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니 그게요 원래 이거 1편만 쓰고 바로 땡처리 할라고 그랬거든요?
2. 근데 이런 사진을 보면 누가 참아요?
3. 네 제가 못 참습니다.
4. 좌우당간 이번에는 융터르님 외에도 덕수님, 뢴트님, 소피아님을 좀 써보고 싶었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입니다.
5. 아 구라핑 치지 말라고요? 들켰네.
6. 근데 더 안 쓸겁니다. 진짜로..... 아마도?
이덕수 요한 주임 신부가 대놓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얼마 없는데, 그 중 대다수의 원인이 되었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의 이러한 반응에 대처하기가 곤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뭘 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워낙 지은 업보가 많았던 탓에 입구 근처에서 머뭇거리던 그에게 신부가 "거기서 뭐햐?" 라며 다그쳤다. 냉큼 이리 오라는 손짓에 쭈뼛거리며 다가온 전직 신학생에게 신부는 제단 위를 가리켰다. 성당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도 않는 융터르도 어딘가 위화감이 강하게 드는 것을 눈치채고 말했다.
"은...촛대가 왜 없습니까?"
"으뜬 쓰글 놈이 쌔볐어." 그렇게 말하는 이덕수 요한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난 밤 일을 설명해주었다.
본당 한 쪽에 주임신부가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별채에서, 신부는 그 날 따라 유독 잠이 안 오는 것으로 인해 바깥 바람이나 쐴까 하였다. 그런데 분명 닫아놨었을 본당의 출입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이 이상해서 따라 들어갔더니, 웬 시커먼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그림자요?"
"그랴... 그 놈이 글쎄, '아닛! 이거 들켰군요?' 라는기여. 순 씨꺼먼 놈이." 누군가의 흉내를 낸 것 같은 신부가 툴툴거렸다.
그 '시커먼 놈'은 곧 손에 쥐고 있던 은촛대를 마대자루에 쑤셔넣고는 그림자 속으로 쑥 들어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부가 씩씩 거리면서 싸리나무 빗자루로 한대 후려패긴 했는데 어딜 갔나 영 알 수 없다며 투덜거리고는 그 끝에 "그니까 니가 좀 찾아 와야." 라는 말을 덧붙였다.
융터르가 그 말을 듣고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그건 경찰이 할 일인데요."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싸리나무 빗자루 대신, 수염 긴 도사가 직접 만들어줬다는 벽조목 효자손으로 한 대 맞고야 말았다. 그래도 끝끝내 입은 죽지 않았던 그가 결국에 중얼거리면서 다시 저항을 시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백한 절도인데 이걸 경찰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기양 도동놈이면 니를 안 불렀지 욘석아. 그림자 속으로다가 쑥하니 들어갔다니께. 뭘 들은거여?"
그 말에 전직 사제 지망생이 이마를 짚었다. 감히 이 성당에서 20년 이상을 주임으로 있는 이덕수 요한의 기도가 곳곳에 배어있는 이 성당에 그림자로 이동을 하는 종류면 어지간한 수준의 악마가 아니고서야 가능하겠냐는 소리니까. 단순히 절도만 하는 놈인지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정말로 못된 놈인지 알아보려면 그 쪽으로 좀 머리가 굴러가는 네가 해야하지 않겠냐며, 주임신부가 투덜거린 끝에 융터르가 결국 그 일을 떠맡아버렸다.
"대신, 이번에는 제 방식으로 좀 하겠습니다."
"염병헐... 니 맘대로 햐."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그 말에 이덕수 요한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생 이후로 손도 대지 않았던 신부복을 다시 입고, 그 술집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큰 결심이 뒤따라야만 했다. 합법적인 악마들의 소굴, 즉 인간들에게 무해한 악마들만이 여기서 술을 즐기며 인간들의 문화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서 종교의 색채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술집 안의 존재들이 경계심과 적대감 사이의 감정이 실린 눈으로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그건 예의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던 뢴트게늄이 보내는 눈짓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연녹색 눈이 위 아래로 찌그러진 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융터르를 마주했다.
"아니, 나 참. 여긴 왜 그딴 옷을 입고 오셨대요? 응?"
"묻지 말아주시죠. 저도 참담하니까."
"...마음 같아서는 여기 한가운데서 이야기 하자고 하고 싶은데, 예? 제가 인심 한 번 쓰겠습니다. 좀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요."
검고 긴 머리를 한 바텐더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로 정중하게 한 장소를 향해 손짓했다. 이 술집의 유일한 룸이다. 대놓고 껄렁한 걸음으로 먼저 들어가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은 대악마가, 문을 조심스레 닫고 뒤이어 앉은 무늬만 신부에게 여전히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서, 왜 왔어요?"
"악마 하나 찾는데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명색이 대악마이신데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흠." 뢴트게늄은 까끌해보이는 수염을 매만지면서 선글라스 너머로 전직 신부 지망생을 바라보다가 이어 말했다. "특징 같은건 뭐, 있어요?"
"눈만 보이는 새까만 복면을 썼고, 그림자 사이로 이동하며, 도벽이 있는 것 같다 했습니다."
"에-이, 그건 어지간한 놈들이면 다 하는거고." 뭔가 실망했는지 뢴트게늄이 등받이에 몸을 던지듯 기대며 투덜거렸다.
"그러고보니, 붉은색 넥타이를 했는데 바람도 불지 않는데도 저 혼자 나풀거린다고도 하더군요."
융터르가 주임 신부에게서 들었던 특징 중 가장 쓸데없게 느껴졌던 특징까지 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마지막말에 뢴트게늄이 눈을 크게 뜨며 "그거다!!" 하고 외치는 바람에 오히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예 대악마가 벌떡 일어나서 전직 구마사제 지망생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연거푸 그 놈 밖에는 없다며 고함을 지르는 통에 바텐더가 "손님들, 시끄럽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어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끼어들 정도였다.
그 정중한 경고에 뢴트게늄이 알았다고 거듭 양해를 구하고 나서야 바텐더는 이만 실례하겠다며 문을 닫았고, 그런 대악마의 과장된 리액션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융터르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안다면 잘 아는 놈이죠. 훔치는 것이 삶의 목적인 놈이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그럼 같이 가시죠."
"좋았-어? 에? 같이 나가라고? 여길?!"
새된 목소리와 함께 선글라스 속 연녹색 눈동자가 커졌다. 제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나갈 수 없던 이 술집은 말하자면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유일한 당근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러니 자신도 여기서 죽치고 사는 것인데. 당황한 악마의 입을 막으며 융터르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 옷을 입고 있는 이유와 맥락을 같이 하는겁니다. 성직자로서 저를 도와주시는 조건으로, 뭐... 임시긴 하지만."
"...그럼 그 동안만큼은 나도, 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뢴트게늄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신 제가 당신의 행동이 비협조적이다는 판단을 하면 곧바로 이 곳으로 돌아옵니다. 하시겠습니까?"
가짜 성직자가 도전적인 말로 대악마의 충동을 박박 긁었다. 일부러 바텐더와 이야기 하는 것도, 저 바깥의 햇볕을 보고 있노라면 질투심에 심기가 뒤틀릴 정도였으니까. 이제는 가망도 없다 생각했던 자유를 이런 자리에서 권유받은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는지, 뢴트게늄의 흰자위가 순식간에 검게 물드면서 자신의 본래 기색을 흘렸다.
그 압박감이 다른 이들에게 괜히 퍼졌다가 쓸데없는 소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검붉은 색 기운은 정확히 융터르만을 옥죄고 있었고, 그 당사자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따위의 소리나 말하고 있었다.
"말한 것, 꼭 지키셔야 합니다? 나, 진짜 그 말 하나만 믿고 하는거에요. 예?"
"제가 거짓말은 안 하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안 하는 것 뿐이지."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뢴트게늄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는지 헛바람을 연거푸 삼키며 웃음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당연히 하죠."
융터르가 바텐더에게 간략한 설명을 한 후, 뢴트게늄이 아직 햇빛이 떠있는 거리로 나선 것은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져있던 미사포를 막 걷은 참이었다. 손 끝에 닿는 태양빛이며 술집과는 전혀 다른 공기와, 진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모든 소리가 한때는 저주의 상징과도 같던 그 대악마에게 있어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꺼림칙한 옷차림의 카르나르 융터르가 여전히 감격에 찬 악마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악마는 대체 누굽니까?"
"본명은 따로 있죠. 물론 저도 그렇고, 다 그렇겠지만. 근데 놈은 좀 뭐랄까. 잊혀졌달까, 경계선 상에 있다고 해야할까."
당황해하는 가짜 신부에게 뢴트게늄이 부연설명을 했다. 때때로 스며든 인간과 너무나 잘 맞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간과 악마 모두가 잃어버리고 그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인식한다는 것이다. 아직 인간도, 악마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것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로 그의 설명이 끝났다.
만약 진짜로 서품을 받고 정식으로 활동했다면 이런 설명으로 으스대는 대악마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것이라는 생각에, 융터르가 작게 한숨을 쉬며 성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당연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뢴트게늄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있었다.
"와 진짜 사악하시네, 아니 날 여기에 데리고 와요?"
"그르게 말이다, 이 써글롬의 자식아."
예의 벽조목으로 만들었다는 효자손이 뢴트게늄의 정수리에 내리 꽂히자,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워하며 그는 울부짖었다. 자세히 듣자니 하치키타치 같은 소리도 나는 것이, 지옥의 어떤 고유어나 저주를 위한 그런 말이 아닐까 생각하며 융터르가 태연하게 말했다.
"임시 대여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식 계약도 맺지 않았습니다만?" 그 말에 악마가 "대여라니 너무하시네"라고 했지만 주임신부가 바로 끼어들었다.
"대여고 나발이고 간에 악마를 성당 안에, 그것도 터무니 없는걸 들여놓는 놈이 으딨냐?"
짜증과 어처구니 없음이 기막히게 섞인 이덕수 요한이 휘두르는 효자손은 이제 융터르의 머리 위로도 내리 꽂히려고 했지만, 그가 황급히 "이 자리에 남아있을 악마의 흔적만 찾고 바로 떠날 참입니다." 라며 변명해, 머리에 혹이 난 것은 뢴트게늄 밖에 더 없었다.
본의 아니게 성전 바닥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그는 곧 자신을 노려보는 늙은 신부에게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은촛대 잃어버렸다면서요? 그거 훔친 놈이 혹시 어느 방향으로 사라졌는지 알아요?"
"쩌어기, 저짝으로 사라졌는디. 그거만으루 알겄는가?"
이덕수 요한이 창고라는 푯말이 붙은 문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문을 활짝 연 뢴트게늄이 바닥부터 뭔가를 찾는 듯, 연거푸 콧소리를 내고는 작은 환기팬까지 시선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저기로 도망쳤네요?"
"환기팬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융터르가 놀란 눈으로 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놈의 본질은 사실 뱀이거든요. 틈만 있다면 어디든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뱀. 근데 이상하네?"
가짜 성직자와 진짜 성직자 둘을 바라보던 뢴트게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제단에 시선을 두고는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제단보다 더 뒤에 성체성사용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감실에.
"왜 진짜 은으로 된 잔은 안 훔쳤지?"
"신부님, 그 촛대... 설마 모조 은 제품입니까?"
"그르면 이놈아, 성당에 주어지는 한 해 예산이 얼만디 그걸 은촛대에 쏟아붓고 그르냐? 성체성사할 때 쓰는 잔만 진짜 은이여."
융터르가 설마 모조 은으로 된 것인지는 몰랐기에, 당황해서 주임신부에게 물었지만 새삼 뭔 난리냐는 듯 이덕수 요한이 태연하다 못해 뻔뻔하게 답했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성당을 운영하고 꾸려나갈 돈은 진짜 아슬아슬하게 오는데, 순수하게 은으로 된 촛대를 구입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늙은 신부의 말에 뢴트게늄이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면서도 조금 피곤하다는 듯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하. 이제 왜 훔쳤는지 알겠네요. 근데 저 여기 이제 더 있으면 아주 죽을 거 같은데 좀 나가서 이야기 하면 안될까요?"
"인쟈, 고 망할 놈의 샤끼가 무언 꿍꿍인지 말혀." 라고 주임신부가 윽박지르는 건, 대악마가 가슴을 활짝 펴면서 공기 좋다고 기지개를 조금 오래 켜는 모습을 아니꼽게 보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효자손이 어떤 회초리라도 되는 양, 손바닥에 탁탁 거리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바로 정수리에 내리 꽂힐 분위기였다. 성당 특유의 기운에 몸이 정말로 불편했던 대악마가 조금 전의 그 고통이 떠올라서는 곧바로 말했다.
"일단, 그 친구는 나름대로 선의로 훔친 겁니다."
"훔치면 훔친 거지, 선의는 또 뭡니까?"
"그 촛대가 가짜라고 했잖아요? 아마 그 친구는 신부님이 사기 당한 줄 알고 진품으로 다시 들고 올거라는거죠."
그 황당한 답변에 성당 앞마당은 이덕수 요한이 효자손을 요란하게 떨어트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가 입이 떡 벌어져서 본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기에, 융터르가 대신 질문했다.
"악마가... 무슨 불만제로 같은 그런 행동을... 한다고요?"
"아이고, 놀라셨나보네. 처음에 말했죠? 그 놈은 훔치는 것 자체로 삶이 목적인 놈이라고. 값어치는 상관 없어요. 행동이 중요하지."
오히려 가짜인 물건을 훔치고 진짜인 물건을 되돌려놓는 행위를 함으로서, 두 번의 도둑질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아할 것이라는 그 요상한 설명이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어 한 성직자와 한 가짜 성직자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도 몰랐던 탓이 더 컸지만.
연륜 덕분에 조금은 더 빠르게 이성을 찾을 수 있었던 이덕수 요한이 "거러믄, 내비두면 놈이 알아서 온다는거 아녀?" 라고 말하며 먼저 별관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남겨진 두 사람이 약간의 침묵을 가지다가, 융터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약속한 일은 끝난 셈이 아닙니까?"
"어, 어어? 아니 잠깐만요, 나 조금만 더 구경하고 돌아가면 안돼요? 예? 나 아직 못 본거 좀 있는데? 최신 애니메이션이라도."
"아니, 구경한다는게 애니메이션이라고요?"
황당한 말에 헛웃음 소리를 내던 융터르는 갑자기 별채가 왈칵 열리는 소리에 고개가 그 쪽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일이 다 해결되었다 믿었던 주임신부가 저리도 당황한 얼굴로 뛰쳐나온 것일까, 생각하던 찰나에 이덕수 요한이 "느이 둘, 이짝으로 와바. 얼른!"이라며 뢴트게늄과 같이 등떠밀려 별채로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지역 뉴스가 긴급 속보라는 자막과 앵커의 당황한 목소리가 자료화면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아직까진 알 수 없는 신부의 의도에 그들이 멀뚱히 화면만 보고 있을 때, 이덕수 요한이 텔레비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검은색에 눈가만 보이는 복면을 쓴 채로, 그마저도 그 눈 위에 붉은색 파티용 하트 선글라스가 특징인 남성의 몽타쥬가 보였다. 앵커의 목소리와 함께 문제의 남성이 금은방 여럿을 털었다는 내용이었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아잇, 저 아닙니다! 제가 왜 금은방을 텁니까?"
"요 도동 놈이 고래도 끝까지 그짓말을 허구 있어!?"
몽타쥬와 똑닮은 악마가 이미 효자손으로 몇 대는 맞았는지 팔뚝을 연신 쓸어내리면서 항변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그 몽타쥬와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는, 일전에 주임신부가 했던 증언대로 붉은색 넥타이가 저 혼자 살아 숨쉬듯 허공에 나풀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삐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뢴트게늄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뭔가 익숙한데 누구십니까?" 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융터르에게 시선을 돌려 "아니, 이젠 하다하다 구마 사제를? 아닌가?" 라며 또 삿대질을 했다. 뢴트게늄이 선글라스 너머로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한 구석에 놓여있던 마대자루를 열어보았다.
"이거봐요, 융터르 씨. 내가 말했잖아. 진짜 은으로 된 걸 들고 올거라니깐?"
그가 던진 은촛대를 받아 들고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에 놀란 전직 구마사제 지망생이 여전히 억울하다며 외치는 복면의 악마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이름은 기억나십니까?"
그러자 복면의 악마가 방정맞게 파닥거리던 손을 뚝 멈추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생각난다기 보다는, 맘에 들지 않아서 새로 지었습니다. 소피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소피아, 네. 그럼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했습니까? 싸구려를 훔쳐서 값어치가 더 좋은 것으로 돌려놓는다니요."
"별 거 없구요. 그냥?"
자신을 소피아라 불러달라는데서 융터르는 대악마가 말한 '경계선'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함부로 정체를 깨우쳐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더불어 훔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의미도. 한편 그런 대답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던 이덕수 요한은 텔레비전에서 계속 배경음처럼 깔려 흐르고 있는 뉴스 속보에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런 놈이, 금은방에 들어가서 보석이고 나발이고 싸그리 훔쳐가?"
"아이, 저 아닙니다! 저 그 때는 진짜 은촛대를 만드는 공방에 들어가서 훔치고 있었단 말입니다!"
"고걸 지금 자랑이라고!"
결국 정수리를 얻어맞고야 만 소피아가 묘하게 맑은 목소리로 연거푸 자신이 아니라며 거듭 호소했기에, 융터르와 뢴트게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이 뢴트게늄이었다.
"그럼, 그 소피아 님. 혹시 지금 뉴스에 나오는 저 놈, 한번이라도 봤다던가 그런 적 있어요?"
"예, 물론이죠! 오매가매 봤습니다."
"혹시 다음에 도둑질을 어디서 할 것이다, 이런 말 한 적 있습니까?" 융터르도 심문에 참여했다. 그 질문에 소피아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다가 생각이 났는지 곧바로 답했다.
"은행을 턴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금괴를 터는데 같이 할거냐고 권유는 받았는데, 사실 그게 영 내키지가 않아서."
"언제 그 지랄을 한다냐?" 이덕수 요한마저도 짜증을 감추지 않고 소피아에게 추궁했다.
"오늘 밤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명이 별채에 걸려있는 낡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시간에 여유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이 지역에서 금괴를 보관할 만한 은행은 단 한 곳이었기에 소피아의 길안내를 반쯤은 협박으로 얻어내, 융터르, 뢴트게늄, 소피아가 그 곳으로 곧장 향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더라도 금괴가 있는 곳은 항상 엄중한 감시가 있기에 섣불리 갈 수 없다. 어떻게 그 경비들을 이해시켜서 진짜로 도둑질에 미친 악마에게서 금괴를 지키러 왔냐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머뭇거리던 융터르에게 소피아가 선뜻 권했다.
"괜찮으시면 제 그림자 속으로 타고 들어가시겠습니까?"
"그게 됩니까?" 미심쩍은 눈빛을 가짜 신부가 여과없이 드러내고, 대악마도 비슷한 눈초리를 보냈다.
"될겁니다!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뭐예요 그게?" 뻔뻔함에 질린 뢴트게늄조차도 투덜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벌써 새카만 원으로 변한 소피아의 그림자 위로 두 사람이 발을 올렸고, 곧이어 극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주변을 알아 볼 수 없다가 빛이 보이게 된 것은 이미 금고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였다. 과격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막 일어난 사람처럼 융터르와 뢴트게늄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태연하게 본 소피아가, "어쨌든 들어왔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라고 엄지까지 치켜 올리며 말하는 그 뻔뻔함까지 선보였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헬쓱한 얼굴로 뢴트게늄이 중얼거리고
"마음 같아서는 곧장 그 쪽으로 보내고 싶은데..." 융터르도 소피아를 째려보았다. 둘의 머리 속에는 반쯤 필요 악 취급을 당한 소피아가 과연 도둑의 감인지 멀미로 힘들어하는 두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며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갔다.
곧이어 소피아의 움직임보다 훨씬 거칠고 조잡해보이는 그림자가 쑥 올라오더니 킬킬거리면서 금괴를 곧장 쓸어담으려 하자, 두 악마가 동시에 가짜 성직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 지독한 하루를 누구보다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카르나르 융터르가 한숨을 작게 쉬면서...
벽조목 효자손을 냅다 던져 악마에 씌인 도둑의 뒤통수에 정확히 맞췄다.
<아아악!!>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엎드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용히 해주시죠. 저 오늘 많이 피곤합니다." 실제로 눈 밑이 퀭해진 그가 품에서 성수를 꺼내 지체없이 악마의 머리 위로 몇 병은 들이부었다. 짙은 회색빛 연기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멀찍이 떨어진 두 악마에게도 닿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런 구마 장면을 볼 일이 없던 둘은 본격적인 활동을 보는 것인가 기대를 했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교회의 신앙과 기도로 명하노니 멀리 떠나가라."
<알았어! 갈테니까!! 그만 때려!!> 성수로 복면이 축축해져 정신을 못 차리는 악마의 머리 위로 효자손이 연거푸 떨어졌다.
"훔친 물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내 은신처! 거기에 숨겨놨어! 장소도 알려줄게! 그만 좀 제발!!>
"훔치려던 금괴 조각 하나도 제대로 원상복구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 계속 때릴겁니다."
그 말대로, 소피아를 흉내낸 가짜가 조금이라도 주머니에 쑤셔넣으려고 하자마자 효자손이 가차없이 매질하는 모습을, 뢴트게늄과 소피아는 약간 오한이 드는 느낌으로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저런 방식으로도 존재하나 싶긴 했지만 아무튼 효과 하나는 죽여주는 모양인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은행 밖으로 나와, 결국에는 헛구역질을 할 뻔했던 일행에게 "어쨌든 잘 풀려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라며 그 특유의 어딘가 비정상적으로 맑은 목소리의 소피아가 엄지를 치켜올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고, 복면을 쓴 악마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먼저 그걸 제자리에 돌려놓을지 모른다며 부리나케 사라졌다. 모든 일이 끝났다.
"아아... 이제 도로 거기서 죽치고 살아야겠네...."
술집 너머가 아닌 장소에서 처음으로 석양을 보던 뢴트게늄이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 햇빛에 닿아 그 어느 때보다도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선글라스 속 연녹빛 눈동자는 저 석양이라도 잊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마음같아서는 누군가에게라도 떠벌리고 자랑하고 싶지만, 자신이 이런 특혜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술집의 평온함은 와장창하고 깨질 것이다. 그건 그 누구보다도 뢴트게늄 그 자신부터가 바라지 않았다.
한편 주임신부에게 다 끝났다는 전화를 막 종료한 융터르가 그 중얼거림을 듣고는 무슨 소리냐며 뢴트게늄의 상념을 깨는 말을 했다.
"제 일을 도와주는 걸 전제로 했지, 이 일을 끝내는 걸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는데요."
"에? 아니, 그, 예?"
"계약을 할 때는 확실히 조건을 따져보셨어야지요. 이러니 사기를 당하시는 게 아닙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해야 할 법한 대사를 서슴없이 하는 그 모습에, 등 뒤로 아직은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뢴트게늄이 처음으로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나빴다 정말." 그 말에 딱히 반박은 하지 않고, 융터르가 숙박은 책임져주지 않는다며 빨리 따라 오라고 앞서 나가고, 뢴트게늄도 곧바로 뒤따랐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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