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부터 저는 씹뜨억이라는 말을 누누히 해온 만큼 그렇고 그런 쪽으로 섭취량이 아주 많습니다. 비만이다, 이거죠.
2. 근데 하필 또 그런 취향을 정조준해서 꿰뚫어버리는 소재를 어느 분께서 던져주셨네요. 망상은 망상으로 보내야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만성은 오늘도 제 무덤을 팝니다. 고져스하게.
3. 흡혈귀 소재인 만큼, 유혈묘사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4. 그러한고로 누구를 탓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울먹이며 저는 제 탓임을 세 번 고백하나이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쥰내게 큰 탓이로소이다. 5.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1.
가로등도 없는 밤거리를 걷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밤거리를 걷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정말 원치 않았지만 그 길을 걸어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을 잡아먹기 위함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양 손을 쑤셔넣은 채 가는 사람이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얼핏보면 상당히 태연한 척하지만, 만약 더 가까이 다가가본다면, 모자 아래로 보이는 눈은 긴장감에 이리저리 오가고 있고 주머니 안은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오면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이. 그 귓가로 어떤 발소리가, 자신의 기척을 죽이며 일정하게 뒤따라오는 소리가 언제 자신을 덮쳐올지 모른다는 생각과 그리고.
"저기요?"
"으아아아악--!!"
귓가에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자 마자, 새된 비명이 거리에 메아리 쳤다. 동시에 그 사람의 주머니에서 작게 '파지직' 소리가 나는 뭔가가 뽑아져 나왔다. 호신용 테이저. 모자가 벗겨지도록 몸을 격하게 뒤틀며 그것을 내민 사람의 표정은 이미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바람에 모자에서 삐져나온, 잘 정돈되게 묶은 포니테일이 정말 그 이름값을 하듯 거리의 공기를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떨리는 팔을 애써 진정 시키려 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댔다.
"오, 오지마요!! 오지마아!! 나 이거 쏠 꺼야!! 쏜다고!!! 오지마아아-!!"
"아, 아뇨.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거, 실례했군요."
테이저의 범위에서 한 끗차이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한, 자신에게 말을 건 남성은 양손을 관자놀이까지 치켜올리면서 당황스럽고도 민망하다는 듯 머쓱해하고 있었다. 밤공기가 제법 추웠는지 검은색 목 폴라티에 가죽장갑과 코트 차림의 남성은, 파리한 얼굴로 거듭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듯이 말을 건네는 그 모습이 음흉한 꿍꿍이가 있기는 커녕 오히려 무해해보였다.
자신을 이 근처에서 사는 심리상담사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그녀에게 종종 이 거리를 산책하고는 하지만 워낙 위험한 곳이라서 사실상 순찰도 겸한다는 말을 그 부드럽고 중후한 목소리로 안심시키려고 했다.
땅에 떨어진 모자를 급히 주워다 푹 눌러 쓴 여성은 그 말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호의는 감사하지만 시간이 없다며 먼저 달려나가듯 앞서기 시작했다.
"아...아잇...!! 자꾸 따라오지 마세요!"
"아, 하... 안 따라 갑니다. 저도 저 큰 도로가까지, 네. 어차피 저 쪽으로 가야 하거든요."
먼 발치까지 도망친 그녀와 반대로 아직도 어두운 골목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자칭 심리상담사는 여전히 손을 머리까지 올리고 있었다. 정말로 가로등은 물론, 온갖 LED 조명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환하고 화려한 간판들로 가득한 저 대로에 볼일이 있다는 듯이.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몸이 먼저 다른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먼저 다다르었다. 뒤돌아서서 어두운 골목길을 바라보는 여성의 눈빛은 방금까지의 상황을 믿을 수 없어라 하는 그것이었다. 정말로 자기 갈 길 가는 김에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곁에서 같이 걸어주려고 했다고? 과도하리만치 긴장해서 만약 그 사람을 공격하는데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칫하면 실수라는 말로 덮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 뻔 했다는 마음에 골목길을 향해 감사함과 죄송한 마음을 담아 손을 흔들었다. 상대방도 그것을 보았는지 손을 똑같이 흔들어주는 것을 본 후, 그녀가 밤을 무시하는 거리를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2.
여성이 안전한 곳까지 도착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흔들던 손을 내린 카르나르 융터르는 새삼스럽게 뱃속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명백한 허기. 그의 차분했던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붉은 빛을 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성이 현명하게도 먼저 앞서 내달리는 것을 선택했기에 망정이지, 몇 주를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한 상황에서 부쩍 예민해진 감각으로는 방금까지를 요약하자면 먹어서는 안 될 진수성찬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군침과 함께 참아왔던 숨을 연달아 몰아서 쉬었다.
방금까지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이던 그의 얼굴은 다시 어두운 골목길로 향하기 무섭게 섬뜩한 미소가 대신하고 있었다. 뭐 진수성찬이 아니면 어떠한가? 언제부터 입맛 까다롭게 굴었다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그의 그림자가 살아있기라도 한 양 구불구불 움직이고 있었다. 먹잇감은 얼마든지 있는것을!
"동물 중에는... 약한 동물이 제 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허락하고, 그걸 잡아먹으려고 침범해오는 어설픈 포식자를 잡아먹는 사냥방식도 있다고 하더군요... 과연 훌륭한 사냥법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다시금 스물스물 그 자신에게 빨리듯 돌아오는 그림자의 끝에 닿아있었다. 평면으로만 움직이는 상식을 명백히 거부하고 단독적으로 꼿꼿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뱀, 그 자체였다. 똬리를 튼 그림자 안쪽에는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 따위로 가리고 있는 남자가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만 비틀려지고 있었다.
가쁜 숨을 연거푸 토해내던 그 남자가 융터르를, 정확히는 그 시뻘건 눈동자를 보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곧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막혀 그럴 수 없었다. 아아, 가죽장갑으로도 막을 수 없는, 뜨겁게 느껴지는 숨결이란!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그저 두 눈 뜨고 고스란히 보내줄 이유도, 그럴 여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포식자의 숨소리가 점차 제 흥분을 못 이겨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붉어지는 눈동자에 정신이 팔려 남성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포식자의 송곳니가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이쯤되면 그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 그 이변을 알아차린, 전 포식자이자, 현 피식자는 목덜미에서 뜨거운 뭔가가 몸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소리지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아주 작게, 하지만 허겁지겁 뭔가 꿀꺽거리고 빨아들이는 소리만이 은은하게 골목길을 채웠다.
"잘 먹었습니다, 라고 하기도 아깝긴 하군요. 뭐, 제가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있겠냐만."
입가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흡혈귀가 말했다. 더 이상 목덜미에서 핏방울조차 맺히지 않는 먹이가, 그보다도 창백해진 채로 땅에 떨어지면서 자빠진 그대로 바들바들 떨면서 속삭이고 있었다. "살려줘"
워낙 조용한 장소였기에 그 숨결에 실린 속삭임을 알아들은 그는 이미 도로 눈동자가 어둡고 푸르게 변해있었지만 아직 삐져나온 송곳니는 제자리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불행이랄지, 다행이랄지, 초점이 풀려 어딘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를 저 먹이는 흡혈귀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내려보는지 몰랐다. 남길 이유는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그저 귓가에,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뱀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한 멀리서 들려오기만 할 뿐.
3.
흡혈귀의 상담실은 한 낮에도 영업중이었다. 암막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형광등을 환하게 켠다면야,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키도, 덩치도 웬만한 사람들은 가뿐하게 쓰러트릴 '헌터'라는 저 족속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카르나르 융터르가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는 그 놈의 감시를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뭐, 자네가 지금도 어찌저찌 잘 생활하는 것 같으니... 난 그만 가야지. 자네랑은 다르게 골치 아픈 놈들이 좀 많아서 말이야."
"제발 가주시죠. 기왕이면 아주 멀리 지구 반대편으로 꺼져주시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극찬이구만?"
천장에 머리가 아슬아슬하니 닿을 정도의 거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고는 배웅은 커녕 쳐다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 흡혈귀에게 뭔가를 던져주었다. 면전에 대놓고 날아오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놓고나니, 제법 커다란 '혈액정제'라고 적혀있는 플라스틱 약통이었다.
"그--으... 자네가 정말로 인간 취급도 아까운 놈을 잡아먹는건 아는데, 그런 놈들이 뭐 늘 나오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다 알고... 온 거였습니까?"
"물론이지. 앞으로도 조심하라고. 정말로 무해한 민간인에게도 그 짓거리를 하는 날이 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모가지는 따줄테니까, 궁금하면 한번 저질러보시던가."
방금까지 능글맞게 웃던 사람 대신 살기를 거리낌없이 뿜어내는 사냥꾼이 흡혈귀를 노려보았다. 그나마 공존을 희망하는 카르나르 융터르이기에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자들은 이미 저 자의 말뚝에 심장을 꿰뚫린 지 오래였다. 그 밤산책 이후 7일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허기를 느끼고 있던 흡혈귀는 기꺼이 그 약병을 열어 한 알 입에 털어넣었다. 그 이름답게 어딘가 인공적인 느낌은 있지만 나름대로 포만감이 느껴져,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순순히 받아먹는 그 모습에 오히려 어색함을 느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다리를 덜덜 떨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근데, 만약 내가 준 약도 없고, 잡아먹을만 한 나쁜 놈들도 없으면 자네는 어떻게 버틴건가?"
"흠.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다른 놈들에게도 그 비법 전수 좀 해줄까 해서 말일세. 자네가 나름대로 모범수 같은 존재라는게 믿겨지진 않지만."
"별 수 있습니까? 정육점에 신세 좀 많이 졌습니다."
생각보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그 말에 사냥꾼이 처음에는 낄낄거리는가 싶더니 곧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에게는 그 어떤 개그보다도 재밌던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연신 땅을 치고 웃어대던 그가 눈물을 훔치고는 "그래, 그 말 꼭 전달하지. 전문가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철분 많은 부위 추천도 나중에 받겠네." 라고 말하며 상담실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흡혈귀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나마 유도리 있는 저 자이기에 자신의 생활을 어느정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사냥꾼치고 이상할 정도로 유연한 저 태도가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에 태양빛에 몸이 불타거나 아니면 심장에 말뚝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아 참. 약을 더 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못 물어봤는데."
별 생각없이 커튼을 젖힌 순간 강렬한 태양빛이 그의 옷을 뚫고 살갗에 닿았다. 순식간에 매캐한 탄내가 상담실 안을 진동하며, 그는 그 찰나의 순간에 바로 불타버린 손목을 부여잡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주체할 수 없는 갈증과 더불어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잔혹하게 깨우쳐주는 저주가 흡혈귀는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본인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된지 벌써 백여년이나 시간이 흘렀어도 이따위 삶이라니.
급하게 다시 커튼을 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도로 의자에 앉은 그는 약통의 남은 약의 갯수를 찬찬히 가늠하다가 곧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 한껏 뒤로 몸을 뻗었다. '그래, 다시 또 올테니 그 때는 좀 넉넉하게 챙겨달라고 말이나 해보자.' 그러는 동안 밤에 산책이나 하지 뭐.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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