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세 놈들 이야기 - 사생결단(끝)
정장차림의 노스페라투 호드는 긴장된 표정으로 한번 열어보았던 교주실의 그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때는 환한 불빛과 눈이 불편할 정도로 화려한 장식품들이 가득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달빛 정도에나 의지하는 그런 어두컴컴하고 황량한 방이 되었을 뿐이다. 그 달빛을 멍하니 보던 것인지 사람의 그림자가 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면을 쓰지 않은 그 얼굴은 형사만이 겨우 알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얼굴과, 흐리멍덩한 눈빛의 아직 어린 티가 그리 가시지 않은 태가 지금까지 호드를 괴롭힌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그래서 "이젠 가면도 벗고 있구만 변태 새끼가."라고 중얼거리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말을 듣고서야 두 사람이 겨우 그 진범임을 깨달을 정도였다. 그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더듬거렸다. 생각보다 유약한 목소리였다.
"아, 아힛... 아니 난, 호, 호드 님, 혼자서 오라고, 했는데. 어째서, 아,아-아저씨들 셋만."
가면을 벗으니 저렇게 사람이 바뀌는건가, 그런 생각을 했던 카르나르 융터르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넌 경찰들과 같이 오면 큰 일이 날 거라고 했지. 본인이 말한 것도 그 새 잊어버리나?"
"어디, 디서, 마, 말장난, 말장난을." 본인 말에 꼬투리가 잡힐 것이라 생각했는지 놈이 발끈했다.
"그 입으로 장난질을 친 건 당신도 마찬가지니까 피장파장이라고 해두면 좋겠는데." 싸늘한 어조로 융터르가 답했다.
"그리고, 우린 호두에게 미리 말해뒀거든. 일종의 공증인 정도의 역할만 할 거라고."
캘리칼리도 툭 끼어들었다. 형사의 눈에 띄는 덩치를 보고 범인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가리켰다. 마치 뒤늦게 그의 존재라도 알아차린 듯 했다.
"다,당신! 그, 그, 그으 공장에!"
"그래, 나야. 현장을 막아뒀더니 기자들을 선동시켜서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었던 걸 막았던 형사. 어차피 지금 지으신 죄도 이만저만한게 아니니 여기서 더 추가해도 꿀릴 것 하나 없잖나? 그러니 왜 현장에 되돌아오려고 했는지나 좀 묻자고."
"... 경찰들."
진범의 말에 형사의 입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파핫!'하는 헛웃음소리가 제법 크게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만약 그 때 현장 진입을 자신이 막지 않았으면, 경찰들도 어느샌가 놈에게 홀려 수사망을 호두에게 좁히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는 그런 생각에 새삼 이런 우연이 다 있는가 싶었다.
그 말을 묵묵히 들은 호드도 궁금한 점이 있었다.
"당신은, 히어로 호드를 위해서, 손을 더럽혔다고, 했는데...?"
"아, 아... 그, 그으 쪽으론... 금방, 차, 찾을 수 있었어. 히, 히이--이어로는, 한 명이면, 추,추,충분하니까."
"그래서, 그 아파트에서...?"
"다, 다, 다 들,었어. 노스페라투, 호드의 혀, 혈청으로, 약, 약을 만든다고."
기자는 그 말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괴인이 아니더라도 추후에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든 자신을 잡아 어떤 약의 재료로 삼으려고 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 놈이 융터르에게 말했던 '끔찍한 일을 막았다'는 말도 맞는 셈이다. 그런 진범도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직도 익숙하지는 않은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어느 샌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걸 막아,줬는데, 몰라, 아무도, 아, 아무도 몰라준다고..."
그 끅끅거리는 소리에 조용해진 실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목소리가 차갑게 끊고 들어왔다. 상담사였다.
"사이비교단 사건에서 중간 정도의 직위가 있었다 했는데, 어째서 금방 풀려난거지?"
"나, 난, 한 일이, 거, 거의, 어-어없었으니까. 처음, 처음만..."
"저건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네. 초반에 신도들 끌어모을때만 잠깐 활동했다가 나중가면 거의 무시당하곤 했다더군."
"아하."
형사가 찝찝해하는 목소리로 보충설명을 해주자, 상담사는 건조하게 '그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저랬다는 소리밖에 더 됩니까?' 라며 투덜거리고는 곧이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이면 노스페라투 호드를 노린거지?"
"나, 날 구해, 구해줬으니까."
진범은 그 때를 생각했던지 열기를 띈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교단에 이름만 올라가 있었을 뿐, 교주도 자신을 더 이상 쓸모없다고 내친 지 오래라 활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 경찰들의 수사에는 득이 되었던 덕에 풀려났던 때였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비포장도로가 있는, 도시 외곽까지 생각없이 걸을 때였다. 그때 자신의 이름이 불리우고, 괴상망측한 촉수 같은 것이 득달같이 달려오는 상황. 살려달라며 소리를 쳐도 장소 탓인지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아 그 것이 목을 한껏 조여와서 정말 죽는구나 생각을 하던 찰나.
살점 따위가 타는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꽉 매여오던 목이 갑자기 풀렸다. 꺽꺽거리면서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지켜주던 그 영웅. 당장은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도망치기 급급했지만 언젠가는 은혜를 갚을 것이고. 그리고.
호드가 그 말을 싹둑 잘랐다.
"그게 당신이었습니까?"
"뭐, 뭐야. 과, 관계자도, 아,아-아니잖아...?"
"관계자, 맞습니다."
기자는 그 때 부리나케 도망쳤던 시민이 지금의 악연이 되었다는 사실에 무슨 악연인지 생각하며, 지금껏 서있던 자리에서 몇 발자국은 앞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껏 구부렸던 등과 목을 똑바로 폈다. 키가 순식간에 20cm는 늘어난 것처럼 보이면서 그 안경도 벗어 정장 안주머니에 찔러넣는 것까지 보자, 진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가락질을 그 얼굴에 대고 했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은혜를 갚는다는게, 이런 뜻은, 아닐텐데요."
"아냐!! 난, 계-계획은 잘 짜, 짠다고...!! 분명 내, 내, 내--계획에...."
황망한 얼굴이 되어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던 형사와 상담사도 보일 정도였다. 곧이어 진범이 돌연 아니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극도로 흥분한 탓인지 목소리마저 전혀 더듬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말이 곱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건 내 계획이 아니었다고!! 아니 여기서 호드가 날 구해주는 것까지는 맞지만, 이따위로 허무하게 끝나는게 아니었어! 아니었단 말야!! 좀 더 극적으로 내가, 내가 모든 죄를 자백하고...!! 그런 다음에 호드 님이 날 구해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게!! 왜!!!"
"그 계획, 잘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제는 거의 오열하다시피하던 진범이 호드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었다. 씨근덕거리던 그 입에서는 "조금만 더 하면" 같은 소리가 실낱같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인 가운데, 진범의 오른손이 주머니로 향하는 걸 본 상담사가 바로 말했다.
"주머니에 그것, 기폭스위치를 누르실 생각이 만전인데 안 하시는걸 권해드리지."
"역시, 그렇게 나오는건가? 뭐 이도 저도 안 되었으니 싹다 죽자? 뭐 지금도 지으신 죄가 한 가득인데 더 짓는다라. 맘대로하게."
분노 때문일지, 혹은 억울함 때문일지. 표정이 한껏 구겨진 진범이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빼고는 곧장 바닥으로 후려치듯 내팽개쳤다. 상담사의 말대로 조잡한 스위치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 회로가 드러날 정도로 깨지고 망가졌다.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진범이 그 위로 발길질을 연거푸 했다. '필요없어' 라는 말 한 마디에 발길질을 한 번.
그렇게 스위치였던 것이 되어버리고, 그 발치에 잔해만 남아버린 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진범이 홀린 듯이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호드가 더 앞으로 나아갔다. 조심스럽게.
"이, 있잖아요, 여, 여기서 떠, 떨어,지면, 트,트,틀림없이, 죽죠? 그쵸?" 그렇게 뒤로 한 발자국.
"...." 호드는 말없이 더 나아갔다.
"가, 갑자, 갑자기 궁금, 해졌, 느,는데요. 그, 그때, 저, 저를, 왜, 왜애, 구해주셨어요?" 조금 더 뒤로 한 발자국.
"궁금하십니까?" 기자의 얼굴은 달빛이 드리워지지 않은 곳 때문에 진범이 그 표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목소리는 평온할 뿐.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읽을 수 없던 그는 "아니, 안 궁금해."라고 내뱉듯 말하고는 몸을 곧바로 뒤로 던졌다.
던질 뻔 했다. 진범의 손을 호드가 벼락같이 내달려 잡았기 때문에. 기자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본 진범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런 귀가 째지는 소리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드는 너무나 손쉽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전,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게 어떤 옷차림이든."
"그게, 그게 무-슨소리야...! 나, 내가, 밉, 미, 밉잖아! 죽게 내버려둬! 당장 이 손 놔!!"
악에 받쳐 내지르는 소리에 멀리서 지켜보던 형사는 묘한 달큰함과 부드러움을 느꼈다. 상담사 특유의 위압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신이 홀리는 느낌이 이제서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던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어 그 기분을 털어내려 했다. 반면 상담사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고, 그저 기자가 어떻게 대응할지만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기자는 손을 놨다. 놈이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발코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 표정은 여전히 그 특유의 곧고 견고한 심지가 부러지지 않은 채로. 다리에 힘이 풀려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은 진범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자를 올려보았다.
"전, 영웅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하게 되었지만."
"뭐?"
"저는, 좋은 놈,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때, 당신을, 구했던 것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뭐야... 그게....씨이...."
진범이 그대로 몸을 뒤로 젖히듯 쓰러져 씨근덕거리다가 곧 어린애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마다 자신이 생각했던 영웅이 아니라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형사가 한숨을 푹 쉬고는 저벅저벅 걸어와서 입을 열었다.
"좋아, 지금까지 네 놈은 중상해죄, 살인죄를 지었고, XX 화학공장에도 방화를 사주한 죄를 저질렀다. 또 그 따까리를 시켜 시체에도 훼손을 저질렀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수사방해시도도 많이 했지. 그리고 이 폐건물에도 폭탄을 설치했고. 지금 말한 이 모든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나?"
"...네."
"좋아."
형사는 미란다원칙을 읊었다. 어떤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동안 폐허가 된 교주실은 그 소리와 진범이 끅끅대며 우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다. 이제 수갑만 채운다면 다 끝났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상담사가 다가왔다.
"이 자는 자신의 목소리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순식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혹시 대응방안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그렇군. 그건 당장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캘리칼리는 새삼 놈을 체포하더라도 가장 골치아픈 부분이 떠올랐다.
"혹시... 뭐, 마지막으로 괜찮으시다면 귀 좀 잠시 막아주시겠습니까?"
"마지막이라... 더는 안 할 것처럼 들리는데?"
"아뇨, 형사님 앞에서만 안 할 겁니다." 융터르의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답에 캘리칼리가 '핫'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범은 자신의 얼굴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지는 것이 놀라 뭐하는 짓이냐며 더듬거렸지만 곧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와닿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로 모든 것이 끝났다.
경찰들은 한 신고전화를 받았다. 최근에서야 경찰들을 농락시킨 범인이 자수를 하는 내용이었다. 단순 장난전화인 줄 알고 처음에는 대충 대응했었지만, 곧 실제로 사제폭탄이 건물 이곳 저곳에 붙어있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어 해체반이 곧바로 투입되는 등의 소란이 발생했다.
심문을 하는 중, 범인이 자백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저 마음이 변했다고만 답했을 뿐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이런 이상한 답변을 하는 범죄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심문은 순탄히 넘어갔다. 그 이후의 일은 법정에서 이루어질 차례만 남았을 뿐이었으므로,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는 중대한 문제인 탓에 어느 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단순히 법정 싸움이 지루해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시는 언제나 그렇듯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런 흐름이 이제 마무리 지어지는 사건들의 자리를 슬금슬금 차지하며 다른 사람들의 뇌리에 흔적을 남길 뿐, 그것들도 또 언젠가는 잊혀질 예정이다.
그런 사건들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이상한 소문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하늘을 날아다니며 일반적으로 사람이 막아낼 수 없는 사고를 막아내는 영웅이 있다던가.
어두운 곳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으면 안된다고 한다던가.
총알을 수십, 수백은 맞아도 죽지 않고 적을 해치우는 사람이 있다던가.
언젠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려지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53. 에필로그 : 좋은 놈 이야기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