커미션/공개

꼬리잡기

김만성피로 2023. 1. 28. 23:45

*정식으로 커미션 오픈 하기 전 테스트로 했었던 두 글의 후속작입니다.

*빌런 융 주의

Words : 20K


 

 문을 열고 창문이 있는 공간을 가까스로 침범하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전문서적으로 꽉 차있는 책장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그 끝에는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육중한 책상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의 상담실은 핏빛처럼 붉은 카펫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부러 발을 내리찍듯 구르지 않는 한은 절대로 소음을 낼 수 없게 만드는, 발등까지 닿는 그 부드러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종종 이상하고, 믿기지 않게도 모직으로 짜였기에 절대로 느끼지 말아야 할 어떤 소름을 선사하고는 했다. 마치 새끼 뱀 수백 마리가 동시에 발등을 기어 다니는 그런.

 세간에서는 시체가 품고 있던 그 내장 따위로 결혼식을 흉내 낸 것으로 유명해진, 속칭 '불륜 커플 살인사건'의 담당형사였던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그런 느낌을 받은 상태였다. 상담사의 요청에 따라 실내화를 신은 채, 그는 진저리를 친 채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의 상담사의 손짓에 따라, 책상 맞은편에 놓인 고풍스러운 느낌의 의자에 앉으며 그 시선을 노려보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투로 상담실의 주인, 카르나르 융터르가 달갑지는 않다지만 그는 형사에게 직접 내린 커피를 약간 거친 손길로 대접하며 깊은 한숨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그 얼굴은 갸름하게 뜬 눈이 누가 보더라도 지겹다는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실은 형사의 방문이 오늘로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하―. 오늘은 또 무슨 일이십니까? 심지어 이 좋은 토요일에."

 "딱히 별 일은 아닐세. 일전에 자네에게 한 번 찾아왔었던 그 사건이 오늘부로 종결처리가 되었다고 말해주러 온 것뿐이니까."

 "아하."

 

 그 소식이 제법 반가웠던 것인지, 상담사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변했다. 그 모습에 캘리칼리는 불만족스러워 쯧하고 혀 차는 소리를 제법 크게 냈다. 그 소리는 누가 듣더라도 이제 안도한 티를 대놓고 드러내는 상담사에게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으니 풀어주겠다는 것으로 들렸고, 물론 상담사도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리며 말했다.

 

 "아직도 불만이 가득하신 얼굴입니다만?"

 "실은 여기 오기 전에 한 번 들이받고 왔거든. 난 아직도 이 사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뭐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경찰 같은 딱딱한 관료사회에서 이단아의 행보라…. 뭐, 응원합니다."

 "하! 잘도 응원 같은 소리 하는군."

 

 대놓고 적대적인 시선과 비아냥거리는 어조의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상담사가 권한 커피에 입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 카펫의 촉감에 진저리를 치며 자기 명함을 던지듯 남기곤 상담실을 나섰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형사는, 융터르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우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형사가 의심의 끈을 아주 놓은 것은 아니었다. 김이 아직도 모락모락 나는 그 잔을 치울 목적으로 집어든 상담사가 책상 뒤로 난 창문을 가린 암막커튼을 남는 손으로 살짝 제쳐보니 저번에는 같이 왔었던, 좌우로 튼실하게 널찍한 체구가 인상적인 다른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상담실을 올려다보았으니까. 두 형사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융터르는 피식 웃으면서 도로 커튼을 닫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경찰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계속 보는 것도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단어가 귓가에 계속 구간반복으로 재생을 하고 있었으니.

 

 "헌데…, 종결처리라니 무슨 이유일까요?"

 

 창가에서 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결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검색을 해보았다. 생각보다 그 사유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지루한 문장들을 한없이 깔끔하게 요약하자면, 지속된 수사에 따른, 두 피해자에 대한 지속적인 명예훼손을 포함하는 인신공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 기괴한 사건인 만큼 수사에 따라 퍼진 그 지저분한 이야기들은 기사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널리 퍼진 덕분에, 그 두 사람을 죽인 융터르 자신도 모르는 내용이었기에 제법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다.

 과연, 양가 부모들이 더 이상 수사를 원치 않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돌아가신 의뢰주의 말마따나, 이 지저분하신 자칭(?) 선남선녀께서는 생각보다 역겹고 문란하게 서로를 탐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꼭꼭 숨겨왔었던 것이다. 하물며 자기 부모에게도. 그리고 그 사실은 이번 신작 발표를 통해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다양한 경로로 파헤쳐지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끝이 바로.

 

 "아―하. 과연, 이런 이유였나?"

 

 융터르는 새삼스레 즐거운 기분이 들어 좋아하는 글귀를 읽는 느낌으로 연거푸 탐독하기에 이르었다. 역시 아는 사람의 뒷이야기를 파헤치는 것은 비도덕적인 유쾌함이 늘 함께하는 법이기에. 물론 기사마다 종종 과장하거나, 혹은 허구의 것을 제법 그럴싸한 '팩트'로 포장한 내용을 볼 적에는 상담사의 기분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이미 세 사람이나 죽었으니 그만큼 더 즐거운 이야기를 쓰지 못할 망정, 쓸데없는 잡소리로 주의가 흐트러지는 기분은 자신의 집중에 방해가 되기에.

 문득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가던 마우스 휠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 보면 그 의뢰주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하고는 이 즐거운 카니발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상담사의 뇌리에 스치듯 떠올랐기 때문에. 모니터에서 눈을 뗀 카르나르 융터르는 부드러운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듯 서서히 누워, 사탕이라도 녹여먹듯이 한 단어를 입에 연거푸 굴렸다. 맛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심각하게 괴상한 맛의 사탕이 되어줄 그 말.

 

 "어떻게?"

 

 여전히 유튜브에서는 기자도 아닌 주제에 가십거리 하나에 이리저리 물고 뜯는 수많은 하이에나들이 음모론을 양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호기심에 이끌려 개중 가장 조회수가 높은 것을 살펴보았지만, 터무니없이 황당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그는 역겨움을 느끼며 곧 그 영상을 종료했다. 그러니, 아직 단언하기에는 제법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되지만 현재로서는 사실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자신 아닐까, 상담사는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그래. 캘리칼리 데이비슨, 그리고 노스페라투 호드라 소개했던 그 형사들은 자신을 추적할 것이다. 그 현장에 어떤 힌트가 될 증거 하나도 남기지 않았음에도, 그저 의뢰인과의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여기까지 물고 뜯기 위해 온 그들이 쉽사리 포기할리가 없다. 그 두 사람은 카르나르 융터르라는,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용의자의 행적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상담사 자신은 어떻게 의뢰인이 정체를 알았는지, 그것을 간과할 수 없기에 움직여야만 한다. 물론 그 사이에 여유가 된다면 간단한 예술작품을 전시할 의향도 충분하였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애석하게도 그 행동 하나하나가 명백한 자충수임을 알고 있지만.

 

 "두 형사님들은 내 꼬리를 물고…, 나는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다시 혼잣말을 하는 상담사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연기처럼 살짝 자리하다 곧 사라졌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에 애용하는 만년필이 쥐어진 채, 이면지 위로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원이 여러 번 그려진 상태인 것을 본 그는 어쩐지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세상을 지탱한다는 그.

 초자아적인 직감의 표현인가 싶어, 융터르는 코웃음을 가볍게 쳤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이 행동이 종국에는 형사들의 뒤를 캔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의한 도망자 역할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였기에 차라리 이 생각 없이 저지른 낙서가 현실이 되기를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간절히 바라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버린 부분, 이건 전적으로 제 탓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자그마한 거울 속에 맺힌 자신의 얼굴은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기에, 융터르는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자기 나름대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 결과지만, 전적으로 첫 의뢰라는 긴장감이나 그 의뢰인이 거스른 신경이 상당했던 것 아니냐는 변명.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차라리 죽이기 전에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여의치는 못했다.

 

 "대놓고 전시를 해버렸으니 두 음탕한 짐승새끼들이 어떤 놈인지도, 또 거기에 놀아난 멍청이도 누구인지 경찰이나 기자들이 순식간에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말이지요."

 

 이건 사실이다. 두 차례에 걸쳐 경찰이 찾아온 것이 불과 15일 이내. 그리고 오늘 사건은 종료가 되어버렸다지만 그 사이에 풀린 -유용함은 둘째 치더라도- 정보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으니.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의뢰인과 자신의 관계가 밝혀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단축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본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어차피 최악으로 내딛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그나마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차악이라는 것뿐.

 은은한 나무향이 올라오는 책상 위에 건반이라도 있다는 듯, 카르나르 융터르의 손가락이 새끼손가락부터 엄지 손가락의 순서로 토도독 소리를 내며 리듬감 있게 두드렸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이나 하고서야 상담사가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내면과 똑 닮은 검은색 코트를 둘렀다. 이미 검은색 목폴라티에 검은색 바지차림인 그의 모습은 창백한 피부와 맞물려 음울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뚜두둑 소리가 나도록 푼, 양손에 낀 검은색 가죽장갑은 그 분위기에 정말 잘 어울렸다.

 

 "그럼, 난 이제 그 머저리가 어떻게 내게 올 생각을 했는지부터 시작해 볼까?"

 

 붉은색 카펫 위로 소리라고는 하나도 나지 않지만, 분명 경쾌한 발걸음의 상담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형식상의 완성도를 위해 미리 작성된 환자, 즉 의뢰인의 개인정보가 담긴 종이에 적힌 주소를 따라 찾아간 주소는 제법 허름한 아파트였다. 두 형사가 이전에 언급한 대로 상담실에서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의도하고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 가까운 심리상담사를 찾는 것이 현명할 정도였다.

 시 외곽에 위치해 있어 곧 앞둘 재개발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인상적인, 그래서 연식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구식 복도형 아파트의 끝에 위치한 의뢰인의 집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경찰에게 있어 이 세 번째 피해자는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한 탓인지, 폴리스라인이나 그 앞을 지키는 순경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은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운이 따라주는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다 열쇠를 잃어버리셨대?"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깜빡하는 일이 많아서."

 "근데 진짜 맞죠? 집주인."

 "물론이죠. 안에 스페어키가 있으니 이제 그건 잃어버리지 말아야겠군요. 하하."

 

 멋쩍어라 하며 웃는 그 창백한 얼굴을 열쇠공이 미심쩍어하며 바라보면서도 손에 쥔 도구들을 이리저리 놀려, 문에 걸린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경쾌하게 걸쇠가 풀리는 소리에 맞춰 적당히 대금을 지불한 상담사는 그 앞에서 방금까지 짓던, 사람 좋은 얼굴을 순식간에 거두고 열쇠공이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경찰이 미행을 했는지 복도 너머를 슬쩍 바라보았다.

 공식 수사였다면 분명 이 행동으로 금방 두 떡대들이 자신과 만나려고 달려들었겠지만, 그들이 자신의 상담실 앞에도 끌고 왔던 검은색의 중-대형 SUV나 경찰차나 하나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 당장으로서는 미행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끝에 집 안으로 들어가, 바로 자물쇠를 다시 걸었다.

 

 "흠. 경찰들이 여길 안 와봤을 리가 없지요."

 

 그의 혼잣말대로, 이미 한 차례 수사했다는 것을 어필하듯 의뢰인의 집은 지저분하게 이곳저곳이 다 들쑤셔진 모양새였다. 참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그 상태가 지저분해서, 상담사는 처음에는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은 아닐까, 잠깐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그러니 자신이 뒤늦게 이런저런 곳을 살펴본다 한들 특별히 건질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왔기에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형사들이 들쑤시고 간 현장을 쓱 둘러보던 그가 이미 다 말라빠진 화분을 들어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곧 '짤랑'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 스페어키가 손가락에 걸려 빠져나왔다. 그 흙을 다시 화분 위로 조심스레 털어 흔적을 없애고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가 걸어둔 현관문의 걸쇠가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여러 가지로 초췌한 인상의 노파가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그러면 어머님께선?"

 "아이고 그려. 자식 놈의 새끼가 끝까지 지 어미 속을 썩이고 가네."

 "이런,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근데 댁은 누구요?"

 "죄송스럽게도 자녀 분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뵈었던 상담사입니다. 한 번은 집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융터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하였다. 약간의 이성이라도 있었다면 의구심을 가지기 쉬웠겠지만, 상대는 자식을 그냥 잃은 것도 아니고 온갖 소문의 주연이 되어 이리저리 뒹굴고 있기까지 한 상황이었기에 살짝 구슬리는 정도로도 호감을 바로 살 수 있었다. 가족도 아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분이 나중에 방문해주었으면 한다'며 함께 준 스페어키를 이용했다는 말에 노파는 의심을 바로 거두기까지 하였다.

 사건이 종료처리가 된 덕분에 이제야 유품을 정리할 수 있었다며 온갖 푸념을 포함해, 말이 지나치게 많은 노파는 카르나르 융터르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죽은 자식의 몇 안 되는 우호적인 사람임을 알아차리자마자 그동안 묵은 하소연을 거듭 반복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 데 팥이 난다더니 그 자식새끼에 그 부모군.'

 

 상담사는 이미 한 번 이상을 겪은, 이 지겨운 읍소에 경멸하는 마음을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으면서 여전히 사람 좋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들어주었다. 중간중간 경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도통 들어주지 않더라는 내용이 그의 호기심을 상당히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집주인도 아니건만 냉장고 안의 생수병을 하나 뜯어 노파에게 건네주자, 그녀도 마침 목이 탔는지 꼴꼴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반절은 비우는 사이에 드디어 상담사가 입을 열었다.

 

 "경찰에게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런 박정한 대우를 받으신 겁니까?"

 "댁이 그 상담사라고 혔잖어? 갸가 그러더라구. 댁을 소개해준 친구가 있다고. 그걸 말해줄라구 혔지."

 "아하."

 

 과연 경찰이 들을 리가 만무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말이야 말로 상담사는 꼭 듣고 싶었던 내용이며, 경계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에 맺힌 미소가 서늘하게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 노파의 경우에는 이미 심신이 지쳐있을 대로 지친 상태였던 데다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모진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련 중에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만난 친절한 사람이라며 상담사를 착각하고 있었기에 그 이변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손쉽게 그녀의 호감을 산 중년의 상담사는, 나름의 배려로 유품 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만큼은 자신의 특권이라 생각했는지 노파가 한사코 거절하며 그를 집 바깥으로 쫓아내다시피 하였다. 물론 실상은 그 얄팍한 현관 너머로 들려오는 이놈의 새끼가 을 숨겨놨을 텐데 어디다 감춘거여? 라며 그렇잖아도 지저분했던 고인의 집을 더 지저분하게 만들 의도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닫힌 문 너머로, 아파트 복도에서 상담사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의뢰를 해결해 준다면 돈을 쥐어주겠다던 의뢰인이 생각났다. 허름한 집에 살면서 막대한 돈이라, 복도를 뚜벅뚜벅 소리 나게 걷는 카르나르 융터르는 무심결에 코웃음을 쳤다. 가장 높은 가능성이라면, 역시 자신의 각종 보험을 일시에 해지해서 생긴 목숨값이라는 소리니까.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쥐락펴락하려는 그 행태가 맘에 들지 않아 거부했건만, 막상 그 돈을 받았다면. 그 뒤로 이어지는 불쾌한 생각에 상담사는 그 충동적인 선택에 감사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날 소개해 준 친구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위를 통했지만, 어쨌든 목표로 삼았던 것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더 파헤치라면 더 파헤칠 수 있는 여 지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건 이제 이 집안에 자신의 흔적을 더욱 진하게 남겨야만 하는 부담감을 수반해야 하며, 그건 곧 자신의 뒤를 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을 두 덩치 큰 형사에게 원치 않는 좋은 먹잇감을 목전에 대령하는 것이다. 아직은 그런 위험부담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노파에게서 얻었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유용했던 그 정보는, 의뢰인의 직장 동료를 겸하기도 하면서 동네에서 제법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이라면. 그는 안내받은 주소를 따라 아까와 비하자면 그래도 조금은 낫지만, 여전히 낡아빠진 다른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복도형은 아닌 정도.

 듣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 전형적으로 집주인에게 손님이 왔음을 안내하는 목적만 추구했다는 듯 귀를 찌르는 도어벨이 울리고도 거의 3분 이상 문 안쪽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없다. 융터르는 자기도 모르게 한 쪽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벨을 울렸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이 열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어조는 변함이 없는 듯 하지만 노여움이 은은히 서려있었다.

 

 활짝 제친 문 안으로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해 현장이 그를 맞이하였다. 자신을 흉내내기라도 한 것인지 사방팔방으로 튀긴 피투성이 사이로는 신체와 장기를 재배열해 만들어 놓은 조잡한 작품이, 현관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 틀림없었다. 상담사는 이제 눈가를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얼굴을 찡그리며 이 상황을 단 한 마디로 압축하였다.

 

 "모방범?"

 

 무지성하게 벽에도 피를 잔뜩 튀긴 줄 알았건만, 자세히 보니 그 피칠갑에도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한쪽 벽에 적혀있는 영문자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었다.

 

 For YOU

 

 인상을 쓴 카르나르 융터르는 스마트폰의 화면에 빛을 밝히고 명함을 보며 주의 깊게 번호 하나하나 꾹꾹 입력한 뒤, 입가에 슬며시 띈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여기 시, 시체가…, 사람이 죽었어요! 

 

 -어이, 당장 그 현장에서 고개 돌려. 곧 출동할 테니까. 주소만 다시 확인하자고.

 "XX동…, XX아파트 XXX동 XXXX호… 우웩!!"

 

 장갑을 벗고 목구멍에 찔러 넣은 손가락을 빼내며 억지로 뱃속을 게워내기 시작한 그를,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현장이 끔찍해서 구역질이 치미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수화기 너머로는 자기네들끼리 고함을 지르며 급히 움직이느라 이곳저곳 부딪치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곧 전화가 끊어졌다.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경찰을 이쪽으로 빠르게 불러올 필요가 있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의 대가는 불쾌한 느낌이 가득한 위액 냄새였다.


 전화 너머로 곧 출동하겠다던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그의 파트너, 노스페라투 호드는 문자 그대로 '곧' 도착하였다. 두 사람이 제법 많은 수의 경관들을 대동하고 출동했을 때, 신고자인 카르나르 융터르는 형사의 지시대로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아예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리에 힘이라도 풀렸는지, 아예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덜덜 떠는 모습에 경관들이 그를 부축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다시피 하였다. 

 저 놈이랑 말 섞기가 싫으니 자네가 하게라는 그런 황당한 이유로 인해,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현장 안으로 들어가고, 노스페라투 호드가 최초 신고자로서 다시 만난 카르나르 융터르를 사정청취하게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그 끔찍한 참상에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는지, 창백한 얼굴로 물을 조심스럽게 마시는 그는 열린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여전히 힘줄이 약간 돋아난 손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 그, 괜찮, 아뇨. 괜찮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충격으로 멍한 눈빛의 그가 고개를 맥없이 저었다.

 "이해, 합니다."

 

 자신들이야 그래도 적응이 되었다지만, 이런 사건을 맡아보지 않은 형사들과 순경들이 저마다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로 현장에 합류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일반인의 시각에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기능을 실행시킨 노스페라투 호드가 연거푸 숨을 몰아쉬는 최초 신고자를 내려다보다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곳에, 오셨습니까?"

 "사건이 종료되었다는 말에 어째서 피해자분이 저를 찾아오셨는가,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전에는, 그저, 소문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었습니다."

 "여긴, 피해자의 집이, 아닙니다."

 

 호드의 그 말에 융터르는 다시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꽤 거칠게 마시고는 잘게 떨리는 한숨을 쉬다 다시 답했다.

 

 "어쩌다 보니 피해자 분의 어머니를 댁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이 주소를 소개해주셨습니다. 혹시 일전에 제가 상담했던 분이 아닐까 했지만 이 주소는 기억에 없던지라."

 "그걸, 왜, 궁금해, 하십니까?"

 "…말해도, 됩니까?"

 

 카르나르 융터르가 민망하다는 듯, 머뭇거리기에 노스페라투 호드 형사의 고개가 살짝 모로 기울어졌다. 그럭저럭 말은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질문에 주저하는 것이 이상했기에. 선글라스로 눈매를 가려 어떤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전혀 모를 그 상담사는, 답변을 재촉하는 형사의 끄덕거림에 두 번은 말하기 싫다는 듯 주저하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왜 저를 소개해줬냐고 따지려 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덩달아 나까지 그 안 좋은 일에 엮일 뻔했다고…."

 "오." 그 어처구니없는 답에 형사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몇 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길래, 혹시나 싶어 문을 열어보니…."

 

 말을 흐린 융터르가 더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양손을 머리에 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쥐어짜듯 움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문에 한 올의 이탈도 없던 그의 헤어스타일이 누군가와 드잡이질이라도 한 듯 보기 싫게 망가진 상태였고, 호드는 그런 최초 신고자의 말에서 유감스럽게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호드가 그런 그를 조금 진정하라며 타일른 뒤,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혹시 오시기 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지도 앱을 보면서 오느라 정신이 조금 없어서."

 

 카르나르 융터르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런 부분까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호드는 지금까지의 질문에 답을 해줘서 고맙다며 말을 마쳤고, 그와 교대를 하기로 약속을 한 것인지, 이번에는 캘리칼리 데이비슨 형사가 라텍스 장갑을 거칠게 벗어 쓰레기봉투에 던지며 다가왔다. 파트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노스페라투 호드가 상담사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전,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직까지는 정확하지는 않은데…, 이 사건은 아무래도 짝퉁이 저지른 거 같네."

 "What?!"

 "조용히 좀 놀라게, 저런 상또라이가 이 세상에 둘이나 있다는 이 끔찍한 현실을 굳이 안 깨우쳐줘도 되니 말일세."

 

 진저리를 치며 현장조사를 했던 그는 더 자세한 것은 역시 국과수 같은 곳에 보내봐야 안다면서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원조가 저지르는 스타일을 흉내 낸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런 측면을 배제하더라도 이 사건이 결코 오리지널의 그것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원조 맛집께서는 절대로 현장에 어떤 메시지도 안 남겨 놓으시거든. 헌데 이번에는 감히 For YOU 라잖나. 그 '당신'이 뉘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게 진퉁이 아니라 짭이라는 가장 큰 증거가 아닐까 싶네."

 

 청취를 담당한 탓에 현장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던 그가 파트너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이 먼저 그 안에 들어가서 확인을 했더라도 그와 똑같은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한편으로 캘리칼리 데이비슨 또한 자신이 줄곧 의심을 한 예비 용의자가 어째서 최초 신고자로 이 자리에 있는지를 궁금해했고, 호드도 간단하게 답했다.

 

 "누가, 피해자를, 자기에게, 보냈는지, 따지려고, 했답니다."

 "뭐?"

 

 황당해하는 얼굴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온통 검은색 차림의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왜 자신을 계속 붙잡아두는지 궁금함과 걱정이 섞인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카르나르 융터르를 노려보던 캘리칼리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누가 듣더라도 명백한 시비조였다.

 

 "자넨 핸드폰 쓸 줄도 모르나?"

 "…에?"

 "호두에게서 다 들었네, 이 피해자에게 직접 따지러 갔다가 토악질도 하고 벌벌 떨고 했다며?"

 

 엉뚱한 질문 다음에 이어지는 그 내용이 사뭇 천박하게 들리더라도 사실은 사실이었는지 대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은 상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걸 보고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말하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 저음에 격앙된 기분을 애써 억누르려 하는 것이 단번에 보여,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양손을 가슴 근처까지 들고는 진정하라며 순순히 그 무례를 인정한 뒤 이어서 물었다.

 

 "피해자 분의 스페어 키를 가지고 있었다고?" 문장 구성요소가 빠진 질문에, 상담사는 답을 되돌려주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아, 그― '불륜 커플 살인사건'이라고 하던가요? 세 번째 피해자 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난 그게 좀 이상해서 말이야."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그를 순식간에 밀어 넣고 체포라도 할 것처럼, 형사가 위협적인 걸음걸이로 가까이 다가와, 그 큰 상반신을 반으로 접다시피 하며 그늘을 만든 채 최초 신고자를 노려보며 계속 질문을 하였다.

 

 "왜 자네일까?"

 "무슨 소립니까, 그건."

 "실은 나도 자네랑 같은 생각을 했거든. '왜 자네가 이 사건에 연루가 되고 있을까―?' 자네 말마따나 그냥 그 세 번째 피해자의 마지막 접촉자에 불과한데 말이지."

 "형사가 되기 위해선 선문답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겁니까?"

 

 에둘러 뜬구름 잡지 말고 본론이나 말하라는 표현에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껄껄 웃고는 서늘한 얼굴로 상담사를 내려보았다.

 

 "스페어키 말일세. 고작 한 번 밖에 안 본 상담사에게 다음에 만나고 싶다며 건네줄 수가 있을까?"

 "이제 와서 돌아가신 분의 뜻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저 유감스럽게도 생존확률이 낮은 암이니…, 거동이 불편하게 될 것을 염두에 뒀다던가? 으음―. 이런, 뭔들 그 속내를 파악하려 해도 전부 억측이 되어버리는군요."

 "자네 핸드폰은 육수를 내는 용도로 쓰는 건가? 아니면, 전화 상담도 못할 만큼 야박한 것이 자네 상담의 특징인 건가?"

 

 엉뚱한 질문을 연거푸 던져대던 형사의 본의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은 세 번째 피해자와의 관계를 뚜렷하게 말하라는 것.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내심 카르나르 융터르가 이 사건의 최초 발견자가 된 이유도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기에, 계속 그의 심리를 푹푹 찔러대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캘리칼리는 이제 상담사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며 질문을 이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현장에 다른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순경 중 하나가 얼굴이 차게 질려서는 두 형사 앞으로 튀어나오듯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그, 그 현장이, 또."

 "무슨 현장? 자네 숨차서 헐떡거리는 소리 덕분에 내가 다 말을 절게 생겼구만."

 "XX 하, 항구에서, 그, 저거랑 비슷한 사체가."

 

 캘리칼리 데이비슨 형사의, 지금까지 유들유들했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행여나 다시 현장에서 보지 않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두 형사는 눈에 익은 검은색 중대형 SUV를 타고 급히 항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차량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금까지 병풍처럼 서 있던 다른 경찰이 그만 가봐도 된다는 말에 얼이 빠진 사람처럼 팔을 휘적거리며 낡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경찰들의 눈에서 멀어진 곳까지 걸은 그는 다시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린 머리를 여러 번 뒤로 쓸어 넘겨, 아까와 같은 몰골만은 면한 상태로 상담실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건 그 마저도 예상하지는 못했던 부분이다. XX항구면 가장 최근에 작업을 마무리했던 작업실이 있는 곳인데.

 그는 모방범이 남겨놓은 메시지가 확실히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은 상대의 정체를 모르지만 상대방은 자신을 안다는 이 일방적인 불합리, 그리고 불공정함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로 노려보는 등의, 그 기분 나쁜 티를 감추지도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 탓 때문에 택시기사가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아무 소리도 못하다 손님이 겨우 내릴 적에서야 "혹시 여기까지 오시는데 불편한 부분이 있었냐"며 물을 정도였다. 

 

 "아, 별 일은 아닙니다. 표절을 당해서."

 "별 일 맞는 거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손님의 말에 그리 대꾸하는 택시기사는 안 좋은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융터르가 택시 문을 닫자마자 부리나케 출발하였다. 얼핏 무례할 수 있어 보였으나 이미 감정적으로 모방범에게 신경을 잔뜩 쓰고 있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곧 상담실로 되돌아온 그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당신을 위해…, 라. 이거 참 고맙군요. 의도하신 겁니까?"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을 향해 그는 그렇게 툭 내뱉었다. 최근 들어 생긴 것인지, 양팔에 난 자잘하고 아문지 며칠 안 된 것 같은 흉터를 애써 긴소매로 가린 그 상대방은 상담사가 대뜸 던진 질문에 당황해서 어버버 소리만 낼뿐이었다. 상처를 빼면 인상이 그리 선명하지는 못한 그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는지, 입가를 실룩거리며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찰도 아닌 민간인이 제가 택시를 타자마자 곧바로 뒤따라 오기에."

 

 모방범은 뭔가 쑥스럽다는 듯, 어깨 사이로 고개를 파묻으며 붉어진 양 볼을 감추려 하였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꼭 동경하던 연예인을 눈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긴장과 고민을 하는 모습의 전형이었다. 달갑지 않은 팬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상담사는 오늘 하루의 목적을 확실히 마무리 짓고자 모방범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아파트에서의 살인은 역시 당신이?"

 "네, 맞습니다. 선생님을 함부로 위험에 빠트렸던 놈이라서 그만 참을 수 없어서."

 

 그 말에 융터르는 살짝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모방범의 말대로 만약 의뢰인에게 자신을 소개한 그놈이 살아있었다면 그 최후를 저 모방범이 아닌, 자신이 지어주려 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자칭 팬께서는 그 기회를 감히 가로챘다는, 매우 심각한 무례를 뻔뻔하게 자랑하고 있었다. 그 속마음은 아직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상담사가 곧 일어나 커피를 그에게 대접하며 이어 물었다.

 

 "그 항구로 경찰들의 시선을 쏠리게 한 것도 당신이 한 행동입니까?"

 "그…, 예. 그것도 접니다."

 

 따뜻한 커피잔의 온기를 손으로 감싸던 그는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카르나르 융터르의 작품에 감명을 깊게 받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던 본질을 그제야 깨우쳤으며, 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모든 행동은 오로지 경찰의 수사망에서 그를 벗어나게끔 하고 싶었을 따름이라는 내용. 융터르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며 그 긴 자기소개 비슷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제가요?" 모방범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것을 보며, 상담사는 사뭇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물론이지요. 아무래도 제가 이번 일 이후로 슬럼프에 온 것 같은데…."

 

 살인마를 동경하는 살인마라는 상황. 상담사는 이 모든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융터르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이 어설픈 모방범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 묵직한 중저음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내용이란, 자신이 슬럼프에 빠진 듯하여 당분간은 다시 복귀하기가 어려울 듯하고 더욱이 경찰의 의심도 겹친 상태라 새로운 작품을 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니, 그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이 슬럼프를 탈출한 자신과도 협업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그러면서 그 낡은 아파트에서의 작품을 본 감상도 짤막하게 말해주자, 자신의 말을 어떤 계시처럼 듣던 모방범의 표정이 결연해지며 보다 노력하겠다는 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그 너머로 나지막하게 상담사가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필 말을 하였다.

 

 "항구의 제 작업실은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실은, 그…, 봤습니다."

 "봤다라. 이거…, 저도 감이 다 죽긴 했나 보군요. 다 들켜버렸다니. 그럼 이렇게 하지요. 그곳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찰에게 아직 들키지 않은 작업실이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는 걸로."

 

 모방범의 볼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명백히 흥분했다는 그 반응에, 상담사가 쿡쿡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이어 말했다.

 

 "어디까지나 대여이니, 언젠간 도로 되찾을 겁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황홀한 표정의 모방범에게 자신이 이제는 모종의 이유로 쓰지 않는 작업실의 위치를 그에게 안내해 주었고,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은 모방범은 그렇게 상담실을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그로부터 제법 흘러, 계절이 바뀌었을 무렵 세상은 다시 시체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희대의 살인마가 부활했다는 소식으로 시끄러워졌다. 상담사는 그 소식에 맞춰 두 형사가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인을 제외한 일상적인 생활 반경에서 그 두 덩치는, 은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컸으니까.

 물론 그들 외에도 종종 다른 형사들이 눈에 띄었지만, 그들에게도 보란 듯 아주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를 향한 의심의 올가미는 벗어난 지 꽤 오래되었다. 감성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용의 선상에 올라와있는 상담사지만, 그를 체포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전혀 없었기에 두 형사도 결국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걸었던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상담사도 나름의 고생을 했어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고생이란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창작욕을 억누르는데서 오는 인내심의 한계였지만.

 그래서 그를 향한 감시가 완전히 끝나고서도, 주의를 살펴가며 향한 곳은 모방범에게 내준 작업실이었다. 임차인에게도 알려주지 않아 여러 장치가 복잡하게 매설되어 있는 그 공간은, 역시 자신보다도 여전히 조잡한 모조품에게서 나는 피와 포르말린 등의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그 지독함에 코를 살짝 막은 건물주가 작업에 여념이 없는 상대방의 뒤에 슬며시 다가가 그 활동을 지켜보았다. 완성되어 가는 그 모습을 보자니 실망스럽게도 자신이 했었던 결과의 바리에이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한껏 열중한 나머지 저 도취된 얼굴을 보자, 그 실망이 더욱 커졌으면 커졌지 절대로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 융터르는 명백히 자신의 후계자를 지망하는 모방범의 주의를 환기시키지도 않고, 그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 장치 하나를 작동시켰다. 곧 아주 조용하지만 뭔가가 새는 소리가 살짝 들리고, 그리 크지 않은 작업실 안에 무색무취의 수면 가스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강렬한 마취에 기절한 모방범 위로 방독면을 쓴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 특유의 섬뜩한 숨소리를 내며 나타났고, 그의 손에는 현장에서 어설픈 가짜가 자신의 지문을 가리기 위해 구해둔 라텍스 장갑이 이미 끼워진 상태였다. 그 장갑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머저리의 얼굴 위로 마취에 쓰는 마스크를 끼우고는 그 라인을 따라 끝에 매달린 가스 봄베의 마개를 아주 살짝 돌렸다.

 방독면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 시선은 한없이, 경멸하는 시선만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모방범이 한창 만지고 있던 것을 잠깐 바라본 뒤, 시선을 돌려 손에 쥔 주사기에 한 앰풀을 꽂아 그 내용물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곧이어 그 바늘에서 약간의 투명한 물줄기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융터르는 모방범의 팔을 걷어 툭 튀어나온 정맥에 살며시 찌르는 채로 중얼거렸다.

 

 "그거 아십니까? 전 당신처럼 쓸데없이 피투성이로 만들지 않습니다. 쓸데없이 내장을 반으로 찢어 그 역겨운 담즙이 쏟아지게도 하지 않거니와, 하나의 예술로써 승화를 시키고 싶은 것뿐이지요. 그래서 그저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선사할 목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만 보이는 장면을 오히려 혐오합니다. 그러니…, 나를 동경한다고? 그랬다면 내 스타일은 파악이라도 했어야지."

 

 작게 쉿쉿하며 조롱하는 목소리는 그 손에 쥐어진 나이프처럼 한없이 차갑고 냉정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는 말이 없었다. 원 주인의 손에 자리한 예리한 흉기는 전등에 반사된 빛을 뿌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이리저리 유영하다 곧 그 몸뚱이의 어느 부분을 향해 깊숙하고 유연하게 잠영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불필요한 소리는 하나도 없이.

 평소 그의 작업 시간을 생각하면 상대적인 의미에서 순식간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전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럴 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아직 마취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방범의 가슴께는 아주 조금씩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싶은 그는 몸을 돌려 작업실의 환기장치를 일제히 작동시켰다. 곧 작업실 곳곳에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하자, 융터르는 "이렇게 또 하나의 작업실을 잃어버리다니…."라며 아쉬움을 표시한 뒤 누군가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도시 외곽으로 들어서는 초입 근처로 한 신고가 들어왔다. 달달 떠는 목소리의 주인은 모처에 있는 오피스텔 주인인데 세입자들이 일제히 몰려와서는 역할 정도로 피냄새가 난다며 항의한 것 때문에 발견했다며 신고의 의도를 밝혔다. "그래서요?"라고 대꾸하는 순경은 이런 호들갑을 떠는 전화에 이골이 난 탓에 제법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그마저도 곧 사색이 되어 문제의 시체 조각가 사건을 전담하는 두 형사에게 곧바로 그 내용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바로 갈 테니, 현장에, 다른 사람들이, 오지만 못하게, 해주십시오."

 

 멀찍이서 그 개자식이 드디어 활동한다며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잔뜩 열 올라 출동준비 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혼이 빠질 뻔했던 노스페라투 호드가 전화 너머로 그리 말하고 주소까지만 확인한 뒤 전화를 끊었다. 덩치 때문에 그 커다란 차를 타면서도 불편해 투덜거리면서도, 캘리칼리는 드디어 놈의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들떠있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호드 또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속도를 아슬아슬하게 도로가 허락하는 선까지 잔뜩 끌어올린 채 질주하고 있었다.

 급히 출동을 나선 탓에 지원 요청을 뒤늦게 해야 한다는 점이 곤란한 부분이지만, 둘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신고자의 전화 내용에서 분명히 언급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장소에 있는 것을 봤다는 그 내용. 긴장한 얼굴로 테이저건에 장착된 카트리지를 살펴보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파트너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건넸다.

 

 "이봐 호두, 놈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하나?"

 "가능성은, 낮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개새끼가 있었다는 이유로 가야 하고. 그렇지?"

 "그래도, 지금 출동이,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빠릅니다." 호드는 불만족스러워하는 파트너에게 달래듯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전까지의 출동은 전부 사체가 발견되고 나서 시간이 지나야 겨우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놓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곧바로 출동을 하는 이상 놈도 자신의 흔적을 치울 시간은 없을 것이며, 그 말은 곧 추후에도 저지를 범죄에 대한 경고가 되어줄 것이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눈빛은 그래서 그 어떤 때보다도 날카로웠고, 송곳니까지 훤히 드러나는 그 입 사이로는 놓치지 않는다는 중얼거림이 일종의 기도문처럼 몇 차례 반복되었다. 

 한편 노스페라투 호드는 핸들을 평소 이상으로 세게 쥐고 있었다. 파트너가 그 범인에게 품은 감정이 맹렬한 증오라고 한다면, 그의 경우에는 어째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서 퍼진 그 이야기로는 그저 죽은 사람들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했기에 저지른다는 터무니없는 그 말을, 오히려 가능성 있다고 봤다. 사실 그것마저도 부정해 버리면 그놈의 동기를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검은색 중대형 SUV가 신고자의 주소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 조급한 마음의 반영이 고스란히 드러나 고작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제의 오피스텔 앞에는 안절부절못한 태도를 좀처럼 감추지 못하는 장년의 남성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신고자의 모습에 두 형사가 가까이 다가가 각자 신분증을 보여주고 몸을 달달 떠는 그에게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먼저 말했다.

 

 "신고하셨죠?"

 "예, 예―에!! 그, 제가, 아이고 이런 세상에." 건물주는 아랫입술이 파들파들 떠는 채로 두 형사를 거의 구원자처럼 맞이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만, 말씀, 부탁드립니다." 호드가 그 극도의 저음으로 조심스레 타이르며 답을 재촉했다.

 

 자신을 이 오피스텔의 건물주라 소개한 장년은, 덜덜 떨면서 신고전화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말했다. 다른 곳에서 거주하는 그가 세입자들이 일제히 자신에게 전화를 하기에 이 오피스텔을 찾아왔을 때, 세입자들이 일제히 환기구에서 이상하고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피냄새가 난다는 항의를 달래기 위해 건물 이곳저곳을 살피다 기억에 없는 지하실 하나를 발견했다는 내용을. 

 

 "그, 그 문이 안 잠겨있길래, 저야 뭐 아무것도 모르고…, 그걸 살짝 열었는데…."

 "못 볼 꼴을 봤군요."

 "아이, 아이고…. 그 끔찍한 거를 보고 놀래서는 저도 모르게, 그 악!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그, 그 앞에 누가―"

 "혹시 얼굴은 봤습니까?" 이제 조급한 마음을 숨기기 힘든 캘리칼리가 말을 잘랐다.

 "이, 있, 있는 건 봤는데 하도 어두워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께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호드의 마지막 당부에 상대방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값 떨어트릴 일 있냐며 죽어도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고 말하곤 그 자리를 벗어나듯 도망쳤다. 지금까지의 증언이 기존의 신고 내용에 더 추가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두 사람이 확인한 뒤, 건물주가 말한 문제의 지하실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어째서 신고 내용이 '피냄새'가 유독 언급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린내가 아래로, 또 그 문제의 지하실에 가까울수록 심했다.

 

 "어이, 준비되었나?"

 "서둘러, 진입, 해야 합니다."

 

 오랜 파트너 간의 경험으로 두 형사는 서로 테이저건을 바로 쏠 수 있게 준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실의 철문을 호드가 벌컥 열고 캘리칼리가 테이저건을 겨누며 그 안을 진입했을 때, 두 사람은 그 안의 광경을 보고 사색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먼저 방 가운데에 진입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나지막하게 쌍욕을 내뱉었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오, 이런, 이 사람, 살아있습니다!"

 "뭐?!"

 

 의도적으로 지하실 한 곳에만 조명이 들어왔는데, 그 아래를 비추는 것은 이미 '작품'이 되어버린지 시간이 지난 한 구의 시신과, 작품이 되어버릴 예정인 한 사람이 있었다. 호드의 손가락질이 가리키는 그 사람으로, 겨우 하반신을 가린 채 거대한 십자가에 매달려 양손, 교차해 놓은 발등에 거대한 못이 박힌 채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몸에 신체의 주요 혈관이 지나가는 곳곳마다 굵은 바늘들이 매달려 거대한 양동이에 뭔가를 쏟아내고 있었다. 양동이 안에 반쯤 차있는 것은 피였다.

 곧 쇼크라도 올 기세였는지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가슴이 작고 빠르게 뛰는 것이 보였기에, 두 형사가 바로 달려들어 바늘을 떼어내려 하였지만 생존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무섭게 열어둔 지하실 문이 바로 닫혀버렸다.

 

 "뭐야 이건?!"

 "이런, 아무래도, 우리, 갇힌 것, 같습니다."

 

 호드도 평정심을 상당히 잃고 주위를 둘러보다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지원을 바로 요청하려 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작동되던 것이 순식간에 통화권 이탈이라는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곧바로 전파 방해장치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벽에 매립된 전등 스위치도 먹통인 상태에서 방해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여유롭게 수색할 시간이 없던 두 사람은 곧 지하실 출입문에 몸을 들이박아 열려고 하였다. 그때

 

 -소용없습니다.

 

 심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방향을 알지 못하는 곳곳마다 울려 퍼졌다. 스피커 따위가 여기저기서 웅웅대는 통에 가뜩이나 본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방해했고, 긴장한 두 형사는 저마다 고개를 홱홱 돌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문에서 떨어지면서도 범인에게 지금까지 휘둘리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이마에 힘줄이 돋은 채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하! 이젠 행위예술로 전공 변경을 하셨나 보군?"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우릴, 가둔, 목적이, 뭡니까?"

 

 호드도 감정을 억지로 누른 채 질문을 하자마자 낮게 작게 흠, 하고 코웃음 치는 변조된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이 떨어진 문가에서 갑자기 불길이 천천히 치솟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매캐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지하실 곳곳이 드문드문 밝아지기 시작하였고 보란 듯이 이미 엉망진창인 시체에는 방부제가 덕지덕지 발려져 있었는지 불이 옮겨 붙자 곧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것을 두 형사는 말리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시간도 없이 순식간이었지만.

 잿더미가 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본 두 사람 위로 스피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건 제 나름의 사죄입니다.

 "하, 사죄? 증거인멸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요 근래 이딴 흉물을 계속 보여드리게 되었기에.

 "흉물? 흉물 맞지. 근데 꼭 말하는 꼬락서니가 발뺌을 하려는 것 같은데?"

 

 방부제가 불타면서 나는 역한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캘리칼리가 으르렁 소리를 냈다. 그 말대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저 목소리가 정말로 진짜가 맞다면, 최근 일어난 사건은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노스페라투 호드가 그 대화를 듣다가 다소 과하게 흥분한 파트너를 살짝 손으로 제지하였다.

 

 "여기, 불타면, 당신도, 위험합니다."

 -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유감스럽지만 제 앞가림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니 염려하는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혹시, 저 십자가, 매달린 사람이,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제 모방범이라 할 수 있겠군요. 

 

 명백히 선을 긋는 그 말투에 호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어떻게 모방범을 진범이 먼저 알고 처리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이 자리를 그러면 왜 자신들에게 불편한 생방송으로 선보이는 것일까.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곧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 이 개자식!! 우리더러 자기 짝퉁을 죽여라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맞습니다.

 

 진범의 단호한 답에 형사들이 당황해하자, 스피커 너머로 변조된 웃음소리가 낮게 쿡쿡거리며 신경을 거스르게 하였다. 이 진범에게 여러모로 휘둘리는 느낌을 받아 불쾌한 기분이 가득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제안에 역겨움을 가득 담아 날카로운 흉기가 가득한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곧 좌르륵하고 갖가지 나이프들이 떨어지는 것이 진범에게도 보였는지 이제는 대놓고 웃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인내심이 조금 부족하시군요. 생각해 보시지요. 저 가짜는 어차피 과다출혈로 죽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캘리칼리보다는 덜했지만, 호드도 똑같이 분노를 감추기가 힘든 채 물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조금은 생각해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지요.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서늘하고 쉿쉿거리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그의 말처럼, 불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타오르기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두 형사마저도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니 진범이 꼬드기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예정인 나쁜 놈을 조금이라도 일찍 죽이는 것이 뭐가 나쁜가?

 

 "이런 제기랄…, 그렇게 나온다 이건가?"

 -선택은 두 분의 몫입니다. 그럼 전 이만.

 

 쿡쿡하고 낮게 웃는 소리를 끝으로 스피커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거세진 불빛에 반사되어 빛을 내는, 땅에 떨어진 흉기를 홀린 듯이 보았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노스페라투 호드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저 놈은, 죽이라고만 말했습니다. 문을 열어주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하, 끝까지 우릴 엿 먹이는군. 망할!! …덕분에 정신 차렸네, 고마워."

 "일단, 여기서, 탈출합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첫째로 이 작업실 내부의 공기순환장치는 계속 작동 중인지 밀폐된 공간이었다면 진작에 질식해도 모자랐을 시간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두 형사가 완력 하나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모방범의 늘어진 사체의 몸에 들러붙듯 매달린 채혈도구들을 거칠게 빼낸 다음, 상대적으로 뭉툭한 흉기를 대고 그 양손과 발등에 박힌 못을 빼내는 사이, 노스페라투 호드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맹렬하게 앞으로 튀어나가며 철제문에 몸을 연거푸 부딪치기를 반복하였다.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는 그만큼 외부에서 산소가 주기적으로 유입된다는 것이며, 그만큼 그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게다가 비밀리에 설계된 공간인지 스프링클러도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지만, 그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드는 이미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철문에 계속 몸을 부딪쳤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실수로 이 칼날 때문에 사체에 훼손이 될까 한껏 긴장하면서도 깊게 박힌 못을 빼내는데 겨우 성공했고, 그 육중한 나무 십자가의 양팔 부분을 짓밟아 각목으로 만들었다.

 호드가 다시 몸을 부딪치자 이제는 살짝 헐거워진 잠금장치로 인해 그 사이가 주먹 하나는 들어갈 정도로 벌어진 틈을 타, 캘리칼리는 손에 쥐고 있던 각목을 잽싸게 쑤셔 넣었다.

 

 "어이, 호두! 다시!!"

 

 그 신호에 맞춰 이미 어깨에 피가 점점이 묻은 호드는 군말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문을 향한 몸통박치기를 시도한 결과, 열기로 본래보다 말랑말랑해진 잠금장치가 연달아 충격을 받은 끝에 철제문이 활짝 열렸다. 열기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 두 형사는 이 사건에서 유일한 증거가 되어줄 모방범의 시체를 조심스레 끌고 나오며, 지하실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통화가 가능해진 것을 확인해 각각 소방서와 소속 경찰서에 전화를 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건물주가 황급히 오피스텔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하실에 불이 났으니 서둘러 대피해 달라는 방송을 듣고 저마다 몸만 챙겨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에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형사들은 그동안 몸고생을 한 탓에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허망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거 돌아버리겠군. 아니, 머리가 정말 핑핑 도는 거 같은데."

 "산소부족, 입니다. 저도, 지금, 속이, 메스껍습니다."

 

 5분 이내의 거리에 소방서가 있었는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또 다른 방향에서는 경찰차 여럿이 달려오는 것을 본 것 까지가 두 형사에게 있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의 앞에 커피잔이 하나씩 놓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믹스커피다. 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 달큼한 향. 형사들은 희뿌연한 그 내용물보다도 자신들의 발등을 소름 끼치게 감싸는 붉은색 카펫에 시선이 닿았다. 그 새빨간 붉은색이 며칠 전 자신들이 고생했던 그 지하실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 탓이었다. 두 손님이 원두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 늦은 시점에 알아차린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런 두 사람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이스 아메리카노 쪽으로 드릴 걸 그랬습니까? 다 식는데요."

 "아, 미안하게 되었구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며칠 전에 몸이며 마음이며 상처를 좀 많이 받았거든."

 "맞습니다, 저희, 지금도, 병원에, 다닙니다."

 

 노스페라투 호드의 말처럼, 손님들의 몰골은 멀쩡하다고 표현해 주기에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양손부터 팔까지 깊고 얕은 상처가 수두룩한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아예 한쪽 어깨부터 손까지 보호대를 착용한 노스페라투 호드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심각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 가능하게끔 하였다.

 두 형사가 겪었던 일을 인터넷으로 봤다면서 뒤늦게 감탄사와 한탄의 사이에 있는 요상한 소리를 낸 융터르는 머쓱해하는 얼굴로 실례했다며 미안함을 표시하였다. 병원에서의 진단결과를 일일이 말해주지 않는 두 사람은 저마다의 페이스대로 뒤늦게 식어가는 커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이번의 방문 목적을 천천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요전번에 모 오피스텔에 불법 건축된 지하실에서 화재가 났었네."

 "아하."

 "그 지하실에 뭐가 있었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그리 말하는 캘리칼리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는 성큼 일어났다. 그 거대한 신장이 형광등을 등지고 있어, 카르나르 융터르의 몸에 그림자를 크게 드리웠다. 명백히 적대적인 태도에 상담사의 눈도 서늘한 빛이 감돌면서 그런 형사를 노려보듯 올려보았다. 서로가 기세를 전혀 죽이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던 노스페라투 호드는 그런 상담사는 보지도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짜를 잡았습니다. 머지않아, 진범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부디 그렇게 되시길 바라며, 이 카르나르 융터르도 멀리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그렇―지. 우리 같은 놈들은 다른 사람들의 응원으로 먹고살거든. 특히 자네 같은 사람들의."

 

 상담사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후의 수사가 있다면 힘을 내길 바란다며 작은 코웃음과 함께 답을 돌려주었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그의 손에 빈 잔을 얹어주며 잘 마셨다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다음엔 말이지―, 난 이것 보다 더 달달한 걸 준비해 달라고. 이 친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다시 또 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아니면 자네가 우리 경찰서로 올 텐 가? 캡슐커피라면 기꺼이 대접해 주지."

 "거절하지요. 웬만해서 갈 일이 없는 편이 좋은 공공기관이 경찰서 아닙니까?"

 

 짐짓 너스레를 떠는 그 말에,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송곳니가 다 드러나도록 씩 웃었지만 그것이 절대로 어떤 호감의 표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노스페라투 호드는 감정이라고는 하나 느껴지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쓰며 불편한 몸을 일으키고는 다음에 다시 보자며 낮은 목소리를 더 내리 깔았다.

 상담실 출입문에 더 가까웠던 캘리칼리가 그 문을 거칠게 열고 앞서 나가고, 그 뒤를 호드가 뒤따랐지만 문을 닫아주는 매너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 무례함을 딱히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적하지 않은 채, 그저 낮게 쿡쿡 웃으면서 문을 닫았다. 곧 육중한 소리를 내며 그 문이 닫혔지만 이미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진 두 형사는 그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