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즈가 어릴 적 서로 안면이 있었다, 라는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겠습니다.
여름에서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 때 쯤이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간이 되었고, 그 무렵이면 한 소년이 침울한 얼굴을 한 채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 꼭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일대에서 이름난 고급 아파트인 만큼, 입고 있는 옷도 요모조모를 뜯어보면 어린이가 입기에는 다소 금액이 사치스럽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만 정작 아이의 주변은 황량하기 짝이 없어 외로움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어린이라도 잘 알 것이다. 지금 자기 또래들은 일찌감치 중학교, 더 나아가서는 고등학교 준비를 한다고 학원에 있을 시간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이제 학원에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처음에야 도서관에 가서 마음놓고 퇴관시간이 되도록 책을 읽어댔지,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조차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기야…."
소년은 씁쓸하다는 어른들의 말을 처음으로 이해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옆동네도, 조금 떨어진 도시도 아니고 비행기로도 하루는 꼬박 있어야 하는 거리로 이사를 가게 될 예정이니 자신과 어울리기 더는 힘들다 이거겠지. 그들에게는 초등학생이라는 탈을 쓴 채로 공부에 허덕여야 한다는 불안함이 있지만 하지만 그런만큼 이 자리에서 누가 가장 불안하겠는가.
그 낯설 것이 당연한 문화를 맨 몸으로 들이받아야 하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힘들텐데 위로는 커녕 공부지옥에서 탈출한다 말로 오독하고 질투를 하지 않는가. 이제 같이 어울릴 시간이라고는 해봐야 고작 1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매몰찬 태도들은 그에게 남아있는 정일랑 죄다 뚝 떨어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런 소년의 눈에 누군가가 띄었다. 분명 이 아파트 단지에 사는 온갖 재수없는 사람들의 면면이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질적인 그 아이는, 여기저기 뜯어봐도 명백히 이 동네 주민이 아니지만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슬쩍 온 티가 역력하였다. 잘 쳐줘봐도 유치원생 정도려나, 그런데도 혹 다른 아이들이 와서 핀잔을 주려나 눈치를 여간 보는 태도가 하루 이틀로 채워질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이 쪼꼬맹이를 발견한 것처럼, 그 아이 또한 자신을 발견하고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아, 아하이고! 이럴수가아—"
"응?"
눈에 띄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타고 있던 그네에서 떨어진 꼬맹이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이 시간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였었다. 더 줄여 표현하자면 들켰다 정도일까? 어찌되었든 지금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그닥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진 않아, 약간의 멍 정도만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쉬곤 잽싸게 말했다.
"더 놀아도 되는데."
"예?"
그의 말에 꼬맹이의 작고 긴 눈이 이보다 더 크게 떠질 수 없다는 듯 부릅하며 제법 동그랗게 변했다. 역시, 그에게 그 누구도 이 곳에서 놀지 말라고 했으면 했지 놀아도 된다 말하는 애들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어른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반문하는 꼬꼬맹이에게 소년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여기 돈 내고 노는 것도 아닌데 뭘."
"하, 하—지만 그러면, 막 주위에서, 거—지라고—"
말버릇 탓인지 떠듬거리긴 하지만 즉각적으로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주위에서 그리도 괴롭혔나 싶은 마음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는데, 그것이 이 꼬맹이에게는 악효과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순전히 선의 혹은 호의로 그 보다는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과 놀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은 것인지 경계하던 그 아이는 엉덩이에서 아릿한 아픔이 사라지기 무섭게 저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주위로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그리 많은 편은 못 되었기에, 다음 날은 물론 그 다다음날에도 해가 질락 말락한 시간이면 체구가 또래보다 확실히 작은 그 꼬맹이는 아파트 놀이터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다리던 소년은 꼬맹이가 나타나기 무섭게 곧바로 아는 척을 해왔다. 그렇게 말을 걸면 도망치고, 말을 걸면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것이 나흘 째.
소년이 미국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이 불과 이틀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결국 키는 자신보다 쬐끄만하면서도 이상하게 몸은 튼튼해보이고, 의외로 또 날렵한 그 꼬맹이를 참지 못하고 쫓아 뛰어가던 소년은 크게 자빠지고 말았다. 다른 것보다도 친구들이 운동을 같이 하자며 권할 적에 마다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소년이 생각하고 있으려니, 온 몸으로 땀이 비직비직 흘러내리는 주제에 손에는 익숙한 하얀색 플라스틱의 구급상자가 쥐어진 꼬맹이가 당황한 얼굴인 채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아니 왜 도망쳐? 그러니까 내가 다쳤잖아."
"그치만…."
그럴거면 왜 쫓아오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다분한 얼굴은 인내심을 발휘해 항변 하려던 것을 애써 멈춘 채, 그저 무릎이 깨져 어린이 특유의 여린 피부가 죄 찢어지고 난 피투성이인 상처 부위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조막만한 손인데도 제법 솜씨가 좋아, 깨진 무릎 위로 조심스레 소독약을 바르고 그 마른 자리에는 연고와 거즈를 의료용 테이프로 튼튼하게 보수공사까지 완료한 자리는 얼핏 보면 누가 다쳤기라도 했냐는 듯 뻔뻔함 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도움을 받았다는데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 소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 안 아픈데."
"아니, 다쳤잖습니까…. 다친 사람은 도와주라고, 그 EBS에서도…."
꼬맹이는 웅얼거리며 자신이 기억나는 공공 도덕을 말해주었다. 물론 소년 또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으나, 제 주위로는 그 바른 생활 교과서에서 적힌 흔해 빠질 정도의 이야기를 준수하는 친구들을 그닥 봐온 적이 없어 오히려 생경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가슴께에서 어른거리는 소년은 이럴 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차마 쉽사리 입에서 튀어나오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전혀 엉뚱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내일 나랑 같이 놀자."
"에?"
"나랑 같이 놀면 다른 애들이 왜 놀이터에서 노냐고 뭐라 안 할거야."
그건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영 싸늘했고 소년은 곧 자신이 내뱉은 것이 값싼 동정임을 깨닫고 말았다. 너무나 슬프게도 그 짐작은 곧 확신이 되어, 꼬맹이의 얼굴은 창백하게 바뀐 채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채로 흘러나오는 것이 그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화가 났는지를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사람 마음을…! 누굴 지금, 지금 동정!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 난 그게…."
"안녕히! 계십시오…!!"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인지,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딴 말보다도 앞서 해야 마땅했건만 그 때는 왜 이렇게도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일까. 소년은 골목길을 내달리는 꼬맹이의 뒤를 쫓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유독 그 주홍빛 하늘이 번져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러고 보면 참 이게 우연이라고 밖에 표현을 하지 못하겠군요."
어린 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이 무엇이냐는 말에 답하던 사짜 심리상담사, 카르나르 융터르가 멋쩍음이 다소 섞인 얼굴로 답했다.
"아, 아하이고! 정—말로 그랬습니다…. 그 땐 정말 저희 동네 어르신들 말에 따르면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할까 뭘까…."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의 상담소에 놀러온 프리터에게 그가 얼어죽어도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어주며 조용히 웃었다. 그때 그가 중얼거렸던 말로 인해 사람 심리를 공부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물론 학위는 없지만. 그런만큼 프리터도 할 말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참, 꼴에 자존심은 아주 그냥 가득!! 있어서 어린 마음에 거절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아주 미국으로 이사를, 예에, 이사를 가셨대서 얼—마나 놀랐는지."
"참 그 땐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참 그 땐 그랬지요 훗훗훗."
무슨 우연의 일치로 이제와서 다시 아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융터르는 자신의 몫으로 만든 따뜻한 커피를, 프리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정말 맛있게 마시며 웃었다. 그 이후로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답하는데 정신이 팔려 둘은 차마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창 바깥에 비치는 노을은 그 시절 그 때의 것만큼이나 유독 주홍빛이 크게 두드러지고 있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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