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든지 말든지, 바다에 삶을 저당잡힌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져왔다.
끝없이 항해하다보면 어떤 해협이 나오는데, 그곳을 따라 배를 몰면 그 끝에는 사방이 암흑에 뒤덮혀 어둡고 까마득한 절벽이 있다는 것이다. 절벽 아래로 바닷물은 무한히 떨어지는데, 배를 거꾸로 되돌리려고 해도 길목이 워낙 좁으니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고 물살도 거세서 결코 그럴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요컨대 세상의 끝이라는 모양이었다.
세상의 끝에 도달해버린 모든 뱃사람들은 배와 함께 속절없이 추락하지만, 아주 가끔 어떤 배는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를 타고 항해를 지속하며 끝 너머에 있는 가장 진귀한 보물을 얻는다던가.
"그래서… 배 옆구리에 날개를 달았다고요? 배를 공중에 띄우려고?"
선의와 요리사, 그리고 사무장. 달리 말해 전투직으로는 도통 써먹을 곳 하나 없는 카르나르 융터르가 금화를 쌓아둔 채 항해에 필요한 경비를 계산하다가 안경을 벗으며 힐난과 황당을 기막히게 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지적처럼, 선원들은 선장이 드디어 미쳤는가보다라며 감히 하극상의 의미를 내포하듯 저들끼리 떠들어대면서도 배의 옆구리에 새의 날개처럼 생긴 접이식 돛을 양 옆으로 달고 있었다.
여기에 소모되는 비용이 상당한지, 벌써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조선공들이 들이닥치고는 이 허황된 설계를 실현시키는데 소요된 모든 공임비를 적은 서류를 들고 쳐들어왔다. 명백히 이 일에 총 책임자가 되어야 할 선장,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책상에서 슬쩍 멀어져 시선을 사무장에게 돌렸다.
배를 점검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로 간만에 육지에 6개월을 허송세월할 여유가 있나 했더니, 이 황당한 짓을 어떤 상의도 없이 멋대로 저지른 선장을 흘겨본 사무장은 조선공들과 협상하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적당히 파도가 넘실거리고 순풍을 받아 별도의 조작을 하지 않아도 유연하게 바닷물을 가로지르는 브릭선이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브릭선 치고는 그 외형이 사뭇 괴악했다. 중소형 범선답게 날렵한 모양은 유지되었지만 선체 중앙부쯤 부터 선미까지가 다른 함선에 비해 높았고 특히 선미 하단부부터 선체 중앙부 사이에 굵은 사선 무늬가 추가 되었다. 이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른바 '더티 크리미널' 호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잘 알았다. 사무장의 거친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그놈의 빌어먹을 날개였다.
"융터르 님 그만 좀 한숨 쉬십쇼! 배가 꺼지겠습니다!"
야채 수프에 단단한 쉽 브래커를 녹여먹던 소피아가 말했다. 마스트 사이를 넘나들며 돛을 조정하던 그의 손은 유독 굳은살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소피아의 질책에도 융터르의 한숨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몰랐다. 지금까지 약탈을 통해 모았던 보석과 금-은화들이 이번 선박 개조 공사에 절반 가량 소모되었다. 선원들의 월급을 주고나면, 그마저도 얼마 없을지 모른다.
그 뼈아픈 손실에 대해서는 항해사를 겸하는 비밀소녀는 소피아의 반응과 달리 절절히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소피아 님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게 다 선장노— 아니, 선장님이 어떤 상의도 없이 예산을 반이나 날려먹었으니 그런거 아니겠어요."
"뭔가 말에 뼈가 있는 거 같습니다?"
"잘못 들으셨겠죠~."
능숙하게 말을 돌린 항해사는 장루원의 의심어린 목소리에 라임즙과 귀한 설탕이 섞인 주스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선장부터 선원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요리한 사무관은 여전히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예산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사람이 원체 살 수 없는 공간이니, 까딱하면 선원들이 마음 먹기에 따라 반란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는 공간은 다름 아닌 배였다.
역심을 가라앉히고 호감을 사는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였다. 그 다음은 육지에서 보낼 수 있는, 합당한 정도의 기간을 가지는 휴식. 선장이 멋대로 한 일은 이 배의 돈을 매만지는 입장에서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협상을 하고 아무리 단가를 후려치더라도 겨우 절반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그마저도 없었다면 7할내지는 8할이 녹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 때 온 선내에 연결된 종이 일제히 한 번 울렸다. 예산 부족을 해소하는데에는 약탈만한 것이 없었다.
"술을 준비해라—!! 외화를 벌어오는 영웅호걸들의 시간이다—!!"
누군가가 외친 그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해적들이 낄낄 웃으며 저마다 환호하고, 남들은 두 손으로 잡는 것도 버거운 타륜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선장은 능숙하게 배를 상선과 나란히 붙도록 배를 몰았다. 갑판 아래로 내려가 대포를 포술장의 명령에 따라 조준하는 해적들은 신중하게 발사명령만을 기다렸다. 곧 선장의 명령을 기다리던 그들은 전달에 전달을 거듭했고,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발사—!!"
발사 명령에 따라 십여 문이 조금 넘는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일반적으로 동그랗게 생긴 포탄이 날아가는 대신, 날카로운 갈고리가 태양 아래 수면 빛을 반사해 유독 더욱 반짝거렸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선의 메인 마스트가 뚜둑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또 일부는 다른 돛대로도 향해 그 질긴 천을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찢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사람으로 치면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대포가 할 일은 여기서 끝났기에, 해적들은 약탈의 기쁨을 위해 일제히 갑판으로 거슬러 올라 저마다 줄을 잡고 시원하게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 행렬에는 선장과 장루원, 항해사도 있었다.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쪽과 빼앗으려는 쪽이 저마다 칼과 총을 휘두르고 발사하는 소리로 상선의 갑판이 시끄러워졌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스스로를 영웅호걸이라고 지나치게 올려치는 해적의 말마따나, 외화를 벌 시간이었다. 뒤늦게 더티 크리미널 호에서 끈이 하나 건너편으로 날아오고 사무장이 능숙하게 건너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엉거주춤하게 갑판에 착지했다. 그는 휘청거리다가 결국 자빠진 끝에 무릎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아… 다 끝났습니까?"
"그럼! 다 끝났지." 선장은 마치 늑대처럼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으며 반박자 늦게 현장에 도달한 사무관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덕분에 그의 몸이 허리를 피는 타이밍이 더욱 늦어졌다. "이제 그만 삐치라고, 융터르."
"아니 누가 삐쳤— 에휴, 됐습니다."
사무관은 다른 해적들에 의해 꽁꽁 묶인 상선 쪽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타 해적과 다를 바 없이 지극히 탐욕스러웠다. 이 점에서 이 해적단은 들판 위 메뚜기떼마냥 닥치는대로 약탈하는 다른 해적들과는 다소 방향이 달랐다. 싹싹 긁어모으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어디보자, 이건 우리가 소화시키려면 좀 어렵겠고. 이건 가져가도 되겠고…. 이야 이건 향신료 아닙니까? 이건 꼭 챙겨야지."
해군이 뒤쫓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카르나르 융터르는 철저히 자신들이 가져가도 뒤탈이 없거나 약간의 트러블 정도를 감수할 만한 것만 효율적으로 가져가도록 지시하면서 장부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던 도중, 이 상선이 옮기는 것치고는 이상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생김새만 보면 영락없는 나침반이었다. 생김새는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함께 검은 바탕에 별자리가 다이아몬드로 수놓아져있어 그 자체만으로 보자면 차라리 예술품 취급이 나을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혹시 이거 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해적으로 직종을 바꾸기 전에도 온갖 물건들을 보고 만져서 웬만한 것들은 다 안다고 자부하는 해적 사무장도 이건 처음 봤기에, 제 손에 들린 나침반을 약탈 당하는 측에게 보란듯이 치켜 올린 채 질문했다. 나침반의 필수요소인 방향과 지남철은 하나 빠지지 않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미친듯이 빙글빙글돌다가도 또 어떨 때는 한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 나침반으로서의 기능치고는 나사 한 두개는 충분히 빠진 그것을 본 상선 쪽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저게 우리한테 있었어? 라며 자기들끼리 쑤군덕거리고 있었다.
"허어."
"그거 이리 좀 줘보게."
불쑥 치고 들어오는 것은 선장의 크고 두꺼운 손이었다. 무어라고 할 겨를도 없이 선장은 융터르의 손에서 이 이상한 나침반을 낚아채고는 '흐음'이나 '오호' 같은 감탄사를 섞어가며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물아비를 통해 팔아치우려고 했던 그는 캘리칼리의 반응에 자신이 기록한 장부에서 '나침반'이라 적은 부분에 가로줄을 찍찍 그었다.
그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들어가도 충분할만큼 큰 궤짝에 주먹만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는 물론, 티끌 하나 없는 루비와 사파이어가 세공된 반지같은 장신구부터 금화와 은화가 가득 담겼다. 약탈이 끝난 후 상선 쪽 사람들은 해적들이 그 손으로 박살냈던 돛대와 돛 따위를 수리해놓는 황당한 꼴을 얼척없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소피아가 날이 잘 드는 단도로 그들의 몸을 묶어놨던 끈을 끊어낸 것이다.
"자— 읏차! 이걸로 끝!"
"…당신 뭐, 뭐한거야?"
"뭐긴 뭡니까? 이래야 다음에도 교역하고 수익 얻으면 저희한테도 분배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황당한 말에 상선 측 선장이 그게 뭔 개소리냐며 바락바락 소리질렀지만,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소피아는 날래게 해적선으로 훌쩍 뛰어넘어가버렸고, 그것만을 기다린 것인지 해적선 더티 크리미널 호는 빠르게 옆으로 비껴나가듯 물살을 거스르고 갈길 가기 시작했다.
비밀소녀는 눈치가 좋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류를 매끄럽게 읽어내고 험난한 파도에도 꿋꿋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녀는 이번에 약탈에 성공한 그 상선에서 얻은 물건 중, 이상한 나침반이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눈길을 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장실에 앉아있는 그 방의 주인은 제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죠?"
"…맞다면 어쩔건가?"
비밀소녀의 질문에 선장은 늑대처럼 씩 웃었고, 항해사는 캘리칼리의 손아귀에 쥐여진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나침반이 어디를 향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차라리 그녀로 하여금 바다의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을 시사하게 만들었다. 이 해적단에 다소 뒤늦게 합류한 카르나르 융터르는 여전히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는 그 이야기지만, 눈 앞의 이 거인에게는 숙명과도 같았다.
날다람쥐처럼 이리저리 넘나들며 돛을 조정하던 소피아가 마치고 선장실로 들어왔다. 이 정도의 무례는,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함께 해적단을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소피아에게 주어진 약간의 특권이었다. 상식 외적인 움직임을 보이든 아니든, 선장의 손에 쥐여진 나침반은 다이아몬드로 무수한 별자리를 꾸민 만큼 화려했기에 자연스레 그의 시선도 그 쪽을 향했다.
"이게 실마리가 될거야. 어때, 궁금하지 않나?"
"어— 세상의 끝 이야기 아직도 포기 안 했습니까?"
생각보다 현실적인 성향인 소피아는 복면 사이로 입이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입 부분에 얼룩이 조금 생긴 것이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른 모양이다. 캘리칼리는 큰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얼핏 듣기에는 한없이 유쾌할 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도사리고 있어 사뭇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선장의 몇 안되는 이러한 모습에 압도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환기시킬 타이밍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선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두꺼운 장부를 품에 안은 채 여전히 안경 차림인 사무장이다.
"음, 여기 계실 줄 알았다면 다른 곳을 뺑뺑이 치지 않았어도 되는데 말입니다. 여기—"
그는 제 품에 있는 장부를 내밀었다. 꼼꼼하게 작성 된 그것은 어떤 횡령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하단에는 선장의 서명만을 기다리는 공란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재깍재깍 하고 제 눈 앞에서 치우던 선장이 다소 굼뜨게 반응하자, 사무장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올라갔다.
선장이 여전히 손에서 떼어놓을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안하는 저놈의 나침반. 그리고 선장의 허황된 꿈. 사무장은 나지막한 한숨을 픽 내쉬었고, 깃펜이 양피지 위를 슥삭하고 긋는 소리가 들렸다. 펜촉에 묻은 잉크가 짓눌린 흔적을 따라 군청색 길을 내며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서명이 되었다.
두 사람에게 실없는 태도로 응하던 선장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사무장에게 말했다.
"이봐, 융터르. 우리가 약탈한 거 전부 팔아치우면 어떻게 되지?"
"음, 시세를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일단 값어치가 크게 훼손되지 않을 것들로 엄선 했으니… 적어도 당신 현상금만큼은 나올겁니다."
"그런가?"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실로 막대했다.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안다면, 그 꿈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나 패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다들 말할 것이다. 캘리칼리의 크고 길쭉한 검지 손가락이 책상 위를 무슨 신호처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듣다보면 어떤 일련의 박자감마저 느껴지는 그것이 돌연 뚝 중단되기까지는, 사무장 본인이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가 정확히 5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다 팔고, 식량과 식수, 그리고 의약품 위주로 사놓게. 남는 돈이 있다면 배를 다시 한 번 점검해. 그리고 마지막 기항지에서 중대발표할 건데, 내리고 싶은 놈들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쥐어주고. 알겠나?"
"…하, 이런. 이런 날이 진짜로 올 줄이야."
사무장은 왜 뱃사람의 일원이 되기로 했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에 먹물께나 찬 사람이었다. 신기한 나침반과 최근까지도 더티 크리미널 호에 저지른 그의 '그 빌어먹을 날개돛' 만행, 그리고 방금의 명령으로 카르나르 융터르는 제 미간을 대번에 구기면서도 선장의 말을 받아적었다. 늘 싫다, 안된다 이런 소리를 대번에 해도 지시 내린 것은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그 답게 잘 처리할 것이라는 생각의 선장이었다.
그 뒤로 해적선은 어떤 약탈도 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속도로 물살을 타고 바람을 받으며 그들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지 모를 항구에 입항했다. 공교롭게도 선장, 장루원, 항해사, 사무장이 모였던 섬, 해적들의 영원불멸할 근거지인 해적섬이었다. 선장의 명령대로 선원들이 내린 배는 조선소로 즉시 들어갔다. 혹여나 용골이 휘어지기라도 했는지, 돛이 낡아빠지기라도 했는지, 선창 아래로 흘수선 이상의 물에 잠겼는지 등등을 면밀히 점검 받을 것이다.
"잘 부탁한다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덩치에 걸맞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해적섬의 조선공들에게 말한 뒤 중대발표를 위해 바텐더나 웨이트리스도 나가게 해 통째로 빌린 한 술집에 모든 인원이 모인 것을 확인했다. 그는 입가가 뒤틀리면서 나침반을 쥐고 있는 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평소 버릇처럼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그의 천성답게, 술집 안에 있는 그의 해적단 전체가 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시선을 그 쪽으로 향했다.
선장이 술집 안을 느긋한 태도로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조용, 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거 눈치들이 빠르구만. 응?"
그제서야 선원들이 와하하 하고 웃으며 시끄럽게 술잔 따위를 각자 앉은 테이블 위로 망치처럼 땅땅 부딪쳐댔다. 선장의 이러한 기행은 선원들의 짬밥이 오래될 수록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 정도는 무례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술집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그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다시 한 번 캘리칼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중대발표를 할거다. 듣고 관심 없으면 저—어기, 융터르에게 가서 퇴직금 정산 처리 하고 와. 안 말린다."
"뭔데 그러시우?"
캘리칼리는 한 선원의 질문에 다시 한 번 소피아와 비밀소녀, 그리고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른 선원들과 달리 바 테이블에 일렬로 앉은 채였고 표정도 다소 굳은 것이 보였다. 어쩌면 이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전염되어 다른 선원들의 얼굴에서도 볼 것이라는 생각에, 캘리칼리는 약간 뜸을 들이듯 숨을 쉰 다음 연설하듯 말했다.
"난 세상의 끝으로 갈 거다. 가기 싫은 놈들은 억지로 따라올 생각하지 마. 안 붙잡으니까. 하지만 따라오겠다고 한다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할 거다. 그게 지옥의 아가리에 스스로 처박히게 되는 꼴이 있더라도, 반드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예상만큼 술집을 차가운 분위기에 빠트렸다. 선원들은 저마다 제 주위에 앉은 다른 놈들을 향해 당황한 얼굴로 이 파격적인 선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쑤군덕거렸다. 혼란은 곧 마른 벌판에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곧 일부는 그제서야 사무장이 평소와 달리 금화가 가득 든 작은 사이즈의 궤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는 분명 농담이 아니었고, 적어도 저 셋은 이미 선장의 발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셈이 되었다.
"제, 젠장! 여기만큼 괜찮은 곳도 없었는데!"
우락부락한 인상의 선원이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사색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누가 제 돈을 뺏을세라, 부리나케 사무장 앞으로 달려간 그는 곧 약간 묵직한 금화주머니를 받아 들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뛰쳐나갔다. 그를 시작으로 술집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곧 깎아 만든 수정으로 제 한쪽 눈을 대체한 놈도, 팔뚝을 갈고리로 대신하는 놈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사무장 앞으로 밀물처럼 달려들었고, 썰물처럼 술집에서 빠져나갔다. 불과 몇십 분 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던 그 술집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선장의 시선은 이제 바 테이블에 앉아있는 마지막 선원 셋을 향해 있었다.
"너희들은?"
"거 정없게 당신 혼자 내보내기엔 또 찝찝하잖습니까?" 소피아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요오— 캘리칼리 님 또 뭣모르고 우격다짐으로 배 몰텐데 그건 제가 가장 싫어하거든요." 비밀소녀도 일어났다.
"죽기 전에 낭만 챙기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돈 남은김에 낭비라도 하죠, 뭐." 융터르는 절반 정도 남은 금화 궤짝과 함께 일어났다.
그제서야,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마음 놓고 뱃속 깊은 곳부터 끓어오르는 웃음을 토해내듯 터트렸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항해보다도 지금만큼 엉망진창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바다에 나갔던 맨 처음도 이보다는 베테랑소리를 들을 터였다. 하늘의 별들이나 해류 따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더티 크리미널 호는 오직 선장의 손에 들려있는 이상한 나침반 하나만을 지침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 내릴 걸!"
날다람쥐마냥 공중에서 겅중거리며 이동하며 돛이 꼬이지 않게 줄을 조정하던 소피아가 가장 먼저 진심을 말했다. 갑판에서 해류를 관측하며 그나마 배가 원활히 움직일 수 있도록 연구하던 비밀소녀도 머리를 쥐어싸맸다. 키를 조정하거나 그 외에 잡다한 조정을 할 선원이 없다는 이유로, 카르나르 융터르의 매끈했던 손바닥은 눈에 띄게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배를 내린다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선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 뿐이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두 눈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형형하게 빛나며 나침반이 천천히 어느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하였다.
육지에 발을 디딜 것이라는 희망 따위 없고, 끝이 언제 도래할 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항해는 밤낮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때려치자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다른 한 손으로 타륜을 굳게 붙잡은 선장이 모는 방향을 따라, 배는 완만하게, 또 어떨 때는 급격하게 돌아가길 반복할 뿐이었다.
"으응?"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은 비밀소녀였다. 익숙한 해류와 섬이 보이곤 했기에 여기가 어느 해역에 속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상쇄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간만에 육체노동에서 벗어난 융터르가 그녀의 목소리에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비밀소녀만이 알고 있는 변화였기 때문인지, 그는 이 이상한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음, 있다라기 보단… 없다? 라고 해야겠는데요. 혹시 뭐 보이시나요?"
"에? 예에…. 뭐 제 눈에도 익숙한 섬이 보이기도 하는군요. 여기 XX 해역 아닙니—" 본디 무역에 자주 사용되는 그 해역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 그는 곧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왜 다른 배가 단 한 척도 안 보입니까?"
대낮인데도 바다만이 철썩거리며 배를 때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하물며 갈매기가 돛대에 앉아 끼룩거리지도 돌고래가 배 주위에서 재롱 따위를 떠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이 바다와 땅에 자신들만 있다는 듯.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피아가 황급히 망루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보는 만큼, 단 한 척의 배라도, 하물며 사람이 사는 것으로 알려진 섬에서 불이라도 피우는 연기라도 보여야 하건만….
주루룩 미끄러지듯 내려와 갑판 위로 발을 내딛는 그는 복면 속에서도 당황한 얼굴이 뚜렷한 채 끼어들었다.
"하나도 안 보입니다! 배는 커녕 사람도!"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뱃사람의 관록이 다른 사람들보다 덜할 수 밖에 없는 융터르로서는 상식 외의 상황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선장의 무모한 꿈 때문에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했던 비밀소녀가 그의 당황한 얼굴에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으로 가기 위해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단계인 침묵의 바다에 도달한 것 같다고 말이다.
"그 다음에는 극야가 시작될거에요. 해가 뜨지 않고 무한한 밤이 이어지면서 별자리의 위치가 상식과 관념을 무시하고 어지럽게 뒤바뀌는거죠. 그 때부터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캘칼 님만 알겠죠." 비밀소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캘리칼리의 손에 들려있는 나침반을 바라봤다.
"하…. 그게 2단계겠군요. 그럼 마지막 단계는 그 해협입니까?"
"맞아요. 세상의 끝으로 이어지는 해협. 가장 난폭한 물살로 배를 끝에 도달하게 만드는…."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답게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비밀소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소피아가 그들의 대화 도중 튀어나온 궁금증을 드디어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비소 님이 지금 1단계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2단계로는 언제 진입합니까? 3단계로는요?"
"몰라요. 그건…. 아마도 우리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 단계가 진행되지 않을까요?"
비밀소녀는 말을 그렇게 흐리듯 마치고는 멀리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장의 무모한 꿈이 결코 한낱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항해사로써 어떻게 해야 할 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이 무색하게 침묵의 바다는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 융터르의 회중시계가 1주일에 한 번, 그것도 월요일에 맞춰 태엽을 감는다고 했는데 그 태엽 감기 소리를 벌써 4번은 들은 참이었다.
"배에 탄 사람이라고 해봐야 고작 넷이라서 좋은 점이 다 있군요."
융터르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며 말하는 어조에는 실없는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스무명이 넘는 것과 비교하면 고작 단 네 명. 식량이 줄어드는 속도는 천지차이였다. 그러니 여유를 부릴 수도 있는 거겠지. 화덕에서 갓 구운 닭고기가 훈김으로 아지랑이를 피우며 통째로 식탁 위로 올라가는 호사도 이 일이 아니었으면 결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어, 어어! 닭다리! 닭다리 하나만! 아 캘칼 님! 하나는 양보해도 되잖습니까!?"
보란 듯 닭다리 2개를 각각 한 손에 들어올린 전직 선장에게 소피아가 목에 핏대가 일어날 정도로 외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하나만이라도 구출하려고 허우적거리는 그 행동은 침울한 분위기를 억지로 전환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비밀소녀는 먼저 솜씨 좋게 닭날개를 먹으며 덧없는 권리에 대해서는 포기한 채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실은 이대로 허송세월하며 침묵의 바다에서 표류하다보니, 얼음을 아무리 동원한다고 한들 식량이 점차 상태가 안 좋아지는 순서부터 처리하려다가 생긴 뜻 밖의 호화로운 식탁인 점은 융터르만의 비밀이었다. 그 식탁 위에서, 네 사람은 다른 선원들이 가득했었을 시절 못지 않게 왁자지껄 떠들어대기도 하고, 그동안 묵혀두었던 원망을 서로 털어놓기도 했다. 에일과 럼주는 그것을 위해 좋은 촉매제가 되어주었다.
다만 술을 즐겨하는 편은 못 되는 융터르만이, 이미 술에 취해 식탁에 머리를 고꾸라트린 채 잠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각자의 방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어?"
마지막으로 선장의 그 무거운 몸을 푸댓자루마냥 낑낑거리며 들어올려 선장실로 향하던 융터르는 이상하게도 주위가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소피아를 옮길 때까지는 늦은 오후 정도나 되었었으니 갑작스러운 밤의 도래는 부자연스러움의 극치였다.
"캘칼 님! 캘칼 님! 일어나세요!"
융터르가 몸을 뒤흔들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술의 냄새가 훅 끼쳐오면서,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눈동자는 언제 취했냐는 듯 오히려 광기로 번들거리기까지 했다. 그의 몸이 휘청거리며 배의 난간으로 향했다. 언젠가 비밀소녀가 했던 그 말 처럼, 하늘 위의 무수한 별자리들은 가장 맑은 밤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고, 또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시작되었구만! 이제부터가 진짜야!"
거의 극적인 태도로 바뀌어 연극적이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배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비밀소녀와 소피아도 각자의 방에서 거의 뛰쳐나왔고, 그들의 표정은 당황과 경외심을 여전히 흔적처럼 남긴 융터르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별자리들. 그것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그 형상대로 모습을 갖춰 움직이고 있었다. 빛 한 점 없는 하늘을 대신해, 소피아는 능숙하게 배 곳곳마다 고래 기름으로 더욱 오랫동안 밝힐 수 있는 등잔을 설치해서 그나마 배 아래의 물살이나마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치만, 이제 어떻게 움직이죠? 해류라고는 해도 이래선 보이지가 않는단 말예요…."
"우린 이제부터—" 어느새 날래게 타륜을 붙잡은 캘리칼리가 제 손에 단단히 쥔 나침반을 힐긋 보고는 곧바로 오른쪽을 향해 타륜을 팽그르르 돌렸다. 배가 60도의 각도로 기울어질 정도로 순식간에 쏠리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서 있던 세 사람은 뭐든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게 버텨야만 했다. "—저기로 간다!"
"갈 땐 가더라도 말 하고 가면 안 됩니까!? 이, 이 인간아!!"
소피아의 비명이 나머지 두 사람 분의 메아리를 머금고 극야의 바다에 되풀이되었다.
침묵의 바다에서 항해할 때는 적어도 보이는 것이 있었기에 비밀소녀는 어떻게 해야 나침반에 따라 움직이는 배를 더욱 빠르게 몰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도 바람은 순풍이고 해류는 배를 빠르게 뒤에서 앞으로 밀었다. 이미 일반적인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상식이 완전히 필요없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하자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서는 침묵의 바다에 있을 때처럼 이 극야의 바다에서 기약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사위가 어두운 상황에서도 비밀소녀의 주황색 머리카락은 한 방향으로 늘 휘날렸고, 그녀의 시선은 이제 타륜을 붙잡은 캘리칼리를 향해있었다.
그 즐거웠던 파티 직후부터, 거의 광적인 태도로 배를 모는데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퍼붓는 그였다.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 자는 것도 거의 최소한으로 줄여서,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얼굴은 전에 없이 메마르고 입술은 부르텄다. 눈 밑은 움푹파여 시꺼먼 그늘이 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두 눈에 서린 광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흘러넘쳤다.
"캘칼 님?"
"냅두시죠."
사뭇 냉정하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피아였다. 캘리칼리가 나홀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영입된 사람치고는 정이 뚝 떨어질 법한 말이었다. 비밀소녀는 선명한 파란색 눈을 놀란 다람쥐처럼 동그랗게 뜨고, 이른바 개국공신의 말에 당황한 얼굴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소피아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복면을 뒤집어 쓴 차림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저 인간, 만사를 태평하고 일종의 즐길거리로 보는데 뭔가 푹 빠지면 그거에 눈 뒤집혀서 안 들립니다."
"…그래보이네요…."
일반적으로 취미생활에 푹 빠진 사람들더러 할만한 소리가 캘리칼리에게 적용되는 그 말에, 비밀소녀는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가산 탕진 수준에서 그칠(?) 것이, 지금 캘리칼리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목숨도 걸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처음과 달리 배는 이제 갑작스러울 정도로 급히 꺾이지도 않았고, 사실 그러는 것인지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감각도 둔해진 상태였다.
어쩌면 자신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 한복판에서도 융터르는 요리를 하며 다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주고, 소피아는 종종 망루로 올라가 돛을 손질했다. 비밀소녀는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머금으며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어이— 피아야!"
"에—?"
사흘 밤낮으로, 수면은 커녕 식사도 챙기지 않은 채로 타륜을 붙잡고 있던 캘리칼리의 부름에 소피아가 생각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굶었어도 일반인 이상의 완력을 가뿐히 낼 수 있는 그가 소피아의 손을 잡고 타륜의 손잡이에 얹었다. 어느 샌가 그의 다른 손에는 캘리칼리가 죽어서도 놓지 않으려던 이상한 나침반이 쥐어져있었다.
"에, 에?!"
"나 좀 자러 들어간다. 수고해라."
비틀비틀 휘청휘청. 어떻게 지금까지 서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가 선장실로 빨리듯 들어갔고 남은 것은 소피아의 황당함에 젖은 눈동자와, 어느새 제 손아귀에 붙잡힌 묵직한 타륜의 무게였다. 캘리칼리의 그 거대한 몸이 제 방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지고 나자, 뒤늦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은 소피아가 복면으로 뒤덮인 목에 핏대가 보일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인간아!! 나 조타수 아닌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잘!"
천둥마냥 우렁우렁 외치는 소리는 뒤이어 작게 코를 고는 소리로 바뀌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목청을 높인 소동은 이미 나머지 두 사람들에게도 원하든 원치 않든 들렸기 때문에, 각자의 방에서 나와 평소와 달리 소피아가 캘리칼리의 자리를 대체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지상에서는 야영을 할 적이면 불침번을 섰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원양항해를 할 때도 종종 조타수 여럿이 순번을 지켜 배를 몰고는 하였다. 지금은 그런 노릇을 할 사람이 없는 노릇이므로, 6시간에 1번씩 교대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순번을 세다가 제 차례가 이제 몇 번째나 돌아왔는지 세기도 귀찮을 무렵.
여전히 졸음이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밀소녀는 주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나침반 하나에 의존해서 천천히 배를 몰아야 하는 이 불합리한 상황이 영 탐탁치는 않았다.
"어머?"
그런 그녀의 눈이 졸음 대신 당황으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타륜을 붙잡고 있던 손 끝에 와닿는 해류의 감각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그저 기분 좋게 넘실거릴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폭급하기 짝이 없었다. 선두에 부딪쳐오는 물살이 거의 박살나듯 산산히 흩어질 정도로 거칠었다. 이런 경우는 그녀도 겪어본 일이 얼마 안 되었기에, 도리어 상황판단은 재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우기 위해, 타륜 옆에 놓아둔 종의 줄을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고작 네 사람 밖에 안 되는 배는 삽시간에 분주해졌다. 세상의 끝으로 이르는 마지막 단계에 진입했을 때, 그 변화는 전설의 시작으로 접어들면서 맞닥트린 침묵과, 사방을 어둠으로 잠기게 만든 극야에 이를만큼 확실했다. 난간에 달려간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도 모르게 귀한 고래기름으로 타오르는 등잔 하나를 떨어트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본 것이다. 무한한 낭떠러지로 사라진 불은 한참 동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시야에 닿는 것이 불가능해 질 무렵에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낭떠러지잖아?"
상식과 이성으로 중무장한 그에게는, 지구는 둥글다가 전제되었기에 세상에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세상에는 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그의 등줄기는 서늘해졌다. 끝에는 너머가 있는가? 설령 새의 날개를 닮은 돛을 양 옆으로 활짝 펼친다고 한들 그것은 언제까지 날 수 있는가?
합리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세상에 압도된 그는 문득 제 머리 위로 뭔가가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한 다른 세 사람에게도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꿈은 아니었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색이 커튼처럼 휘영청 늘어진 그것은 분명 오로라였다. 극야의 바다에 진입한 후부터 지금까지 제 주위를 밝히는 등잔불에 의지해오던 그들에게 그것은 기이함의 극치였다.
"와!"
비밀소녀와 소피아는 저도 모르게 그 광경에 감탄하고 말았고, 캘리칼리는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하늘에는 오로라, 발 아래로는 조금만이라도 잘못 까딱했다가는 한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난폭한 해류. 그 모두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는 남자를 바다에 뛰어들게 한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따지자면 100%에서 한 2% 정도 빠진 수준이다.
"어이! 날개 돛을 펼 준비해! 비밀소녀는 조정간을 맡고!"
캘리칼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은 불꽃에 데인 듯 황급히 움직였다. 이제서야 언젯적인지도 모를 옛날에 배를 개조했던 것의 효과를 볼 시간이었다. 각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어도 얼마나 서로가 긴장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캘리칼리의 신호 뿐이다.
"지금이다, 펴!"
"으랏차—!!"
소피아의 기합소리에 융터르도 팔뚝에 안간힘을 주며 날개돛을 펴기 시작했다. 접이식 돛이 펴지면서 덜커덩하고 기어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곧 배의 양 옆으로 거대한 돛이 활짝 펴졌다. 돛의 한계 때문에 새의 날개기는 커녕 순 박쥐날개다운 모양이었지만.
"여러분, 꽉 잡아요!"
고도를 조정할 역할을 맡은 비밀소녀가 두 날개돛이 활짝 펴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정간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자 날개돛이 기울어지면서 점차 배가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배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생각이상으로 많은 힘이 들었기에, 두 남자 또한 비밀소녀에게 황급히 달려가 조정간을 붙잡았다. 이대로 날지 못한다면, 이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오직 추락만이 남을 뿐이었다.
"안돼! 이제 해류도 없다니…!"
뱃머리에 부딪쳐오던 거친 파도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융터르가 평소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경악했다. 그 말이 주는 의미를 모를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해류의 거친 속도를 바탕으로 도움닫기를 할 시간이었다. 엉성한 상태로 머물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의 낯빛은 비록 오로라가 흘리는 오묘한 색상의 빛으로 기괴하게 보일지언정 한없이 창백하다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결국 배의 그 어떤 부분도 더 이상 해류에 닿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비밀소녀와 나머지 두 사람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배가 완만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드리워진 장막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도록.
"날았다! 우리 지금 날았어!"
소피아의 두 눈이 보기 드문 순수함으로 크게 틔여진 상태에서 즐겁게 외쳤다. 융터르는 이제 자신들이 조정간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운이 쭉 빠졌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비밀소녀는 이제 처음과 달리 뻑뻑하지 않은 그것을 붙잡은 채 해류를 읽어내듯 바람을 읽어내려고 했다.
제 자리에 굳건히 서서 배를 몰던 캘리칼리는 이제 괜찮을거라며 그동안 붙잡고 있던 타륜에서 손을 놓은 채 갑판으로 다가갔다.
"수고 많았다. 지금까지 말이야."
자신만만함을 넘어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였던 그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입에서 순수한 감사의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다가 씩 웃고 말았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은 물론 세 사람의 반응 또한 낯설기 그지없던 캘리칼리는 곧 평소와 같은 능글맞은 얼굴로 되돌아와 이어서 질문했다.
"세상의 끝에 닿으면, 니들은 뭘 가장 먼저 하고 싶니?"
"음, 일단 저는 책을 쓰겠지요. 공상소설치고 꽤 기막힐겁니다." 그러면서 융터르는 비싼 돈을 들였어도 사진기를 꼭 들여왔어야 했다고 덧붙이며 후회했다.
"으음— 일단 저는 제대로 휴식하고 싶을거 같은데요?" 캘리칼리 다음으로 가장 고생한 탓인지 비밀소녀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아이 무슨 소립니까!? 세상의 끝에는 무수한 보물들이 있다고요! 그걸 먼저 가져가야지!" 소피아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여전히 한결같은 반응을 드러냈다.
근데 캘칼님은요? 이제 질문을 받은 세 사람이 역으로, 이 모험에 자신들을 끌어들인 장본인을 향해 말했다. 평소였으면 그 능글맞은 목소리로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던 그가, 자신을 향한 질문에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어라 답을 하려던 그때였다.
오로라에 뱃머리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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