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산책 : 기나긴 밤의 끝
1. 분명 어제 새벽으로 더 안 쓴다고 했는데...
2. 왜 그랬지?!
3. 아무튼 예로부터 삼세번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국룰이랬으니까, 저도 이 룰을 따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깔끔하게 결말편 한번 두개재 이예이. 그리고 더는 진짜진짜로 안 쓴다 이거 아닙니까.
4.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좀 기이이이ㅣ일게 써보겠습니다.
5. 좋은 소재를 주신 뜨너 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그런 오후였다. 눈 앞에 캘리칼리 데이비슨과는 다른 의미로 거구의 사냥꾼이 기세등등해서 자신을 노려본다. 키는 살짝 작지만 대신 더 떡벌어진 어깨나 탄탄한 몸이 돋보인다. 은은히 눈 가장자리를 튀어오르듯 내뿜어지는 번개가, 말뚝과 은탄과 같이 의외로 전통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캘리칼리와는 전혀 다른 인물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런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이, 큰 부상을 입어, 대신 감시할, 노스페라투 호드 입니다."
"다쳤다고요?"
흡혈귀는 적잖은 의문을 담아 반문을 했다. 구울을 씹어먹어도 멀쩡할 사람이 큰 부상이라니. 그 의문에 답변하기라도 하듯, 이국적인 말투로 스스로를 노스페라투 호드라고 지칭한 사냥꾼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어떻게 다쳤냐는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엇보다도 약통을 거칠게 내려찍듯이 책상 위로 올려둔 것을 보면, 절대로 자신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님이 자명했다.
그런 위협적인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융터르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약통을 늘 보관해두는 서랍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연히 말을 건넸다.
"그러고보니... 노스페라투는 유명한 흡혈귀 영화 제목이 아닙니까?"
"저는, 말장난 할, 시간, 없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크라는 제법 사교적인 행동이었는데, 굉장히 경계하시는군요."
"어쨌든, 지금은 이 약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탄탄하고 거대한 몸에 어울리게 발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던 그는, 체구 탓에 제법 비좁은 출입구를 조심스레 나가려다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마치 말을 섞기도 싫은 상대에게 이야기를 해야하는 괴로움과 같은 얼굴인 그가 뜬금없이 '골콘다' 라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는, 그 답변을 듣기도 전에 훌쩍 떠났다.
어떻게 알았을까? 새로운 사냥꾼이 떠나고 난 뒤로도 그는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건 흡혈귀들 사이에서 유명한 전설이자, 일종의 경지이며 하나의 허구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그 내용은 제법 단순했다. 옅은 피가 아니더라도 태양 아래를 거닐고 불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경지이며, 짐승처럼 굴고 싶어하는 포악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
듣기만 해도 환상적이지만, 얼만큼의 실력을 쌓아야 하는지도 불명이고, 설령 도달했다 한들 목숨을 건 시험까지 있다는 진정 환상으로 밖에 남지 않은 그것. 어째서 사냥꾼이 대리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에게 말하려 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일텐데.
어쩐지 융터르는 캘리칼리가 크게 다쳤다는 사실에는 자신에게 전한 메시지가 크게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듣고 빠져나오려다 다쳤거나, 혹은 다른 흡혈귀 집단을 상대하다 다쳤다던가. 어쩌면, 도시에서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흡혈귀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 그 도시로 발걸음을 향했다.
"뭐야?" 그처럼 제법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도시의 입구 앞에서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글쎄, 저도 일단은 흡혈귀라서 말입니다만, 들어가도 되겠지요?"
"...그래 들은 적 있어. 자기 영역에서만 틀혀박혀 사냥한다는 장로 급이 있다고. 그게 당신이셨군요."
말이 좋아 도시지만, 폐선이 되어버린 지하철 노선을 따라 제법 볼만한 정도로만 꾸민 수준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그 앞을 지키는 흡혈귀가 그에 대해서 소문을 들은 것인지,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순식간에 존댓말로 바뀐 것으로 봐서는 생각보다 어린 친구라는 생각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걷고, 또 걸었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확신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어떻게든 이 도시의 정보를 알고 무작정 쳐들어왔으며, 여기서 문제의 단어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크게 다쳤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다른 흡혈귀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자 경계어린 눈초리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설마하는 또 다른 침입자인가 하는 그런 경계심이.
다행히도 그 따가운 눈동자들이 곧 거둬졌다. 그가 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도시의 지배자가 행차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탐탁치 않아하는 티를 역력히 드러내며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은둔자에게 말을 건넸다.
"몰락한 분파더라도, 분명 네 놈 또한 장로일진데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는가?"
"정치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사절이라 말입니다. 게다가 제가 발언한들, 들어줄 자가 있겠습니까?"
"주제는 잘 아는군.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만."
지배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하 도시의 입성을 허가하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서야 굳어버린 시간들이 다시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흡혈귀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물건을 팔고 구입하는 것을 계속했다. 그 모습은 어쩐지 지상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화폐도 지상의 그것과 똑같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융터르는 한때나마 존재했던 대부가, 자신을 저 자에게 소개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분파가 달라, 고유한 도시를 선포할 수 없어 신세를 위탁받아야했던 처지를 원망해하던 그가.
지배자는 의외로 현대적인 시설을 꾸려논, 낡은 지하철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꾸민 정성이나 그에 수반되는 비용을 생각하면 제법 힘께나 썼다는 느낌이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었다. 그때는 좀 더 엄숙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융터르에게 불쑥 지배자가 입을 열었다.
"놀랐다는 눈치군?"
"..."
"무대가 바뀌면 규칙 또한 바뀌는 법. 그러니 말하게, 왜 이 곳으로 돌아왔는지를."
융터르는 한숨을 쉬고서는 말했다. 혹시 이 곳에 단독으로 쳐들어온 사냥꾼이 있었냐고. 지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감정이 무뎌질대로 무뎌졌지만, 이것만큼은 속내를 감추기가 힘들었던 그에게 지배자가 다시 말했다.
"그 자에게 전하라 하였네. 자네와 친한 듯 하니, 자네가 골콘다에 이를 수 있는지 시험을 치루겠노라고."
"사냥꾼이 도시에? 입성을 허가한 겁니까?"
"그 자는 다르네. 우리의 삶을 존중하고 또 그 대안을 마련했지. 그가 속한 계파에서 제공한 약을, 자네도 먹지 않는가?"
"그 사냥꾼이 크게 다쳤습니다. 그 동료가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은둔하던 그가 전한 소식에 지배자도 당황한 것을 감출 수 없어했다. 분명 그의 엄명과 지배 아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는 사냥꾼을 건들지 말라고 했건만. 그의 당황은 곧 분노가 되었으며, 건들지도 않았지만 각종 물건들이 날뛸 정도로 그 기세가 심각해졌다. 지배자의 호위들이 융터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곧장 문을 박찰 기세로 쳐들어왔다가 주군의 열화와 같은 분노에 이기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런 기세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분한 말투로 지배자가 말했다.
"내 명예와 피를 걸고 감히 말하지. 내 명령 아래 그를 습격한 자는 없네. 그러나 의심가는 자가 있지."
"누굽니까?"
"오만한 놈들. 새 무대와 새 규칙을 거부한 자들이네."
마음같아서는 짓씹어도 모자르다는 말투로 지배자는 이어서 설명했다. 그가 나갈 때까지 지켜본 바, 그 누구도 사냥꾼에게 상처입히지도, 공격하지도 않았으니 도시에서 추방된 자들만이 그 노련한 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그리고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을 놀라게 할 말을 서슴없이 했다.
"만약 그 놈들을 발견하거든, 원한다면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대신해 온 그 사냥꾼과 협력하여 죽여도 상관없네."
"과격하시군요."
"지쳤네. 그 옛날의 영광? 흡혈귀가 인간들을 지배하자? 그럴 수 없음을 알았네. 우리에겐 공존이라는 길 밖에 더는 없어."
쓰게 말한 지도자는 그 반기를 든 어리석은 놈들을 전부 처단 한 후에 시험을 치루겠노라고 선언했다.
다시 약을 건네주러 온 호드는 제법 지친 얼굴이었다. 번개를 부릴 줄 아는데도 곳곳에서 피냄새가 은은하게 배인 것이 상처도 제법 입은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융터르가 지난번 도시의 지배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말을 건넸다.
"꽤 고전하시나봅니다?"
"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곧 눈이 커졌다.
"알고 있습니다. 캘리칼리 님을 습격한 자들은 도시에서 추방된 자들이라고. 저 또한 그에게 신세를 졌는데 알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동족포식이라도,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100년은 넘게 살았는데, 무슨 야심이 갑자기 생기겠습니까?" 그 말에 호드가 그를 노려 보다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이번 뿐, 입니다."
그래서 호드 또한 융터르와 같이 밤의 거리를 나섰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습격당했던 곳을 되짚어 가기 시작한 호드가 불쾌한 얼굴로 흡혈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캘리칼리 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제 구역에 돌아다니던 자를 사냥했을 때, 그에게 걸렸습니다. 그 인연으로."
"사냥?"
"글쎄, 관심없는 척하시더니... 저에 대해서 좀 많이 궁금하시나봅니다?"
흡혈귀가 그리 반문을 하자, 호드는 아차하는 얼굴이 되어 다시 정색하고는 음침하기 짝이 없는 폐허를 가리켰다. 근처에 나부끼는 현수막은 건설사가 점유권을 행사한다는 현수막이 낡아서 실낱같은 바람에도 펄럭이고 있었고, 각양각색의 공구들이 죄다 삭아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호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은 총 셋, 입니다."
"그걸 혼자서 감당하시려고 했다니, 안 물리고 용케도 빠져나오셨군요."
융터르가 비아냥거리며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그 바로 곁에 있던 호드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분명 방금 이 곳에 도착했건만 몇 시간, 아니 거의 하루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자신의 영혼을 뽑아 시계열 순으로 쭉 늘어놓는 그 괴이한 체험은 곧 발치를 기는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신발을 건드리는 것으로 끝났다. 속도가 유독 빨라 대응하기 힘들었던 놈이다. 놈의 등을 발로 강하게 짓누르던 흡혈귀가 그의 정신을 붙잡듯 말했다.
"이건 더 할 짓도 못되겠군요. 그나저나 심장은 안 찌르시는 겁니까?"
이렇게 쉽게 한 놈을 잡아도 되는 걸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은제 말뚝과 나무망치를 꺼내고 해야 할 일을 했다. 흡혈귀의 몸에 은이 주는 독성이 닿아 그 자리부터 불타오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융터르는 "역시 심장에 말뚝을 박혀 죽는 건 좀 꺼려지는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호드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할 때, 무수한 박쥐 떼들과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덩치의 늑대가 동시에 그들을 덮쳐왔다.
둘의 시선이 서로 맞닿기 무섭게 끄덕이고, 호드는 번개를 손끝으로 무수히 피워내 박쥐들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그 보랏빛 번개가 박쥐 한 마리에 닿기만 해도 곧 주위의 모든 놈들에게 확산이 되었다. 이내 곧 간신히 그 공격에서 벗어날 요량이었던지, 박쥐떼들은 한데 뭉쳐 흡혈귀가 되어 상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용, 없습니다!"
그 덩치와 걸맞게 흡혈귀의 완력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은 사냥꾼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발악하는 놈에게 낡은 슬레지해머를 한 손으로 휘둘러 아예 턱째 박살내버렸다. 그렇게 강한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해 하던 흡혈귀의 심장에도 똑같이 은말뚝이 박혔다.
한편 늑대를 상대하는 것은 융터르였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뱀과 닮은 그림자도 꺼내 상대했다. 그 짐승이 그림자가 바닥에서 떨어지려 할 적마다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양 덤벼들었지만, 교묘하게 다른 물건들에게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뱀을 숨기다 공격하길 반복했다. 그러자 늑대가 자신을 옥죄려는 그림자를 전력으로 내달리며 떨어트리고는, 곧 본 모습으로 돌아와 융터르를 공격하려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직한 그 돌격은 그저 안면에 주먹이 꽂히는 것으로 순식간에 무력화 되었다. 그리고 그 놈의 심장 위로도 말뚝이 박힘으로서, 모든 일이 끝났다.
순순히 그가 협조해주리라 끝까지 믿을 수 없어라 했던 호드에게 융터르가 물었다.
"추후에 캘리칼리 님 상태가 호전되면 면회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전 가볼 곳이 있어서. 그럼 이만."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정말 궁금증이 많으신 분이군요. 시험 치르러 갑니다."
지배자는 그의 성공을 의심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지하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며 시험을 치룰 장소를 안내해주었다. 도시 내에서도, 지배자의 처소보다 더욱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은 그저 관 하나 뿐이었다. 심지어 매우 오래되서 까딱하다간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하던 융터르에게 지배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저 관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으면 시험이 시작될 걸세."
"시험 내용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나도 모르네. 그저 이 시험에 도달할 만한 가치 있는 자들까지만 아는 정도지." 그 말에 융터르가 반문했다.
"당신은 시험을 치루지 않은 겁니까?"
"그 경지에 도달한 자는 아직까지도 없었네. 모두 실패했으니 말이야. 영원한 잠에 빠져 더는 못 깨어났네."
지배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조건마저도 터무니가 없다며 말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아주 간단했다. 선량한 인간이 될 것. 누군가를 함부로 헤치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고뇌하며 살아감으로서 세상에 끝없이 헌신과 반성을 할 것. 그 터무니 없는 조건에 덧붙이듯 지배자는 이어 말했다. "하늘이 내린 저주를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나?"
오래된 나무 냄새가 그윽한 관 안에서 융터르는 준비가 되었으면 눈을 감으라는 소리에 맞춰 곧바로 눈을 감았다.
익숙한 감각에 그가 눈을 떴다. 정확히는 익숙하고도 괴로운 감각이었다. 제법 고풍스럽고도 여기저기가 찢어진 옷차림의 융터르는 순식간에 여기가 어딘지 알아차렸다. 눈 앞의 상대는 기억보다 훨씬 추레했다.
"대부."
"또 다시 저항할 참이더냐? 네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정녕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단 말이냐?"
대부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자, 아직 대자의 신분이었던 그는 그 때의 고통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피가 몸 이곳 저곳을 역류하며 신체를 마구 들쑤시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약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융터르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과거로 돌아간 그것이 아니다. 100년을 저 추한 늙은이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그러니 이 고통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망령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한 번 고통으로 지하 감옥 바닥에 쓰러졌던 그의 몸이 천천히 일어나자, 대부는 당황했는지 다시 피를 통한 구속을 하려 했다. 어디까지나 하려고 했을 뿐이다.
"더는 그 더러운 짓, 참고만 있지 않습니다."
"뭐, 뭐냐!? 어찌 된 일인게야?"
"지금도 그렇고 먼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당신이 정말 증오스러웠거든." 그렇게 말하는 융터르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미래? 무슨 개소리를 하는게야, 어떻게... 어떻게?!"
비명을 지르듯 외친 그의 의문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려주지도 않은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쓰는 대자에게 방금도 유효타를 세게 맞은 탓이다. 감옥 바닥을 꼴사납게 뒹굴면서도 혈족의 부흥이라는 비원, 그 하나만을 목표로 살았던 대부가 발악을 하며 똑같이 덤벼들었다.
"네 놈에게 내 피를 더 먹여야겠다, 충실히 내 의지를 뒤따르게끔!!"
"닥쳐!!"
그 외침과 동시에 대부는 순식간에 영혼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인식하는 느낌을 받고 경악했다. 이 경지까지는 자신도 도달하지 못했던 건만.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이, 융터르가 그렇게 '과거의 자신의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대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배를 뒤흔드는 충격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대부가 바닥을 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뱀이 되었다. 융터르는 그 모습으로 공격을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인가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대부는 지하감옥의 바닥을 쓸어내리듯 기어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도망치는 것이 분명해, 융터르는 그런 추한 대부의 뒷모습을 울부짖듯이 소리치며 쫓았다.
"당신의 그 멍청한 망상만 아니었어도 난 평범하게 살고 죽을 수 있었어!!"
"네 잠재력을 누구도 몰라주었다!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래서 내 정신을 망가트리려고 사랑하는 사람들부터 내 먹이로 삼게 했나?!"
"그 자들은 네 약점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살려달라 비는 사람들을 왜 공격하게 했어!!"
"약해빠진 네게 걸맞는 사냥감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부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에 합리화를 했고, 그렇게 도망치려 한 곳은 태양빛이 가득 내리쬐는 바깥이었다. 뱀으로 변하면 태양빛으로부터 몸이 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에게는 잠시라도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는 몸이 곧 햇빛에 닿자마자 불에 타는 작열통에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흉측하고 거대한 뱀의 위로 뛰어올라탔다.
그 흉측한 뱀은 온 몸을 뒤틀며 융터르의 몸을 옥죄려고도 했고 입을 쩍 벌려서 아예 삼키려고도 했다. 그럴때마다 피가 점차 고갈되는 것도, 햇빛이 몸을 불태우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몸을 찢고, 또 찢으면서 울분에 찬 비명만을 계속 내지를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는 채, 뱀에서 다시 대부가 본모습으로 돌아오며, 불에 타오르기 시작해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자에게 비아냥댔다. 융터르 또한 몸이 완전히 불탄 지 오래여서 잠깐의 바람만 불어도 잿가루가 되어 날릴 지경이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했다.
"그렇게 정의로운 척, 착한 척하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볼까?"
"적어도 세상엔 해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사람들이 있거든."
"굶주리고 또 굶주려서... 짐승이 될 것이 눈에 훤히... 아아... 너무 훤히 보이는구나..."
"요새는 피를 못 마셔도 약으로 버틸 수 있으니 걱정은 관두시지."
"너는 결국... 내가 내려준... 가르침에서... 벗어... 날 수... 없을게다..."
"이미 벗어난 지 오래야. 최소한 당신같은 머저리가 되지 않도록 신경은... 글쎄 그럴만한 값어치도 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애써 남은 몸을 움직이다 뭔가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말뚝이었다. 어디서 굴러왔을지도 모르는 그것에, 한때 대자였던 그가 홀린 듯이 쥐고 간신히 죽어가는 흡혈귀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아직도 갸냘프게 뛰는 심장 위로 내리 찍었다.
햇볕을 쬐며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사냥꾼 다 죽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 자신도 흡혈귀가 되지 않았고, 도우러 온 호드가 놈들을 다 잡는데 성공했다는 말에 안심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문병을 온 호드가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이, 말하던, 그 자와, 같이 싸웠습니다."
"허? 자넨... 원래 죽기보다 싫어했잖나?"
"어쩌면, 좋은 놈도, 있을지, 모릅니다."
평소 모든 흡혈귀는 다 죽어야 마땅하다며 강경하게 굴었던 친구가 생각을 바꾼것이, 캘리칼리는 퍽 우스워서 껄껄거리며 웃다 깨진 갈비뼈 때문에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투덜거림은 덤이었다. 혼자서 웃고 혼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호드는 그런 캘리칼리에게, 흡혈귀가 문병을 오겠다던 말을 전했다.
"허! 한밤중에나 오겠구만?"
"누가 한밤중에 오겠다고 했습니까? 이상하군요, 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1인실 바깥에서부터, 절대로 이 시간에는 들리지 말아야 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여지없이 창백한 얼굴이 돋보이는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네 설마 시험을 통과한건가?"
두 사냥꾼이 놀라 각기 질문을 했지만,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저 살짝 웃고는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다가가 그 온기를 느꼈다. 전혀 뜨겁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