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은 전래동화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입니다.
*그냥 전지적 시점으로 할까 하다가 화자를 뜬금없이 정했습니다.
흔하다면 흔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한 선비의 이야기다. 본래라면 주막에서 묵었어야 했건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러지 못했던 그는 어떤 마을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배를 곯지도 않는 그 마을은 여행자를 환영하였다. 허나, 손님된 예의로 차마 말하는 것을 거듭 껄끄러워하였음에도 선비에게 갑작스러울 정도로 들이닥친 호기심은 밤늦게까지 그를 놓아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보아도 마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한 곳이 흉가라니 이 얼마나 불길한 일인가. 스스로를 도가의 파민이라 소개한 촌장의 호의로 작은 방에서 본래라면 밤을 보냈어야 할 손님이 늦게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있자, 촌장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잉, 저 흉가 말씀하시오?"
"아니, 아니 세상에. 저렇, 저렇게 무릇 흉가를 방치하면 으—음기가 쉬 돌, 돌 것인데! 어찌 마을은 저, 저, 저걸 안 치우는겐가?"
내친김에 선비는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것을 털어버리며 문제의 흉가에 손가락질을 하였다. 한때 그 위세를 쉬이 짐작케 하나 지금은 영락해버린 그 꼴이란. 규모만 말하자면 감히 한양에서도 쉽사리 비교할 수준이 안되었건만 위풍당당해야 할 대문은 경첩부터가 힘을 잃어 끽끽 소리를 내며 울고, 마당은 잡초들만이 무성하며 툇마루부터 대들보까지 하나 썩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기왓장이 바닥에 떨어져 쨍하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
그 시선을 따라가는 촌장은 그 머리만큼이나 희끗하게 난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면서도 선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슬쩍 저으며 말했다.
"으응— 저 바싹 망해버린 집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외다. 응, 거 잠이 안 오시는 거 같은데 말동무 해드려도 되겠소? 저 집이 으쩌다 저리 되었는고 하는 이야기인데."
어디 하, 한 번 말해보시게. 밤잠을 진작에 설친 선비가 팔짱을 끼며 답했고 조금은 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며 촌장이 두렛박에 시원한 물을 한 가득 떠와 제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잉, 고것이 언젯적 일인가 하믄 불과 1~2년도 안 된 것이라오. 저 집에 살고 있던 냥반은 그야말로 부자였다고 할 수 있겠소. 그 얼마냐 부자냐—고 허면, 임금님이나 드시는 귤을 지가 직접 공수혀서 먹을 정도니께 말을 다혔다고 허겄구먼. 헌데 모으는 돈은 갈퀴로 쓸어 담어도, 막상 베푸는 돈은 호미도 모자라 지 새끼 손가락보다도 모자라 요 일대에선 지독허기로다가 유명한 구두쇠였다는게 문제요, 이잉.
저 폐가가 된 집 보시오. 지금이야 죄 망해서 흉측허긴 혀도 규모가 거대하지 않소? 무릇 저만한 집을 혼자서 관리하려며는 평생이 가도 무리일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이까? 수십의 머슴이 밭을 매고 집을 정리하는 고 모습은 지금 생각만 혀도 아주 장관이었어요, 으응. 근디 문제가 있다고 허면… 역시 고 구두쇠 기질이 뒈지질 않아서 머슴들이 응당 받았어야 혔을 새경도 개미 눈물보다 못하게 받았다고 협디다. 겨우 먹고 자고 입을 정도라 허는디 고것이 얼마정도인지는 나도 몰러요.
아무튼 그런 집에 웬 듣도 보도 못헌 장정이 왔으요. 키가 육척이나 되는 듯 허는디 옷은 죄 꺼멓고 눈이 묘허게 시퍼런 감이 있던 그 자가 대뜸 저 부잣집 대문을 땅땅 두드립디다. 그 이름이… 하여간 우리네 말씨는 아니었소. 카 어쩌고 저쩌고던데…. 하여튼 잉, 내가 고 근처에 있어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는디, 오다 산적들에게 죄 털려 돈이 없으니 이 집에서 잠시 일허겄다— 그런 내용이었소. 그르니께 이제 부자 양반이 와서는 말을 합디다.
"우리 집은 그리 여유가 좋지 못해서 돈을 많이 못 주는데 괜찮은가?" 그 질문에 장정이 재깍 말을 혔어요.
"아, 괜찮습니다. 그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시면 충분합니다." 라고 뭔 땅굴 뚫을 정도루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이여.
이잉, 사실상 돈 구경 안혀도 좋다는 고 말이 부자에게 가장 좋은 말 아니것소이까? 덜컥 계약서에 지장 콱콱 찍고 머슴살이를 시키지. 근데 그렇게 머슴살이 시키는 첫 날에 문제가 생겼다 이게 아니겠소.
촌장이 잠시 목이 탄다며 떠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안, 그 열띤 이야기에 몰입했던 선비는 그가 물을 족할 만큼 충분히 축였다 생각되는 시점에서 빨리 이야기를 해달라며 재촉하였다.
"으응, 어디보자—"
아침이 되었응께는, 행랑채 곳곳서 머슴들이 나와 일을 허는디 부자가 슥— 둘러보니께 어제 계약을 혔던 고 머슴만 딱 보이지 않는게 아니겠소. 그르니 노발대발한 부자가 마을을 아주 뒤집어 놓을 기세로 난리를 피워대니 어찌 구경을 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여튼, 댓발로다가 행랑채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디 요 신참 머슴이라는 사내가 받은 옷 앞에서 제사를 지내나 멀뚱허게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소?
"이 놈이 지금 뭐하는 짓이냐!" 고 꼴을 본 부자는 그리도 길길이 날뛰지. 헌데 그 육척 남성이 계약서를 부자 코앞에 턱 미는거요.
"입혀주셔야지요." 라는 말과 함께 말이외다.
그 때 그 부자놈 표정이란! 망치라도 머리에 콱 얻어 맞은 사람 마냥 순간 멍~ 해졌다가 곧 무어라 무어라 따질려고 혔는데 불쑥 그 장정이 들이민 계약서를 보구 나서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주섬주섬 그 옷을 입혀주었소. 잉, 진짜루다가 입혀준다가 적혀있었던게지.
그러고나니까 일은 곧잘 하는데 문제는 인제 새참시간이 되었을 때요. 뭐 밥이라고 해봐야 마소 먹을 것보다 아주 조금 나은 거지만. 아무튼 아침도 거르고 곧바로 일을 시키니 다른 머슴들은 밥풀이 제 콧구멍으루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퍼먹고 그러는디, 또 이 신참은 그저 수저만 들고 뚱—허니 있더랍니다. 다른 머슴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부자가 또 밥은 왜 안 먹냐고 윽박지르니 고 놈의 계약서를 또 들이 밀더랍니다. 이잉, 거기에 먹여주고라는 단어가 똑똑히 적혀있던게지….
"먹여준다는게 밥술 떠먹여주는게냐!" 라고 화를 암만 내도 별 수 있겠소? 울며 겨자먹기로 먹여주는 수 밖에.
하여간 이쯤 되면 그 다음은 우리 집 멍멍이도 다 알 이야기요. 그날 밤이 되었을 때 한밤중에 되어도 도통 행랑채 한 칸에 불이 꺼지지 않으니 잠을 못 자는 다른 머슴들이 부자에게 몰려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소. 그 아우성이 얼마나 심했는지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덩달에 나도 잠에서 깬김에 고 부잣집 마당에서 진을 쳐보니께, 눈이 아직도 또랑또랑한 채로 그 부자 양반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 아주 뒤집어질 정도였소.
"재워주셔야지요."
또 또 그 계약서! 물론 부자는 그 의미를 생각하고 쓴 단어들이 절대 아니었을거외다. 그건 풍신 할배 수염을 걸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소? 제 입으로다가 재워주기까지 한다고 했으니 팔자도 없는 자장가를 불러줘야지. 이잉, 내 유식한 말은 재수없어보일까봐 차마 쓰지를 못혔는디, 생각해보시오. 그 계약 어디에 언제까지 라는 말이 있었는지. 과하게 말하자면 그 카 뭐시기하는 남자가 만약 죽을 때까지 있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자승자박이 아닐 수 없었소이다. 그저 싼 값에 부려먹을 생각 만만이었을 터였겠지.
그러니 부자는 하소연하였소. 전 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등 숫제 오열을 하였지. 그런데 부자가 애써 입혀준 그 옷을 훌훌 벗고는 다시 발끝까지 시꺼멓고도 희안한 옷으로 돌아간 그 장정은 딱 한 마디 그리 툭 내뱉더이다.
"대가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는디, 금방 뒤쫓아 간 사람들도 그 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온데간데 없어진게요. …으응, 여기서 또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한디 그 자가 말하는 댓가도 곧 금방 드러났다고 내 생각을 혀요. 그게 저 흉가가 되어버린 집이고.
뭔 소린고 허면, 그 육척 장신의 장정이 홀연히 사라진 다음부터 부자는 헛것을 보는 걸 시작으로 점차 골골거리더만 픽 쓰러지더라 이 말이오. 지금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그 수전노 같은 행태에 가족이고 뭐고 있었겠소이까? 재산을 지켜줄 사람 하등 없으니 이때다— 하던 머슴들, 하녀들, 마름들 온갖 사람들이 앓는 사람이 없는 기운 짜내가며 내 돈 가져가지마라! 하고 소리지르는 걸 귓등도 듣지 않고 구들장까지 파헤쳐가며 숨겨둔 전 재산을 들고 날랐다 이거요.
이잉, 목이 타는구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물을 시원하게 들이켜는 촌장에게, 선비는 이제 참을성을 잃어버리고 따지듯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아, 아니 세상에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다 있는가? 그건 숫제 귀, 귀신같은 그런 허황된 이야기 아니란 말인가?"
"잉, 믿든 말든 그건 자유요. 요 동네 토박이인 나로서는 그 황당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하루를 여즉 잊기 힘들어 말한거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그나저나 선비님은 괜찮으시겠소?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디."
"엇? 아잇! 이런 제기랄! 촌장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이거 밤을 세워버렸네! 아잇 다 망했네 이거!"
선비는 투덜거리며 방에서 제 짐을 챙기고는 촌장에게 방 삯이라며 강제로 엽전 몇 푼을 안겨 준 뒤 한성을 향해 발걸음을 급히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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