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만성은 드디어 미쳤습니다. 히어로즈 쓴다고 매일 주겨줘...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과학팸으로 망상을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2. 근데 더 미쳤습니다. 아예 소재를 스스로 생산할 능력도 안된다고 헬프콜을 쳐버렸으니까요. 이걸 사회에서는 잉여인간이라고 사회적 합의를 봤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아름답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이 얼마나 많습니까?
4. 그리하여 김만성은 무덤을 좀 많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무덤을 파다니, 심각한 변태입니다.
5. 그리하여 과학팸 망상 옴니버스(?) 제1편 시작하겠읍니다.
6. 조금 순서가 늦었지만 좋은 소재 주신 몽블 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도 감사인사드립니다.
7. 조폭 소재를 차용한 터라, 욕설이 좀 많습니다. 욕설 주의 부탁드립니다.
살점이 짓이겨지고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 누가 더 많이 때리고 적게 때렸는지 구분도 못할지언정, 결국 끝까지 서 있는 놈이 이기는 법인, 이 어둡고 무도한 거리에 한 남성이 펴진 곳 하나 없이 피투성이인 알루미늄 배트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승리자의 포효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시끄럽고 요란하게 쨍강 소리를 내다 곧 잠잠해졌다.
단 한 명을 꺾지 못해 죽은 자들은 이미 이 업계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불명예다. 팔뚝이 도화지로 된 것처럼 문신투성이인 남성은 모욕감을 그러모아 상대 조직의 행동대장 격이었던 놈의 다 식은 몸뚱이에 피가래를 뱉어냈다. 이거나 먹고 부활이라도 해보시던가. 이 개좆같은 빙시 새끼야. 한참을 악다구니에 받쳐 치고 박고 싸웠더니 정신이 아득해서 당장은 쉬고 싶은 마음 밖에 없던 그의 정신에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이상하게 거슬리는 목소리.
"경찰입니까? 여기 사람들이 쓰러져있습"
"이런 씨발...!!"
뒤를 돌아보니 누가 봐도 여자애였다. 이 쬐깐한 년이 현장을 신고하면, 자신은 분명 원치않는 큰 집살이를, 그것도 좀 많이 할 것이다. 형님이 맡기신 일에 저 썅년이 초를 쳐? 남성이 그런 생각에 얻어터지고 베여 아픈 것도 잊은 채 주먹을 바로 날렸다. 아니 날렸어야 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떡대도 쓰러트리는 자신의 주먹이 저 뼈랑 가죽 정도밖에 안 남은 요상한 년한테 막혔다. 그것도 한 손으로
주먹을 단단히 잡힌 남성이 이를 뿌득하고 가는 소리를 내며 성질을 부렸다.
"뭐, 뭐야 썅...!! 이거 안 놔? 이 씨발년 내가 너 죽여버린다. 이거 안 놔--!!"
"안녕하십니까?"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
"아?"
자신의 주먹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주제에, 해맑게 웃는 그 모습에, 그는 자신의 빈약한 어휘력을 한껏 끌어모아 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 "이건 또 뭔데? 씨팔..."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지만 이건 숫제 기계 사이에 손이 끼어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수준이다. 그렇게 퉁퉁 붓도록 만들어버린 저 괴상한 여자애. 구름 사이를 뚫고 달빛이 나름대로 환해지자 더 선명히 보이는 이 애는 정말로 요상했다. 저 파랗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초록빛이 감돈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머리카락이며, 볼따구에는 뭔 쇳조각 같은 것이 붙어있는데? 아니 그것보다도 눈깔이 왜 저렇게 생겼는지도, 본래 무작정 돌격하곤 하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엿같았다.
그 여자애가 가지런히 배꼽 언저리에 양 손을 올리고는 꾸뻑 인사를 했다. 기계음이 잔뜩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쿠 0089입니다! 마스터를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마스터..어? 뭐야 씨, 그건 뭔데? 또. 뭐 니... 니 주인?"
"그렇습니다! 저는 마스터를 찾아야만 합니다!"
남성은 이 비현실적인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런 니미 개좆같은 소리는 뒈질 때 쯤에야 듣는다고 하니까, 차라리 정신을 차리면 땅바닥에 누워서 피나 질질 흘리라고.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오도카니 서 있었고, 그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자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난 사이는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고 입력되어있습니다!"
"자기소개... 니미 씹. 염병하네. 야. 가라. 경찰한테 신고나 하지말고."
"어어... 오류! 도움을 청하면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오류! 오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애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저런 얼빠진 소리나 하고 자빠졌지. 그러니까 저런 얼빠진 기계인 것이지. 남자는 연거푸 오류라며 외치는, 자신을 '하쿠'라고 소개한 그 여자애에게 아가리 좀 닥치라고 윽박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융통성 없는 깡통년.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어떤 원수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짓씹어 내뱉듯 말했다.
"...용식. 용식이라고 불러라."
"네! 용식 님 반갑습니다! 마스터를 찾는데 도움을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썅, 야! 그거 아니라고!!" 용식은 그나마 짧게 붙들고 있던 인내심을 전부 써버리고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용식아, 쟤는 대체 뭐냐?"
"죄송합니다. 만석이 형님. 저도 궁금합니다."
"야, 니가 모르면 어떻게 하냐?"
그의 형님. 만석은 성인 나이트 클럽에 애를 끼고 온 용식의 모습에 먼저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 여자애가 로봇이라는 사실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라고 묻는 그의 얼굴에, 치료도 아직 제대로 못한 용식은 고개를 푹 수구리면서 그저, '죄송합니다' 라고만 되뇌이고 있을 뿐이었다.
용식도 나름대로 변명할라면 할 것이 많았다. 그저 형님이 시킨대로 적 조직원들을 아작내고 자리를 뜨려니까 이 쬐깐한, 하쿠가 마스터를 찾아달라며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하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보다 힘도 센데. 하지만 조직의 세계에서 변명이라는 것은 곧 불복종의 표시. 그러니 그저 죄송합니다만 연거푸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석이 덥수룩한 머리를 북북 긁어대고는 용식의 바짓자락만 붙들고 있는 하쿠에게 자신의 기준으로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니?"
"어-어... 잘 모르겠습니다!" 하쿠는 똘망똘망한 눈(이라기보다는 렌즈)을 빛내며 천진난만하게 답했다.
"아니, 그, 내 말은... 그 마스터 라는 사람말인데, 우린 몰라. 찾는 것도 못 도와준다고. 여기 있을 필요 없잖냐. 안 그래?"
"하지만 용식 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하쿠의 그 폭탄같은 발언에 만석은 물론이고 다른 조직원들도 용식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용식도 하쿠를 쳐다보았다. 차마 존경하는 형님 앞이라 욕설은 하지도 못하고 그는 그저 "야, 내가 어,어어,언제! 언제 그랬다고! 그냥 이름만 알려줬잖아!" 라고 얼굴이 시뻘개져라 말할 뿐이었다.
그 꼬라지에 할말도 이성도 잃은 만석은 더 이상의 사고를 치기 전에 가까스로 싸구려 담배를 하나 입에 꼬나 물고 그 연초가 반 이상 타버릴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재떨이에 짓누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얘 일이나 좀 시켜봐라. 서빙, 청소 뭐. 그런걸로다가."
"형님!" 용식이 그 말에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자, 만식도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소리 질렀다.
"아 저게 안 떨어진다잖아! 일하다 보면 지도 좆같은 곳이구나 하고 떨어져나가게 내비둬!"
만석이 상황에 질렸는지, 용식이 그를 뒤에서 "형님! 아, 형님!!"하고 불러도 들은 척도 안하고 나가버리고, 곁에서는 하쿠가 "잘 되었습니다! 용식 님!" 이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는 바람에 그는 속이 뒤집어져도 어떻게 표현 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여자애, 하지만 기계인. 죄책감과 안도감의 어중간한 경계선에서 하쿠는 의외로 잘 적응했다. 그 천진난만하고 순수함이 직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 서로 드잡이질을 하던 놈들도 멀찍이서 하쿠가 그 청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십니까?" 라며 다가오면 저들끼리도 머쓱해져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적당히 화해하곤 했다.
하물며 만석에게도 종종 얼굴을 비추는 하쿠는 특유의 붙임성과 귀여움으로 제법 친해졌다고 할 사이가 되었고, 그의 책상에는 가끔 어울리지 않는 동화책 따위가 올라와있기도 하였다.
클럽 운영의 측면에서도 늘 자기들 혈기를 못 이긴 끝에 애먼 가구들이 박살나는 걸 수습하느라 이래저래 위장이 좀 쓰렸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득이기도 했고. 가족이 아닌 일반 직원들도 하쿠의 늘 순진한 태도에 한껏 부드럽게 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만석은 클럽 입구에서 어깨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길길이 날뛰는 취객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코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는데, 솔직히 당해도 싸다는 것이 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쪽이 아니었다. 만석은 뒤돌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용식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야, 용식아."
"예. 형님."
"하쿠 좀 간수 잘 해라. 벌써 몇 번째냐 저게?" 입구 쪽에는 취객이 경찰을 부르네마네 하고 있었다.
"단디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식이 하쿠의 손을 제딴에는 조금 부드럽게 잡고 뒤로 물러났다. 영문을 몰라하는 하쿠의 얼굴에는 피가 살짝 튀어있었다. 졸지에 보호자가 된 용식은 휴지를 아무렇게나 빼서 그 얼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아냈다. 더불어 그 손도. 취객의 얼굴에 붉은색 색조화장을 넣어준 것이 다름 아닌 하쿠 였다.
그는 한숨을 픽픽 쉬면서 중얼거렸다.
"야, 하쿠. 내가 취한 새끼는 내비두고 그냥 저기 아저씨들한테 가서 말하라 그랬지?"
"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너 자꾸 주먹질 할래? 니 마스터 찾는다 캤냐 안 했냐?"
"...했습니다..." 하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떨렸다.
"마스터가 너 그렇게 주먹질하고 댕기는거보면 좋아하겠냐? 너 이거 금지야. 알았어?" 버릇처럼 욕을 섞으려던 용식이 말을 뚝 끊었다. 하쿠의 표정 때문에.
만약 기계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저 끄덕거림에 이미 굵고 작은 방울들이 후두둑하고 떨어졌을 하쿠의 표정을 용식은 애써 무시했다. 가뜩이나 만사를 주먹으로 해결하던 자신이 이상하게 하쿠한테는 말로 설명하려는 상황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손이나 내미는 정도가 그가 생각해낸 최대의 위로방법이었다.
그러나 하쿠는 그런 용식의 손을 꼭 쥐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떨어지지 않았다. 잔뜩 시무룩해져서, 울 수만 있다면 그럴 얼굴인 주제에. 사람과도 같은 부드럽고, 여린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에 적응을 못하는 용식이 내심 몸서리를 치면서 몇 발자국 정도 더 걷다가 그런 기계에게 몸을 돌렸다.
"니 배고프나?"
"배...는 모르겠습니다! 에너지가 현재 절반 이하입니다!"
"그럼 배고픈거지 뭐 씨... 니, 밥..묵을 줄 아나?"
"저어는... 기름을 먹습니다! 저번에 주방에서 카놀라유 라는 것을 먹었는데 맛있었습니다!"
"카, 카놀라유. ...오냐 알았다. 가자."
이런 걸 보면 기계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소녀다. 가끔은, 방금 전처럼 취객한테서 자길 구하겠다고 주먹질을 날리는 꼴이 또 기계구나 싶다가도, 지금도 기름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기계인갑다 싶다가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살갑게 굴다가도 유독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것이. 천생 깡패로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던 용식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요새 주방에 과할 정도로 쌓아놓는 카놀라유도 온전히 그런 하쿠를 위한 것임을 그는 최근에 알았다. 종종 서빙하지 않아도 주방을 기웃기웃거리더니만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나, 카놀라유를 정말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고 용식은 어쩐지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리는 것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하쿠가 시선을 마주치며 물어왔다.
"용식 님은 무엇을 드십니까?"
"아."
내친김에 자기도 밥 먹겠다고 해서 마주보고 앉아있던 용식은 식탁 위에 올려진 밥상을 바라보았다. 남는 기름 덕분에 요새 튀김 요리가 종종 올라오곤 했는데. 그는 끝의 꼬리가 빨갛게 달아 오른 채 그 내용물을 갈색의 바삭거리는 옷으로 감싼 요리를 하나 집어 보여줬다.
"새우튀김."
"맛있어보입니다! 저도 나중에 식사를 할 수 있으면 꼭 먹어보겠습니다!" 하쿠는 눈을 좀 더 빛내며 말했다.
"오, 오냐." 용식은 그리 답하면서 한 입 베어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 뒤로 용식은 예전보다는 풀어진 얼굴로 하쿠와 같이 마트도 들리고, 때때로는 동화책도 산답시고 서점에도 가보고 하였다. 그럴적마다 주변에서 "아이고 딸내미 시집 보낼때 사위 될 사람은 간 띵띵 부어야 긋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도 반응하기 귀찮고, 그 보다도 그런 쑤군덕거리는 것들 따위는...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롯이 하쿠에게 집중되어있었다. 길가에 햇볕을 쬐며 늘어져라 누워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좋아하는 하쿠. 동화책을 읽으면서 즐거워하고 때때로는 슬퍼하기도 하는 하쿠. 한번은 카놀라유가 아니라 실수로 올리브유를 주었는데 그 어느때보다도 눈을 빛내며 연신 맛있다고 하는 하쿠. 어떻게 알았는지 "올리브유에는 여러가지 등급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맛있다는 것이 엑스트라 버진 등급이라고 합니다!" 라면서 사달라고 졸라대는 하쿠. 언젠가 그런 응석을 만석이 형님이 들었는지 선물이라며 들고왔던 그 올리브유에 기뻐하던 하쿠.
그의 새빨갛게 피범벅으로 점철되어있던 삶에 밝은 하늘빛처럼 하쿠가 스며들었다.
어느 날, 하쿠에게 마음을 조금은 더 연 용식이 언젠가는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있던 그녀에게 물어봤다.
"야, 하쿠야. 니 마스터는 왜 찾나? 거 맨날 찾는다 찾는다 캐쌓기만 하고..."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 장치에 중대한 손상이 발생해서어... 어쨌든 마스터를 찾아야 합니다!"
"기억장치?"
하쿠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 한 구석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바깥에 있는 모양이었다. 뭔 제작자가 저리도 허술하노. 어이가 없구만. 용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름대로 만든 사람이 부모 뻘일텐데 자식 앞에서 부모 욕하는 것도 할 짓은 못되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최근 용식은 종종 하쿠가 어딘가 고장이 났나 걱정이 될 적마다 들리는 곳이 있었다. 도파민 박사 연구소 라는 간판만 붙어있는 이상한 장소.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이 종종 기계하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우연찮게 본 이후, 자신보다는 하쿠를 더 잘 돌봐주겠거니하고 얼굴을 비추는 것이다. 마침내 기억장치 쪽을 건드리게 된 박사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으이이... 이거 어렵구만... 으이.."
"뭔 문제 있...어요?"
도파민 박사는 모니터를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도통 굴러가지 않던 용식이 참다못해 답을 재촉했지만 암담했다.
"으이... 이거, 복구 불가능이에요. 으이...."
"아니, 댁이 최고의 박사라면서, 이런 것도 못해?"
여전히 선이 목 뒤의 연결부분에 꼽혀있는 하쿠는 얼핏 보았을 때 잠든 것처럼 보였다. 만약 데이터라는 놈이 무사히 복구가 된다면, 이제 자신은 옛날 그 익숙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도파민 박사는 용식의 겁박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으이이... 이게 데이터만 날아갔으믄 복구가 될 수도 있는디... 물리적으로 손상이 가부렸으요... 이이..."
"물리적?"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 용식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이... 누군지는 몰라도 강하게 때려서라든가 해가지구는, 아예 훼손이 심하게 되버린거에요 이잉...."
하쿠의 기억장치가 있는 관자놀이 언저리를 톡톡 치고는,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에 지나친 충격을 받고 기억상실이 오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며 박사는 덧붙여 설명했다. 사람은 간혹 기적처럼 다시 기억이 돌아오지만 기계는 그러는 경우가 없으니 포기하라는 절망적인 말과 함께. 눈가를 찌푸린 용식은 선을 빼도 된다는 박사의 말에 바로 빼서 아직 눈을 감고 있는 하쿠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조금 무거웠다. 마스터는 못 찾아줘도 아버지 노릇은 좀 더 해줘도 되지않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박사가 그 자신의 머리로 설명하기 위해 건드렸던 부분을 얼핏 본 용식은 노인의 말처럼 하쿠의 그 부분에도 뭔가가 툭 튀어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머리카락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걸 살짝 건드리려고 하자 박사가 기겁하면서 말했다.
"이잉!! 그게 기억장치에요! 함부로 건들지 마요잉...!!"
"아니 건드는 게 뭐가 어쨌다고..."
"지금 아주 상태가 불안정해요... 으이이... 까딱하다가는 기억이 다 날아갈수도 있으니께 건들지를 말어요..."
그게 그 정도였나 싶어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용식은 연구소를 나가기 직전, 깡패는 이상한 포스터를 보았다. '실험지원자 모집'?
"이, 이봐요 박사. 저거 뭡니까?"
"이...? 이잉... 그거는 이제 신체 활동을 증강시키는, 그런 종류의 실험이에요. 이잉..."
"워우씨... 하는 사람은 있긴 한가?"
"읎어요, 아직은...이잉..."
기대와 다른 결과에 실망감에 젖어있던 용식은 본래 돌아가야 할 길을 몇 배는 더 많이 걷고 있었고, 그 사이에 하쿠는 정신을 다시 차렸다. 딴에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내려주십시오! 저도 걸을 수 있습니다!" 라며 아기새 마냥 지저귀는 그 응석에 용식이 피식 웃으면서 내려줄 때였다. 그의 뒤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여럿 들리고.
"이야아아... 씨발... 우리 용식이가 여기서 다 얼굴을 비추냐아...? 무슨 지랄을 하실라고 여긴 또 오셨을까... 으응?"
"아따... 개 좆같은 면상들 또 보네... 씨이발꺼..."
예전에 그가 단신으로 쓸어버리다시피 했던 상대 조직원들이 복수랍시고 연장을 손에 손마다 쥐고 있었다. 그제서야 용식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 여기 그 새끼들 나와바리인데.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손해보는 것은 자신이고, 피해를 입는 것은 하쿠다. 그는 하쿠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야 하쿠야. 내 손 꽉 잡아라."
"천하의 용식이가 우리 쪽에도 다 오고 말이여... 응? 왔으면 환영인사는 혀야지. 안 그르냐."
상대 조직원들이 점차 용식을 구석으로 몰아가려고 할 때, 용식은 하쿠의 손을 꽉 쥐고 냅다 달렸다.
"하... 씨발.... 저 개새끼들 좆도 할일도 없나..."
"괜찮으십니까? 많이 다치셨습니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사이에 용식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많이 입어버렸다. 하쿠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품에 안고 뛰다보니 생긴 것이다. 어둑한 골목길에 숨어 잠시 숨을 돌리는 찰나에도 그런 하쿠가 걱정하며 그의 상처를 일일이 봐주고 있음에, 용식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미안함에 그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지도 못했다. 평소랑 다른 그의 태도에 하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손 더러워 임마... 지지다 지지. 집에가서 해줄게."
"더럽지 않습니다..." 하쿠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진즉부터 드러웠다. 니 만나기 전부터." 용식은 애써 그 손을 뿌리쳤다.
용식은 새삼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 어두운 골목길.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도 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어.
그때는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나 아파.
숨을 연거푸 몰아쉬던 그는 다시 하쿠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내달리고 싶었다. 칼에 찔린 곳 중 한 군데가 꽤 치명상이었던 모양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는 몸에서 힘이 점차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러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이 고통을 호소하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숨이 점차 가빠오기 시작했다. 멈출 수는 없는데, 빨리 하쿠를 집에 데려다 줘야 하는데....
급하게 비어있는 건물로 몇 층은 올라간 용식은 어떤 결심을 하고 하쿠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하... 하쿠야... 내 저 개새끼들이랑 좀 이야기 할테니까.... 니는... 눈치껏 봐서 도망쳐라. 알았나?"
"...싫습니다! 저 가기 싫습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눈치 챈 하쿠가 도리질을 세차게 했다. 엉망진창인 머리카락.
"내 말 들어라 하쿠야. 그냥 가는게 아니야. 집에 가서 형님하고... 아저씨들... 불러와 줘. 그러믄 된다. 알겠지?"
"아버지!!"
어떤 예감이나 혹은 계산을 했는지, 비명을 지르는 하쿠는 끝끝내 안 가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렇구나. 넌 지금 내가 어떻게 될지 아는구나. 용식은 정신과 육체적인 고통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그나마 덜 더러운 손으로 하쿠의 볼을 처음으로 만졌다. 따스했다. 선명한, 밝고 푸르른 색이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안도감. 그는 결국 눈가에 뭔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거푸 그 따스함을 갈구하던 손이 점차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고. "다시 만나자. 하쿠야. 꼭."
푸른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어있는 건물을 에워싼 상대 조직원들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저 안에 들어가있는 놈은 단 한 명이지만, 그 유명한 미친개가 아니던가. 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진을 치고 있었다. 곧 건물 안에서 지친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입구까지 나온, 피투성이인 용식이 전에없이 눈에 독기를 넘어 아예 악을 머금고 있었다.
"씨-팔... 좆이나 떼 빙신새끼들아... 나 하나 잡자고 열 명이 몰려와? 븅신들..."
용식이 으르렁거리면서 조직원들에게 더 다가기 시작하면, 조직원들은 뒤로 그만큼 물러났다. 그 모습이 웃겼던지 피로 범벅인 그의 얼굴 사이로 치아가 하얗게 드러나며, 그는 다시 비웃었다.
"좆만한 병신 새끼들..."
"야 씨발 다 덮쳐!!"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조직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바라던 바다. 용식은 늘 품고 있던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빼서 가장 먼저 달려드는 조직원의 목덜미에 곧바로 꽂아 넣었다가 빼냈다. 피 웅덩이를 밟은 용식은 반쯤은 울부짖으며 "다음"을 외쳤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더 없냐?! 그럼 뒈져 씨발 새끼야!!
죽은 놈들의 시체에 발길질을 연거푸 한다. 팔이 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리 속마저 잔뜩 늘어진 테이프처럼 변해서 가장 분명한 생각 하나 빼고는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인 조직원들의 시체가 아직 굳지도 않아 그 물컹거리는 것에도 대응을 못하는 발에 나자빠져도, 용식은 비틀거리고 휘청거려도 움직였다. 가자. 하쿠야. 그래. 그 곳으로 갈게.
흐릿해져도 이제는 익숙해진 시야에 맺힌 한 건물이 보였다. 하쿠야. 네가 안내해줬구나. 너와 같이 간 길이었기에 결국 도착할 수 있었구나. 안도감에 휩싸여 몸이 한껏 가벼워진 용식은 그대로 원했던 목적지의 코앞인,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을 날듯이 도착했다.
"이잉... 겨우 정신이 들었구만..."
"박사..." 노인의 얼굴을 알아차린 깡패가 겨우 안도의 한숨 섞인 말을 할 수 있었다.
"으이... 여길 굴러서 오시면 으뜨케 해요! 병원을 가셔야지 여긴 왜 오셨어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박사는 나름대로 치료를 해줬는지, 자꾸 감기는 시야에도 붕대에 피가 점점히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용식은 그것도 안심이 되어 남은 정신과 의지를 한데 그러모아 말을 했다.
"그 개조실험... 나한테 해봐요. 어서..." 그의 말이 점차 숨소리와 구분 할 수 없게 흐려지고 있었다.
"으이?"
"인정 안 할라고 했어... 나... 하쿠 아빠야... 딸한테 돌아갈 겁니다... 나아..."
"..."
"아...빠가... 딸을... 행복하게 해줘야...지...."
처음으로 부드럽게 웃은 용식의 정신은 그 말을 끝으로 달큰하고 어두운 밤공기에 가라앉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만석의 조직원들이 그 후로 용식을 찾느라 시간을 몇 달 넘게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하물며 하쿠도 그 일이 있은 후로 실종이 되어버렸다. 변화라면 또 있었다. 도파민 박사 연구소에는 스스로를 '새우튀김'이라 부르는 한 남자가 실험에 매진하고 있었다. 노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그 위에 프로펠러가 달린 유치한 모자와 실험복.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던 도파민 박사와 그의 창조물, 왁파고는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으이... 일단은 잘 된 것 같구먼..."
[박사님. 저 사람에게 어떤 실험을 하신겁니까?]
"이이... 딴 거는 안 했으... 저 머리에 일정한 뇌파 신호를 자극하도록만 혔지... 이잉..."
박사는 곧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했으므로, 왁파고는 늘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다. 박사는 새우튀김을 보면서 언제 그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걱정을 했지만, 가끔가다 나오는 과격한 말투만 빼면 딱히 그럴 일은 없어보였다. 어쩌면, 그가 원해서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내재된 불안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박사는 "아오...씨. 뭐가 어떻게 된거야?" 라고 연신 중얼거리는 새우튀김을 목청껏 높여 불렀다.
"제자야! 시간 되었다! 그만 가야지!"
"아, 벌써 시간 그렇게 됐어요?"
새우튀김은 "와 씨, 시간 쥰내 빨리 흐르고. 개무섭네." 라며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저런 박사와 같이 엮여서... 그는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면접장에서 대뜸 자신더러 제자라고 부르던 저 괴상한 박사가 익숙하긴 했지만 저런 박사를 교수로 둔 적은 없는데. 뭐 힘들어서 기억이 깜빡깜빡한가보다, 그리 넘어간 그는 그 사람의 새로운 멤버를 뽑는 면접장소에 면접관으로서 쭐래쭐래 박사의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어?"
"안녕하십니까? 마스터를 찾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한 소녀.
아니 기계라고 해야 하나.
새우튀김은 유독 한 참가자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사람같지 않은 푸른빛의 머리카락. 어딘가 들어 본 적있는 기계음. 다른 참가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더라도 이상하리만치 눈에 꽂히는 그녀에게 새우튀김은 자유대화시간을 빌미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자야, 이 씹덕스러운 게, 네가 만든 거 아니냐?" 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부터.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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