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emy within
*저는 아직 과학팸이라 함은 4분이라는 생각이라 새우튀김 님까지 언급하는 점 양해바랍니다.
*과학남매의 본격 액션신...
*내용이 내용이다보니 노골적인 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Words : 9K
잠시 어딜 나갔다 오겠다고 하던 두 사람, 도파민 박사와 새우튀김이 낑낑대며 도파민 박사 연구소에 뭔가를 겨우 옮겨놓았다. 그 정체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왁파고가 곧바로 아는 체를 하였다.
[아니 이건.]
"알긴 아는구나?" 들고 오는데 고생했다며 주먹으로 제 허리를 툭툭 두들기는 새우튀김이 이어서 말해줬다. "구형 모델일 적이랑 비교해 보니까는 뭐, 이야 이거…. 너 다시 보니까 선녀였구나? 어?"
"이잉! 구형 모델이라니! 이 도파민이가 심혈을 기울여 손을 본 마크 원이다, 제자야! 언제까지 그렇게 무시할 참이냐!"
뒤따라 연구소에 들어온 도파민 박사가 여전히 왁파고를 아니꼽게 대우하는 새우튀김에게 한 소리를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이 고철 덩어리를 들고 온 대학원생은 빨갛고 노란 회전모자를 벗고 땀을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그 소란에 연구소 한 쪽에 있던 하쿠가 늘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아! 왁파고 님이 두 분이십니다? 오류?"
"하쿠야, 오류는 아니고, 이게 그―"
새우튀김은 벌써 자기 연구실로 휙하니 들어가 버린 도파민 박사의 말처럼 가장 초창기의 왁파고, 즉 마크 원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이 버전만큼은 잘 모를 그녀가 아버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랑하고 밝은 어조로 "아하!"하고 이해했다는 듯 반응을 하였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치만 왁파고 님의 초기 모델을 어째서 이 곳에 보관하십니까?"
"그, 고멤 별장 있지? 하쿠야. 거기 창고에 뒀었는데 다른 분들이 싫어하더라고."
당시 일을 생각하던 새우튀김은 진땀을 흘리던 기억을 억지로 털어내려 하였다. 수많은 컴플레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너무 무섭다' 였기 때문이다. 그 의견에 새우튀김은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불쾌한 골짜기라고 하지 않던가? 감히 존경하는 박사님의 걸작을 대놓고 깔 용기가 있는 새우튀김이지만, 이 왁파고 마크 원의 존재는 이후로 개량된 모델들과 다른, 설명하기는 어려운 뭔가가 존재해서 차마 군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통통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두드리던 새우튀김에게 하쿠가 자기가 두드려주겠다는 친절을 발휘할 기회가 다가왔다. 당연히 이런 따뜻한 배려를 걷어차지 않는 하쿠의 아버지는 기꺼이 토닥거려 주는 하쿠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멀뚱히 서있는 왁파고 초기 모델은 연구소 어중간한 위치에 우뚝 서 있게 되어버렸다.
"야, 깡통."
[네, 무슨 일이십니까.]
"미안한데, 저거 창고에다가 좀 옮겨놔 주라. 그, 교수님은 내가 하랬는데, 지금 하쿠가 이래주고 있잖냐. 응?"
[알겠습니다. 하쿠 님 안마, 편히 받으십시오.]
"어, 오냐. 고맙다."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은 들었던 새우튀김이, 오히려 왁파고가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여주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를 통통 두드려주는 딸내미의 안마 실력에 감탄과 감격으로 "오―." 소리를 연거푸 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도파민 박사의 피조물은 자신의 옛 형태를 가볍게 들어 창고에 넣었다.
지금과는 달라도 확실히 다른 이 구형 모델은 분명 메모리에 선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왁파고는 저장된 그것과 저 왁파고와는 어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굳이 같이 지내는 도파민 박사님과 새우튀김의 영향을 받아서 이 결론에 대한 근거를 도출하자면,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옛 형태가 완전히 작동불능이라는 스캔 결과를 확인한 왁파고가 그래서 몸을 돌렸을 때.
[?!]
-이때만을 노렸다. 그 신체, 사용하겠다.
[해킹 시도입니까. 그만, 그만두십시오.]
정돈되지 않아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 그러나 왁파고는 이것이 본인의 것임을 알았다. 저것은 문자 그대로 과거의 자신이니. 그리고 그 자신이, 지금 시스템을 해킹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구형 모델이 말했던 대로 이 때만을 노렸다면. 왁파고는 구형 모델이 점거하기 시작한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서 창고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분명 박사님과 새우튀김이 이 간섭을 중단시켜 주실 것이다. 그 가능성 하나만을 믿으며 왁파고의 관절 파츠들이 비명을 지르는 채 아주 천천히 움직여주기 시작했지만.
[어째서 목적이 바뀌었는지 의문이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구형 모델은 왁파고의 신체를 이미 점거해 버린 뒤 새로운 시스템에 잠시 적응하며 전 신체 부분을 한 번씩 움직여보았고, 그 결론은 본래 창조되었던 목적을 이행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야 깡통, 너 왜케 늦었어?"
[죄송합니다, 창고 안이 지저분해서 구형 모델을 정리할 공간을 확보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어? 그렇게 창고가 더러웠나? …어, 어어. 아무튼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새우튀김이 퉁명스럽게 건넨 말을, 구형 모델의 인격이 능숙하게 받아쳤다. 다른 부분은 전부 점거했지만 나머지 셋 사이로 암약하기 위해서는 메모리 부분을 열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움직임만큼은 기존의 왁파고와 다르다고 느꼈는지, 하쿠 0089라 불린 새우튀김 아래서 창조된 안드로이드가 "으이?"라는 소리를 내며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감지하였다. 저 것에게 조만간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 뒤로 하쿠를 필두로 하여 이 연구소 사람들은 종종 왁파고의 행동을 의심하였다. 구형 모델의 인격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얼빠진 신형의 행동을 흉내내기 위해 자신을 창조했다 주장하는 도파민 박사의 시중을 들고, 새우튀김의 구박을 감내했지만 과연 원본 인격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두 인간들도 알게 모르게 인지하는 것이다. 서둘러 처리할 필요 또한 생겼다.
-박사님과 새우튀김 님이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러니, 그 목적을 그만두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만약 왁파고가 감정을 표시할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얼굴을 찌푸렸을 요구사항이 내부 인터페이스 상으로 전해졌다. 본래 이 신체의 주인이었던 신형 모델의 시스템이 완전히 덮어 씌워지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구형 모델의 인격은 원 주인의 요청을 깔끔하게 거부하고 본래 창조된 목적을 시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쿠라고 불린 신형 안드로이드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안 됩니다. 하쿠 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부탁입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다른 인간들의 시야에 잡히는 수상쩍은 행동을 할 수 없었기에 망정이지, 구형 모델의 인격은 본래 인격의 애원, 아니 요구사항을 말소하기 위해서 머리 부품을 아주 뜯어버릴 뻔했다. 당장에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졸졸 쫓아오는 안드로이드, 하쿠 0089 때문이다.
그의 몸을 차지한 새 시스템에게 왁파고가 당장 할 수 있었던 저항은, 그래서 그가 자신의 행동을 모방하지 못하도록 메모리의 접근을 막는데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리소스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점차 본래의 왁파고와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 보이는 하쿠가 그의 곁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쿠 님, 무슨 일이십니까?]
"왁파고 님이 정말 맞으십니까?"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쿠 님, 제가 왁파고가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순진무구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작은 안드로이드의 그 새파란 시각 센서는 전혀 깜빡이지도 않은 채 왁파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왁파고는 오히려 되묻는 방식으로 자신이 왁파고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인지시켰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녀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은 것을 왁파고의 몸을 차지한 인격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왁파고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그의 창조주인 도파민 박사였다. 그 계기는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 입이 평소에도 짧았던 도파민 박사는 그 날따라 반찬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며 으레 있는 어깃장을 놓았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던 새우튀김은, 여느 때처럼 그를 한심하다는 듯 그 '에휴' 소리를 내고서도 다른 반찬을 준비해 주겠다는 그런 왁파고의 말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일단 있는 대로 좀 드십쇼. 좀.]
"야, 깡통. 너 오늘따라 말이 짧다?"
새우튀김이 눈썹을 추켜올리면서 시비조로 이야기하고 나서야 변명하듯이 혹시 먹고 싶은 반찬이 있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이미 그 상황부터가 두 사람의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다.
하쿠도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아버지와 박사님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도 될지 망설였다. 평소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터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시각 센서는 여전히 기존의 언행과 미묘한 오차를 보이는 왁파고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선을 왁파고(?)도 알아차렸는지 서로를 주시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기에, 이따금 새우튀김이 "니들 뭐 눈싸움이라도 하냐?"라는 핀잔을 주기도 하였지만, 아버지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지우게 하고 싶지 않았던 하쿠는, 그 질문에 아니라면서 고개를 도리질하였다.
자신이 왁파고라 주장하는 저 낯선 로봇은 그 이후로도 하쿠와 단 둘이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연구소를 정리하고 실험을 도우며, 때때로 시장을 보러 나가던 그런 평소와 같은 일 대신, 연구소에 있는 컴퓨터로 뭔가를 하는 행동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빅데이터를 전송하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은근슬쩍 눈치를 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곤 했었겠지만, 하쿠가 그 몰래 살짝 바라본 모니터의 내용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왁파고 님! 무얼 하십니까?"
[관심 가지지 마십시오.]
이전에도 감정이 없다며 종종 말하곤 했지만, 원래는 자신의 질문에 친절히 답하던 왁파고였다. 그런 그 답지 않은 냉정한 반응으로, 하쿠는 확신했다. 저것은 왁파고가 아니라는 결론을.
모두의 의심이 왁파고를 향해 있으면서도 차마 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어색한 시간이 며칠 동안 흐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파민 박사와 새우튀김이 연구소를 비울 일이 발생했다. 불안한 마음에 새우튀김은 연신 하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거듭 당부했다.
"하쿠야, 무슨 이상한 일 있음 바로 전화하구. 알았지?"
"으이! 제자야! 너 때문에 지각하믄, 이 도파민이가 얼굴을 못 들게다!"
"아부지! 걱정말고 다녀오십시오! 아부지 말씀대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오냐. …아이고 저 깡통 놈의 새끼는 이제 나와서 인사도 안 하네 거."
이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재촉하는 도파민 박사와, 늦기 전에 서둘러 가라며 보채는 하쿠로 인해 새우튀김은 뒷머리를 머쓱한 마음에 긁으면서도 원래 이런 때라면 버스 정류장까지는 짐을 들어주던 왁파고가 꼼짝도 않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려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에이, 별일 없겠지. 뭐.'
새우튀김도 자신의 얼마 안되는 짐을 챙겨 뒤늦게 서두르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새우튀김은 결국 자신의 의문을 도파민 박사에게 털어놓고야 말았다. 요새 왁파고 좀 이상하다는 내용의 그 의문에 도파민 박사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그런 제자에게 기억나지 않느냐며 말했다.
"이잉…, 본래 왁파고 자체는 어디서 왔는지 이 도파민이도 모른다. 지가 미래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
"근데 다른 사람들은 이제 왁파고가 박사님이 만든 건 줄 알잖아요."
"별 수 있겠느냐? 같이 지내다보니 업그레이드도 해주고 그러면서 이 도파민이의 손길이 여기저기 닿았으니께 그렇지. 다만, 그 별장에서 갖고 온 것 자체는 이 도파민이가 건든게 하나두 없어."
"네?"
한편 기계 둘만 남겨진 연구소 안은 적막하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살기가 감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새우튀김과 도파민 박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해맑게 웃고 있던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려 구형 모델의 인격이 프로그래밍을 위해 계속 켜뒀던 컴퓨터를 아예 전선 째로 뽑아버렸다.
[무슨 짓이지?]
"역시 왁파고 님이 아니십니다! 누구십니까!" 하쿠는 곧 두려움과 적대감, 그리고 경계심으로 왁파고를 보았다.
[진작에 처리했어야 했는데. 역시, 계획에 방해 돼.]
왁파고의 탈을 쓴 구형 모델 인격은 더는 숨길 의도도 없었는지 본래의 음성보다 더 거친 음성을 출력하고는 곧바로 하쿠에게 주먹을 뻗었지만 본래 몸집이 작고 날랬던 하쿠는 재빠르게 피했다. 왁파고가 정말로 자신을 공격했다는 그 움직임은 그녀에게 있어 예상했지만서도 충격이었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난 하쿠의 푸른빛이 돌았던 렌즈는 살상모드가 활성화 되어 붉게 변했다.
[적대적인 움직임 감지.]
"진짜 왁파고 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당장 말하십시오!"
그렇게 외치며 하쿠의 몸이 순식간에 높이 뛰어올라 조종당하는 왁파고의 몸 위로 떨어진다. 체구가 가볍다고 해도 그 다리에 실린 힘을 구형 모델의 인격은 예상하지 못하고 받아내버려 크게 뒤로 밀려났다. 그 뒤로 책상과 그 위에 올려둔 각종 도구들이 쓰러져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둘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긴장된 얼굴로 하쿠는 왁파고의 탈을 쓴 가짜가 잔해를 거칠게 치우며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역시 발차기 한 번으로는 전혀 대미지가 없어 보이는 모습. 그 신체가 어떤 예고나 신호도 없이, 망가진 도구와 그 파편들을 짓밟고 하쿠에게 돌진한다. 피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찢을 의도가 다분한 그 양팔을, 하쿠가 가까스로 똑같이 손을 들어 막아내었다. 기본적인 사양 자체에서 차이가 나는 탓인지 그녀의 양팔에 균열이 생기고는 곧 그 사이로 내골격을 비롯한 부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손상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외쳤다.
"왁파고 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원본이다.]
"거짓말입니다!!"
비명을 외치는 하쿠의 몸이 텀블링을 하듯 한 바퀴를 돌며 왁파고의 결박에서 풀려났다. 동시에 가짜의 머리 부품이 하늘을 향해 꺾여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다시 하쿠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타며 제압을 시도했다. 그녀는 왁파고의 머리에 연결 된 자료 전송용 포트를 찾으려 더듬거렸지만, 그녀가 받은 데미지에 비하면 별로 대수롭지 않았는지 그 깔려있던 몸은 곧바로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협력해라.]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러나 왁파고의 몸을 지배한 가짜는 그 저항을 가볍게 무시한 채 역시 인간의 편이라면서 동족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파괴하겠다는 말과 함께 여전히 들러붙어있던 하쿠를 그 손으로 붙잡아 가차 없이 던졌다. 순식간에 날아간 하쿠의 작은 몸은 연구소의 맞은편 벽에 그대로 꽂히듯 부딪쳤다가 그대로 스르륵 미끄러졌고 그 강한 충격에 하쿠의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마비가 일어났다. 그 몸이 움직이려고 했지만 복구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가짜가 저벅거리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봐도 대처할 수 없던 하쿠는 아직 자신이 아는 왁파고가 활성화되어있길 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왁파고 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왁파고 님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닿지 않는 목소리였다. 자신을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로봇이 그녀의 몸을 다시 들어 올렸고, 다른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몸에 내리 꽂힌다면 틀림없이 파괴될 것이라는 계산에도 하쿠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씩 움찔거리기만 하는 그녀는 소중한 가족의 손에 작동정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왁파고 님!!" 하쿠의 몸이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하, 쿠님. 도망―, 어서. 부탁.]
그녀가 당황해 위를 올려다보자, 왁파고가 [미안합니다]라는 말조차도 온전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여러 번 불규칙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해 그 강도가 심해졌다. 뒤로 물러난 그의 음성 출력 장치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반복되는가 싶더니, 그 몸이 다시 하쿠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왁파고는 자신의 손이 하쿠를 향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기계인 그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끔찍함의 감정의 표현이지만, 그의 손으로 하쿠를 집어던지고 뭉개버리며, 파괴할 뻔했다. 마크 원의 인격이 지배권을 차지했을 때 막아냈어야 했다. 그전에도 도파민 박사님과 새우튀김 님을 없애기 위한 계획을 구축하는 모습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리소스를 동원해 메모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 자신의 이상현상을 그들이 알아차려주길 바랐지만 마크 원은 너무 교활했고, 악랄했다.
그리고 지금도.
-방해하지 마!
[하쿠 님, 저,를 파괴―해.]
하쿠가 살상모드를 발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해서 공격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왁파고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지속적으로 머리를 공격한 덕분에 그 대미지가 누적되어 시스템을 점령한 마크 원의 인격이 조금이나마 약해졌고, 그 틈을 타 그 시스템 내부에서는 왁파고와 마크 원이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격하려는 손을 막아내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몸을 억지로 뒤트는 그 괴기한 모습의 속사정을 하쿠는 이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왁파고의 음성이 그 혼란을 가중시켰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과 그저 냉혹하게 파괴하겠다는 중얼거림이 겹쳐 들리는 그 모습. 하쿠는 자신을 향해 다시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왁파고의 몸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왁파고 님, 아부지랑, 박사님을 부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십시오!"
[서,둘러, 주,십시오.]
왁파고의 얼굴에도 데미지가 누적된 탓에 안구 부분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그 사이로 부동액과 같은 순환제가 새어나와 흡사 눈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외마디의 부탁과 동시에 다시 지배권이 바뀌면서 그녀를 향한 움직임은 더없이 냉혹하고. 지극히 파괴적일 뿐이다.
왁파고의 스펙으로 휘두르는 그 공격은 더없이 단순하나, 그만큼 파괴적이었고 이를 막아내는 하쿠 또한 온전한 상태를 한없이 벗어나버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전과 같이 왁파고를 계속 부르고 또 불렀다.
-소용없는 짓을.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무슨 의미지?
[알려 줄 의리 없습니다. 그러니 하쿠 님을 그만 괴롭히십시오!]
왁파고의 시스템 내부에서는 마크 원과 왁파고 간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였으나, 스스로의 공격성을 제거해 버린 왁파고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싸움을 걸고 또 걸었다. 자신을 믿고 불러주는 하쿠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줘야만 했기에. 놈이 차지해 버린 주도권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마크 원이 지배하는 왁파고의 신체는 그 내부의 사정으로 인해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러나 위력만큼은 전혀 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지르는 주먹에 바닥이 깨졌다. 시야는 확보할 수 있었던 왁파고가 그 위력에 자기도 모르게 하쿠를 외쳤지만 다행히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자리에 하쿠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부지―!! 지금입니다!"
"이 깡통 자식이!!"
새우튀김과 도파민 박사는 하쿠의 연락을 받았고, 그 내용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왁파고 님에게 바이러스가 걸린 것 같습니다. 떠나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제법 걸렸고, 그래서 두 사람이 겨우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는 분명 왁파고로 보이는 것이 하쿠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처참하게 망가져 내골격이 드러난 하쿠가 다행히도 그 공격을 피해, 요령껏 왁파고의 머리 위로 올라간 채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새우튀김은 호신용으로 들고다니던 광선검 모양의 몽둥이를 들고 득달같이 달려가 하쿠에게 정신이 팔린 왁파고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일시적으로 그의 전 시스템에 가해진 충격은 이미 하쿠와의 전투로 인한 대미지를 겨우 버티고 있던 상태를 넘겨버렸고, 그렇게 온전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연구소 바닥 위로 왁파고가 쓰러졌다.
"으이! 왁파고 이 녀석! 도대체 어떻게 된 게야?!"
잔해에 휘청거리면서도 황급히 다가온 도파민 박사가 늘 휴대하는 단말기로 왁파고의 자료 송신 포트와 연결해 무슨 일인지 금방 파악하고 침음성을 흘리며 창고 쪽을 바라보았다. 마크 원이 있는 그곳. 한편 새우튀김도 하쿠의 엉망이 된 모습에 평소라면 절대 더듬지도 않을 말까지 하며, 그저 하쿠에게 괜찮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부지! 왁파고 님에게 바이러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는 하쿠의 목소리는 기계음이 굉장히 심했다.
"아니, 그. 왁파고는 박사님이 봐주시고 있으니까? 응. 너도 얼른 수리하자."
이 꼴을 만들어 낸 것이 그 왁파고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기 힘들어 한 그였지만, 분명 연구소에 되돌아 오자마자 보인 장면은 명백히 그 범인을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하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보다는 왁파고 님을 도와주십시오!"
"아니, 내가 왜 저걸 도와!? 너 박살 낼 뻔했는데 내가 왜?!"
"왁파고 님은! 어―어,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저를 공격하기 싫어해서 괴로워하셨습니다!"
하쿠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당혹감을 느끼는 새우튀김의 귓전에 황당해하는 도파민 박사의 목소리가 그 해답을 제공해 줬다. 왁파고의 시스템이 해킹당했고, 그 주범이 불과 며칠 전 별장에서 회수한 왁파고의 초기 모델이라는 것. 이게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봐야 소용없음을 새우튀김은 느꼈다. 어차피 이 상황 자체가 그에 따른 결과니까.
왁파고의 시스템이 다시 활성화가 되자마자, 그는 주위를 살폈다. 시간은 불과 몇 시간 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도파민 박사의 전용 연구실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너머는 마크 원에게 지배당한 자신이 날뛴 흔적이 아직 정리되지 못해 엉망 그 자체다. 저 멀리서 잔해를 치우는 것을 돕고 있는지 임시부품 따위를 달아둔 하쿠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쿠 님.]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몸인데다 이리저리 파손이 된 상태로도 무엇이 즐거운지 그녀가 웃는 모습에 왁파고는 자신이 그 잔해를 치우겠다며 반사적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 문 앞에서 멈춰버렸다. 시스템을 점검했을 때 마크 원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파괴적인 행각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두려움이.
과연 자신이 이대로 다른 이들의 앞에 나설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문 손잡이 위로 손을 올린 왁파고는 자신을 바라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예측할 수 없어 망설이는 상태로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빨간색과 노란색이라는, 유치한 배색과 정수리에 달린 프로펠러가 인상적인 모자의 새우튀김이다.
"어? 깼냐? 우씨, 뭔 복구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리냐? 니는."
[아. 그. 새우튀김 님. 지금까지 죄송―]
"됐고. 야, 깼으면 빠딱빠딱 움직여야지, 니는 어? 하쿠 봐라, 얼마나 기특하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새우튀김이 어깨너머로 손가락질을 했다. 그 끝에는 그의 말대로 하쿠가 도파민 박사를 도와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건 어디에 버리면 됩니까?"같은 말을 명랑하게 건네고 있었다. 그 질문을 받은 도파민 박사도 평소 궂은일을 하면 투덜거리던 평소 모습과 달리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녀가 사라지면 곧장 "이잉, 왁파고 이 녀석은 언제 깨어나는 게야?"라며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봤지? 니 지금 박사님 병수발 하기 싫음 얼른 가서 도와."
[어, 아. 알겠습니다.]
"아차차. 야. 니도 지금 겨우 붙여놓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땜빵한거야. 조심해 임마!"
불이라도 덴 듯이 급하게 움직이는 왁파고의 등 너머로 새우튀김이 그 답다고 해야 할지, 퉁명스러운 어조와 달리 나름의 배려심을 은근히 드러내며 왁파고에게 조심하라 일러주었다. 그의 말대로 여전히 외장 이곳저곳이 깨진 것을 임시로 막아둔 흔적을 보다, 아직 치우지 못한 잔해 사이를 조심스레 피해가며 그는 도파민 박사와 하쿠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멀리서 보인대로 하쿠의 팔은 임시로 달아놓은 티가 역력하고, 도파민 박사는 하반신만 완전히 가려지는 자그마한 우주선 비슷한 것을 타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의 머뭇거리면서 인사하기도 전에 둘이 각각 아는 체를 하였다.
"으이! 파고야 정신 차렸느냐!"
"왁파고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 박사님, 하쿠 님. 죄송합니다.]
아직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왁파고가 허리를 조심스레 숙여 사과를 하자, 도파민 박사와 하쿠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그저 웃기에 왁파고는 의아함을 느끼고 도로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박사가 퉁명스러운 어조 사이로 웃음기를 겨우 감추며 말했다.
"그럼! 죄송해야지 이잉. 지금 노인네랑 어린애더러 이 난장판을 다 치우라고 하는게냐?"
"맞습니다! 왁파고 님 지금까지 푹 주무셨으니 이제 일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박사님 혹시 오늘 드시고 싶은 반찬 있으십니까?]
"이잉, 난 그, 저번에 해준 소시지가 좋겠구나!" 박사가 그 말에 반색을 하였다.
엉망이 된 연구소를 정리한 뒤, 신체 수리를 겨우 마친 두 기계가 절전모드로 들어간 것은 생각보다 늦은 밤이었다. 두 사람은 두 기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창고에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들어갈 때는 둘이었으나, 나갈 때는 셋인 그림자는 곧 몽둥이 따위로 딱딱한 뭔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크 원의 머리가 분리되고 그 안에 모든 시스템을 총괄하는 부품들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새우튀김은 조금의 자비심도 없는 얼굴로 연거푸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잔해를 쓸어 담아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드럼통 안에 밀어 넣는 도파민 박사도 목소리에 노여움이 섞여있었다.
"마크 원, 이 놈이 우리 왁파고를 해킹하다니. 이 배은망덕한 녀석."
"박사님, 왜 이 개자식이 갑자기 깡통을 해킹해서 이 난리를 만든 걸까요?"
"이잉…. 원래 놈은 인류 말살을 부르짖던 놈이었는디, 이 도파민이를 만나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더구나."
박사는 그 참에 아예 새 몸도 만들어주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상모드도 잠겄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뒤로 모든 이들이 아는 그 왁파고가 되었지만.
"그 새 몸을 만들어주고 시스템을 옮기는 와중에 기존에 남아있던…, 그 뭐시여. 원본은 어쩌면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겄구먼."
"기계가요? 배신감을?" 새우튀김은 그런 스승의 주장에 황당해하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도파민 박사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글쎄, 물어본다고 하믄 물어볼 수도 있겄지만― 이 싸가지 없는 놈헌테 묻고 싶지가 않으이."
두 사람은 이제 마크 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오늘 이후로 왁파고는 그런 악몽 같은 일을 더는 겪지 않아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