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또 미쳤지.
2. 근데 맛있는 소재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3. 그… 뭐시냐, 나폴리탄을 생각하려 했는데 그건 무리였습니다.
4. 좋은 소재 주신 분들께는 늘 그랜절 드립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가방을 다시 고쳐매고, 얼굴에 와닿는 불빛에 안도감이 그제서야 불쑥 치솟았다. 더러운 집, 더러운 생활에서 잠시나마 안녕이다. 부모라는 작자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은 몸뚱이를 겨우 움직여가며, 밤 11시라는 제법 늦은 시간에도 아직 잠기지 않은 이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고된 나날을 보냈던가. 원래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입소하기로 하였지만, 끔찍한 나날로부터 도피를 원하는 몸과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
현관에서 나를 중년의 남성이, 그 외모와 어울리는 굵직한 중저음으로 맞이해주었다. 코 끝으로는 안전한 생활의 냄새가 감돈다. 잔뜩 얼어붙어버린 발 끝에 지저분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눈을 툭툭 털어내느라 현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분명 센터의 관계자가 분명한 남자는, 졸린 기색 하나 내비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는 모습이라 내심 감사했다. 그가 내 짐을 들어주기 위함인지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 손길이 닿는, 살갗조차도 아닌 옷 위로도 익숙한 통증이 갑작스레 튀어 나오는 착각을 받느라 몸이 버릇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이런,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관계자의 그 미안함이 담긴, 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솔직히 괜찮지는 않았다. 안 좋은 곳에서 탈출했다고 기억이 순식간에 즐거운 것으로만 잔뜩 뒤덮여질 수가 없는 탓이다. 몸에 난 상처들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야 겨우 낫겠지.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내미는 그 손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채로, 그저 사전에 연락해서 안내 받았던 내용 중 내게 가장 절실한 내용인 방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당장 자고 싶었다.
"좋습니다. 혹시 성함이…."
나는 내 이름을 댔고, 그는 품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 내 이름을 중얼거리며 살펴보고는 도로 검은색 양복 안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관계자가 확인되었다면서도 시설 안내를 해주겠으니 잠시만 인내해달라고 하여 나는 슬슬 고통스러워지는 어깨를 다시 으쓱하고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현관 근처에 비치된 몇 페이지 짜리 얇은 안내문을, 그가 가급적이면 나를 건드리지 않는 노력을 하면서 건네주어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펼쳐보니 흔한 안내도에 불과하다.
"우선 여기 1층은, 기본적으로 공용 생활공간입니다. 개별적으로 요리할 수 있는, 주방이 딸린 식당과—"
식당, 그리고 나 같이 아직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 학습 공간, 독서실 등이 마련되어있는 1층을 지나 2층부터는 본격적인 생활공간이었다. 2층은 남자들이 지낸다는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려니, 관계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투로 설명해주었다.
"이 시설이 생각보다 방음이 그리 좋지 않아, 남성 분들이 내는 소음을 견딜 수 없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하기야, 제법 청결해보이긴 하지만 곳곳에 보이는 흔적들이 이 센터가 새 건물은 아님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귓가로 은근히 들리는 소리는 분명 나보다 먼저 입주한 사람들이 내는 말소리였다. 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튼 여성용 생활공간으로 배정된 3층에는 복도를 기준으로 양 끝에 샤워실을 겸하는 화장실이 마련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인당 30분 정도의 샤워시간을 갖는다는 말과 함께 마찬가지로 실내가 낙후되어 각 방마다 샤워실을 둘 수 없었다는 속사정을 듣고, 나는 이제 내 짐을 내려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방금보다 조금 더 강압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재촉하듯 말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4층까지만 안내드리겠습니다."
나조차도 스스로가 느낄 정도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았을 터였지만, 이 관계자는 어쩐지 기왕 안내한 김에 단숨에 전부 처리하고 편히 쉬고 싶은 모양이다. 이제 내 어깨는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마지막이라니까 별 수 없었다. 손에서 여전히 팔락거리는 얄팍한 안내문을 힐끗 보자, 4층은 센터 직원의 공간이며 때때로 숙직을 겸하는 모양이었다. 과연 그 안내 문구대로, 센터 직원들이 방에서 저마다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 마련되어있어, 그 소음으로부터 제법 고요한 카운슬링 룸.
"여긴 제 공간입니다."
단순히 관계자인 줄 알았는데 심리상담가 같은 모양이었다. 상담가가 자기 방문을 열자 시설 내부와 달리 제법 깔끔하게 화이트톤이 인상적인 상담실이 보였다. 안에는 은은한 커피향이 풍기는 것이 막 커피를 내리다가 업무 때문에 나온 모양이라는 생각에 조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혀 나를 모르는 이 어른조차도 다정은 모르겠지만 친절하게 나와주는데, 내 친부모라는 인간말종은. 문득 그 작자들의 면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는 치솟는 울분이 눈물로 바뀌어 곧 아직도 추위에 얼얼하던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오는 그 무수한 고생들이 갑자기 물밀듯이 떠오르고 가라앉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히끅거리는 목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상담사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스스로의 울음에 주체를 하지도 못하던 나는, 눈물을 닦는데 이제 방해되는 안내서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연거푸 손바닥으로 슥슥 비비는데 정신이 없었다.
"…분명 여기까지 오는데 힘든 일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원래라면 저도 슬슬 자야 될 시간이지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환한 불빛의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다음 날 아침. 당직을 선 센터 직원들과, 출근을 막 한 직원들이 당황한 얼굴로 4층 복도에 모여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또 여기서 안내문이 떨어져있어."
"벌써 몇 번째죠?"
"모르긴 몰라도 이미 열 몇 번은 될거에요. 그나저나 이상하네, 오늘 오시기로 한 분이 안 오시는데."
기껏해야 창문 하나와 다 죽어가는 작은 나무만이 있는 복도 끝은 직원들에게도 일종의 미스터리였다. 거의 엇비슷한 지점에서 떨어지는 시설 안내문 팜플렛. 처음에는 질나쁜 사람들의 장난인가 했지만,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별의 별 수를 써봐도 여기서 머무는 사람들은 결단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결론났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새로 오기로 하는 사람도 연락을 받지 않아, 담당자가 거듭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스피커로는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한다는 메시지가 흐른다.
"그게, 이 분… 통화가 안 되는데요."
"장난으로 신청한 거 아니에요…?"
직원들이 저마다 떠들면서도, 이 시설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들이면서도 일부러 한 이야기는 억지로 집어 삼켰다. 팜플렛 맨 마지막 장, 가장 끝 줄에 적혀있는 만큼 큼직하게 박스 처리해서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문구가.
본 시설은 상담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리 상담을 원하시는 분들은 로비의 직원께 문의 부탁드립니다.
본 시설에 상담사를 자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직원에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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