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썰입니다./합작 참여 모음

2024 크리스마스 합작)향수병을 치료하는 황당한 방법

김만성피로 2024. 12. 28. 18:07

 문득 권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이미 어둑해진 사위로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알았다. 쌀쌀한 바람이 그 때문에 움츠러들었다가 벌어진 목 사이로 한기를 스미게 했지만, 앞니 크기가 인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개의치 않았다. 그 뒤로 트럼펫을 든 곽춘식과 드럼을 케이스에 밀어넣은 단답벌레가 오늘 하루 동안 신세졌던 공연장에서 나왔다. 오늘의 크리스마스 이브 기념 공연은 꽤 표가 잘 팔려서 당분간은 안심이다.

 그들보다 앞서 이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 사이로는 캐롤송 따위가 흥얼거리고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듯 멀찍이 보이는 광장 한복판에는 어디서 구했을지 모를 거대한 트리 따위가 있었다. 온갖 장식물로 번쩍거리는 것이 밤새도록 빛을 낼 요량이다. 내일이 당일이건만, 이미 마음 한복판은 벌써 크리스마스 당일이라도 되는 분위기에 절어있던 권민에게 찬바람은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와— 하늘 뭔 일임까? 진짜 맑네."

 "인정."

 

 두 사람도 앞서 공연장에서 나온 친구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했고, 포르르 새어나오는 김은 이제 2개가 추가 되었다. 고향과 비교해 말할 것도 없이 거대한 도시인 이 곳까지 와서 음악가의 생활을 하게 된 세 사람이다. 권민은 그래서였을까 이 두 친구가 자신을 따라 하늘을 짤막한 말과 반대로 한없이 올려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악기를 구입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했던 시절,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이 몸을 혹사시키고서야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고 위안을 받았던 고향의 하늘이 유독 오늘따라 겹쳐보였다. 이 곳은 텁텁하고 꽉 막힌 공기로 가득한 곳이라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했던 곽춘식이 툭 내뱉듯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고향, 그립슴다."

 "그더게여."

 

 권민의 목소리도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그리움에 흐려졌다. 매번 호통은 치면서도 은근슬쩍 뽀얗게 흰 병우유를 세 병 주는 잡화상 할아바이나, 말뽄새는 천박하고 행동은 허당스럽기 짝이 없는 귀족, 매일 새벽마다 동네 호숫가에서 신선한 물고기를 낚아오는 아저씨 등등. 어느 하나 떠오르지 못하는 얼굴들이 없었다.

 그러나 추억을 회상하는 것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에취."

 

 단답벌레가 그 답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요란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희한한 재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였다. 늦은 시간인데다 추운 겨울밤을 있으나마나 한 방한 의류로 버티는 것은 꽤 어리석은 행동이었기에 세 연주자, 짬통스는 얼른 숙소로 돌아가자고 서로 입을 모아 움직였다. 세 사람의 크기도 각기 다른 발자국이 쌓여가는 눈 위로 흔적을 남겼다가 곧 뒤덮여졌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벽난로의 온기에 힘입어 잠이 들 시간이 되었다.

 

 잠이 안 와.

 

 다소 낡았지만 믿을만한 벽난로가 온기를 퍼트리는 조건으로 타닥거리며 잘 마른 나무 장작을 살라먹는 소리가 들려올 뿐인 고요한 숙소. 연주회를 마치고 나면 거의 하루가 다 가버리는 시간인 탓에 아무리 좋게 말하고 싶어도 깔끔하다는 것과 거리가 먼 집 안에서도 다른 친구들은 작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건만. 

 유독 단답벌레는 그러지 못했다. 고향 생각을 했다고 이렇게나 잠이 오지 않을 일인가? 조촐한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었고, 양을 어찌나 세었는지 가장 훌륭한 양치기가 될 수준으로 반복하는데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짬통스들도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공연을 쉰다. 그러니 밤을 새서 늦잠을 자버린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은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먹으려고 하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툭하는.

 단답벌레는 뭔 까마귀라도 있는가 싶어 쫓아낼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설령 바깥의 까마귀가 앉아있다 해도 나가기보단, 창문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머리 위로 둥지를 틀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까치집이 다가갔다.

 

 "응?"

 "에?!"

 

 까마귀는 까마귀인데 사람 모양 까마귀 같은 것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사람 모양 까마귀 같은 것은 없다. 그와 비슷한 이치로, 미라 따위는 없다고 믿어온 단답벌레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철회해야 할 듯 싶었다. 미라가 있다면 언젠간 사람 모양 까마귀도 발견할 날이 오지 않을까? 제 눈을 거듭 비비고 부벼봐도 보이는 것은 머쓱한 듯 눈가만 빼놓고 온 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미라였다. 뭔가에 매달려 있다가 미끄러졌던 것인지 미라는 창틀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도와달라고 목소리를 제법 크게 냈고, 그 탓에 다른 두 친구들이 듣고 잠에 덜 깬 얼굴로 창문 쪽에 달려왔다.

 각자 손 끝에 잡히는 붕대의 소름끼치는 감각은 잠시 뒤로 날려버리고, 일단은 3층 높이에서 볼썽사납게 추락할 뻔한 미라를 끄집어 올렸다.

 

 "으아, 아! 아!! 살려주십쇼!"

 

 미라는 자신의 손을 잡는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지자 더욱 바둥바둥 거렸고, 체구가 작은 세 사람이 겨우 낑낑거리며 그 사람을 끌어올려 자신들의 숙소 안으로 당겨오는데 성공했다.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셋, 자빠진 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으억!!"

 "…아픔."

 

 단답벌레만이 살짝 굼뜬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두 친구들은 그런 그를 부축할 정신이 없었다. 비록 모닥불이 은은한 불빛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코앞에 있는 것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명한 파란색 두 눈을 제외하면 살갗이 드러나야 할 모든 부분은 붕대가 대신 하고 있는, 검은색 상하의에 붉은 넥타이가 인상적인 외형의 사람이었다. 하물며 이토록이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걷어부친 두 팔에도 붕대가 칭칭 감겨있으니, 장갑 속에 있을 손가락도 붕대 투성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명백한 미라라는 점이다.

 하지만 할로윈은 벌써 애저녁의 일인데.

 그 사실을 깨닫자, 짬통스 세 사람은 일제히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가능한 이 미라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나마 담대한 편인 춘식이 다른 두 친구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 질렀다.

 

 "뭐, 뭐, 뭐, 뭐임까 당신?!"

 "아, 저요?"

 

 자신에게 묻는 질문임을 알면서도, 미라는 버릇인지 그의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연령대를 짐작할 수 있는 다소 맑은 목소리는 듣다보면 어쩐지 미묘하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런 미라가 이제 손가락을 바꿔 들었다. 검지에서 엄지로. 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미라가 자기 소개를 했다.

 

 "소피압니다!"

 "…아니, 누가 이듬 무더봤더여?!"

 

 살다 살다 언데드의 신상정보를 듣게 된 꼴인 권민이 황당해서 외쳤다. 그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지적에, 스스로를 소피아라고 소개한 미라는 왜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하나같이 우호적이지 않은지 그 이유를 생각하는 동작을 취하더니, 곧 붕대로 돌돌 감겨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 정수리를 더듬었다.

 

 "어, 어어… 아하!"

 

 아무것도 없는 붕대투성이 머리를 더듬고서야 깨달았다는 듯, 그는 이제 제 주머니를 더듬었다. 앞은 물론 뒤를 이상하게도 숙련되고 꼼꼼한 솜씨로 쑤셔대더니 곧 그 결과가 튀어나왔다. 워낙 검은색 옷 투성이라 상대적으로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익숙한 모양새의 빨강색 모자가 그 검은색 장갑 낀 손에 딸려나왔다. 제대로 보고 물구나무 서기를 해서 봐도 영락없는, 하얀색 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 산타 모자였다. 그것을 눈에 닿을 정도로 푹 눌러 쓴 소피아가 다시 엄지를 치켜 든 상태로 말했다.

 

 "산타 대행 소피아입니다!"

 "…구라."

 

 단답벌레의 짧고 굵은 한 단어에, 두 친구들도 입을 모아서 뻥치지 말라고 전혀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공교롭게도 고향에서 본 한 인형극을 떠올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을 받고 싶었던 괴물들이 산타클로스의 일을 가로채서 멋대로 움직이다가 온갖 사건사고의 주인공이 된다는 내용. 

 소피아는 그 반응이 꽤나 억울한지 좀 믿어달라고 뭐라뭐라 말했지만, 그의 항변은 짬통스 쪽이 아닌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끊겼다. 정확히 소피아가 엉겁결에 들어왔던 그 창문에서 똑똑 하고 명백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우, 소피아 님—! 대체 그 안에서 뭐하시는 거에요오…."

 

 창문 너머로 가장 먼저 시선을 돌렸던 권민이 "우어!!" 하고 괴상한 소리를 크게 낼 수 밖에 없었다. 창문 너머로는 소피아와 동일한 붉은색 산타모자를 쓴, 그리고 그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머리카락처럼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준 의상을 입은 마녀가 다소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빗자루를 탄 채 동동 하늘에 떠있었다.

 소피아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반색하며 황급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행동만 놓고 보자면 누가 집주인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겨울 특유의 한기 머금은 공기가 지금까지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던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소피아는 마녀를 향해 외쳤다.

 

 "비소 님! 비소 님! 잠깐 이리 와보십쇼!"

 "…어머, 지금 소피아 님 들킨거에요?"

 

 동료애라고는 먼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그보다는 차라리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목소리로 마녀가 말했다. 꽤 진심으로 즐거운지 마녀는 소피아의 내민 손을 잡고 짬통스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양 볼에 손바닥이 찰싹 하고 소리가 나도록 부딪친 그녀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나도 들킨거잖아요오—!!"

 "하, 하! 저만 죽을 순 없잖습니까? 같이 죽으시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놀리는 미라와, 그런 미라의 정강이를 까는 마녀. 짬통스는 순식간에 이 두 사람(?)의 페이스에 휘말려 도대체 자신들이 이 꽁트를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 망했다고 울상인 마녀는 뒤늦게서야 자신을 비밀소녀라고 이름을 밝혔다. 소피아라는 이름의 미라와 마찬가지로 산타 대행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짬통스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믿어줬고 그 모습에 소피아는 아니 왜! 왜 제가 말했을 때는 안 믿어주신겁니까? 라며 퍽 억울해 하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 억울한 외침에 대해서는, 비밀소녀가 인덕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미라의 머리 속을 더 어지럽게 만들어버렸다.

 

 "에… 그러니깐, 지금 두 분이 산타를 도와주는? 그런 역할이라굽쇼?"

 

 여전히 비현실적인 일 투성이지만 가능한 빨리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한 곽춘식이 제 까까머리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자세히 보니 여전히 창문 밖에 둥실 떠다니는 마녀의 빗자루 끄트머리에는 제법 묵직한 선물보따리가 매달려 있었다.

 

 "빼도박도 모타고 도둑인 둘 아랏는데…."

 

 이제는 잠에서 완전히 깨버린 권민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창문 너머 빗자루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미 잠이 깰 대로 깬 그였기에 안경을 쓴 지 오래였고, 그러니 그의 바디랭귀지는 명백히 앞이 안 보여서가 아니라 의심한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건 단답벌레도 마찬가지였다. 눈썰미 좋은 그는 권민이 유독 힘주어 말한 '도둑'이라는 단어에 마녀와 미라의 어깨가 움찔 거린 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뜨끔한 건 뜨끔한 것이고, 이 두 사람(?)은 진심으로 억울해 하였다. 자신들을 어떻게 본 것이냐는 등, 마치 벌집을 건드려 성난 벌마냥 웅웅대는 통에 말릴 틈이 없던 짬통스는 그래서였을까 창문이 아닌 문에서 나는 노크 소리에 오히려 반색을 표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명백히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이웃이 제발 잠 좀 자자며 끼어드는 타이밍이 아니던가.

 

 "아이구, 데동합니다…! 데동—"

 

 악몽이면 제발 깨어나서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이 가득해 웃음기를 머금은 권민이 문을 열면서 사과를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껄껄 웃는 소리로 무마하곤 하던 그의 목소리가 정확히 문을 연 이후로 뚝 끊겼다. 영문을 몰라서 미간에 물음표가 새겨진 두 친구들과 달리, 현관을 정면으로 마주하던 마녀와 미라가 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두 침입자가 반색하는 기색에 의문을 표하던 춘식과 단답벌레도 뒤를 돌아 현관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표정은 권민과 다를바 없었다.

 한때 성직자였는지 신부 복장 차림을 한 영락없는 좀비와, 주단으로 붉게 포인트를 줘 고급지고 화려한 복장을 한 거인 뱀파이어가 있었다. 곧 풀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권민이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음? 이거 우리더러 들어가도 된다는 뜻 맞지? 융터르."

 "글쎄요? 일단은 집주인에게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해봄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게 당신 규칙이잖습니까."

 

 심해를 연상케 하는 좀비의 나긋한 저음을 듣고 뱀파이어는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곧 거인에 준하는 키를 자랑하는 뱀파이어는 현관문이 온전하게 그의 모습을 담아낼 수 없었던 탓에, 그가 몸을 기울여 안을 바라보았다. 8자로 잘 다듬어진 콧수염과, 그에 반해 눈썹 한 쪽에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오래된 흉터가 있는 그가 안의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우렁우렁 목청을 높여 말했다.

 

 "어이, 들어가도 되나?"

 "걱정 하시는 부분이 대략적으로나마 짐작이 되는 바인데, 그 부분은 절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도시에 와서 여유가 생기면 종종 극장으로도 달려가던 권민이다. 음악에 꿈을 먼저 두지 않았다면 영화에 깊이 빠져들었을 그는 덜덜 떨었다. 재수가 없게도,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봤던 최신 영화는 무덤에서 스스로 일어난 좀비가 온 마을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던 탓이었다.

 

 "아, 이거 참. 누굴 뭐 식인종으로 아는 건지."

 "그래서, 들어가도 된다는거야—? 아니라는거야?"

 

 좀비는 억울해하고, 뱀파이어의 눈껍은 이제 시계탑의 10시 10분처럼 치켜뜨며 짜증을 냈다. 이 이상 심기를 거슬렸다가는 별로 좋은 꼴도 못 보겠다 싶던 권민의 눈에 그제서야 이색적인 것이 그들의 머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녀와 미라의 머리에 씌워진 것과 동일한, 흰 방울이 달린 붉은색 산타 모자. 권민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성큼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안에 있는 마녀와 미라가 반색을 했다. 새롭게 난입한 둘은 이미 자신들이 들키는 것은 전제로 움직인 것인지 마녀와 달리 별 다른 반응도 없이 대번에 타박부터 놓았다. 성직자 차림의 신부가 미간을 좁히며 그 사이로 제 검지를 긁적거리고는 타박을 놓았다.

 
 "아니, 소피아 님은 그렇다쳐도…. 비소 님까지 이러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선물 하나 배달하는게 그렇게 어려울 일입니까?"

 "아니이—"

 

 졸지에 혼나는 꼴이 된 비밀소녀가 부루퉁한 얼굴이 되어 소피아를 힐긋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소피아만 안 들켰으면 자신도 들키지 않았을 것인데 이건 그렇게 따지면 전부 저 미라 탓이 아니냐는 묵언의 항변이 가득했다. 오래 본 사이가 결코 아닌 짬통스들도 그 점은 확신 할 수 있었다. 

 그때 온기를 품은 손이 불쑥 한 마녀와 세 언데드 사이로 끼어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호기심이 강한 성격의 단답벌레였다.

 

 "들킴, 페널티?"

 

 하나같이 잘 어울리지도 않는 산타모자를 쓰고 선물을 나르는 이 네 언데드들이 그의 말에 눈만 슬쩍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선뜻 답해준 것은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폼이 생각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뱀파이어였다. 다만 답변해주려는 자세 치고는 퍽 불량해서, 얼핏 느끼기엔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낭만이 없잖냐."

 "아."

 

 황당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짬통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좀비만큼은 아니더라도, 뱀파이어의 중후한 목소리가 신빙성을 더해주는 효과를 품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기다리던 산타할아버지가 알고보니 자기 부모님이더라 같은 이야기는, 산타 할아버지라는 네임밸류에 대한 기대감을 상당히 식혀버리는 악효과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한편으로, 비밀소녀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에서 투덜거렸다.

 

 "아우, 진짜! 소피아 님 때문에 여기서 밍기적거리게 되고 이게 뭐에요오—! 이럴 시간 없는데…."

 "아니! 그게 제 탓입니까? 애당초 주차를 잘 해주셨으면—"

 "와, 딘따 따틴다."

 

 다시 한 번, 시계를 가리키는 마녀와 마녀의 빗자루를 가리키는 미라가 서로에게 목청을 높이려던 찰나, 권민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모든 시선이 앞니가 독보적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향했다. 


 나무에 앞으로 피우고자 하는 이파리의 색이 희기를 바라는 것인지, 하늘은 함박눈이 펑펑 내려 지붕은 물론 닿는 모든 것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순백의 세계를 검은 그림자가 여럿 긴 흔적을 남겼다. 마녀에게 감히 '짜친다'는 말을 한 죄로, 권민은 마녀의 빗자루 뒤에 매달려 덜덜 떨었다.

 

 "어우 증말! 왜 자꾸 떨어요?!"

 "으어, 하지만! 하지만!"

 "안 춥게 하는 마법을 걸었으니깐 쫌!"

 "으어아아—!!"

 

 권민은 겁에 질린 얼굴로 아래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발 밑에 디뎌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채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래를 보면 현기증이 일기 때문에 하늘을 오히려 올려다 보았다. 차라리 안정성면에서 따지자면 뱀파이어가 마편을 잡고 박쥐가 모는 마(?)차를 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들려오는 뱀파이어의 호방한 웃음과, 그에 대비되어 같이 앉아있는 춘식의 핏기 어린 얼굴을 보면 영 아닌 듯 했다. 그렇다면 좀비와 미라와 같이 움직이고 있는 단답벌레는 괜찮은가?

 의외로 좀비가 제일 앞서가고, 그 뒤를 미라가, 그리고 한참 멀리 뒤로 떨어진 자리에 단답벌레가 저마다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같이, 좀."

 "이야, 이거 소피아 님이 제일 체력이 약한 줄 알았는데."

 "좀비가! 좀비가 체력 운운하는건! 예?! 아니잖아요! 그거!"

 

 저주를 받기 전까지 도굴꾼이었다는 미라, 소피아는 눈밭에도 앞서가는 좀비를 보더니 자신더러 뭐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듯 뒤에서 거의 눈에 파묻히려는 듯 고꾸러지기 직전의 단답벌레에게 외쳤다.

 

 "업히십쇼!"

 "에?"

 "아 잔말 말고!"

 

 영문 모를 단답벌레가 미라의 이상할 정도의 박력에 업히자,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지 모를 미라의 소매에서 갈고리가 매달린 총이 튀어나왔다. 곧 미라는 이 도시에서 절찬리에 팔리는 거미를 모티프로 한 영웅 만화 속 주인공마냥 벽과 벽 사이를 스윙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좀비, 카르나르 융터르는 허허 하고 황당하다는 듯 웃으면서 제 어깨에 짊어진 선물 꾸러미를 다시 고쳐맨 다음 뛰기 시작했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다며 능숙한 스윙을 선보이는 소피아가 이상하게도 그 붕대 투성이의 얼굴 너머로 편해보이지만, 그 반대로 매달린 단답벌레는 거의 죽을 지경에 가까워보이는 것은 권민의 기분 탓이었을까?

 도울 사람이 순식간에 셋이 늘어서였을까? 마녀 비밀소녀는 처음 보았을 적과 달리 명랑하게 웃으면서 기분이 좋은 티를 숨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구가 작은 짬통스들이 열린 창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선물을 전달하는 게, 비밀소녀를 제외하면 덩치들이 제법 큰 언데드들보다는 더욱 빠르기 때문이었다.

  

 "이거, 어쩐지 옛날 생각 나는데…."

 

 고향에서 굴뚝 청소부로 일하던 곽춘식이 슬쩍 투덜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떨결에 이 언데드들에게 붙잡혀 일을 도와주는 꼴이라니,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싶은 탓이다. 적어도 산타 할아버지의 오랜 전통인 굴뚝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큼은 나았으니 망정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두 친구들 이상으로 옛 직업병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곽춘식에게 적응이 하나도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의 눈길은 원치 않게도 루돌프 역할을 대신하는 박쥐들을 향했다. 딴에는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살리자고 한 것인지, 혹은 산타 할아버지의 인상적인 그 순록인가 사슴 같은 것이 눈에 띄는 붉은 코를 가지고 있다는 설화 때문일진 몰라도 박쥐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전구들이 어딘가 하나씩은 꼭 붙어있었다.

 

 "문제 있나?"

 "아, 아님다…."

 

 박쥐들이 말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춘식의 눈으로는 그 박쥐들이 비참하니까 그만 봐라라는 기세를 숨기지 않았기에 그는 이제 마지막 선물만이 남은 집을 향해 움직일 채비를 마친 마(?)차 위로 다시 기어올라갔다. 저렇게나 덩치가 크고 무서운 사람이 모는, 마(?)차를 타느니 차라리… 거기까지 생각한 춘식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표정은 영 변화가 없지만 가느다란 와이어총을 건물 사이로 발사하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미라의 등에 업힌 단답벌레,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과격한 빗자룰 운전을 보여주는 마녀 뒤에 앉아 빗자루가 부서져라 그 막대기를 꽉 쥐고 있는 권민. 둘 다 바꾸자고 이야기를 하자면 차라리 바꾸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였다.

 

 "에?"

 

 선물을 줘야 할 마지막 집이라면서 박쥐떼가 모는 마차와 와이어 총의 갈고리, 그리고 마녀의 빗자루가 도착한 곳은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적막을 깬 목소리는 황당함을 이기지 못한 단답벌레가 가장 먼저 냈다. 곧 빗자루와 마차에서 각각 내린 권민과 곽춘식의 반응도 그닥 다르진 않았다.

 

 "딥이…."

 "왜 이렇게 깨끗해졌슴까?"

 

 곽춘식은 그 말에 평소엔 솔직히 돼지우리였는데라고 하고 싶었던 것을 참기 위해 제 혀를 제법 세게 깨물었다. 처음 계약 할 때부터 다소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이기에 대충 그러려니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리고 짬통스는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들이 선물을 이 집 저 집 나르는 동안, 어느 순간 부터인가 좀비가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스스로 장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뿌듯해하는 낮은 목소리는 신부 복장 위로 앞치마와 두건을 야물딱지게 차려 입은 좀비가 내는 것이다. 곧 멀쩡하게 들어오는 법을 모르는 것인지 나머지 언데드들도 창문으로 들어와 변하지 않은 것은 집 안을 훈김 가득한 곳으로 만드는 벽난로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마저도, 사실 귀찮아서 치우지 못한 잿더미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하지만 짬통스들은 기껏해야 이 임시 산타들이자 언데드들을 도와주면 콩고물 개념으로 작은 선물이나마 받겠거니 생각했지, 이런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누군가가 설명을 해주면 좋겠다는 그 간절한 표정을 정면에서 받아버린 것은 다름아닌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2m가 넘는 거한은 그 답지 않게 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앓는 소리를 짧게 내고는 말했다.

 

 "크리스마스잖냐. 선물은 받아야지."

 

그러면서 세 사람에게 불쑥 내민 선물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크고 작고 무겁고 가벼운 온갖 선물들 사이에서도 가장 작고 또 가장 가벼운 것을 받았지만, 짬퉁스는 그 봉투를 열고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서야 고향까지 갈 수 있다는 기차표, 그것도 왕복이었다. 

 짬통스라고 고향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차표는 워낙 비쌌고 거리는 하염없이 멀어서 작정하고 걸어가지 않는 한 며칠은 꼬박 걸릴 수준임을 생각하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중하고 값진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꼬리에 물방울이 슬쩍 맺힌 그들을 향해 마녀는 살갑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 주기 싫으셔서— 안 울게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하셨대요—"

 "우어, 아, 아아, 안 울었거든요!?"

 

 권민이 급히 손등으로 제 눈가를 문지르며 항변하는 사이, 단답벌레는 다소 특이한 점을 확인했다. 기차표가 왕복인 것은 맞는데, 떠나는 일자는 바로 내일인데 비해 거의 2주일 뒤에나 도시로 돌아오는 표였던 것이다. 단답벌레가 그 부분에 집중한 것을 알아차린 미라가 곧바로 설명해주었다.

 

 "어어, 곧 있으면 또 새해도 오고 그러잖습니까? 그러니까 푹 쉬고 오시면 됩니다."

 

 마치 자신의 말을 믿으라는 듯, 미라는 장갑 낀 제 손을 엄지손가락만 내보이면서 뻔뻔하다고 좋을 정도의 태도로 말했다. 그게 말이나 되냐고 따지려던 춘식이었지만 곧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좀비가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간이 되었군요, 저희는 햇빛을 받으면 좀 많이 아픈 몸인 거 아시죠?"

 

 그러면서 그가 창문 너머로 희붐하게 밝아오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시간을 살펴보니 거의 4시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었고, 짬통스들이 받은 티켓 속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7시였기에 언데드와 짬통스 어느 쪽도 여유부릴 시간이 전혀 없었다. 서둘러 짐을 바리바리 캐리어 따위에 욱여 넣던 연주자들은 창문 너머로 마녀의 빗자루 뒤에 미라가, 뱀파이어의 마차에 좀비가 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손을 흔들면서 잘 가라고 창문에 달라붙어 외쳤다.

 

 "와, 정말 꿈 같네."

 

 손에 쥐어진 티켓 2장과 번쩍번쩍하게 잘 관리된 집이 아니었으면 믿지 않았을 춘식의 말을 동의한 두 친구 또한 조금 멀리 떨어진 역까지 향할 준비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에잉, 니들이 거 선물 도둑질만 안 했어도…!"

 

 명치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산타할아버지가 삐끗한 허리를 두드리며 네 언데드들을 탐탁치 않은 시선과 함께 말했다. 마녀, 미라, 뱀파이어와 좀비 모두가 그제서야 자신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산타 모자를 저마다 어딘가에 내팽개친 채로 산타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저 넷이 곧 크리스마스인데 자신들은 선물도 안 주냐면서 산타를 귀찮게 만들더니 결국 자신들의 것도 아닌 선물들을 들고 도망쳤고, 결국 잡혀서 산타 대행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불과 그저께부터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아니 뭐… 그래도 어쨌든 선물 잘 배달 해줬잖습니까."

 

 웅얼거리던 좀비의 말에 산타는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홰홰 치면서 얼른 가라고나 할 뿐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말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넷은 곧바로 산타의 면전에서 거의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그렇게 자신들의 아지트에 돌아온 넷은 자연스레 엉겁결에 마주쳤던 짬통스라는 세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곧 그들에게 건네준 선물을 떠올린 마녀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의문을 제기했다.

 

 "융터르 님, 근데 원래 그 선물말이에요 티켓은 편도 아니었어요?"

 

 좀비의 어깨가 뜨끔하고 순간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 외에도 동시에 미라와 뱀파이어까지. 마녀가 한 번 추궁하면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음을 잘 아는 세 언데드였기 때문에, 서로의 팔꿈치가 서로의 옆구리에 투닥거리며 먼저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짬순이었다. 

 결국 땅이 꺼져라 한숨을 깊게 내쉰 융터르가 말했다.

 

 "아, 아니… 그 소피아 님이랑 캘리칼리 님이 선물을 좀 더 빨리 전달하고 끝내겠다고…."

 

 입 하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 수준으로 평가받던 좀비는 그 답지 않게 중언부언하다 결국 모든 것을 고백했다. 미라와 뱀파이어가 과격하게 마차를 몰다가 어떤 공연장을 박살냈는데, 그게 짬통스들이 공연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인내심과 함께 설명을 듣던 마녀는 결국 선명한 파란 눈이 동그랗게 떠지다가 빗자루를 들고 야무지게 세 남성들을 향해서 외쳤다.

 

 "내가 못 살아! 증말!!"

 "이봐, 수리비 냈어! 냈다고!"

 "맞습니다! 2주일이면 수리도 끝날건데요 뭐!"

 "그래서 2주일 뒤 돌아오는 티켓을 산거에요?!"

 "그건 제 돈으로  샀습니다, 비밀소녀 님! 아니 전 빼주셔야죠! 난 하지도 않았는데!"

 

 창문이란 창문은 암막커튼으로 가려 어두운 방 안이지만, 멀리서 증기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려퍼지는 소리는 마녀의 빗자루 타작과 꽤 잘 어울리는 박자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