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인 파란색 모험
*닥터후 AU입니다!
*닥터 융과 컴패니언 데이비슨(?) 입니다.
*네. 운율 맞춰보려고 억지로 때려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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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누가 그의 이름을 묻는다고 하면 그저 단순하게 '닥터'라고 불러달라 주장하는 그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평소처럼 그저 타디스를 무의식적으로 운전하다, 무의식적으로 불시착한 공간에 내렸을 뿐이다. 무릇 전혀 알 수도 없는 낯선 곳에 도착하면 그 주위를 탐색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던가? 새로운 탐험을 한다는 생각에 닥터는 생각보다 조심성 없이 타디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아간 죄라면 그걸 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당연히 무죄 방면이라 극구 주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공간, 즉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고성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주인들은 그 변론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 이런!"
달빛이 고스란히 스며드는 어두운 복도 위로, 검은색 코트 자락이 휘날리도록 다시 타디스가 있는 곳까지 뛰는 사이에도 그 특유의 붉은색 광선이 발사하는 소리와 옷감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돌로 만든 복도를 가득 메웠다. 운이 좋아 옷에 스쳤을 뿐이지만, 저 광선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으니 엄폐물이라도 없는 이상, 지금도 뛰고 있는 다리를 쉬게 해서는 안되었다. 말하자면 생존의 본능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닥터는 어떤 코너도 없이 복도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한껏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람 모양의 그림자. 뒤로는 한 방이라도 잘못 맞으면 목숨이 위험한 광선을 마구 발사하는 오톤 무리. 피할 곳 하나 없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어이―! 고개 숙여!"
갑작스럽게 거대한 그림자 쪽에서 호탕함의 전형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 닥터는 몸을 숙였지만 여전히 다리가 뜀박질을 하는 통에 곧 볼썽사납게 자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반응이 오히려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는 반가운 태도였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아!" 라며 쾌활하게 외치고는, 곧 허리춤에서 뭔가를 뽑더니 대번에 매캐한 화약냄새를 흘리며 총성을 여러 번 냈다.
"이봐, 거기서 잘 텐가? 입 돌아간다?"
열로 달아오른 총구를 크게 훅하고 불어 식히던 그,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닥터에게 손을 뻗으며 자기가 한 말이 일종의 농담이었던지 킬킬 웃는 채로 말했다.
아끼던 옷에 구멍이 뚫려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닥터와 달리, 타디스 안에 들어온 거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감탄사를 쉴 새 없이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사이마다 "이 파란색 박스, 정말 바깥보다 안쪽이 더 넓잖아?!"와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은 덤이었다. 닥터는 자신을 구해준 이 인간을 힐끔 바라보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닥터입니다."
"닥터? 무슨 닥터?" 제 키만큼이나 손도 거대한, 자신을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 소개한 상대가 순수한 궁금증을 표시했다.
"그냥 닥터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닥터는 그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간단히 소개를 했지만 캘리칼리는 그래도 뭔가가 이해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런 것을 못 참는다며 곧바로 질문을 했다.
"왜 온 건가? 여긴."
"아―. 꼭 설명해야 합니까?" 그리 망설이던 닥터는 그 질문의 본질이자 정수에 준하는 아주 핵심적인 답을 했다. "우연입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인상을 쓰며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은 아까 전 괴물이 조종하는 플라스틱 꼭두각시들에게 쫓길 때보다도 더 무섭다는 생각을, 닥터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말았다. 평소 이런 식으로 연거푸 실수하는 일도 없건만 오늘은 이상하다며, 그는 캘리칼리를 향해 다시 조근조근한 어조로 이게 무슨 뜻인지 차근히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이 우주선이고, 때때로 의도한 곳으로 움직여주는 것이 아닌 엉뚱한 곳에 착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하필 오늘이었으며, 영문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주위를 살펴보다 외계인이 조종하는 플라스틱 꼭두각시 로봇에게 쫓기고 있더라는 내용.
"…어―어. 그러니까, 자네가 외계인…이라고?"
"음. 그쪽에 집중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아까 내가 쏴서 쓰러트린 건―"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로봇이지요, 예. 그것도 외계인이 조종하는 겁니다."
누가 들어도 허황된 말이지만,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막상 농담이라 치부하며 평소처럼 껄껄 웃을 수도 없었다. 바깥보다 안쪽이 더 거대한 이 공간 한가운데에 거대한 실린더 따위가 불규칙하게 위 아래로 움직이고, 그 주위를 감싸듯 버튼이나 레버 따위가 복잡하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명백한 조종용 콘솔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을 끔뻑거리던 캘리칼리는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가장 현명한 대처를 하였다.
"그렇구만!"
"쉽게 인정하시는군요?"
"뭐―어. 이 공간만 봐도 다들 비슷하게 생각할 걸세. 그럴 바에야 믿는 게 맘 편하지."
"그나저나, 캘리칼리 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곳에?"
그 질문에 계속 유들유들한 태도를 유지하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멋들어진 짧게 깎은 팔자수염 하나를 긁적이며 끙끙 앓는듯한 묘한 소리를 내다가 닥터의 것처럼 아주 본질적인 정수로서 답해주었다. "보물 찾으러 왔네." 당연히 닥터도 이해할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라니깐?"
"이런 성에 보물이 있다고요?" 닥터가 이제 눈을 가늘게 뜨면서 반문할 수밖에 없었고, 캘리칼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글쎄―, 이 쪽 업계에 몸 담고 있는 친구들이 더러 있는데 말이지… 말해주더라고! 보물이 있는 것 같다고."
"흠."
"나는 막 성 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을 한 참이었는데, 자네가 저쪽에서부터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을 뿐이야. 아직은 여기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네."
능글맞게 웃는 그가 아직 풀지도 못한 자신의 짐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간 닥터의 눈에는 그 안에는 지도나, 삽, 곡괭이 따위의 도구들이 묵직한 배낭 안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점잖은 방식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품과, 총까지도 들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이거 완전히 도굴ㄲ―"
"하하! 무슨 소리인가! 난 그저 아직 사회에 환원되지 못한 귀중품들을 조금은 거친 방법으로 찾아내는 일을 할 뿐일세. …진짜라니까?"
"하…." 그 뻔뻔한 답에 닥터는 작게 한숨일지 허무한 웃음일지 애매한 소리를 내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 정보, 근거가 있는 건 맞습니까?"
질타하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이 섞인 그 말에 캘리칼리도 딱히 불쾌해하지 않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불과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건…, 아닌 것 같군."
"그렇습니까? 오― 이런."
순간 타디스가 거칠게 흔들렸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던 두 사람 중 닥터가 먼저 중앙 콘솔의 모니터를 잽싸게 끌어와 바깥 상황을 살펴보았다. 아까까지 자신을 공격하던 플라스틱 로봇, 오톤 무리가 더 많이 불어난 채로 아예 타디스 째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닥터의 낮고 굵은 침음성에, 같이 보자며 그의 옆 자리를 차지한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그 영상을 보면서 믿기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조작된 것 아니냐며 오히려 물었고, 닥터는 실제 상황이라며 뭐든 꽉 잡으라는 말과 함께 레버 하나를 쑥 당겼다. 그러나.
"아니, 이게… 왜 이러지?"
"뭔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게, 그 조종이."
원래는 깔끔하게 공간이동이 되어야 하건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듯 타디스가 성 이곳저곳을 거칠게 부딪치며 허공에 살짝 붕 뜬 상태로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이제 문자 그대로 좌충우돌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래에서 계속 붉은색 광선을 쏘아대는 플라스틱 마네킹들이 그 움직임에 휘말려 박살 나는 긍정적인 결과도 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채, 우주선 내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이 과격한 움직임에 비명을 지르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휘청거리는 몸으로 겨우 타디스 바깥을 빠져나왔다. 성을 탈출하는데 실패해 좌충우돌한 끝에 어지간한 탈 것도 태연하게 타던 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게 만든 원흉도 뒤늦게 빠져나왔지만, 그 또한 심한 멀미였는지 핼쑥함 그 자체였다. 입을 가리면서도 타디스에서 나오는 그의 주머니는 생각보다 볼록했다.
한편 지독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자칭 유물 발굴가는 아예 고급스러운 방에 거대한 벽을 뚫은 이 과격한 운전에 불만을 호소하면서도 땅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고르기에 이르었다.
"으어…. 생긴 것보다 난폭운전을 선호하는 줄은 몰랐는데."
"저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성 주위로 일종의 방어막…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의 손에 잡힌 이상한 기구가 빛을 내면서 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 기구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한 번씩 슥 휘젓고는 그 결과가 보이는지 유심히 살펴보는 닥터에게, 캘리칼리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건 뭔가?"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입니다. 이런저런 기능이 있지만―" 그는 잘해봐야 근대 시대에 건축되었어야 할 성의 문 이곳저곳을 두드리다가 한 곳에 그 윙윙대는 드라이버를 갖다 대며 말했다. "―문을 잘 땁니다."
아무리 봐도 나무문이어야 할 것에서 쇠로 만든 것이 분명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팎의 개념을 무시하는 신기한 우주선도 움직이는 마당에 고작 빛과 귀에 약간 거슬리는 소음을 내는 것으로 문을 따는 신기한 도구라니.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방금 전 멀미는 전부 잊은 듯, 이제 문을 열고 다시 그 스크류 드라이버를 어둡기만 한 공간을 휙휙 휘두르는 닥터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했다.
"이거…, 나한테도 주면 안되나?"
"예?"
"하나만 주게. 좀 좋은 게 있으면 공유하자고."
아무리 봐도 그렇고 그런 쪽으로 쓸 의도가 다분한 캘리칼리가 그렇게 말하자, 닥터가 곤란해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 달라고 하는지 그 이유가 명백했으니까. 그 시선을 읽은 캘리칼리가 대뜸 닥터의 어깨에 그 큼지막한 손을 얹으면서 말을 했다.
"자네도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남몰래, 그래 지금처럼 잠입을 해야 하는 경우에 잘 쓰는 거 같은데 말이지―. 나도 크게 보면 자네와 큰 차이가 없거든. 까짓거 동종업계 사람으로서의 부탁이라고 생각해주면 안되나?"
"아…, 안됩니다."
"나 원, 각박하구만."
열린 문 너머로 꽤 거대한 공동이라도 있는지, 가뜩이나 낮은 닥터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메아리치며 웅웅거렸다. 서운함을 드러내는 그 말과 달리 여전히 능글맞게 웃는 캘리칼리를 닥터는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 가라앉은 멀미 탓으로 미루기에는 그 낯빛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도 어째서 이 외계인이 자신을 걱정어린 시선으로 보는지 이해하고 있지만 그걸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려 제대로 된 모험이다! 이제 그에게 있어 실존하는지 아닌지 불확실한 보물의 존재는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엉망진창으로 모는 우주선도 그렇고, 목숨을 노리며 죽기 살기로 쫓아오는 진짜 외계인의 존재 또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스릴이었다. 자신의 기분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이 덩치 큰 동행자의 억지에, 이제 당황하는 것은 닥터였다.
"자네가 내 팔다리를 밧줄 따위로 꽁꽁 묶어놔도 난 따라갈 걸세."
"…왜요?"
"재밌을 것 같거든! 자, 그러니 이 성이 뭘 감추고 있는지 한 번 같이 파헤쳐 보자고! ―뭐, 보물이 있으면 더 좋고."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웃음도 공동 이곳 저곳에 부딪치며 메아리를 만들었다. 여전히 그를 달갑지 않게 바라보던 닥터는 캘리칼리가 그 큰 손으로 등을 치는 바람에 아래로 난 계단 몇 개쯤을 밟기에 이르었다. 아무리 외계인이어도 아픈 것은 똑같이 아픈 것인지, 그가 한 대 맞은 그 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작게 침음성을 흘리는 모습을 자칭 유물발굴가는 킬킬거리는 웃음기로 바라보다가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아예 눈물이라도 찔끔 나왔는지 닥터가 손등에 눈가를 살짝 대고 있다가 난간도 없는 그 계단을 살짝 내다보며 말했다.
"아까도 여쭤보려고 했지만, 이 성을 알려줬다는 그 정보… 그리 믿을 만한 것은 못 되는 것같군요."
"음.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뒤이어 계단을 한 층 한 층 밟는 캘리칼리가 허리춤에서 손전등을 빼서 전원을 올렸다. 그 환한 불빛으로 비춰보는 바닥은 여전히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긴장감에 침묵하고 있으려니 아주 미약하기는 해도 소름끼치는 소리가 저 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들렸다. 축축한 뭔가가 연신 벽이나 바닥을 때리는 그런 잘박거리는 것이.
닥터가 그 소리를 듣고는 손전등으로 계단이 어디있는지 발치를 비춰주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에게 속삭이듯이 질문했다.
"그러고보니 캘리칼리 님께서는 이 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오셨다 하셨는데, 혹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바닥을 조심스럽게 걷는 캘리칼리의 입에서 기억을 되짚는지 끙끙대는 소리가 살며시 흘러나오던 것도 잠시, 곧바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이 성은 근대에 접어들기 직전에 한 괴짜 귀족이 앞은 험한 삼림지대이자 뒤로는 절벽 위에 세웠고, 그 탓에 올라오는 것 자체가 큰 난관이라 숱한 전쟁에도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비교적 최근 모 대기업에서 이 성을 통째로 이용해 일종의 놀이공원으로 개조할 것이라는 것까지.
"성 자체는 고색창연한데도 더러 보이는 소품 이것저것이 꽤 새 것인 이유가 그런 이유일세. 마네킹들도 들여왔다던 이야기가 있던데."
"아하. 그래서." 닥터가 이제서야 이 성에 어째서 마네킹들이 들끓었는지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은 보이는 곳 자체만 조금씩 손대고 있다기에 조바심도 나고, 정보를 준 친구가 어디선가 입수했다며 지도를 줬거든."
이제는 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내려온 지점에서, 캘리칼리가 유틸리티 벨트에 매달린 주머니 중 하나에서 인쇄된 지도를 꺼내 닥터에게 건네주었다. 오래된 설계도를 찍은 사진인지, 관련 업종에 오랜 시간 몸담고 있지 않았다면 잘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건 닥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감상을 말하라고 해도 매우 복잡하다는 것. 종이뭉치를 도로 건네 받은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이 참에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듣자하니, 오톤이라느니 뭐니 했는데 그게 그 플라스틱 로봇인지 뭔지하는 마네킹들을 의미하는 건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존재가 따로 있습니다. 어쩌면―." 닥터는 그리 말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아래에 있을 수도 있겠군요."
이제는 그 찰박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면서 캘리칼리도 그가 말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시계가 없었다면 얼마나 흘렀을지도 모를 정도로 깊숙한 이 구덩이 끝에 내려오는데 성공하였다. 캘리칼리는 절대로 사람이라면 이만한 깊이까지 파낼 수 없다는 감탄 아닌 감탄사를 흘리며 주위를 휙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놈을 잡는거고?"
"잡는다라, 관점에 따라서는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우리라니요? 지금까지 길 밝혀주셔서 감사하지만, 이 앞은 캘리칼리 님께 위험한데요. 그만 도로 올라가시지요."
"하! 아까까지 그 마네킹들에게서 죽자사자 도망쳤던 자네가 할 말은 아닌데? 인정하라고, 적어도 나는 놈들을 쫓아낼 수 있잖나?"
닥터의 염려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보란 듯 자신의 총을 꺼내들었지만, 닥터는 그것이 영 탐탁지 않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도움 받은 것 자체는 고맙지만 역시 총과 같은 폭력적인 방식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닥터는 제법 냉정하게 선을 긋듯이 말했다.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할 참인가?"
"이걸 쓸겁니다."
그리 말하는 닥터는 주머니에서 얇고 길쭉한 용기를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찰랑거리는 검푸른빛 액체가 거의 가득차있어 의아해 하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에게 닥터가 넌지시 말했다.
"항플라스틱 용액입니다. 이걸 당신이 표현하는대로 그 친구에게 던져 무력화를 시킬 수 있습니다."
"아하. 이론은 좋구만. 거기까지는 갈 수 있고?"
"…."
"날 믿게. 적어도 자네보다는 힘 쓸 줄 잘 아니까."
그렇게 닥터의 입장에서 원치 않는 동행인은 씩 웃으며 성큼성큼 나섰고, 어쩐지 이 막무가내의 언변에 계속 밀린다는 생각에 닥터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뒤를 재빠르게 쫓았다. 아무리 달갑지 않더라도 지금은 저 자칭 유물 발굴가의 조력이 있는 것이 감사한 상황이었기에.
"이런 젠장! 아주 바퀴벌레 소굴이 따로 없구만!"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눈치껏 코너 너머로 총을 발사하다가도 살벌한 붉은빛의 레이저 세례에 몸을 내밀지 못한 채 외쳤다. 곤란해하는 사람치고 껄껄 웃는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똑같이 몸을 피하고 있는 닥터가 오히려 걱정을 감추지 못해 마구 튀는 파편 사이로 똑같이 외치듯 질문을 했다.
"혹시 총알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까?"
"아…, 약간은 여유가 있긴 하네! 그것도 모자르다면―" 캘리칼리가 쏜 총알을 우연히 피한 오톤 하나가 내장된 레이저를 발사할 수는 없었는지 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그 머리를 낚아채 멀리 내던지며 외쳤다. "―이렇게 하면 되거든!"
과연 덩치에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연신 자신들의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던 플라스틱 마네킹들이 순식간에 날아온 것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진 틈을 타,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엉켜 허우적대는 그 마네킹 더미 사이를 요령좋게 피해 복도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과연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푸념대로, 이 공간 자체가 거대한 마네킹 생산공장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플라스틱 로봇들이 어디선가 자꾸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고 이제는 총알을 아껴야 한다며 계속 내던지는 것을 반복하던 그도 슬슬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 닥터. 그러니까 이걸 자네는 맨 몸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이건가?"
"이렇게 심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나한테 감사인사, 하게!!"
다시 마네킹을 있는 힘껏 던지다보니 윽박지르는 어조가 되었지만, 닥터도 나름대로 그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로 이리저리 지름길을 확인하고 막힌 문을 열며 길을 확보한 공이 있기에 굳이 감사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 부분을 넌지시 지적하자, 캘리칼리도 낄낄 웃으면서 그 말이 맞다고 넘어가기를 수차례. 가장 깊은 곳에서 촉수 따위가 흐느적거리며 벽을 찰박거리는 모습에 도굴꾼은 역겨워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이야―. 이거 아주 못생겼구만. 이거 꿈에서 나오면 이제 다 자네 책임일세."
"저렇게 생긴 건 제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걸 보겠다고 여기까지 오신건 캘리칼리 님이지요."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 특유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문가에 갖다 대고 물러난 닥터가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역겨워라 하는 표정의 캘리칼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손을 댄 문 너머로 뭔가가 연거푸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보기 드물게도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닥터는 숨이 찬 것만 빼면 태연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다시 그 용액을 꺼내 주저하지 않고 던졌다.
그 내용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플라스틱 로봇을 조종한다는 그 괴물은 용액에 닿자마자 듣기 괴로운 비명을 지르다 곧 발악하기 시작했다. 촉수 따위가 격렬하게 허우적거리면서 돌벽에 부딪치자 천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슬 위협적으로 떨어지는 그 모습을 웃으며 볼 수 없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할 때.
그의 등 뒤로 절대 불어올 이유가 없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 짧은 머리카락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 짤막한 시간이 지나자 닥터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살짝 웃음기를 머금으며 들려왔다.
"도굴꾼이여도 생매장은 역시 달갑지 않겠지요?"
아무 곳이든 상관이 없다는 말에, 아까와 달리 격한 움직임은 커녕 이동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였던 캘리칼리는 닥터가 내리라고 하는 말을 듣고나서야 조심스럽게 타디스의 문을 열었다. 넓지는 않은 방에 제법 큼지막한 책상이 인상적인 곳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심리 상담사 카르나르 융터르라는 명패가.
"여긴 어딘가?"
"일단 아무데나라고 하셔서…. 그 제 사무실로 모셔와봤습니다만, 혹시 거주지가 여기서 좀 멉니까?"
"으음―. 아니 상관 없을 것 같네." 그렇게 말하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대뜸 타디스의 문을 열고 적당한 곳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난 자네랑 같이 여행 할 거거든!"
"자, 잠, 잠깐만요. 지금, 뭐, 뭐라고요?'
당황한 닥터가 말을 몇 차례 더듬자,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닥터가 여태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 단연 가장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거든! 까짓거 이곳 저곳 맘껏 여행해보자고!"
"아니, 그―, 그러니까. 저기,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
"아아, 거절은 거절하겠네. 낙장불입이야. 난 이제부터! 자네와 좀 더 재미난 모험을 즐기기로 결정했네."
스스로의 결정이 맘에 들었는지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클클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에 닥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다시 타디스 안으로 들어갔다.
"좋습니다. 그럼 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아―, 그렇지. 나는 말이야."
캘리칼리는 씩 웃으면서 원하는 목적지를 말해보았고, 닥터도 입가에 웃음을 작게 띄우면서 타디스의 레버를 하나 쭉 잡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