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What if: 도파민박사의 젊음젊음빔을 XX가 맞았다면?
세상이 희고 두꺼운 이불을 걷을 무렵 하늘에서는 분홍색 꽃비가 내렸다. 그 한순간이 지나자, 사방은 좀더 푸릇푸릇한 바탕에 갖가지 꽃이 알록달록하게 피는 시기가 도래했다. 명백히 봄이었다. 실험 중이던 도파민 박사는 문득 제 귀에 들려오는 흥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티파니가 신이 나서 부르는 것이었다. 오묘한 회색깔의 긴 땋은 머리가 까딱거리는 고개에 맞춰 괘종시계의 추처럼 좌우로 낭창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5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와아!"
"이잉, 청춘이구먼."
박사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그도 매끄러운 손을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만물에게 공평해서, 이제는 손등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끼어있었다. 문득 그는 이 사실이 사뭇 못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곧 심통맞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한때는 대학에서 잘 알아주는 남자였던 과거를 떠올리자면, 지금의 현실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도파민 박사에게는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도파민이도… 왕년에는 잘 나갔었는디…."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곧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영원히 시간을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며칠 정도만 제 몸의 모든 세포를 젊은 시절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무엇보다도 갑작스러운 충동은 그를 연구에 몰두하게 만들었고, 그 결실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꼬박 닷새에 걸친 연구때문에, 노박사가 염려되던 왁파고가 잽싸게 박사 곁으로 와서는 그의 연구 결과를 보았다.
"아니, 박사님. 또 듀엣총 만드신겁니까—"
"우요! 그런게 아니다, 파고파고야! 이건 이름하야 젊음젊음빔! 이 도파민이의 젊음을 되찾아 줄—"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 문제였을까?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운 연구의 대가는 극심한 피로였기 때문에 왁파고에게 제 발명품을 자랑하려던 도파민 박사는 열성적으로 제 발명품을 소개하려다가 그대로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고 말았다. 당황한 왁파고는 단조로운 기계음으로도 어떻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박사를 황급히 침실로 옮기고, 티파니도 그런 왁파고의 뒤를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이 연구소를 심심하면 드나드는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연구실의 천장 한쪽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저 홀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너울거리는 빨간 넥타이가 가장 먼저, 그 뒤에는 눈을 제외하고 머리를 죄다 가려버리는 새까만 복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읏차! 이게 박사님의 그 최신 발명품이군요?"
도둑질을 했다면 무릇 그 자리에서 빠르게 빠져나와야 하는 것은 예의였으므로, 소피아는 재빠르게 그 자리에서 떠나 본래 있어야 할 목적지로 향했다. 어쩌다보니 왁타버스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범죄 크루가 되어버린, 나머지 세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그리고 그가 떠난지 얼마 안되어, 기절한 박사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온 왁파고가 괴상한 소리와 함꼐 발명품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지만 도로 되찾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아니 소피아 님, 어디 갔다가 이제— 어머나, 그거 듀엣총 아니에요?"
소피아가 되돌아 온 것을 알아차린 것은 비밀소녀였다. 그녀는 늘 정상적인 경로인 문으로 아지트에 들어오지 않는 소피아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그의 손에 잡힌 것을 보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듀엣총이라는 발명품 때문에 박사의 듀엣 상대가 되어버렸던 전적을 떠올리면, 소피아가 결코 들고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발명품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비밀소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허, 다시 노래 고놀이라도 찍자고? 난 안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계절 하나 분은 앞서나간,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 스타일의 캘리칼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노래 고놀이 언제 다시 가능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셋의 반응은 그닥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그 당사자 되는 소피아가 듀엣총으로 인해 도파민 박사와 듀엣으로 노래를 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특히.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반대로 아직도 겨울인 양 검은색 목티를 입은 카르나르 융터르가 빈정거렸다.
"소피아 님이 감이 다 죽으신 모양입니다. 옛날 발명품을 가지고 뭘 돈이 된다고…."
"아이 뭔 소립니까?! 생김새가 이따위여서 그렇지, 이건 듀엣총과 비교도 안 되는 거라고요!"
"아니이… 그럼 빨리 저게 뭔지 설명을 해줘야 하는거 아니에요오?"
슬슬 비밀소녀의 인내심이 한계를 보이려고 해서, 소피아는 제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가 설명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총을 닮은 박사의 새 발명품은 그 외형처럼 방아쇠가 있고 소피아의 손가락은 그 위에 얹혀지듯 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점차 안쪽으로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달칵—!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빛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일제히 눈을 감고야 말았다. 어머나, 웬 빛이 누군가의 몸에 달려드는 것을 본 것 같은데… 비밀소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해버렸다. 그것이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문득 극심한 현기증을 느낀 비밀소녀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렸을 적, 놀이터마다 꼭 있던 회전 놀이기구에 멋모르고 올라타자 동네의 짖궃은 오빠들이 일제히 달라붙어 그것을 팽팽 돌렸을 때 어질어질함이 문득 떠오를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시야가 팽팽 돌았고, 그래서 눈을 떴는데도 10여 초는 가만히 멍하게 눈을 뜨고나서야 제 머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익숙한 얼굴들인 것이 보였다.
"어— 비소님? 비소님 보이십니까? 어… 이거 어떻하지?"
복면을 죄 뒤집어 썼는데도 곤란해 하는 눈초리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소피아가 그녀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운 채 손바닥을 휘적거렸다. 아으… 소피아 님, 그게 더 사람 심란하게 만든다구요오… 만약 그녀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금만 더 여유를 되찾았다면 분명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각각 융터르와 캘리칼리가 나란히 포진해있었다. 융터르야 뭐 사시사철 그 목소리만큼이나 진중해보이는 얼굴이니… 평소보다 조금 굳어있는 얼굴이여도 그러려니 하는 비밀소녀였다. 하지만 캘리칼리는 대체 왜? 괴물의 아가리에 다이빙해도 늘 태평할 사람이 딱딱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비밀소녀는 지금 무심결에 입을 열면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아 의문을 말로 표현도 못하고 갑갑해하였다.
"일단 이걸 좀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떨떠름한 얼굴의 융터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가 했더니 곧 돌아왔다. 어딜 갔던가 했더니 손거울을 들고 온 모양이다. 거울 속 제 화상을 본 비밀소녀는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쭈뼛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거의 튕겨지듯 일어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가장 그녀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소피아가 제대로 박치기를 맞은 꼴이 되어 뒤로 나동그라졌지만, 비밀소녀는 그 자그마한 사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고라면 자신이 가장 크게 입고 있으니까. 동글 넙적한 얼굴 위로는 채 가라앉지 않은 솜털이 일렁거리고, 오똑했던 코가 삽시간에 조막만해졌다. 그것을 깨닫자 어쩐지 말하는 것이 퍽 어려워진 것 같았고, 당황해서 지진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지만 닿는 시선에 비치는 손은 명백히 이 모든 사실을 하나로 귀결시키고 있었다.
어쩐지 혀의 길이가 좀 짤막해진 것 같은 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힘없이 빠져나왔다.
"흐에?!"
어쩐지 평소보다 남자들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더라니, 아예 융터르의 손에서 손거울을 빼앗아 제 볼살을 꼬집고 늘여트려보아도 아릿한 고통만이 남았다.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비밀소녀의 찹쌀떡같은 볼따구는 붉게 꼬집은 흔적이 강하게 남아 눈물을 글썽거리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난감함을 감출 수 없던 캘리칼리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허— 진짜로 소녀가 되어버렸잖아?"
원래라면 더범새의 스케쥴은 생각보다 제법 빡빡했어야 했을 터였다. 그것이 일괄적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도파민 박사 연구소에 가서 깽판치기, 비즈니스 킴의 nn번째 성의 보물을 털기, 지나가다가 노스페라투 호드에게 시비걸기 등등. 이 모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소피아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 비소님! 제가 잘못했다고요—!! 아악—!!"
사이코패스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소피아가 자발적으로 그 죄를 인정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두 중년의 시선은 자업자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피아의 복면이 반죽마냥 주욱 늘어나서, 그 틈바구니로 금발의 머리채가 잡힌 것을 볼 수 있었다. 소피아의 어깨 위로 무등을 타듯 올라간 비밀소녀의 작품이다. 짐작컨대 잘해줘봐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평균 입학 연령대의 외모가 되어버린 그녀가, 그 나잇대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함부로! 가꼬와서!"
소피아는 필사적으로 며칠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변명하긴 했다. 그러나 비밀소녀의 당장 모든 계획이 원치않게 취소되어 오는 분노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많았다. 주방으로 표표히 갔다가 돌아온 융터르는 캘리칼리의 최애 딸기 생크림 케이크 조각 한 접시와 제 몫의 커피를 들고와서 이 촌극을 구경했다.
결국 소피아의 복면이 거의 걸레짝에 준하는 상태가 되고서야 비밀소녀는 그의 몸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닌 팔자에 아동복을 입게 된 비밀소녀는 소피아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고서야 제 방으로 오도도 뛰어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다. 양 볼이 부루퉁해진 그녀는 소피아를 지나쳐 두 중년에게 말했다.
"저 좀 침대 위로 올려져여."
"어이, 비밀소녀… 지금 우—으흡?!"
황급히 손을 뻗어 캘리칼리의 입을 가로막은 융터르가 평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침대 위로 올려주고 빠져나왔다. 축 늘어진 복면을 어떻게든 끌어올려 제 얼굴을 다시 가리는데 필사적인 소피아를 향한 그의 눈초리는 떨떠름함 그 자체였다.
"아니 그러니까, 왜…. 에휴, 됐습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이 상황에서도 당당할 정도로는 뻔뻔하지 못했다.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던 캘리칼리는 진즉에 다 먹은 케이크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툭 내뱉듯 말했다. 평소처럼 주위 신경 쓰지 않고 제 데시벨 온전히 내던 것과는 조금 다른 태도였다.
"공주님 대우해주자고."
"에? 공, 공 뭐라구요? 공주?"
"…진심이십니까, 캘칼 님? 배그 합방 이야기가 아니고요?"
두 남자가 대번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자, 정작 발언한 캘리칼리도 평소답지 않게 머쓱한 얼굴이었다. 고멤 생활만 아니면 그 누구보다도 가장 거친 삶을 살아왔을 것이 분명한 남자가 합방이 있는 것도 아닌 마당에 어울리지 않게도 공주라는 단어를 언급한데서 오는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 발언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긴 했다.
"대놓고 하자는 소리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삐친거 달래주기라는거지. 그리고 언제 비밀소녀가 살면서 그런 대접 받아봤겠어?"
"그거 해루석 님이 어련히 해주지 않—아윽!"
소피아는 섣불리 발언한 댓가를 외발로 토끼뜀을 함으로써 갚았다. 정강이를 부여잡은 틈으로는 융터르의 구둣발 흔적이 남아있지만 당사자는 태연한 얼굴로 캘리칼리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발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말입니까? 뭐… 설마 잘때까지 춤추겠다는 그 집사들 마냥 행동하자는 겁니까?"
소피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다가도 융터르가 한 말에 한때 인터넷 상에서 유명한 밈이 되어버린 그 쇼츠를 떠올리고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해루석이 해도 오그라들판에, 그걸 자신들이 하자는 소리가 말이 되느냐는 의미가 다분했다. 실제로, 그런걸 해봐야 다른 고멤들이 눈갱을 외칠 것이라고 소피아는 속으로 장담했다.
그리고 캘리칼리는 최근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부쩍 길어진 머리카락을 북북 긁으며 당연히 융터르의 말을 부정했다.
"원하는게 있으면 해주고, 먹고 싶은게 있으면 같이 먹어주는거지. 설마, 내가 그런 정장이라도 입고 춤 춰야겠나?"
캘리칼리가 진지한 얼굴로 그러는 꼴을 상상해봤다가 저도 모르게 소피아처럼 웃음이 터져버린 융터르는 글썽거리는 눈물마저 닦아내면서 고개를 좌우로 겨우 저었다. 확실히 다른 남고멤들보다도 캘리칼리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다. 하지만 그걸 공주님 대우라고 하기에는… 융터르의 마음을 읽은 소피아가 속닥거렸다.
"저 양반은 장르가 다르다니까요, 융터르 님."
그 어떤 발언도 이보다 더 명확하고 논리적일 수 밖에 없었기에, 융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의도든 아니든, 슬그머니 캘리칼리의 의견이 반영되자 이제 다음 주제는 명확해졌다. 비밀소녀에게 누가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가? 소피아는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봤지만, 반대로 두 사람은 너무나 확고하게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저지른 놈이 책임져야지."
"맞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거 소피아 님이 문제 아닙니까."
처음으로 소피아의 한숨소리가 융터르의 진성보다도 더욱 낮게 깔렸다.
비밀소녀의 몸이 높이 하늘을 거슬러 올라갔다. 몇 초 동안 체류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땅으로 끌려내려오지만 그녀의 얼굴은 처음으로 순수한 미소가 떠오른 상태였다. 평소 남고멤들을 대상으로 여장을 시킨다던가 괴악한 분장을 시키려 했던 의미심장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네에 탄 채 그녀의 신발 뒤꿈치가 놀이터의 흙바닥을 거칠게 내리그어 밀어주던 캘리칼리의 다리에 튀었지만 그는 이런걸로 기분 상해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넌 하늘 잘만 날아다니면서 이런게 좋냐?"
"이거랑 이게 같나요—?"
다시 한번 비밀소녀의 등이 캘리칼리의, 평소보다 더욱 크게 느껴지는 손이 닿자마자 그네는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붕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 특유의 꺄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높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피아는 쩝 소리를 내며 작게 투덜거렸다.
"비소 님 저런 웃음 짓는거 해루석 님 앞에서만 본거 같은데."
"루석 님이랑 우리랑 비교가 되긴 합니까?"
"뭐, 하긴 그러네."
융터르의 상식적인 힐난에 소피아는 크게 반발하지도 않고 곧 수긍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작 그네를 타는 것만으로도 해루석을 만날 만큼 신날만한 일인가? 그보다는 평소처럼 비즈니스 킴의 거대한 성을 남김없이 털때가 더욱 신났던 소피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밀소녀는 어려져도 비밀소녀라는 걸까? 그네가 아예 꼭대기에서 뒤로 뒤집힐 정도로 높이 치솟았을 때, 비밀소녀는 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네는 곧장 아래로 훅 꺼지고 그녀만이 허공에 동실 떠오른 상태에서 놀랍도록 사뿐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이럴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비로소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으응— 그네는 이제 됐구여어— 이제 딴 거 하고 싶달까?"
본래의 팔다리보다 짧아진 탓에 원치 않아도 아장거리는 걸음걸이로 놀이터 바깥에 나온 그녀는 자신들을 향해 영 이상해하는 표정을 짓는 남성들을 올려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혀 짧은 발음이나 어린이 특유의 오동통한 몸매가 되었어도 비밀소녀는 비밀소녀였다.
"어머, 왜 구래여? 저도 이런거 조아하거든여?"
"…제가 아는 비밀소녀 님은 보석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봐온 것이 있는 탓에, 곧 죽어도 제 할말은 해야 하는 융터르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나름 소신을 지켰지만 그 하찮은 저항은 어느 곳에서도 통용되는 만고의 법칙인 '짬순'에 의해 곧바로 진정되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오동통해진 손이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았고 한참은 시선을 내려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융터르와 마주쳤다.
"캘리칼리 님이 그네 태워줘쓰니까아— 융터르 님은 책 읽어줘여."
"어… 무슨, 무슨 책이요?"
"암거나? 동화책이면 더 좋구."
어린이 특유의 더욱 선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썩을 대로 썩은 사기꾼에게 제대로 어필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유한 책 중에서는 동화책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은 급속도로 크게 한정되었다. 서점 혹은 도서관. 그마저도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성인의 체형이 될 그녀를 위해 동화책을 무리해서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온 비밀소녀는 제일 푹신한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되게 조용하다. 그쳐."
아무래도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들이 우루루 어린이 도서관에 몰려든 탓이 컸다. 경우에 따라 심약한 성정의 어린이들은 아예 울음을 터트리며 보호자의 품 속으로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결국 도서관을 독차지한 것은 의도와 관계없이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다.
캘리칼리가 뻔뻔한 태도를 고수한 채 양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난 애—새끼일 적부터 이 얼굴이었는데?"
"…."
지금처럼 얼굴에 흉터가 나고 콧수염이 난 어린이 캘리칼리라니, 비밀소녀는 문득 상상했다가 웃기기도 하고 좀 징그러운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홱홱 가로로 저었다. 약간의 소란이 있은 후, 융터르는 품에 동화책들을 제법 한가득 들고왔다. 어차피 하나같이 얄팍한데다 글씨가 큼지막하고 삽화도 들어가있는지라, 한 권을 전부 읽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비밀소녀는 각 책마다 담겨져있는 이야기에 일일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어린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듣기 좋게 일부러 평소보다 더욱 목소리를 높여, 그녀의 옆에 앉아 동화책을 낭독해주던 융터르는 문득 자신을 리코더로 머리를 때려 바닥에 때려눕히거나, 아예 천장 위로 처박아 올렸던 비밀소녀를 떠올리자니 위화감 떄문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한편 소피아는 손가락을 찬찬히 꼽아보니 이제 비밀소녀를 공주처럼 모시기에서 제 차례밖에 남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네, 도서관 그 다음은 무엇을 요구할까? 소피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런 시선을 비밀소녀는 알아차렸고, 그 불안을 달래듯 곧바로 마지막 요구사항을 말했다.
"으응, 이제 그러며는 저 놀이동산 가고 시픈데."
일단 이거만 마저 읽고요. 비밀소녀는 작아진 체구에 걸맞게 짜리몽땅 연필같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집 부모가 이 광경을 봤다면 남정네들이 어쩜 애를 이렇게 똑부러지게 키웠대요같은 소리를 절로 할 정도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고요한 어린이 도서관에 울려퍼졌다.
결국 오후 늦게 도서관을 나와, 이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놀이동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슬슬 질 무렵이 되었다. 하지만 무릇 이런 장소는 낮보다는 밤이 더 화려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색색이 LED로 기둥 따위를 빛내서 어둑해지는 하늘을 현란하게 빛내는 갖가지 놀이기구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신이나서 내지르는 비명, 가로등 기둥마다 자리잡은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신나는 음악들 모두가 원치 않아도 막 발을 들이민 사람에게 이유 모를 피를 끓게 만들 정도였다.
비밀소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꾹 참은 채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캘리칼리 데이비슨 어깨 위로 올라탔고, 처음으로 이 얼렁뚱땅한 계획의 취지에 걸맞게 그는 껄껄 웃으며 그 덩치에 걸맞게 큼지막한 걸음을 한 발자국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공주님?"
"…공주고 나발이고! 나만 돈 썼잖아요, 나만!"
"대신 공주님이 만족하실 때까지 어깨 빠지도록 그네를 밀어주거나 목이 나갈 정도로 동화책 읽어주기보단 그게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성인 셋 분의 자유이용권(야간)과 어린이 하나 분의 자유이용권(야간)의 티켓 값을 치뤄야 했던 소피아만이 사기꾼의 말에 그런가? 하고 살짝 납득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여전히 손해는 자신만 보고 있다며 툴툴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곧 이들은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한 곳에서 보이는 교차로 앞에 우뚝 섰다.
무엇을 타야 할 지 고르는 시간이었다.
"아, 역시 놀이공원의 백미는—" 바이킹을 흡족한 눈으로 보던 융터르가 말했다.
"롤러코스터죠!" 그러나 곧바로 소피아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급추락하는 코스터에 삿대질까지 하며 강력 추천했다.
"회전목마지, 이 멍청이들아."
반대로 캘리칼리는 회전목마를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이 추천한 것과 정반대로, 어린아이들과 커플들이 주로 타고 있는 그것. 비밀소녀는 캘리칼리의 손을 들어줬다. 생각보다 상식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제 키를 보란듯,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고는 까딱거리며 흔들며 말했다.
"아휴! 제가 어떠케 바이킹이랑 롤러코스터를 타여? 키가 안 되자나!"
"봤지? 이 브아—보들아."
"아하하! 바—보들!"
회전목마는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비밀소녀의 차례는 곧 다가왔다. 곧 그녀가 탈 수 있도록 직원이 그녀 앞에 있던 줄을 치우자, 장난기가 갑자기 쑥 올라온 융터르가 슬쩍 뒤에서 있다가 탑승 할 차례가 되자 부쩍 앞으로 치고 나서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타실까요 공주님?"
"어디보자, 저기 마차는 어떻습니까?"
캘리칼리는 한 술 더 떴다. 노란색에 가까운 주황빛 조명들이 화려하게 빛나는, 회전목마 스테이지에 발을 내딛은 비밀소녀도 이번만큼은 이 고약한 남정네들의 장난기를 받아주었다. 그들이 내민 손을 각각 한 손씩 붙잡은 채 마차 위로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이 모습을 전부 본, 굳이 회전목마를 타고 싶지 않았던 소피아만이 팔뚝 위로 올라온 닭살에 소름끼쳐하며 마구 비벼댔지만 곧 동화풍 음악이 놀이기구 시작과 함꼐 울려퍼지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두 남정네야 뭐 포커스에 잡히든 말든, 소피아가 찍는 화면 속에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비밀소녀만이 있었다.
그 뒤로도 어린이용 롤러코스터-캘리칼리는 그 거대한 신장 때문에 당연히 탈 수 없었다-를 타거나, 어린이도 같이 탈 수 있는 범퍼카-죽어라, 캘리칼리! 라는 고함과 함께 소피아의 과격운전이 있었다.-를 타기도 하고 갖가지 어트랙션이 한가득인 후룸라이드-에서는 융터르가 기가막힌 저음으로 뱃노래를 불러 운치가 더욱 살았지만 정작 물에 뒤집어 쓴 생쥐꼴이 되었다-를 타는 등, 그 어떤 때보다도 비밀소녀가 가장 즐거워했다. 그네를 타거나 도서관에서 동화책을 읽어줄 때보다도 더.
"이거 묘하게 패배감이 드는데?" 본인이 원하면 지는 것은 죽어도 싫어하는 캘리칼리가 말했다.
"저흰 돈 안 내고 했잖습니까, 요컨대 무료 컨텐츠랑 유료 컨텐츠의 차이라 칩시다."
융터르가 달래면서 말했지만, 그런 그도 저열한 피지컬에서 비롯된 패배감은 달콤해야 할 소프트 아이스크림마저 씁쓸한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은 오락실을 방불케하는 아케이드 센터 안. 방금 전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기계를 거의 부술 듯 최고점을 뽑아내는 소피아의 격렬한 망치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게임에서 진 두 어른이 서로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비밀소녀와 그녀를 놀아주고 있는 소피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곧 오렌지 선데 아이스크림-물론 비밀소녀를 향한 이른바 공주님 특전이었다-을 야금야금 먹고 있던 공주님이 쪼르르 달려왔다. 표정을 봐서는 슬슬 여기도 지루해진 모양이었다. 그 뒤로 잔뜩 지친 얼굴의 소피아가 뒤따라오자, 비밀소녀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놀이공원에 왔으면 저거는 한 번 타야 하는거 아니겠어여?"
"…저거?"
비밀소녀가 말과 함께 손가락을 가리키자, 융터르가 가장 먼저 그 손짓에 시선이 돌아갔다. 아무리 잘못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가장 상징적인 놀이기구가 있었다. 곧 나머지 두 남자들도 그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취향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라주기로 했으므로 순순히 응했다.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고도를 높여가는 관람차 속. 그 너머로 비춰지는 놀이공원의 전경이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개미에 비교할 정도로 작아지는 사람들. 마법소녀로써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이런 광경을 많이 봤을 텐데, 비밀소녀는 지금 그녀의 눈 앞에 보여지는 것이 퍽 신기했는지 '와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소리를 직접 하는 것 만큼 분위기에 산통을 깨는 것도 없었으므로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예외가 있었다. 소피아의 기이할 정도로 늘 청량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렇게나 신기하십니까?"
"어머나 소피아 님은 낭만이 없으신가부다…."
"뭐어… 비소님은 늘 이런 거 보셨지 않았을까 싶어서."
머쓱한지 소피아는 복면 위로 검지를 세워 긁으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문을 꺼내서 그렇지, 비슷한 생각은 캘리칼리나 융터르도 하고 있었기에 평소처럼 그를 책망한다기보다는 약간 호기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갑작스레 시선을 받은 비밀소녀는 나지막하게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관람차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이 까딱거리며 허공을 휘젓고, 관람차가 꼭대기 무렵까지 올라갈 무렵에서야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래도오… 저는요오…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요…."
"해 본 적이 없다…니요?" 무거운 중압감을 겨우 뚫고 융터르가 겨우 호기심에 질문을 했다.
"그르니까아… 남들처럼, 그네를 탄다던가… 동화책을 실컷 읽는다던가… 친구랑 같이 놀이동산에 간다던가…."
뜨끔, 하고 융터르의 양 어깨가 잠시 움찔거렸다. 저 정도로 말했는데도 모르면 그거야 말로 눈치가 진희나 젠투 급이라는 방증이다. 어떤 비범한 유년기를 보냈는지는 몰라도, 이쯤 되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예의를 물에 말아서 마시는 짓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든, 분위기는 바닥으로 착 가라앉을 수 밖에 없었고 대관람차에 올라탔을 때는 지쳤을지언정 즐거워보였던 얼굴들이 내릴 때는 어쩔 도리 없이 차분해지고야 말았다. 그떄였다. 스피커마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금일 마지막 행사인 퍼레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관람객 분들께서는 안전하게 라인을 지켜 양 옆에서 구경해주세요….
"퍼레이드라."
답지 않게 울적한 얼굴이 되어있던 캘리칼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놓고 씩 웃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처음 이 놀이공원에 왔을 때처럼 비밀소녀를 제 어깨에 태우고 반대쪽 어깨에는 소피아를 거의 짊어지다시피 한 채 들어올렸다. 난데없이 짐짝마냥 들어올려진 소피아가 민망함에 내려달라고 발버둥을 쳤지만 독불장군 같은 그를 말리는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이 융터르! 잘 따라오고 있지?"
"…제발 말 걸지 말아주세요, 캘리칼리. 저 지금 굉장히 쪽팔리니까."
융터르가 쪽팔려하거나 말거나. 소피아가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치거나 말거나. 비밀소녀가 이런 남정네들이 일행이라는 사실에 하염없이 부정하고 싶어하거나 말거나. 캘리칼리는 부득불 퍼레이드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모든 민망함을 삽시간에 잊을만한 경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빛으로 레드카펫을 깔기라도 한 양, 화려한 루미나리에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행진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애니매트로닉스 기술로 이제는 감정마저 표현 할 수 있게 된 인형탈들이 신이 난다는 듯 폴짝폴짝거리며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특수하게 개조된 차량이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면 헬륨을 가득 채운 마스코트 인형들이 하늘을 둥실 떠다니고, 그 사이에는 놀이공원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던 갖가지 캐릭터들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마주 환호하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첫 차량이 지나가자 그 뒤로는 군악대같이 화려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악기에 부착된 마이크 덕분에 멀리 있어도 연주곡을 듣는데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시 인형탈을 쓴 사람들, 더 뒤로는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과감한 옷을 입은 댄서들이 앞서 가는 밴드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다시 그 뒤로 인형탈을 쓴 사람들과 하늘을 낮게 떠다니는 마스코트 헬륨 풍선들. 대망의 마무리는 다름 아닌 높은 하늘 위였다. 안내 방송을 따라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본 사람들은 목근육이 뻐근해지는 불편함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펑—!!
인적 드문 곳에서 터트린 것이 분명한, 색색깔의 불꽃놀이가 별을 대신해 새까만 하늘에 수놓아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꽃처럼 넖게 퍼지는 것도 있었지만, 점차 그 양상이 다양해졌다. 단순하게 희화화시킨 강아지나 고양이, 장미와 튤립 같은 꽃들, 이제는 잊기가 힘들 정도로 눈에 익은 놀이공원의 마스코트 등등. 귀가 먹먹해지도록 몇 번이고 불꽃이 발사되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에? 그게 무슨 소리에요? 비밀소녀가, 평범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뇨?"
도파민 박사의 (언제나 그렇듯 희대의) 괴작, 젊음젊음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피아 때문에, 루석바의 오너인 해루석이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소 얼빠진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냉미남의 전형인 얼굴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소피아는 오늘도 다시 한 번 놀라곤 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놀라야 할 구석이 달랐다. 비밀소녀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 자타가 공인하는 해루석의 저 반응이란 도대체.
"그네를 누가 뒤에서 밀어준 적 없댔는데요?"
"그야 혼자서도 탈 수 있으니까요?"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그야 혼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이랑 놀이공원에 가본 적 없다는데요?"
"그—야 안 가도 무방하니까요?"
당연한 소리를 뭣하러 하느냐는 해루석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건 이제 소피아였다. 물론 복면 때문에 잘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그런만큼 해루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비범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의미도 아니었으니까.
복면 속 소피아의 입은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서 뻐끔거렸다. 뭔가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의 목울대만 꿀꺽거릴 뿐 소리라고는 외마디조차 새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어라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옆 자리에, 젊음젊음빔의 영향에서 해소된 비밀소녀가 앉아 늘상 주문하는 칵테일을 하나 입에 올리면서 말했다.
"아웅, 소피아 님. 제가 언제 유년기를 평범하지 않게 보냈댔어요오—? 그냥 그런걸 경험한 적 없다고 했을 뿐인데."
"…에?"
"그리구, 개인적인 이야기는 비밀인거 몰라요?"
악동을 연상케 하는 웃음을 지은 비밀소녀가, 해루석이 내민 그녀의 음료를 받아들고 한 모금 태연하게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