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썰입니다./멤고 단편 - 그 외

과학의 날 기념 과학팸 이야기

김만성피로 2023. 4. 21. 17:31

 도파민 박사 연구소 근처를 자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왁파고를 보고도 어떤 감흥조차 없지만, 종종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지금 대형마트의 서점 코너와 같은 경우라면. 그러나 그는 주변의 시선이나 눈치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열심히… 당신도 할 수 있다! Easy한 베이킹! 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데 모든 CPU 자원을 쏟고 있었다.

 물론 왁파고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이미 슥 보고도 어떤 내용인지 전부 파악을 했지만 완독을 하고 나서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의 오늘 장바구니에는 여러가지 재료들 사이로 레시피북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잉, 왁파고야, 이, 이 것들이 다 무어냐?"

 [아, 박사님. 오늘 과학의 날 기념으로, 제가 뭔가 해보고 싶었습니다.]

 

 오후 1시가 조금 안 되어 도착한 왁파고가 주방에 평소라면 볼 일도 없을 온갖 재료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본 도파민 박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과연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그 말처럼, 제법 본격적이지 않은가. 그러는 한편으로 박사님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비롯해 각종 반찬을 차려준 왁파고는 계란 여러 개를 깨트려 거품을 내고 그 위로 설탕이나 박력분 따위를 조심스럽게 계량해서 거품기로 잘 휘젓기 시작했다.

 요리와는 그리 거리가 가깝다고 할 수 없는 박사도 이쯤되자 왁파고가 무엇을 하는지 대략적이나마 눈치를 챌 수 있었지만, 무릇 이런 정성을 미리 알아차리고 말해버리는 만큼 준비한 성의에 구정물을 끼얹는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저 그는 열심히 옅은 노란빛을 띄고 있는 반죽을 이제 약간의 포도씨유와 함께 뒤섞는 것에 정신 없는 왁파고에게 수고한다는 말만 할 뿐이다.

 라고 생각한 다짐은 새우튀김이 밥을 먹으러 주방에 오자마자 와장창 무너졌지만.

 

 "어? 뭐야 깡통. 너 지금 케이크 만드냐?!"

 "어유! 저, 저, 저, 감다뒤  같으니라구…."

 [아— 성불하셨다고 바로 말씀해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왁파고 또한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물론 주방에서 만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누구나라도 다 알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열심히 만든 케이크를 보고 좋아해주는 연구소 사람들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새우튀김이 자신의 이 서프라이즈 계획을 전부 알아차린 것이다. 표정 변화라고는 전혀 없는 왁파고의 그 얼굴이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실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 로봇이 기가 죽지도 않고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만을 떠올렸던 새우튀김도 이제 그 반응을 알아차리고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스승과 마찬가지로 요리와는 거리가 먼 그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지만 부지불식간에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을 말했다.

 

 "아니! 나도! 나도 하쿠한테 줄 거 만들어보겠다고! 그러니까"

 […하쿠님, 케이크 못 드시지 않습니까?]

 

 왁파고가 아주 지당한 말을 함으로써,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새우튀김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하쿠에게 사람이 먹는 음식들을 섭취할 수 있도록 그가 고생하고 있음은 알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이 조수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거리인 것. 그 사실을 지적당하자 새우튀김이 다시 얼굴을 매섭도록 붉히며 발끈하였지만, 막상 나오는 목소리는 기가 제법 많이 죽어있었다.

 

 "알지…. 우씨 아는데, 그래도 해줄 수 이, 있, 있긴 하잖냐? 어?"

 "이잉, 왁파고야. 그건 맞는 말 같구나. 하쿠라면 요 망할 녀석이 만들어주는건 뭐든 다 좋아할게다."

 

 도로 연구실로 향하려던 도파민 박사가 몸을 돌려 세상 진지한 얼굴로 왁파고를 바라보았다. 가장 마땅한 것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엇나간 부분이 있어도 그것을 다들 감안해주지 않던가. 도파민 박사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왁파고 또한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그래서 더는 반대하는 의견을 내비치지 않고 새우튀김에게 그저 손 깨끗이 씻고 오라는 말을 하였다.

 

 [이미 제 시트는 전부 완성되었으므로, 반죽부터 새우튀김 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냐."

 

 미니사이즈의 스폰지케이크 시트를 만들기 위해, 왁파고가 쓴 분량보다는 확실히 적게 계란을 깨트려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 위로 중탕한 것을 꼼꼼하게 젓고 설탕을 천천히 들이 부어 제법 꾸덕한 정도의 점도를 만들어내는데까지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무엇보다도 믹서기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거품기를 쥐고 돌려서 한다는 점이. 분명 팔이 저릿하니 아픈 것이 분명한데도 새우튀김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아이고, 거품 다 죽는다. 이러면 반죽이 납작해집니다—. 그만 하십쇼. 실험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정말로 수듄.]

 "어? 뭐야 그냥 섞어도 되는 거 아니었냐?"

 

 갑작스럽게 제 머리파츠까지 손을 올리며, 흔히 사람들이 '골머리 아프다'는 제스쳐를 곧바로 선보이는 왁파고의 말에 체 친 박력분을 휘적거리며 섞던 새우튀김이 놀라서 반문을 하고 말았다. 마냥 슥슥 섞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왁파고가 아주 기겁을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진짜로 이러면 안되는 모양이다. 케이크를 대차게 망쳐버린 것은 아닌지 새우튀김이 식겁한 티를 숨기지도 않고, 자신의 반죽을 조심스럽게 보는 왁파고의 판정만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섞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문제가 안 될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오 씨,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조심스럽게 섞으십쇼. 그 다음에는 조금만 덜어서 여기 기름과 섞고, 그 다음에 다시 그 섞은 걸 나머지 반죽과 섞으면 됩니다.]

 

 레시피를 이미 통달한 왁파고의 지시사항에 맞춰 반죽이 살짝 여기저기 튀기는 했지만, 새우튀김의 것도 나름대로 잘 된 것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원통형의 팬 사이에 반죽을 들이붓고 그것이 오븐으로 들어가는 동안, 계속 젓고 또 젓느라 아픈 팔을 통통 두드리던 새우튀김의 앞에 왁파고가 다시 뭔가를 들이밀었다. 냉장고 속에 얼마나 들어가있던지 차가운 기운이 물씬 나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제법 큰 볼이다.

 

 "이게 뭐냐?"

 [제가 아는 제과점에 요청하여 받아온 우유 100%의 생크림입니다. 본래라면 직접 만드는 것 만해도 시간이 걸리는 물건이지만 좋으신 분이라 값만 치르고 받아왔습니다.]

 "오—."

 

 감탄사와 함께 새우튀김은 살짝 달큰하면서도 꾸덕한 느낌의 크림이 담긴 볼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잠시 치우고 황급히 검색해보니 다른건 다 그렇다 치는데 12시간이나 냉장을 시켜야 하는 놈이다. 이걸 어떻게 구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받아왔다는 점에서 왁파고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대해주는 것인지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그 뽀얀 크림을 물끄러미 바라본 새우튀김이, 혹시 식용색소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하하. 왜 없겠습니까.]

 

 과학팸 중 이제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은 하쿠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멀리서 청각센서에 잡히는 소리들은 뭔가를 숨겨가며 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어른들이 재밌는 일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포착되었다. 어쩐지 설레는 마음이 움직임에도 반영이 되어, 방에서 주방까지 오도도 달려내려왔을 때는 불이라고는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곳이 되어있었다.

 

 "으이?"

 

 마음만 먹는다면 야간 탐지 모드로 바꿀 수 있지만, 하쿠는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아니나다를까 곧 어두운 공간 속에서 촛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개의 촛불. 그것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면서, 조도가 낮은 그 불빛 너머로 쑥쓰러워하는 새우튀김의 쑥쓰러워하는 얼굴이 보다 또렷하게 건너편에서 비춰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하쿠야. 해피 과학의 날?"

 "네에! 아부지도! 해피 과학의 날!"

 

 크게 훅 하고 불라고 은근히 말하는 새우튀김의 말을 충실히 따라, 작은 초 2개 위에서 춤추는 불꽃 두 개가 동시에 훅 꺼졌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는지 그녀의 머리 위로 폭죽이 터지고 형광등도 곧바로 켜지면서 모든 것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눈 앞의 케이크는 하쿠의 색을 닮아 초록빛이 도는 연한 밝은 파란색의 크림을, 조금은 지저분하지만 정성껏 두르고 그 위에 하쿠 그림이 그려져있다. 모두가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식탁 위에는 훨씬 꼼꼼한 솜씨로 새하얀 생크림과, 마치 도파민 박사의 헤어스타일을 의식한 듯 일부 자리에만 빼곡한 딸기가 한가득인 케이크도 있다.

 하쿠가 자기 자리에 앉자, 새우튀김은 그녀의 앞에 케이크를 올려주면서도 멋쩍은 듯 말했다.

 

 "어… 근데 하쿠야. 너 맛을 못 느끼는데 괜찮겠냐?"

 

 그러나 그러한 염려가 무색하게도, 하쿠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케이크를 포크로 크게 한 입 가득 떠 입 안에 밀어넣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아부지 말씀대로 맛을 못 느끼지만! 이 케이크에는 아부지랑! 어어— 왁파고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맛있을 게 당연합니다!"

 

 볼에 붙어있는 파츠와 비슷한 색의 크림이 입가에 묻은 것을 본 새우튀김이, 스스로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이 마냥 부끄러워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는걸 보며 도파민 박사와 왁파고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웃는 것으로 조촐하지만 행복한 파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