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썰입니다./고멤 in the Z

2. 아스팔트 위의 사람들

김만성피로 2022. 12. 20. 18:09

1. 1주전의 나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습니다.

2. 좀비겜 좋아한다고 좀비물을 쓰고 싶었다 이거냐? 어!! 이 나쁜 놈아!!

3. 이건 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해지기 시작했읍니다.

4. 저번 편에서 살짝 어필한 것처럼, 이번에는 캘칼님과 단답님이 주인공입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고 쨍한 보랏빛을 내뿜는 막대가 점차 빛이 약해 질때까지, 하쿠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이끄는 순간까지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걸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거점을 더 쉽고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이끄는 두 남성의 한 쪽, 확실히 키가 작은 사람이 좀비로부터 끌어당기기 전까지 하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자, 켜 둔 손전등 위로 이불 따위를 덮어 아슬아슬하게 주위를 알아 볼만큼만 밝기를 유지한 작은 공간이 나왔다. 생필품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아, 두 사람은 여기서 생활했다기 보다는 임시로 거점을 만든 듯 하였다. 작은 남자가 드디어 하쿠의 얼굴을 본 것인지, 외마디 소리를 작게 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리, 조심."

 

 검지를 양 입술 위에 살짝 올려놓는다. 그저 때려잡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건만,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불빛도 알아볼 만큼만으로 유지해두는 것을 보아서는 불빛에도 민감한 것일지도. 하쿠는 연구실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박사님에게 이 사실을 꼭 전달해야겠다고 메모리에 확실히 기록해두었다. 그 때 키 큰 남자가 은신처로 돌아와서는 하쿠를 이제서야 제대로 보았는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용감한 거라고 봐야 하나, 아님 겁이 없다고 봐야 하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 겁이 없는 걸로 하자고." 누가 듣더라도 확실한 비아냥이 섞여있는 목소리가 이죽거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나서 바로 이어 말했다.

 

 "그, 우리가 구해준... 보답은 없는거니?"

 "어어... 저는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작은 남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미묘한 단어선정이 마음에 걸린다는 모양이다. 키 큰 남성도 비슷한 대목에서 신경이 쓰였는지 아까 전의 좀비에게서 뽑아 낸 것이 분명해보이는 볼트의 촉을 닦아내면서도 하쿠를 바라보았다.

 하쿠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은 물건들을 노리거나 혹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데에서 재미 들렸던 자들인데, 처음으로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런 경우에 대한 사례를 쌓을 수 없었던 하쿠는 결국 새우튀김이 기본적으로 설치해둔 사회화 프로그램의 판정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준다.


 "제 이름은 하쿠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쿠가 막상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고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야 시각센서가 있으니 어떻게든 구분을 한다지만, 연구소에 도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키가 큰 분, 키가 작은 분 입니다' 같은 설명을 하는 것은 안드로이드인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키가 큰 쪽이 먼저 답해주었다.

 

 "내 이름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다."

 "단답벌레."

 "다시 한 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부지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그럼 우리가 그 보상이란 걸 받으려면 잘 모셔다 드려야 한다 이건가? 좋아, 그렇게 하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능글맞은 태도로 예리하게 찔러 들어왔다. 하쿠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단답벌레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쿠가 인식하기에는 그 결과가 '아무 생각 없음'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캘리칼리가 작게 낄낄대며 말해주었다.

 

 "원래 저런 친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라. 그나저나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넌 괜찮은거니?"

 "어어.. 현재 시스템 점검을 했는데, 움직일 수 있습니다."

 "너 로봇이나 뭐 그런거였나? 겁도 없을만 했구만. 좋아, 그럼 이 아저씨들은 좀 잘테니까 문제 생기면 깨워주고."

 

 그 말을 끝으로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벽에 등을 대고 눈을 붙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고 고르게 숨을 쉬는 소리만 들렸을 뿐 좀비들이 불현듯 닥쳐온다던가 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밤을 보내고 하쿠와 두 사람은 해가 은신처 앞 골목까지 닿을 동안 조용히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박사님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 본 적이 없는 하쿠가, 두 사람간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신장의 차이부터 성격까지 다르더라도 너무 다른데 어떻게 같이 생존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것일까?

 단답벌레가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아주 짧게 답했다.

 

 "그냥." 

 "그냥, 이지. 어쩌다 갇힌 건물에서 같이 생존하기로 합의를 본 사이 라고 해야 할까. 별 의미는 없어."

 

 캘리칼리도 그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조금은 더 자세하게 말을 해주었다. 대형마트에 볼 일이 있어서 들어갔다가 그 안에 좀비 사태가 일어나서 두 사람이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자신은 주로 힘을 쓰고, 단답벌레는 머리 쓰는 일을 나눠서 맡아 지금까지 생존해오고 있었다며 말했다.

 간밤에 보았던 UV램프스틱의 경우도 단답벌레가 어떻게든 만들어낸 결과라며 캘리칼리가 으쓱거릴 때, 그 칭찬의 당사자가 매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그 문제의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보여주었다. 하쿠가 옛 연구소 생각을 하며 그 물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바깥을 한껏 경계하며 살펴보던 캘리칼리가 손짓을 하며 나오라고 했다.

 삭막한 골목. 그늘진 곳에는 어김없이 더 흉폭한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반대로 햇빛 아래에서는 더 썩은내가 심하고, 그만큼 몸이 삭아 캘리칼리가 휘두르는 마체테 한 방에 금방 쓰러지는 허약한 놈들 만을 꺾는데도 연구소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꼬마야, 집이 어디라고?"

 "저기 꼭대기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보이십니까?"

 "아."

 

 하쿠에게 낯이 익은, 기존 건물에 강철 따위를 덕지덕지 덧댄 건물이 보이자 그녀가 손가락질을 하며 두 사람에게 안내해줬다. 하쿠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드디어 도착했다 말했지만, 편안히 쉴 곳이 필요했던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단답벌레는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꼬마야, 저길 어떻게  가라고 하는거니?"

 "아?"

 

 하쿠에게는 딱히 어려울 것이 없지만, 문제의 대피소는 다른 건물들의 3층 정도 되는 부분부터 옥상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는 캘리칼리에게 하쿠가 이상할 정도로 늘어져있는 줄을 가리켰다. 다행히 그 주위로는 좀비가 없으니 망정이지만.

 

 "이걸 타고 올라오시면 됩니다!"

 "저 줄?" 단답벌레가 가까이 가서 미심쩍다는 눈으로 만져보았다.

 "그, 이걸 잡고 직접 타는건가? 아니면?"

 "아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쿠가 새삼스럽다는 듯 문제의 줄 근처에서 "여기 있었는데?" 소리를 거듭 반복했다. 망가진 배전함의 문을 열고 마치 이 팽팽한 줄과 한 세트라도 되는 양 주황색 몸체에 손잡이가 달린 그것을 세 개 꺼내고는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문제의 물건을 받아든 캘리칼리가 놀란 어투로 말했다.

 

 "등강기?"

 "그렇습니다! 이걸 줄에 끼워서어어--"

 

 시범을 보이려던 하쿠는 등강기가 곧바로 작동하는 바람에 곧바로 위로 솟구치듯 올라갔고, 그걸 본 다른 두 사람도 차례대로 그녀처럼 바로 대피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쿠를 잃어버리고, 왁파고가 그런 하쿠를 찾으러 떠난지 한나절은 충분히 지난 시간, 새우튀김의 다크서클은 그 어떤 때보다도 훨씬 짙게 물들고 있었다. 그의 눈은 깜빡이는 것만 빼면 줄곧 대피소의 입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밤 사이에 설마 하쿠가 올지 모른다며 지새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걱정하던 도파민 박사도 졸음기가 가실 정도로는 수면을 취했지만, 제자가 언제 쓰러질지 몰라 걱정이 되어 그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제자야, 네가 논문을 그렇게 밤새워가면서 썼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으이?"

 "...그러게요."

 "으..잉?" 평소와 다르게 순순히 답하는 제자의 말에 도파민 박사가 도리어 당황했다.

 

 어제 왁파고에게 그렇게 성질이란 성질을 냈지만, 사실 그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 누가 생각하더라도 하쿠의 아버지 실격이었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었으니까. 왁파고가 하쿠를 놓쳤을 때, 그는 그래서 더 길길이 날뛰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깡통이라며 비하했지만 자신보다 확실히 하쿠를 더 잘 지켜줄 수 있는 왁파고에게, 자신의 역할을 은근슬쩍 떠넘겼던 것은 아닐까 하고.

 제자의 심경고백을 들은 도파민 박사는 그 짙고 무거운 자괴감에서 그만 떨어지려면 하쿠가 돌아오는 방법 밖에 없으며, 그러라고 보낸 왁파고에게는 폭언을 했던 부분은 사과하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왁파고에게 자신을 이입했으면, 곧 자신을 용서하는 셈 아니겠느냐며. 그때 대피소의 철문이 통통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가벼움. 그 명랑함. 두 사람이 순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고, 또 동시에 철문을 바라보았다.

 철문이 열리고, 조금은 꾀죄죄하지만 여전히 밝고 명랑한 그녀가 멀뚱히 서 있던 새우튀김의 품에 폭 안겼다. "아부지!!"

 

 "하, 하쿠니? 너 진짜 하쿠 맞지? 응?"

 "다녀왔습니다!"

 

 새우튀김의 떨리는 목소리와 정반대로 하쿠가 예의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대피소 안을 낭랑하게 퍼지는 것을 감격해하던 도파민 박사는, 그녀가 혼자서 온 것이 아님을 깨닫고 동행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으이..? 혹시 하쿠가 데려온건가.. 아님 하쿠를 데려온건가..? 이잉... 아무튼 무슨 일로 오셨으요?"

 "굳이 말하자면 그 쪽 손녀딸 같은 로봇을 데려와준거지요."

 "응."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단답벌레는 대피소를 휘휘 둘러보다가 박사의 질문에 이어서, 캘리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우리도 험악한 말 쓰고 싶지 않으니까 좋게좋게 말하지요. 일행으로 받아주시는 편으로... 말입니다."

 "이잉? 이상한 사람들이구먼, 하쿠를 데려와준 건 고마운디... 우리가 댁들을 으뜨케 믿고 일행으로 받아준댑니까?"

 "이거."

 

 단답벌레가 자신의 가방에서 UV램프스틱을 하나 꺼내 도파민 박사에게 던졌다. 새우튀김이 "아이 왜케 애가 꾀죄죄해져서 왔어?!"라며 물수건으로 하쿠의 얼굴을 꼼꼼하게 문지르다가 그 쨍한 보랏빛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가며 말했다.

 

 "자외선?"

 "오래 지속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좀비들 한 두마리한테 던지면 도망칠 때는 제법 유효하거든요. 우리가 자재를 구해올테니, 여기서 그걸 만들고 곳곳에 설치하면... 거점 확장에도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으이... 설득력은 있구만."

 

 도파민 박사가 끄덕였다. 어차피 대피소를 지을때도 가능한 공간은 많이 확장해두는게 좋겠다는 새우튀김의 조언을 따라 남는 방이라면 충분히 있으니까. 새우튀김도 하쿠를 데려온 두 사람에게 야박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연구자들이 방랑자 두 사람에게 적당히 방을 잡아서 쓰고 종종 자재정도만 가져와달라고 부탁하자, 내심 긴장하고 있던 두 손님도 저마다 한 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기왕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게 되었으니 소개부터 좀 하지. 난 캘리칼리 데이비슨."

 "단답벌레."

 "두 사람 잘 부탁합니다. 난 새우튀김이고 여기 이 쪽은 도파민 박사님. 하쿠야 뭐, 두 분이 데리고 오셨으니 알테고."

 

 눈가가 발갛게 부은 새우튀김이 캘리칼리와 단답벌레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할 때였다. 혹여나 하쿠가 연락을 할까 싶어 계속 켜둔 무전기에서 왁파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사님. 하쿠님을 찾으셨습니까?]

 "이! 이잉, 파고야 하쿠는 무사하다, 그러니 너도 어여 돌아오너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왁파고의 말이 어딘가 불길하게 들린탓에 새우튀김이 무전기의 마이크를 박사에게서 빼앗아 들 듯 쥐고는 말했다.

 

 "야 깡통! 너 어디길래 그래!?"

 [현재 제가 위치한 곳에 구조요청자가 두 명 있습니다. 노인과 학생입니다. 혹시 구조해도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