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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나쁜 놈 이야기 - I'm still standing(4)

김만성피로 2022. 12. 19. 13:05

*본격 연기파 배우 카르나르 융터르입니다.

*지난 화에서 저는 힌트를 조금 넣긴 했는데, 눈치 채셨을까요?


 시간을 보았다. 오후 4시 정각, 분명 전화 상으로 예약한 사람은 저 놈이 아니다.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근 그에게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노스페라투 호드의 악행에 두려워하는, 쉽게 말해 선동당해 겁에 질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 시간대에 오기로 한 사람도 겁에 질려있던 목소리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 저렇게 헤실거리면서 들어왔다는 것은, 자신의 상담스케쥴을 가로챘다는 의미이다. 앉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았는데 성큼 자신의 책상 맞은 편에 앉은 진범은 가면의 좁은 눈구멍사이로 누가 봐도 히죽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카르나르 융터르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것이 본인의 감정을 컨트롤을 거의 완벽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평소와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상담을 진행할 때 쓰는 용지를 꺼내 '이름' 란에 펜을 갖다 대었다.

 

 "혹시나 모르니 확인을 해두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으음... 이거 꼭 남겨야 합니까아?"

 "강제는 아닙니다만, 추후의 상담에 필요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상담의 특성상,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론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압박했다. 그만 이름을 밝히시지. 그러나 상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예 가명을 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실실거리는 웃음만 연거푸 흘릴 뿐, 이쯤되면 놈의 의도는 뻔하다. 이 대화의 목줄은 내가 잡겠다.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용지에 이름을 기입하는 곳에 '가면남'이라고 쓰고는 양해를 구하는 척 말했다.

 

 "우선은 형식의 완성도를 위해 본의 아니게, 내담자님을 가면남 님으로 지칭하게 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얼마든지 수정가능하니,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네에, 네에. 상관 없습니다아." 꼭 비꼬는 법을 이제 배운 초등학생처럼 가면남이 말했다.

 "흠. 그럼 이제 본론을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혹시 마음 속 어딘가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오신지, 여쭙겠습니다."

 "으으음... 어... 그게요오... 선생님이 불편합니다!"

 

  가면남의 말에 상담사는 짐짓 불쾌하면서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라고 생각할 법한 그 표정. 그러면서도 그는 배려심 넘치는 상담사를 연기했다. 종이에 '내가 불편하다?' 라고 적고 난 뒤에 그 펜을 든 손으로 계속 이야기하라는 손짓을 취해보였다.

 상대방은 그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 추가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에!"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었다. 분명 저런 화법은 상대방을 일부러 열받게 하고, 마음이 혼란해지는 틈을 노리는 사람들이 일부러 하는 유치한 것임을 떠올린 상담사는 그저 묵묵히 대화를 기다리는 연기를 할 뿐이었다. 과거 한 유명한 슈퍼히어로물 영화에서 나온 대사처럼, 시간도 많고 인내심은... 더더욱 많을 뿐이니.


 "혹시, 화 나셨나요오?"

 "아뇨, 상담을 하다보면 사실 선생님 같은 분은 오히려 젠틀하신 편이지요. 필요하시다면 말씀하는데 시간도 넉넉히 잡아드릴 수 있겠네요. 오늘 제 일정은 선생님이 마지막이라." 

 

 부러 자신의 감정을 찔러보는 진범에게 융터르는 그저 '선생님이라 다행입니다.'와 같은 미소를 은은히 띄울 뿐이었다. 이럴 수록 페이스에 말리는 것이 상대인 것처럼. 그래도 그는 자신이 적어둔 메모를 읽고는 상대방의 긴장에 발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사랑이 시작하기 위해서는 밀당이 필요한 것처럼, 놈의 페이스를 흔들어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분위기를 바꾸는 것처럼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 얼빠진 겉모습을 걷어내고 속마음을 말해보시지.

 

 "흠, 제가 불편하다...라. 혹시 제 어디가 불편한 건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QA 차원이라고 생각하고."

 "으으음... 제가요오, 그 요새 말이 많은 히어로 호드의 지이인짜 팬이거든요!"

  -진짜 히어로 호드 너무 좋은데.

 "그래서 초 장기 프로젝트라고 해야하나아...? 이야기로 따지면 이제 마악 절정에 다다르게 하려고 하거든요오."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영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은 누가보더라도 '나 일부러 네 신경 긁는거야'라고 어필하는 듯, 계속 느릿느릿하고 늘어지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얼빠진 대화방법과 내용은 별개로 해도. 반면에 지극히 정상적인 템포의 속마음이라. 

 

 "근데 선생님이요오 자꾸 제 계획을 방해하시잖아요오...? 그래서 불편합니다!"

  -히어로는 자고로 위기를 극복하고 떨쳐내서 일어나는게 멋있는건데...

 "이런, 제가 방해를 했다라... 근데 뭘요?"

 "이야기에는 반드시 위기가 있어야 하는데에... 선생님께서 그 위기를 만드는 분위기를 망가트리고 있으세요오!"

  -애써 조성한 위기 무드를 왜 계속 망치는거야?! 다 찾아봤어! 너한테 갔다오면 다들 얼빠져서는!!

 

 그 말에 상담사가 눈가를 찌푸렸다. 실제로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의 정도로만. 한편으로는 겉과 속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놀라기도 하였고. 적어도 그 의도는 본인이 주절거리는 지금 그대로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제가요?"

 "그래요! 아아, 물론 선생님의 행동도 무우울론! 호드를 위한 것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제 계획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너어어무 나빴어요!"

 -위기 의식을 초쳐버리면 더 극적인 상황이 연출이 안 되잖아!!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얼빠져선!!

 "음... 저도 호드 님에게서 한번 생명을 구원받았던 전적이 있던지라, 제 나름의 보은이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래서...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요오? 호드의 입장에서 선생님이 몇 안되는 아군인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큰 그림을 그리는데 구정물을 끼얹었어!! 용서 못해!!

 

 그 속마음까지, 확실히 놈의 목적은 자신에게도 그 암시를 심어줄 요량인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전히 겉으로는 헤실거리면서도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는 저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싶었지만, 호드가 마땅히 결착지어야 할 일을 자신이 가로 채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만약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감히 허락을 구하고 저 망할 놈의 주둥이를 좀 비틀어줬으면 좋았겠는데.

 놈이 입을 연다.

 

 "솔직히 인정하시죠오? 히어로 호드가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고 말하시는겁니다. 예?"

 

 자기 자신의 정신이 그 인위적인 달큰함에 어딘가 몽롱해지고 있었다. 아주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 생각해보면 저 놈과 자신의 능력 간 비교를 하면 자신의 것이 압도적으로 강력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걸 섣불리 드러낼 수는 없기에, 일단은 진범이 강제로 주는 몽롱함에 몸을 빼앗긴 것 처럼 나른한 어조로 상담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실은 아는 형사님의 말을 듣고선 그렇게 생각했는데... 역시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렇지요오? 그런 것 같지요오?? 그럼 한 번 연락을 해보시겠습니까?"

  -형사면... 그 키만 큰 놈?

 

 연기인지 아닌지 테스트를 하려는 행동이 너무 노골적인 나머지, 상담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 말에 홀린 척 핸드폰을 들고 형사에게 전화를 했다.

 

 -날세, 뭔가?

 "형사님, 두 귀를 막고 더 이상 언제까지 부정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히어로 노스페라투 호드가 범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지... 알고는 있나?

 "알고 있습니다. 거짓된 주장으로 제가 했던 말들은 모두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방금 깨우친 참이라. 그럼 실례하지요."

 

 당황한 형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전화를 끊고, 여전히 몽롱하면서도 자신을 감히 조종하려는 저 멍청한 놈의 말을 따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상담사 앞에, 진범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는 것 처럼 보였다. 상관없었다. 호드와 같이 있었던 것인지, 멀찍이서 기자가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었으니, 이렇게만 말해도 이 형사라면 눈치를 챌 것이다. 지금 자신이 누구와 같이 있는지 혹은 지금 어떤 상황인 것인지.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형사 놈도 끌어올 수 있으면 더 좋겠는데, 아쉽네.

 "혹시 다음에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상담사는 펜과 메모지를 내담자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는 다른 것은 노리지도 않았다. 사람의 정신은 건들 수 있어도 무생물에게 남긴 흔적은 건들지 못한다는 것을. 상대방은 맨손으로 그 펜과 종이를 만졌으며, 그 메모지 위에 전화번호를 적고는 "이 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며 돌려주었다.

 교묘하게 진범이 만지지 않은 부분만 집은 상담사는, 여전히 몽롱하고도 옅은 희열감에 찬 얼굴을 한 채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진범이 희희낙락한 채로 상담실이 위치한 건물을 떠나는 것까지 보고서야 다시금 두 친구에게 익숙한 비웃음을 띈 얼굴로 돌아왔다.

 

-44. 세 놈들 이야기 - 사생결단(4)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