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너 님과의 연성 교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염하신 흑여우융... 감사합니다....!
*날먹적(?)인 무의식으로 커미션에서 작성했던 글의 짤막한 외전 정도로 봐주십사 합니다.
평소 평정심이라면 수백년은 수련을 했으니 문제 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좀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는 연거푸 머리를 매만지고 꾹꾹 눌러보기도 하였지만 도통 이 놈의 귀가 감춰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귀를 감추면 꼬리가, 꼬리를 감추면 다시 귀가.
"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거울을 바라보면 계속 쫑긋거리는, 머리카락을 닮아 흑단같은 그 여우귀가 곤혹스러워 그는 볼을 살짝 긁었다가 제 손끝을 보고 다시 놀랬다. 이제는 손톱도 도통 가라앉지를 않고 그 뾰족한 발톱이 툭 튀어나와 얇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가면 갈수록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그는 점차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이라도 쉬게 되었다. 그리고 등 뒤로 익숙한 꼬리들이 풍성하게 툭 튀어나오는 그 느낌. 갈수록 가관이다.
언제부터 이 꼴이냐고 하냐면, 불과 며칠 전부터 징조는 있었다. 둔갑술이 이상하게 잘 안 듣는 날인가보다 생각하고 단순하게 넘어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몇 번 시도하면 제대로 되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여기고 넘어갔었지만. 오늘은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들키기 좋은 마당이라 상담실 문패에도 급히 손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늘 하루만 쉬겠습니다라고 종이도 써서 붙였다.
이제 남은 것은 온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고 둔갑술이 제대로 되기를 바라야 하는데.
"어―이, 융터르! 우리 왔네!"
"저희, 왔습니다."
이런 꼴을 뭔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 문을 세차게 노크했다. 이대로 더 내버려두면 이 상가 건물 내에 위치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여기 이 꼬락서니로 있는 것을 알게 될 터. 겨우 뭔가 가닥을 잡을까 말까 그 애매모호한 감이 흩어져버린 구미호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저 오늘 쉰다고 미리 연락을 드렸는데."
"…."
"…."
"두 분 왜 말이 없― 이런."
불쾌한 마음에 뒤로 제껴진 양쪽 귀, 좌우로 흐느적거리는 꼬리들. 아무리 제 몸이라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이 신체구조에 속으로 한탄하며, 여우 요괴는 자신이 유이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두 사람 친구들에게 서둘러 들어오게 재촉하고 곧바로 문을 닫았다.
자신이 내주는 커피를 받아마시면서 갖고 온 케이크를 포크가 가능한 크게 떠먹는 XX대 민속학 교수 캘리칼리 데이비슨, 그리고 뜨거운 건 못 마신다며 얼음물에 그 커피를 타는 같은 대학교의 같은 과 교수인 노스페라투 호드. 예전 일촌법사의 노림수에 곤란했을 적 도와준 두 친구들이라지만, 이런 꼴은 가급적이면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앍앍' 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몫이라고 잘라둔 그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은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나름대로 자기 할 말이 좀 있었다.
"그 손톱 좀 깎아야 되겠던데, 자네. 평소랑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오타 투성이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아."
생각해보니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낼 적에는 손이 말썽이어서, 액정 위로 손톱이 찍어댄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정이 생겨서 오늘은 인터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다음에 만나자는 내용도 두 사람에게는 불안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결국 제 무덤을 제가 판 꼴이라는 생각에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카우치 소파에 엎드렸다. 꼬리 때문에 좀처럼 쉽게 앉을 수 없었기에.
"저희, 간, 공수해, 왔는데, 드시겠습니까?"
"…네."
노스페라투 호드가 중년의 외국인의 얼굴을 한 채 잔뜩 시무룩해서 엎드린 그 얼굴과 달리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지 아홉개의 검은색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그 모습에 겨우 웃음을 참으며 보냉용기를 꺼내 여우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장식일 수 없는 귀와 꼬리들 이후로, 두 사람은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의 생간을 아삭아삭 소리가 나도록 즐겁게 먹는 카르나르 융터르라 자칭하는 이 구미호는 확실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내색을 굳이 하지 않으며 대표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물었다. 한 입크기로 썬 그것을 포크로 찍어 먹던 그가 손에 쥔 접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낮게 침음성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이 하나 있는데,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악몽, 이라구요?"
"두 분이야 전에 보셔서 알겠지만, 둔갑술은 어지간해서선 풀리지 않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 한은 말이지요."
"그 위기의식 때문에 계속 귀나 꼬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이건가?"
"동물도 트라우마 걸리는 거 모르십니까?"
실제로 짐승이 저러니까 이보다도 더 강력한 설득력도 없다. 그런 한편으로 두 교수는 이 구미호가 수백년을 살아온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텐데도 도대체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지금도 귀는 저도 모르게 쫑긋거리고 꼬리는 살랑거리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그 당사자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새까만 털빛의 구미호는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턱을 살짝 쥐고 깊이 생각하다 그 평소 목소리보다도 더 낮게 중얼거렸다.
"진짜 이걸 부탁드려야 하나."
"뭔데 그러나?"
"두 분이 제 꿈 속으로 들어가서 트라우마의 원인을 치료해주시면 됩니다."
"What?!"
아직 두 분은 영문을 모르시겠군요, 라며 멋쩍다는 듯 말한 여우요괴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유리구슬 같은 것을 하나를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작지만, 영롱하고 따뜻한 빛을 내뿜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다. 두 교수는 이 자그마한 것이 곧 여우가 신령으로 발돋움을 하기 위한 수련의 결정체이자, 일전에 한 번 큰일 날 뻔 했던 원인인, 그 여우구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여우구슬로 도술을 부릴래야 방법을 알아야 하는 노릇 아니냐며 호드가 의문을 제기했고, 그 와중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며 남은 간 조각을 열심히 먹고 있던 융터르는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없었기에 고개만 여러 번 끄덕였다. 귀에 울리도록 꿀꺽 소리를 내며 겨우 접시를 비운 그가 아까까지 엎드려있던 카우치 소파를 이번에는 반듯하게 누웠다. 정확히는 그 꼬리 때문에 눕는 것도 제법 수고로웠지만.
어쨌든 제 명치쯤에 그 구슬을 얹은 그가 두 사람에게 가까이 와달라며 부탁하고는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잠에 빠질 겁니다. 그럼 이 구슬을 통해 두 분이 제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주시고…, 가급적이면 그 트라우마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해결 될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혼자서는 못하나?"
"무의식의 영역은 제가 컨트롤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라서요. 운이 나쁘면 스스로 빠져나오는데도 시간이 가혹할 정도로 걸립니다."
"얼마나, 걸려, 봤습니까?"
"아―. 딱 한 번 시도해봤었는데 그 때는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렸더군요. 그래서 두 분이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며 두 교수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처음 만난 날처럼 어쩐지 안심이 된 구미호는 그 두 사람에게 명치 위로 올려둔 구슬에 손을 뻗어달라 부탁하고, 심호흡을 갈수록 아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구슬에서 빠져나오는 미세한 기운이 그를 잠들게 하고, 곧 두 사람의 손 끝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건가, 캘리칼리가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구슬에서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환하게 빛을 내어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차리자 두 사람은 자신들이 상담실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천지가 불이다. 잘 마른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시작으로 곧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자란 나무들에도 번지고 있었다.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정도로만 세간살이를 겨우 챙겨나오며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그런 한편으로 여우 요괴를 잡으라며 저들끼리 외치는 그 불쾌하게 들뜬 목소리들이.
"이게, 융터르 님의, 트라우마?"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만. 헌데, 이 친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산 위로 산새들이 부리나케 날아오르고, 미처 타오르지 않은 곳을 향해 온갖 짐승과 요괴들이 날뛰는 상황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여기엔 없다"며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저 짐승들처럼 구미호가 도망치기를 유도하는 것이 틀림없어,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숨을 어지럽게 해도 두 사람은 발을 절대로 쉴 수 없었다. 어떤 불길한 기분이 두 사람을 사로 잡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는 카르나르 융터르라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
아니나 다를까, 사냥꾼들이 알려준 방법으로 찾아간 그의 은신처의 근처로는 그 불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구미호가 있었다. 이미 불길에 닿기라도 했는지 꼬리 끝이 그슬린 그가 연기에 어쩔 줄 몰라하며 정신없이 뛰는 모습 뒤로 군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저기 구미호가 있다!!"
"잡으면 은이 열 냥이랬다!! 쏴라!!"
소총에서 불이 뿜어지고 구미호 하나를 잡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나 과분한 양의 총탄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상황에, 카르나르 융터르는 연기를 들이마셔 패닉에 질려 도망치는 그 모습. 그리고 결국 매캐한 연기에 더는 숨을 쉬지도 못하고 구미호가 다리에 힘이 풀려 낙엽 위로 미끄러지자, 환호성을 지르며 놈들이 그의 목에 총검을 내려 찍으려는 이 광경.
이젠 그냥 보고도 참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의 거죽을 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즉 저딴 것들이라는 생각에 두 사람은 더는 상황 판단도 하지 않고 맹렬하게 뛰어 각자 한 놈씩 때려 눕혔다. 처음 만났을 적에도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던 그 말이 맞았는지, 그저 팔을 들어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구미호가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로 위를 올려보았다.
"누, 누구신지."
"자네 친구일세."
"조금, 나중에, 만날, 친구, 입니다."
"나중에? 친구?" 영문을 모르는 채로, 저들을 아직 모를 카르나르 융터르는 유순한 눈을 끔뻑거렸다.
"이야기라도 좀 많이 풀어두고 싶긴 한데, 지금은 자네 생명부터 보존해야지 않겠나!"
그리 말하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거대한 덩치에 믿기지도 않는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이며 여우를 잡겠다고 화마 속에서 눈이 벌개진 한 놈을 제대로 후려팼다.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그의 몸을 강제로 일으킨 호드가 다소 안전해보이는 곳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구미호의 등을 떠밀고는 곧바로 자신도 그 싸움에 합류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어 어리둥절한 그가 두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혹시, 혹시 두 분 성함이라도 말해주시면 안됩니까!"
"언젠간 다시 만날텐데 굳이 왜!"
"그건, 그 때의, 즐거움, 입니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이 이다지도 무력했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통한 얼굴로 불길 사이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다 황급히 도망을 치고, 다시 치기 시작했다. 산골짜기 아래로 어디선가 여우가 서글프게 우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늘 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분, 입 돌아갑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의 양 볼에 닿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뭔가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깼다. 분명 서있었다고 생각했건만, 정신을 차리자 푹신한 카펫에 머리를 대고 있었던 탓이다. 한기에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지며 다시 상담실에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두 교수가 본 것은, 이제 여우 귀와 꼬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구미호였다.
그가 보냉가방에 아직 딱딱하게 얼어있는 그 팩을 도로 집어넣으며 부드러운 바람소리가 섞인 웃음을 내고는 고맙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제 생애에 이처럼 더없이 끔찍한 기억은 없었을 겁니다. 산은 어디 도망칠 곳 없이 불이 났지, 사방팔방으로는 요괴들이며 들짐승들이 살려달라 도망치지, 저한테는 총탄까지도 쏟아지지. 정말이지 떠올리기도 싫을만 하다는 생각이 다 들더군요."
"이게…, 기억이면 자네는 어떻게 그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건가?"
"내가, 도움."
"아이, 깜짝이야…!"
어느 샌가 상담실에 슬쩍 들어와서는, 푹신한 카우치 소파 위를 차지하고 있던 단답벌레가 몸을 쭉 늘이면서 그 푹신한 감각을 즐기고 있다가 말해줬다. 실제로는 총에도 맞고 칼에도 찔려가며 겨우 도망치고 있던 그에게 뒤늦게 찾아온 단답벌레가 문자 그대로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거의 전소하기 일보 직전에야 비를 도술로 불러내 모든 사태를 마쳤다는 융터르의 설명도 이어졌다.
멋쩍게 웃는 얼굴로 단답벌레에게 보냉가방 속 간 하나를 더 꺼내 넘겨주던 융터르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슬쩍 웃었다.
"그러고보면 두 분을 만난건 참 행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참 그 폐가에서 어떻게 만날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융터르, 운동 좀."
그러나 단답벌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꼬리 하나를 휘적거리며 불만스럽다는 표시를 곧바로 드러냈다. 진작에 사람을 상대하는 쪽으로도 힘을 길렀으면 그런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말이 어쩐지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에게는 너무나도 웃겼다.
"아, 그러고보니 말이야―. 자네 우리랑 처음 만났을 적에도 살려달라며 뛰어오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때도, 꼬리, 귀, 다 붙어서, 헐레벌떡."
"운동, 해."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단답벌레의 그 말에 융터르가 당황해서 "아니, 그게 그런식으로 결론이 나는 겁니까?"라며 반문을 했지만 한 요괴친구와 두 사람 친구는 저들끼리 한 말이 웃겼던 탓에 대꾸도 못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낄낄대며 한참을 웃었다.
'공개 썰입니다. > 멤고 단편 - 판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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