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공개

하늘 아래 음악소리가 들리다

김만성피로 2023. 3. 5. 21:39

*장르는 무협입니다.

*어쩌다보니 게르만계 이방인 카르나르 융터르가 중원으로 넘어와 무림인으로 산다―라는 설정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명'이라고 함은 곧 융터르가 만?든? 가명 정도로 생각해주십사.

*더불어 그런 융터르니까 가끔 외국어 쓰는 건 세이프입니다.

 

Words : 15k


 한여름이 주는 뙤약볕이 나무 사이사이마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길을,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걷고 걸은지 오래되어 풀 한 자락도 나지 않는 그 오솔길은, 자신도 모를 산새 따위가 우는 소리가 메아리를 치고 그 사이로는 아무리 산 속이라 한들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하는 더위를 아주 살짝 가시게 할 만큼의 바람이 불었다. 그런 길을 등에 새카맣고, 관짝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얇은 것을 한 메고 있는 남자가 죽립을 벗어 부채처럼 그것을 부쳤다. 덕분에 드러난 남자의 생김새를 면면이 뜯어볼 수 있다면 일반적인 중원의 사람과는 확연히 다름을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툭 튀어나온 코와 그에 대비되게 푹 들어간 눈은 새파랗다. 명백한 색목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마저도 낯설어하는 세상에게 발을 맞춰 중원식 이름을 짓기보다는 차라리 이름을 따로 짓지 않은 남자에게 호사가들은 그를 무명이라 불렀다. 그에게는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중원식 별칭인 별호도 지어준 모양이다만 그마저도 부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나칠 정도로 과분하다는 것. 그러나 그를 그나마 잘 안다는 몇 안 되는 자들은 그 허울 좋은 변명에 대해 일축했다.

 그거 오그라들어서 못 쓴다는 거요

 

 "날이 참 덥긴 하군요."

 

 무의식적으로 그는 유독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였다. 말끔히 뒤로 넘긴 머리를 연거푸 뒤로 쓸어넘겨 땀을 닦아내고, 아무리 부채질을 하더라도 한없이 남쪽 바다에 가까운 이곳은 내리쬐는 햇빛도 햇빛이건만 습도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 차라리 아주 거대한 찜통에 갇혀 천천히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스스로도 무명이라 자칭하는 색목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슬슬 어디쯤 왔는지 살펴보고자 주위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는 굳이 내공을 쓰며 이동할 이유가 없지만, 지금은 이제 슬슬 운용하는 것이 익숙해진 내공을 발 끝에 실어 크게 뛰어오르자 제법 거대한 6척에 가까운 건장한 몸이 깃털이라도 되는 양 위로 사라졌다. 무명의 그 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30척은 가뿐히 넘어갈 법한 아름드리 나무의 잎이 튼튼한 받침이라도 되는 양 밟고 주변을 살펴 볼 따름이었다.

 안력을 높여,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다소 환해졌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전혀 보이지 않았을 그 먼 거리지만,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저기까지 도달한다면, 이제 딱딱한 나무뿌리 따위로 배게를 삼고 하늘을 이불처럼 덮는 생활도 당분간은 안녕일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나을지도."

 

 얼떨결에 무림의 세계에 몸을 던지게 된 자신이지만, 아직은 그들 특유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를테면 내공을 쓰는 채로 먼 거리를 쭉쭉 이동해야 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랬다. 요컨대 무리해서 몸을 놀려야 할 이유를 크게 느끼지 못한 탓이다. 여행을 하던 중 동행하곤 했던 무림인들이 그런 고충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그의 등짐을 보고 빠르게 납득하였다. 검은색의 얄팍한 관짝처럼 생긴 그것의 안에는 자신의 무기이자 곧 악기가 들어있기에. 저도 모르게 그 목에서 무척이나 낮고 굵은 목소리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 어쩌다가 내가 악공 노릇을 다 하게 된 것인지."

 

 저들의 눈에는 한낱 색목인, 야만인으로 비하당하는 자신에게 심법을 포함한 무공부터 무기까지 건네준 그 노인. 온몸을 타고 도는 괴이한 '기'라는 개념부터 이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까지 순식간에 이해하게 되어버리는 기적의 댓가는 노인이 평생을 다뤄온 무공을 세상에 널리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공이란, 다름 아닌 악기를 이용한 것. 조금만 기운이 흐트러져도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악기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기에, 강철보다도 더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길쭉한 하프 비슷한 것이 설령 망가질 걱정은 아무리 달래도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바다가 낫겠다. 최소한 이 푹푹 찌는 곳이나 바다나 매한가지로 습기투성이라 악기가 뒤틀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계속 드는 바라면 적어도 몸을 쓸 일은 더 적은 바다가 낫지 않을까.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 나뭇잎 위로 뛰어오른 것과 똑같이 지상에 사뿐히 착지한 그의 발걸음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놀라서 턱이 빠져 의원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죽립을 푹 쓰고 등에는 검은색의 얄팍한 함을 멘 그 모습은 몇 장 길이의 거리를, 마치 접어서 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막상 입성하기 직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짐꾸러미에서 겨우 입만 드러내는 가면을 쓰고 난 뒤에야, 도시의 출입구에 서 줄을 섰다. 이곳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자신의 외양 때문에 얼마나 곤혹을 치룬 경우가 많던가. 그나마 이곳 생태계에 점차 익숙해졌기에, 어렵사리 하오문이라는 단체를 통해 지금도 생각하면 속이 시릴 정도로 비싼 댓가를 치르고 구한 가면을 쓰면 신기할 정도로 얼굴가지고 트집거리를 잡히지 않았다. 듣기로는 특수한 약품 따위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정교하고 요상한 가죽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지만, 그것이 지금의 처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문지기가 그의 등에 메달린 함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림인이오?"

 "그렇습니다만."

 "흥, 사고 치지 마쇼. 요새 당신같은 양반들 덕분에 힘드니깐."

 

 문지기는 그를 들여보내주면서도 마뜩찮다는 얼굴로 제 엄지를 들어 어깨너머로 가리켰다. 아니나다를까, 이곳 사람들이 사파라고 부르는 것이 분명한 왈패들이 껄렁한 태도로 저마다 허리춤에 검이나 도 따위를 매단 채 좌판 따위를 발로 걷어차며 윽박지르는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언짢아진 무명의 귓가로 저러다 그 도련님한테 뭔 피똥이나 쌀라고 와 같은 제법 저속한 말이 들려왔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옆구리에 검을 찬 채 이곳의 언어로 하늘이라는 글자와 승천하는 용 모양의 은색 자수가 크게 수놓아진 파란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벽력처럼 왈패들에게 달려들더니 고강한 무술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놈들에게는 검법도 보여주는 것이 아깝다는 듯 단정하게 묶은 긴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것은 각법이라고 하기에도 우스꽝스럽지만 그저 발차기,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 뿐이면 충분했다. 

 왈패는 자신들이 셋이라는, 수적으로 우위임을 믿으며 저마다 무기를 빼들었다. 혼자와 셋, 기껏해야 발차기와 날이 흉흉하게 선 무기. 누가보더라도 이 혈기 넘치는 푸른 무복의 청년이 불리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러나, 청년이 내뻗은 발이 왈패 한 놈의 입을 제대로 맞추기 무섭게 몸을 재빨리 뒤틀어 여전히 허공에 부유하던 나머지 발 하나가 순식간에 다른 놈의 관자놀이를 걷어 찼다. 두 놈이 눈 깜빡일 사이에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을 본 남은 놈이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갈! 어딜 감히 내빼는가!"

 

 그 인상만큼이나 호쾌함이 돋보이는 청년이 그렇게 외치고는 두 번째 왈패를 후려쳤던 그 발을 유연하게 하늘로 치켜세우고는 곧바로 그 정수리를 향해 내리 꽂았다. 차라리 장작을 패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이 청년이 가볍게 땅 위로 내려오고는 놈들에게 시달리던 좌판상에게 다가갔다. 코 앞에서 무림인의 기술을 견식한 꼴이 된 이 노인은 얼이 조금 빠진 상태로 청년의 괜찮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놀란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 것이 보였다.

 

 "이런, 어르신께서는 어서 쉬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아, 아유… 오늘, 오늘 장사가…."

 "추후 관아에 본 공자의 이름을 대시면 되오이다. 걱정은 하지 않으시길 바라오!"

 

 과연 귀티나는 도련님이라는 건가, 라는 생각으로 무명이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푸른 무복의 검사는 자신을 대 남궁세가의 삼남인 소청룡 남궁혁이라는 소개를 했다. 과연 그 이름이 가지는 영향은 상당했는지, 주위에서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은 채 웅성거리고 노인도 그 가문을 신뢰한다는 듯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정리한 채로 남궁혁이라는 도련님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구경거리가 끝난 사람들이 흩어지고, 무명은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영리한 사람이군.'

 

 당장 일차원적으로 생각했다면 그 자리에서 저 물건들을 사고 금방 돈을 지불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양이 제법 되었으니 일제히 산다면 그 금액도 제법 되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저 도련님과 헤어지면 그 돈에 눈독들인 다른 놈들이 이 장사꾼 노인을 습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관아에 들리라는 이야기를 함으로서, 추후 노인이 습격을 당하는 경우를 전면에서 차단해버렸다. 아무리 관과 무림의 일은 상호불가침이라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민간인 하나를 돕기 위한 것 아닌가. 저 정도의 융통성이야 관에서도 허락할 바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나서려 했던 무명도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에 발맞춰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떠나려 하였다. 그러나.

 

 "거기, 이상한 가면을 쓰신 분께서는 잠시 남아주시길 바라오만."

 "아, 이런."

 

 무명의 주위로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다음엔 이 놈인가라는 묘한 기대감이 어려있었다. 지목당한 그도 비슷한 이유에서 긴장한 채, 가면 아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채 가면 너머로 매사가 늘 자신만만해보이는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남궁혁은 불쑥 포권이라고 하는, 한 주먹을 다른 손바닥으로 감싼 채 앞으로 내미는 특유의 인사를 하며 말했다.

 

 "도움을 주려 했던 것, 감사합니다!"

 "…어, 예?"

 "본 공자가 오기 전에는 기세를 한껏 피워 올렸다가, 상황이 마무리 지어질 무렵 거두셨더군요.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는 남궁혁의 눈에는 무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호승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림이라는 생에 본의 아니게 뛰어든 무명은 이제는 이 익숙해진 눈빛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핑계는 여러가지지만, 궁극적으로는 강함을 추구하게 되어있는 이들의 섭리에 따라 대련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조만간 할 예정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곳은 처음이 분명할 것이 뻔하다며 남궁혁의 손에 이끌려 객잔으로 향해 있었다. 

 

 "자, 강호의 동도를 만난 것도 다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드시는 것은 전부 내겠습니다."

 "이, 이걸… 전부 말입니까?"

 

 무림에 와서 다양한 것들이 적응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무명이지만, 아직도 좀 낯선 것이 있다면 단연 식생활이었다. 맛 부분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야 낯선 환경 탓에 조금 꺼린 것도 있지만, 지금은 갖가지 향신료로 맛을 낸 종류는 그도 꽤 즐겨 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문제라고 하면 이었다. 지금 이걸 두 사람이서 전부 먹을 수는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상 위에는 열 몇 가지의 음식들이 순식간에 늘어져 있는 모습은 슬슬 익숙해져도 되건만. 그런 생각을 하며 무명은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진 젓가락질을 하며 적당히 먹고 상을 물렸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정말로 전부 먹는 것이 맞았는지 남궁혁이 제 앞에 있는 그릇을 싹 비우고 있었다. 연신 맛있다며 감탄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니, 더 안 드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원체 많이 먹는 편이 아니 됩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먹는 속도는 얼핏 표준적인데도 한번 젓가락질을 하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무명이 웃음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려고 조금 난감한 얼굴을 지었다. 식비가 엄청 들겠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애써 참고 있으려니, 차려진 순간만큼이나 순식간에 상이 치워지고 가면이 슬슬 갑갑한 기분이 들었던 무명은 실례하겠다며 일어났다. 자신과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이 남자가 부담스러웠던 탓이 맞았다.

 이후, 각각의 방으로 헤어진 뒤 무명을 맞이한 것은 오래간만에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 그리고 더없이 푹신한 침상. 직접 돈을 내고 누렸다면 그동안 이 도시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자신을 위한 포상으로 얼른 잠에 들었겠지만, 색목인은 그럴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이 강호에 자신을 무명이라 소개하고 있는 그, 카르나르 융터르는 남궁혁이라는 과하게 열정적인 사내의 박력에 연거푸 밀린 끝에 그 결과가 그의 돈으로 밥을 먹고, 이 최고급 객실에서 묵고 있는 셈이 되었으니.

 가면을 벗은 그는 그 꿍꿍이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으나 딱히 많은 대화를 하지도 않은 그에게 어떤 속내가 있을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당장으로서는 어떤 결론을 내린다 한들 전부 추측에 불과하다. 결국 침상 위로 몸을 던진 그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은 자고 나서 생각해야겠군."

 

 잠에 들기에는 어쩐지 아쉬울만큼 어둑한 밤이지만, 어쩐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예상을 문득 하며 융터르는 애써 잠을 청했다.


 새벽녘에 맞춰 닭이 울 쯤의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미 무림인 무명으로서, 이미 이모저모로 준비할 것은 다 하고, 심지어 가면도 쓴 상황이었다. 이놈의 기라는 것이 단순한 에너지 정도로만 생각했건만 신체 능력을 올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아예 생활습관도 지나칠 정도로 건강하게 바꿔주고 있었던 덕분이다. 어쩌다보니 하게 된 심법 따위의 구결도 정좌한 채 능숙하게 해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설명하지 못할 민망함에 슬쩍 웃고 온 정신을 집중하자, 객잔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산 속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궁혁의 것이다.

 

 "음…. 역시 수련할 적의 모습은 쉽게 보여주면 안되는 것이 규칙이랬던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무명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는 모를 검은색 함에서 길쭉한 하프, 여기서는 고쟁이라 부르는 새까만 악기를 꺼내 마음이 가는대로 천천히 연주했다. 처음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칼이나 창 따위를 휘두르는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믿지 않았건만.

 꽤나 듣기 좋은 소리가 연거푸 흘러나오는 것이 제법 만족스러웠던 그는, 선계로 떠난 스승을 잠시 떠올리다 순간 실수를 했다. 음악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이 괴이한 악기는 그 이름답게 내공을 실어 연주를 하면서도 집중을 잃지 말아야 했으나 그러지 못해 손가락이 살짝 그 예리한 실에 베인 것이다.

 순간 옛 스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상처 난 손가락을 이유로 수련을 농땡이 부리려 하자 그놈의 기를 이용한 방식으로 치료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 독특한 언성을 떠올리며 상처에 집중하자, 그 가늘고 깊게 난 흔적은 순식간에 메꿔졌다. 아직도 영 적응되지 않는 그 오묘한 기분에 손을 매만지던 그는, 남궁혁의 그 과할 정도의 텐션이 느껴지는 바람에 고쟁을 도로 함에 집어 넣고 식당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 좋은 아침입니다!"

 

 남궁혁이 한 손을 들어올리며 곧바로 그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수련을 했는지는 몰라도 맑은 샘물로 몸을 한 차례 끼얹은 것이 분명한 그 몸에서는 여전히 땀냄새 따위가 은은히 올라오고 있는채, 남궁혁은 어제 저녁처럼 제법 과하다 싶은 정도의 밥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기척이 저 멀리서 느껴졌기에 몰래 빠져나가도 되겠다 싶었던 무명은 별 수 없이 다시 그 손에 이끌려 널따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식사도 하지 아니하시고, 혹여나 급히 가셔야만 하는 일정이 있습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만 바다로 가서 배를 탈까 합니다."

 "흠." 남궁혁은 그런 답을 내놓은 무명을 바라보았다가 곧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당장 급하지 아니하다면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닭국물에서 두부 건더기를 건져먹고 있던 무명은 갑작스럽게 진중해진 그 청년의 얼굴에 당황한 속마음을 숨긴채 침묵을 지킨 채 남궁세가의 셋째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들뜬 분위기와 이 어마어마한 식사량에 시선을 빼앗겨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이 청년이 그리 행동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이다.

 과연 그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쌓여있는 빈 접시들 사이로 그의 작게 달달 떠는 손을 바라보는 무명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작게 숙인 남궁혁은 쓰게 웃다가 다시 말했다.

 

 "실은 이곳에서 멀다고 하면 먼 곳에 녹림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산적들… 말입니까?"

 "보통 산적이 아닙니다. 맹을 통해 들은 첩보에 따르면 녹림왕과 그 수하되는 자들 수백이 그 근방에 지금 진을 치고 있다고 하고 있다더군요."

 

 난세에 판을 치는 녹림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지금은 마교라 불리는 광신도들의 준동이나 전쟁도 하나 없다. 이런 애매모호한 평화로운 상황에 산적이라고 하면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그저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약탈 내지는 살인을 일삼을 뿐인 놈들. 외양부터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이 도련님으로서는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불쾌한 것이 분명했다. 쌉싸름한 차를 마시고 입 안의 기름기를 닦아낸 무명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반문했다.

 

 "혹시 저 또한 그 녹림을 상대하는데 힘을 보태달라― 이런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문이 자랑하는 무예가 있다 한들, 수백에 달하는 그 무리를 혼자서 맡을 수는 없지 아니하겠습니까?"

 

 고강한 무력을 지닌 한 사람이 수백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격의 차이가 턱없이 벌어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흔한 졸개들도 아니고 무려 산적왕이 있다고 하면, 그보다는 못해도 무공이 고강한 자들도 두루 포진해있을 가능성은 거의 사실에 준할 정도라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무공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모르지만, 무명의 눈에 보인 그는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추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인 산적왕과 그 부하들의 고강함에 대해 자신감을 잃은 모습이었다.

 무명은 그 부탁에 침묵을 제법 오래 유지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을 항구도시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어쩐지 그 부탁을 건네오는 눈을 마주보자 거부하기가 참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듣기로는 아예 영혼을 아주 홀려버리는 그런 것도 있다고 하건만. 그래서 무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다만 이 일로써 공자가 명성을 얻든, 부를 얻든 그 모든 수반되는 결과에서 저를 제외해주시길 바랍니다."

 "무명을 높이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사문…에서는 그걸 바라는 눈치였으나 제가 아직 감내하기에는 모자르다 생각되어서."

 "실로 겸허하신 분이시구려."

 

 무명의 그 말을 좋을대로 해석한 남궁혁은 자신 앞에 남은 접시도 깔끔하게 비우고는 잠깐만 기다려달라며 순식간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가 정말 잠깐이라고 표현하기에 적당한 시간 안에 자신의 짐을 전부 챙겨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짐이 그리 많지 않은 무명은 다시 등에 고쟁이 들어있는 함을 짊어메고 앞서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문제의 산으로 접어드는 동안, 무명은 자신의 선택을 곧바로 후회했다. 남궁혁 또한 한 사람의 무인임을 잠시나마 외면했던 것이 죄라면 죄겠다. 가급적이면 부탁받은 일을 서둘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축지법이라 부르는 그 독특한 걸음을 선보인 것도 어쩌면 죄목에 추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명의 뇌리에 스쳤다.

 

 "세상에, 그건 무당파의 고강한 도사들이 쓰던 축지법 아닙니까?"

 "아… 이건, 그― 비밀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남궁혁은 걷는 자신의 모양새와 정반대로 경공이라 부르는 방식이다. 한번의 발구르기로 몸이 몇 장거리를 튀어나가는 그 솜씨에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쓰는 무공에 대해서 그리 궁금해하지 않았던 무명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사문 아래에서 지내왔는지를 궁금해하는 남궁혁의 눈치를 애써 무시하고 에둘러 넘어갔다.

 아직은 아침이기도 하고 목적지는 깊은 산속이기도 한 덕분에, 몸을 움직인다 한들 어제처럼 불쾌한 땀에 절을 일도 없었고 내공을 요령좋게 사용한 덕분에 공연한 것에서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초상비의 묘수를 살려, 저마다 나무 꼭대기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나뭇잎 위에 올라온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차라리 성이라고 해도 좋을 녹림의 산채를 바라보았다.

 풀로 염색하여 제법 큰 깃발에는 입을 쩍 벌리고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거대한 호랑이가 그려져있고 그 아래로 지나온 나날을 연상하게 만드는 덩어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마다 몸에 난 상처들이 영광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듯, 시원하게 어깨까지 드러낸 민소매 가죽 조끼 같은 의상은 전형적이라고 해도 좋을 산적의 전형이다.

 

 "단순히 산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다들 기세가 형형하군요."

 "그렇습니다. 녹림왕 아래에서 무공을 직접 사사받은 자들이 보이실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공자께서는 저들을 치려 하시는 겁니까?"

 "저 쪽을 자세히 봐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말과 함께 남궁세가의 셋째 도련님이 한 쪽을 가리켰다. 깊은 곳에 자리한 것은 다름아닌 논밭이다. 안력을 조금 더 끌어올리자 이 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의 누더기나 다름 없는 옷가지를 입고 앙상한 팔다리로 밭을 매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근처로는 마찬가지의 꼴을 하고 있는 자들이 풀무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대장일의 결과가 그 근처로 아무렇게나 던져지고 있었다. 창과 화살, 도 따위다. 그 외에도 놈들이기에 할 수 있는 저열한 행동들이라면 하나도 거르지 않고 보이는 광경에 무명의 얼굴이 가면 아래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최근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을 정도로 산적들의 횡포가 심했으면서도 관은 저런 놈들을 토벌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고…. 정파무림은 아직 여기까지 이렇다 할 세력을 늘리지 못한 실정입니다."

 "그러면 공자님은 이곳을 오시게 된 이유가 단순히 의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 무성한 소문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헌데―"

 "이건 산채라기보다는 차라리 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만."

 

 무명의 감상을 들은 남궁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 체류하던 그 도시에서 관을 도와 치안활동을 겸하며 꾸준히 모아온 정보에 따르면 저들은 어떤 거대한 대의나 야망이 있어서 이런 거대한 성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약탈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일종의 거점을 만들기 위함일 뿐이었다. 열혈이라 불러 마땅할, 일렁이는 불꽃같은 눈빛으로 도련님이 중얼거렸다.

 

 "무기의 공급을, 말로 설명하는 것 조차 아까운 욕구를, 어쩌면 부족할지 모를 식량을. 전부 원활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고는 한다는 짓이 다시 무고한 사람들과 상인들을 약탈하는 것이라니."

 "어떤 대의도 없는 겁니까?"

 

 한숨소리만이 돌아왔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뜻이 무엇인지 선명하다. 잠깐 어색하리만치 조용해진 틈을 타, 두 사람은 다시금 저 성채같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산적 수백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산채를 경비하는 인력들도 제법 되었다. 무턱대고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순간 맞이할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 그러나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심각한 얼굴로 고민 중이던 두 사람이 황급히 몸을 날려야 할 이유가 돌연 발생하고 말았다.

 산채의 그 좁은 입구를 발로 걷어차 제 몸집보다 배는 큰 장정들을 나가떨어지게 만든 분홍빛이 살짝 도는 무복과 제 몸집만한 중검을 휘두르는, 이제 막 약관도 안 되었을 여성. 앞머리를 대나무 따위로 돌돌 만 것이 다소 특이할 뿐인 그녀가 휘두르는 그 묵직한 검격에 이미 산적 여럿이 쓰러지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조무래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소저! 구해드리겠소이다!"

 "어? 뭐에요?"

 

 아직 앳된 얼굴이 숨을 크게 고르며 다음 초식으로 이어지는 기수식을 취하다 급히 검을 거두었다. 한 청년과 한 중년이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모습에 자칫하다가 휘두를 뻔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입한 두 사람의 얼굴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한사코 피하고 싶었을 상황에 닥쳤다.

 

 "이런… 예상은 했건만." 무명이 순식간에 에워싼 놈들을 보고 한탄했다.

 "어? 어? 여기 이렇게나 산적들이 많았어요?"

 "아니, 소저, 그걸 모르고 오면 어떻게 하오?" 남궁혁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 아니 진짜 여기 그냥… 개패고 싶네."

 

 가까이는 제법 무공이 고강해보이는 놈들이 진을 치고 그 너머로는 활을 겨누는 놈들도 많은 상황에서 아무리 검막을 두른다고 한들 전부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두 분은 잠시 귀를 막아주십시오. 이유는 묻지 마시고."

 

 무명의 말에서 알 수 없는 박력이 느껴져 검병을 쥐던 손을 놓고 두 젊은이들이 귀를 막는 순간, 그의 등에서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고쟁이 순식간에 울음을 토해냈다. 세워서도 연주를 할 수 있게 함이었는지 날카로운 꼬챙이같은 것으로 세운 악기에서 그 현을 퉁기기 무섭게 무명의 목소리가 연상되는 낮은 울림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아니 이건…. 음공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우와! 나 음공 쓰는 사람 처음 봐요!"

 

 귀에서 손을 뗀 두 사람이 저마다 이 광경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귀를 막지 않은 놈들은 저마다 머리를 부여잡거나 심하면 아예 드러눕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음공치고는 과격한 그것에 당황해하는 두 젊은이들이 그저 눈을 끔뻑이자, 무명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우르르 몰려온 것 같은데…. 두 분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녹림왕을 상대하실 수 있겠다 믿겠습니다."

 "이 많은 놈들을 일제히 상대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냥 셋이서 같이 싸우면 안되요?"

 "두 분이 휘말릴겁니다."

 

 놈들 중 제법 고강한, 그래봐야 산도둑에 불과한 자들이 슬슬 정신차리려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무명이 재촉한 탓에 남궁혁과 여검객은 어쩔 수 없이 신형을 훌쩍 날려 산채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산적 중 일부가 여전히 제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잡으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그는 곧바로 다음으로 이어나가고 싶어도 두 사람이 아직 범위에 휘말릴까 선뜻 다음으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 곧 자신의 내공으로 귓가에 멤도는 윰률을 억지로 밀어내는 것에 성공한 녹림도 일부가 다시 제 컨디션을 찾아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사술을 쓰고 있어! 옆에 정신 못 차린 새끼들은 내버려두고 모두 쳐라!"

 "좀 드물다 싶으면 늘 그러는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사술이라고 하다니."

 

 햇빛에 닿은 칼끝이 예리함을 자랑하며 일제히 몰려들었다. 얼핏 마구잡이로 달려오는 듯 하여도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것인지 무턱대고 맞상대했다간 순식간에 피할 겨를도 없이 포위되게끔 그 노림수가 보였고 현을 퉁기려는 그 손을 노리고 날아오는 도풍에 몇 발자국은 연거푸 뒤로 물러나야 했다. 고쟁 끝에 매달린 꼬챙이의 가느다란 실선자국이 제법 길게 날 만큼 물러나도 놈들이 걸맞지 않게도 합격은 교묘하고 끈질긴 것이 융터르의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이대로 몇 발자국만 더 물러나버리면 성벽에 등이 닿을 상황에 이를 무렵, 손을 새의 발톱처럼 바짝 세운 그가 현을 일제히 거칠게 퉁겼다. 

 

 "다들 귀를 막아!"

 "놈이 또 사술을 쓴다!"

 "스승님이 들으셨으면 아주 경을 칠 노릇이지만, 뭐."

 

 처음과 같이 그저 고막을 뒤흔들어 내장까지 영향을 끼치는 줄 알았던 놈들이 아예 무기마저도 떨어트리며 귀를 막았지만 무지에 대한 댓가는 꽤 처참했다. 칼을 몇 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닿을 그 거리만큼 달라붙어 있던 놈들의 몸에 예리한 칼 따위로 몸이 베인 것처럼 깊고 흉측한 상처가 연거푸 터진 것이다. 더러 제대로 직격당한 놈들은 제 몸뚱이에 난 그 모습에 믿기지 않아하는 얼굴로 내려보다 곧 풀썩 거리며 쓰러졌다.

 그보다는 상황이 낫다고 해야 할 부류도 사실 괜찮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어, 깔끔하게 도려내진 팔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거나 몸이 겨우 목숨은 부지할 정도로 살갗이 너덜너덜하게 변한 이들이 제법 많았다. 남궁혁과 그 검객이 있었다면 놀랐겠지만 융터르는 막상 자신의 결과를 보고도 그리 만족스러운 표정은 되지 못했다.

 

 "이런, 아직은 수행이 부족한 것 같은데."

 

 스승님이라면 분명 이렇게 한 번 퉁겨서 수백명의 목숨을 앗았겠지만, 그의 주변에는 나름대로 동료라고 했던 자들이 그 죽음에 기운을 형형하게 드러내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아까처럼 마치 사냥감을 포위하는 것 같은 합격진 대신 거대한 짐승이 몰아치는 기세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차피 저 지랄맞게 큰 악기로는 못 피할거다!!"

 "그… 악기가 큰 건 맞긴 한데 말이지만…. 하, 설명해서 무얼 하나."

 

 융터르는 묵빛이 은은히 어린 그 도기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모습에 숨을 한 번 고른 뒤, 내공을 담아 발을 세차게 굴렀다. 얼만큼 해야 할 지 계산을 하고 내지른 것은 아니었기에, 그 바닥이 곳곳에 균열이 크게 일어났고 그 결과는 곧 확인 할 수 있었다. 달려오는 놈들 중 일부가 발을 헛디뎌 무너져 그 공세에 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무너지는 모습을 그저 뜬 눈으로 방치할 그는 아니었기에 다시 거칠게 뜯은 현에서는 서늘한 살기를 품은 소리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당한 공격을 다시 그대로 당해주지는 않겠다는 듯, 녹림도들이 저마다 무기를 휘둘렀다. 마치 병장기끼리 서로 부딪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의 공격을 파훼했다며 저들끼리 의기양양해 했지만 막상 실제로 그 공격을 날린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저들끼리 고개를 마구 돌리며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고, 개중 누군가가 '저기에 있다!'며 소리를 질렀을 때는 늦게 발견한 것을 탓해야만 했다. 어느 새 지붕 위에 요령좋게 앉아서 고쟁을 무릎 위에 얹은 융터르는 아까와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현을 놀리기 시작했고, 그 음악만 듣는다면 차라리 고급 기루에서 유명한 악공이 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놈들은 자신의 배때지에 부지불식간에 난 상처를 보고 당황했다. 익숙한 얼굴이 공격해왔을 적에 느끼는 배신감.

 

 "왜 갑자기…!!"

 

 은은한 내공이 실린 연주는 흔히 섭혼술이라 부르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묘리가 담긴 채였고 그 범위에 해당되는 만큼 영향을 받은 자들이 이성을 잃고 입에서 거품을 문 채 지금까지 서로를 형제라 부르던 자들을 있는 힘껏 베고 찌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그 굵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사술이지요." 

 

 그러나 여유를 부릴 사이는 없었다. 살기가 가득한 도풍이 순식간에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피하기 무섭게 그가 있는 지붕 위로 지금까지의 놈들보다 더 실력자인 놈들이 여럿 다가왔다. 다섯에 달하는 그들의 면면이가 조금 낯이 익다 싶더니, 산채를 염탐할 적에 녹림왕의 친위대를 자처하던 놈들이다.

 저마다 무슨 채의 대주라느니, 방주라느니 떠드는 것에 관심이 없던 카르나르 융터르의 그 모습에 무시당했다 여긴 그들이 묵빛 도기가 서린 무기를 저마다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것을 피하기에는 너무 주어진 시간이 짧았던 그가 내린 선택은 이랬다. 불쑥 앞으로 내민 고쟁과 여러 자루의 칼이 맞닿자, 하고 차라리 종 따위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쯧. 사문의 물건인데 이걸 이렇게 망가트리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이 미친 놈이! 니가 그걸로 맞받아낸거잖아!"

 "아니 그러니까 누가 피할 겨를도 없이 공격을 하랍니까?"

 

 놈들이 움찔거린 틈을 타 몸을 잽싸게 일으킨 융터르가 퉁명스럽고 뻔뻔하게 말을 하자 아예 친위대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며 저마다 쥔 칼을 더욱 세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세만 본다면 아예 산 마저도 반으로 가를 것 같았지만. 그는 고쟁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로 내공을 실은 발로는 그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 내고 손은 현을 다시 거칠게 뜯었다.

 

 "당황해하지 마라! 아까와 똑같은 궤도로 날―아아악!!"

 "한 곡만 연주 할 줄 아는 음악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한심해하는 목소리, 그리고 확실히 음이 아까와 달라지면서 날아오는 그 살의가 가득한 검기도 달라졌다. 제대로 얻어 맞은 놈은 지붕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지고,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튕겨내는데 성공한 놈들은 공격을 파훼했다는 기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지붕 아래로 여전히 융터르에게 홀려 서로 치고박고 싸우느라 여념없는 조무래기들에게 쏟아진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휘두를 수는 있을까 의심되는 그런 거대한 무기로 휘두른 것 같은 흔적을 남긴 채, 지상이 점차 피로 물드는 모습이다.

 순식간에 형제를 잃어버렸다며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놈들이 그를 무슨 수라도 써서 잡겠다고 기세를 한껏 피워올리며 덤벼오기 시작했다. 섭혼의 묘리를 담은 음악을 연주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안 그는 제자리에서 연주하기를 포기하고 몇 번을 겅중겅중 뛰어올라 지붕 사이를 뛰어넘고 허공을 밟으며 부드럽게 몰려오는 공격을 여러차례 피했다.

 쥐새끼처럼 피하지말라며 윽박지르는 녹림 무리들은 그 흉내도 내지 못한채 그 아래에서 나름대로 원거리 기술이랍시고 도기를 실은 검풍을 휘둘렀지만 그것도 그리 훌륭한 방법은 못 되었고, 그가 내려오기만을 바라며 내지르는 헛손질에 가까웠다. 그렇게 내공을 마구 쥐어짜내버려 식은땀을 질질 흘리는 놈들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로 융터르가 다시 사뿐히 내려왔다.

 

 "단순히 산채라고 하기에는 아예 한 성을 만들어놨는데, 얼마나 사람을 갈아가며 만든겁니까?"

 "뭔 개소리야?"

 "…모르면 되었습니다."

 

 이런 시설을 구축하기까지 저 산적들이 성실해서 일일이 손으로 벽돌을 빚고 쌓아 올렸을리가 만무하고, 그러니 필연적으로 민간인들의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 시간에 비례해 애먼 농민들, 대장장이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겠지만 그걸 의식했다면 나와선 안 될 답이 나온 것에 가면 너머로 카르나르 융터르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기습적으로 다시 현을 거칠게 뜯었다.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은 내공도, 체력도 바닥난 녹림도들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었고 그 광경이 어떤 결말인지 잘 아는 악공은 등 뒤로 살갖을 넘어, 근육과 내장까지도 갈갈이 찢어지는 그 고통에 찬 비명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먼저 떠나버린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뒤늦게 따라 가기 시작했다.


 "어! 여기에요 여기!"

 "겨우 죽지 않을 만큼만 패느라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남궁혁과 앳된 얼굴의 검사가 반겨주는 모습을 보며, 무명은 이 꼴을 녹림도들도 봐야 했다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그토록 믿어왔던 자신들의 강자가 잘해봐야 약관에 불과한 두 남녀에게 쓰러진 이 모습이라면 그 사기도 손쉽게 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쟁을 다시 검은색 함에 집어넣고 다가온 무명이 물었다.

 

 "힘드셨을텐데, 다치신 것은 어디 없습니까?"

 "에이 뭐! 하나도 안 다쳤는데요 뭘!"

 "그 말씀대로! 헌데 선배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어!? 가면 찢어졌다!"

 

 검객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면서 무례한 것도 잊은 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말았다. 무명이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가면에 손을 대보니 그녀의 말대로 곧 너덜너덜해진 감각이 손끝에 닿아버렸고, 그 행동이 가면의 수명을 더 갉아먹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바닥에 툭 떨어진 그것과 훤히 드러난 맨얼굴에 두 남녀가 저마다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럴수가! 저 색목인은 처음 봅니다!"

 "우와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소저, 그건 좀 말이 심한게 아니오?"

 

 이국적인 외모가 적잖은 충격을 주기라도 한 것이 틀림없다. 비록 두 사람이 힘을 합했다고 한들, 고수임이 분명한 녹림왕을 꺾은 실력자들은 어디로 가고 그저 낯선 것에 충격을 받은 젊은 사람들만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음공의 고수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그가 곤란해할 무렵, 놀란 부분이 다른 곳에 있었던지 남궁혁이 떠올랐다며 바로 이야기 하였다.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색목인인데도 우리 말과 글을 잘 하며, 음공이 뛰어난 고수가 방랑한다는 이야기―"

 "아! 나도!! 나도 들은 적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별호가… 가누라고 했었는데!"

 "그렇소이다! 가누! 들을 수록 눈물이 더해진다며 붙여진, 참으로 낭만적인 별호 아니오이까!"

 "아…."

 

 무명, 아니 카르나르 융터르는 아무리 들어도 도통 적응되지 않는 그 말에 두통이 일어 머리에 손을 짚었다. 자신의 본명을 발음하기 힘들어하던 이들이 대신 붙여준 별명을 반길 수 없는 것도, 어쩐지 그 발음이 자신의 이름 앞 두 글자가 연상되기 때문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심히 대충 지어준 별호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원래 살던 곳에서 부르는 방식을 따르자면 묘하게 애칭 비스무리한 느낌이었기에 든 거북함. 그런 자신의 반응과는 전혀 관계없이, 두 사람은 저마다 소문만 무성하던 그 가누를 만났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묵빛보다도 짙은 검은색의 함이 가누의 상징이었는데 저는 이것이 그저 우연의 산물인 줄 알았습니다."

 "저희 여기서도 다 들렸거든요, 그 뚱땅거리는 소리."

 "참 듣기 좋지 않았소이까? 그 마지막만 빼면."

 "그…, 여기서 계속 떠드실 생각이십니까?"

 

 이제는 아예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도 두 사람이 저마다 왁왁 떠들어대는 바람에, 융터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핀잔을 주듯 말했다. 은근슬쩍 단전으로 내공을 모아 도망치려던 녹림왕이 그 이국적인 얼굴과 제대로 눈이 마주쳐버리고는 어쩐지 쥐를 연상케하는 입매를 죽 늘어트려 헤헤 하고 웃으며 넘어가려 하는 모습에 두 사람이 마무리를 확실히 졌어야 했다며 저마다 한숨을 쉬었다.

 녹림왕을 관아에 넘기고 받은 포상금이 제법 두둑했다. 물론 다시 도시로 들어오는데 있어 융터르의 심히 낯선 얼굴에 경계심을 감추지 못한 위병들이 트집을 잡는 것을, 남궁혁과 검객이 애써 자신의 신분으로 보증하며 해가 되지 않으니 염려말라는 말을 몇 번이고나 하고 나서야 받은 것이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난 맨 얼굴이 부담스러워 혼잣말을 했다.

 

 "그나저나, 이거 가면을 다시 구하려면 좀 곤란한데."

 "역시 그 외양 때문이십니까?"

 

 남궁혁이 은근슬쩍 물었다. 아무래도 푹 들어간 눈과 반대로 툭 튀어나온 콧대는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니 그 우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어떻게 다시 복구하려고 해도 자신은 그쪽 방면으로는 잘 모르는 약품을 쓴 모양이라, 원치 않더라도 다시 하오문을 통해 접선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융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피면구의 원리와 비슷한 것 아니냐는 도련님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도로 가면을 돌려준 남궁혁이 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선배께서 혹여나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문의 실력있는 명장들이 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아! 늦었다! 저희 가문도 할 수 있거든요 그거! 인피면구가 좀 보기는 힘들어도 어지간한데서는 다 만들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솜씨가 뛰어난데는 역시 저희 가문이―"

 "잠시만요…. 어지간한데서는 다 만들 수 있다…고요?"

 

 융터르는 강호에 뛰어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의 대금을 치렀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도 떠올리면 여전히 속이 쓰린 수준을 넘어, 뼈아픈 그 금액을 저도 모르게 입에 올려버린 그의 목소리에 두 남녀가 저마다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왁왁 떠드는 그 말을 겨우 정리하자면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 가차없는 평가에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그가 신음섞인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그러고보니, 선배께선 앞으로의 여정을 바다를 통해 하실 예정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그 목적지를 안휘로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남궁세가가 왜이렇게 약아빠졌어요?! 거기 아저씨 본가가 있는 곳이잖아!"

 "본래 이런 고수를 만남에 있어 조금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는 법 아니오! 헌데 소저야 말로 아직 자기 소개를 안하셨소이다만!"

 "아? 그랬어요?"

 

 지금은 약간의 흙먼지 때문에 분홍빛이 살짝 바래진 무복과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대나무 따위로 앞머리를 돌돌 만 검객이 그제서야 포권을 취하며 다른 두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독고세가의 독고혜지라고 합니다! 강호는 초출이라서 아직 별호는 없지만 잘 부탁드려요! 그러니까 저희 가문에도 와주심 안될까요? 가―"

 "―알겠으니까 그 별호라는 것을 제발 부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에? 왜요?"

 "…그런게 있습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독고혜지는 가문에 이런 특이한 고수가 오는 것이 기뻤는지 연신 싱글벙글인 채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하고, 질 수 없다는 듯 남궁혁도 꾸준히 자기 어필을 하는, 시끄러운 시간이 흘렀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남궁혁이 헬쓱한 얼굴을 한 채, 겨우 선체 난간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 얼굴은 그 어떤 강적보다도 뱃멀리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옆에서 독고혜지는 그 남궁세가의 도련님의 처참한 모습에 연거푸 깔깔대며 웃기에 바빴다. 한편으로 아직은 어색한 새 가면의 감촉을 느끼며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쐬는 무명은 일행의 시끄러움에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어쩌다 저 둘에게 휘말렸는지를 생각하던 그의 귓가로 갑자기 선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적이다!!"

 "…차라리 육지로 떠나는 편이 더 나았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면도 벌써 등에 맨 함에서 고쟁을 꺼내는 모습은 이미 훌륭할 정도로 한 사람의 무인이 되어있는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이미 몸을 훌쩍 해적선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