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뢴트게늄
어딘가 어설프게 손바닥을 두 번 짝짝 맞추고는 인사를 꾸뻑하는 그 아이가 귀여웠다. 제단 위에 올려진 것은, 분명 저 조막만한 손으로 빚어낸 것이 틀림없는 주먹밥이며 그마저도 객관적으로 말해,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뢴트게늄은 그 생김새에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누가 지적을 하든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그러나 신사에 설치된 배전함에는 그런 걸 넣는게 아니라며 아이의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남녀가 꾸중을 했다. 곧 아이의 입이 가로로 죽 벌어진 네모꼴이 되어 잉잉 우는데, 그 사이로 “그치만 돈은 치료비로 다 나가잖아요”와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건강을 기원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 자리에서 없을 법한 인물이라면.
아 그렇지, 오늘은 어린이날이 아닌가. 신사 곳곳마다 팔락팔락 소리를 내며 휘날리는 잉어 모양의 깃발이 이제서야 뢴트게늄의 눈에 띄었다.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가 울며 기도를 드렸으니, 아마도 동생이 크게 아픈 모양이었다. 그 말대로, 어린이는 빨리 동생이랑 같이 놀고 싶다며 투정이라기에는 가슴아픈 말을, 똑같이 안쓰러운 얼굴로 자길 내려다보는 부모님에게 했다.
“신께서 네 부탁을 들어주셨을거야. 그러니 오늘은 걱정말고 맘껏 논 다음에, 동생한테 줄 선물을 고르자.”
아이는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렸지만 용케 그 소리까지는 내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울면 결국 동생에게 해가 갈거라 믿는지 어머니가 얼굴에 문지르는 휴지의 까끌한 감촉을 이겨내고 애써 웃기까지 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족들이 떠나고, 뢴트게늄은 공물로 바친 주먹밥을 우적우적, 깔끔하게 먹었다. 공물을 받았으니 이제 소원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내년 어린이날에는 꼭 제 누나를 닮은, 어딘가 고집 센 인상의 남자아이도 이 신사로 올 것이고, 그 때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즐거운 생각을 멈춘 신은 들뜬 발걸음으로 훌쩍 떠나기 시작했다. 그 분홍빛 머리카락만큼 화려하였다.
2. 💫🍹🖼️ / 비밀소녀
누굴까, 태연한 척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분명 비밀소녀가 느낀 감정은 단호하고 확실하게 현기증을 동반한 아찔함이었다. 곧 그녀 주위로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며 저마다 한 마디 씩 하고 있었다. 불행한 점이라면 그들이 지금 눈 앞에 있는 사진에 대해 어떻게 평하는지를 그녀는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며, 다행인 점은 그 모델이 바로 사진 앞에서 겨우 감정조절을 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진 속 그녀는 수많은 알록달록한 풍선들을 손에 쥔 채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찍혀있었고, 그 액자 아래에는 소녀와 비밀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누구일까, 자신을 찍은 이 사진가는. 분명 언젠가 이런 쟁반같은 보름달의 빛을 느끼며 하늘을 날았던 적이 있을때 찍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액자 밑에 적힌 제목 외에는 누가 찍었는지 정보가 없었다.
“감명받으셨나봐요?”
그녀의 등 뒤로 부드럽고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쭈뼛거리면서도 당당한 기세가 은은히 섞여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치고는 옷차림이 그리 고급지지는 않은 탓에 위화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상대방이 손에 들고 있던 차가운 유리잔을 내밀었다. 그 안에서 열대과일 특유의 향이 올라오는 사이로 비밀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찍었습니다. 제목을 ‘무제’라고 출품하려고 했더니 사진전 측에서 거절을 해서 별 수 없이.”
쑥스럽다는 듯 사진사는 쓰고 있는 빵모자가 들썩거릴 정도로 뒷머리를 긁고는 이어서 나지막하게 어쩌다 보니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전에 출품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꼭 제대로 된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을 흘리듯 하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자리로 곧 떠났다.
그 모습을 본 비밀소녀는 사진사가 건네준 음료수를 한 모금 입에 굴리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이걸 훔쳐낼 생각이었지만 계획을 변경해야겠네요.
3.🐎🌌🍁 / 단답벌레
단답벌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충동적인 마음으로 홀연히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그의 충실하고도 사려깊은 동물은 그저 오래간만에 멀리까지 내달리는 기쁨으로 밤바람을 가르며 유연한 질주를 즐길 뿐이다. 그 쾌속에 답답했던 단답벌레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투레질을 하며 뽀얀 콧김을 훅 뿜어내는 덩치 큰 친구를 진정시킨 그는 안장에 매단 짐가방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말에게 건네주었다. 간만의 운동이 즐거웠던지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잘도 먹는 그 모습을, 단답벌레는 그저 말없이 다른 손을 뻗어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어줄 뿐이다.
그 시선을 알았는지, 갈색빛을 띄는 그 거마가 갑자기 작은 체구의 기수에게 고개를 힘껏 부볐을 때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지만 단답벌레는 그것마저도 어쩐지 속이 후련해지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적의 자유로움을 이제와서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어딘가 먼 발치에서 밤에만 제 짝을 찾는다고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아득하고 아련하게 들려온다. 누운 그 자세 그대로 깊은 숨을 몇 번이고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거듭하자, 잘 마른 단풍잎이 내는 특유의 향이 은근히 올라온다. 어두운 밤이라 미처 몰랐는데 여긴 단풍나무 숲이었나, 단답벌레는 알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오는 듯 하였다.
그 위로 기수를 쓰러뜨려버린 말이 어딘가 불안하고 미안해 하는 눈으로 내려다 보는가 싶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던 것일까? 육중한 소리가 조심스레 그 옆으로 천천히 앉는가 싶더니 곧 그 머리를 기수의 배 위로 살포시 얹었다. 마치 쓰다듬어달라는 듯.
그는 아주 살짝 웃었다.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애교만큼은 확실히 부릴 줄 아는 친구가 한없이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탓에, 평소부터 매만져주면 좋아라했던 콧잔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만족감에 콧김소리가 푹 새어나오는 것을 들으며, 단답벌레는 하늘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아”소리를 냈다.
이토록 맑은 밤하늘이라니. 옛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영웅이 흩뿌렸다던 은하수가 그 이름값을 하듯 우윳빛으로 수놓은 하늘을 보며 한 사람과 그의 친구는 더없는 행복감으로 충만해졌다.
4. 🧸🎀🌸 / 캘리칼리
그저 벚꽃축제라길래 심심한 마음으로 참여한 사격게임장에서 엉겁결에 우승을 했다. 그건 캘리칼리 데이비슨에게 있어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1등상이 자기 덩치에 조금 못미치는 굉장한 크기의 곰인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심지어 이 놈, 무게도 묵직하지 않은가!
“으아아—, 이거 어디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가는 꼬맹이에게 “얘야, 이거 너 가질래?” 라고 해도 사이즈가 사이즈라 선뜻 받아들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벤치에 앉아 늘어진 자신의 옆에 널부러진 저 곰인형을 탐내는 눈치긴 하다만, 그 부모들이 께름칙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같은 험악한 인상의 남성이 들고다니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으니 어지간해서는 달라고 하고 싶겠지만, 역시 원인은… 저 흉악한 사이즈가 만악의 근원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커플이 자기가 앉은 벤치 앞을 지나가면서 “오빠야, 나도 저거 갖고 싶어”라고 이야기 하길래 선뜻 넘겨주려 했건만, 그 오빠라는 사람이 캘리칼리가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내빼버리는 아쉬운 순간은 덤이었다.
그도 알겠지. 이 흉물을 들고 돌아다니는건 자신이 될 것이며, 그 무게를 감당하는 하루의 대가는 심각한 근육통이 될 것임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걸 누구에게 떠넘겨야 하는 것인가!
문득 봄바람이 살랑살랑하고 불어오는 사이로 그 안온한 따스함에 눈이 저절로 감긴 캘리칼리는 저 망할 거대 곰인형만큼이나 자기 목 위로 붙은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무겁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잠들기 직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다.
“엉? 이게 뭐야?”
정신을 차렸다. 뭔가 까끌거리는 것이 턱과 양 볼을 감싸며 관자놀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바람결에 자꾸 쓸려 간질거린 탓에 눈을 떴을 떄는 주위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살짝 들려오던 참이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볼따귀를 따라 그 간질거리는 것을 따라 올라가듯 매만지니, 거대한 리본이 정수리에 매달려있었다.
나참, 이건 또 누가 한건가 라고 생각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 주변으로 쬐깐한 아이들이 곰인형 주위로 껴안거나 무릎 배게 등을 하며 자신처럼 졸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니 굳이 곰인형이 아니더라도 자기 주위에 달라붙듯, 아이들이 낮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 머리에 떨어진 벚꽃잎을 떼주며 그는 작게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5. 🌌☄🎇 / 단답벌레
은하수를 여행하는 작은 우주선 속에서 단답벌레는 드물게 안도감을 느끼며 잔뜩 긴장해 땀에 젖은 손을 겨우 닦아 낼 수 있었다. 방금까지 그는 소행성군을 겨우 벗어난 참이다. 다음 목적지인 해왕성까지 도착한다면, 그때는 좋아하는 치즈피자라도 실컷 먹겠다고 다짐하며 혹시나 방금의 조우로 인해 선체에 피해가 없는지 그는 한 번 검사를 해보았다.
다행히도 외관이 살짝 찌그러진 것을 제외하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소홀히 한다면 나중엔 그 피해가 누적되어 결국 어마어마한 수리비로 빠져나갈텐데. 그런 돈이 한 푼 한 푼 모여, 결국 피자 몇백 판의 가격은 훌쩍 넘는 것이다. 그는 공연히 그런 부분으로도 속이 쓰리고 있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틀어논 광파 라디오에서는 최신 아이돌곡이 흘러나오고, 그는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아쉬운대로 냉동피자를 꺼내서 먹을 때였다. 장거리 여행을 하더라도 만나기가 제법 힘든 혜성이 그 빛나는 꼬리로 포물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와.”
평소 그를 아는 사람들이면 정말 드물게 나오는 감탄사가 단답벌레의 입에서 슬쩍 흘렀으나, 곧 그 당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태양계에서 악명높은 우주 도적들이 그 특유의 상징 홀로그램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현재 구역에서는 지금 자신밖에 없으니, 당연히 노리는 것도 자신. 단답벌레는 인상을 쓰며 부리나케 조종간을 움직였다.
도적들은 한 가지 간과했다. 기세좋게 홀로그램을 빛내며 날아올 적에는 그들이 누구를 약탈하러 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먹어치우려 달려든 작은 우주선이 기술적으로도, 성능적으로도 자신들을 압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들의 자랑스러운 우주선들은 그저 고철파편을 남긴채 화려한 불꽃놀이를 성대하게 해버렸고, 우주를 맨 몸으로 유영하게 만들었던 그들을 단답벌레는 사로잡았다.
신고한 끝에 곧 호쾌하고 덩치가 큰 보안관의 손에 이끌린 도적떼를 보던 그는 뒤늦게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데워둔 피자가 다 식었다.
6. 🧣🌠🎨 / 단답벌레
초겨울이라 믿기지 않는 날씨에 단답벌레는 다시 목에 두른 스카프를 꼼꼼히 여몄다. 찬바람이 그 사이로 스며들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드는 이 시각은 어느 덧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졸음을 억지로 쫓아낼 겸 몸을 따뜻하게 할, 커피가 담긴 머그잔에 양 손을 꼭 쥐고 그 손을 녹인다. 그 외에도 훈훈한 온기를 위해 곁에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똥을 튀기는 사이, 그는 천천히 자신이 머나먼 이 곳까지 무리해서라도 캠핑을 하는 이유를 다시금 되새겼다.
낡은 팔레트를 꺼내 손에 얹자 안정감이 생기고, 그는 눈 앞에 캔버스를 얹은 이젤을 살펴보았다. 이런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이유.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기를 반복한 끝에, 그 이유가 나타났다. 유성이다. 그것도 유성군이다.
그 끝이 새카맣게 타들어 잔해만 남는다 한들, 마지막 불꽃을 피워내며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을 먼 곳에 떨어지는 그 광경은 환상적이었다. 십여 분 동안 그 무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붓을 들어 원하는 바를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했지만 도통 마음에 들지는 않아 몇 번이고 수정을 해야만 했다.
“이거, 아님.”
그의 혼잣말은 시무룩한 그 감정이 한껏 묻어나왔고, 캔버스는 몇 번이고 교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거듭된 실패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벌써 4시간이나 흐른 것이다. 단답벌레는 피곤한 마음에 설치해둔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는 잘 때 목이 갑갑할 스카프를 벗어둔 그는 그 무늬를 보고 살짝 웃었다.
그저 단색의 시커먼 그것에 언제 하얀 물감이 튀었는지 점점이 흰 무늬가 얇은 꼬리를 매단 채 그려진 것이다. 마치 오늘 보았던 유성군처럼. 이 어찌나 낭만적인 우연일까. 그는 도로 텐트에서 나와 미술용구들을 차례로 정리했다. 그가 그리려 했던 유성군은 이미 그 목을 두를 예정이 되었으니까.
7. 🎛🎧🗣 / 단답벌레
헤드셋을 낀 단답벌레는 그 두툼하고 거대한 크기 때문에 얼굴이 거의 감싸진 것처럼 보였다. 오늘을 위해 비싸게 주문한 이 헤드셋이 과연 제 성능을 보여줄 것인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의 어깨는 제법 무거웠다. 비유적인 표현으로도 맞는 말이고 물리적인 표현으로도 맞는 말이다. 본래 가벼운 그의 체구가 정말로 묵직하게, 어깨에 매달린 물건 하나 때문에 돌아다니는 종종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음침하게 들려왔다.
저번에 탐사했을 때, 안전했던 그 장소까지 겨우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짐꾸러미를 풀을 수 있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준비한 것은 하루치의 식량, 약간의 조명기구, 침낭, 그리고 독특한 레버들이 달린 기계들이다. 사실 그 어떤 것보다도 기계가 가장 중요했다. 이 폐가의 소리를 잡아 줄 것이다.
아직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단답벌레는 유령이 나온다는 이 악명높은 폐가가 과연 사실인지 거짓인지 바로 판명해볼 참이었다. 기존에 뿌려둔 블루투스 마이크들은 미리 연결을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충분히 녹음이 되었을 것이라 믿으며 그는 컨트롤 노브가 여러 개 달린 그 기계를 정밀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밤에만 활동한다 알려진 풀벌레가 우는 소리, 폐가의 창문 따위로 바람이 불어 스산하게 소름이 끼치는 소리 등. 지루한 마음을 달래며 이리저리 레버를 돌리던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잡혔다. “이건 또 뭔가?” 단답벌레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발소리도 없이 갑자기 선명히 잡히는 목소리라고?
그러나 단답벌레는 기계와 소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 선명한, ‘이건 또 뭔가’라는 목소리는 바로 그의 곁에서 덩치가 크고 하반신으로 내려갈수록 흐릿하다 못해 투명한 어떤 실루엣이 그의 귓가에 대고 직접 말하고 있었음을.
8. 🎰🌃🎮 / 단답벌레
심야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은 당연히 있고, 오히려 그런 곳일수록 활발해지는 곳이 있는 법이다. 이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본래는 닿지 않아야 할 곳.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 곳은 카지노다. 탐욕과 한탕주의의 성지인 이 곳에서 그나마 가장 부담이 덜해 사람들이 안심하고 찾는 자리는 단연 슬롯머신들이 즐비한 구역이었다. 얼핏보면 비디오게임처럼 직접 조종해서 결국 원하는 목표까지 닿을 수 있을 법한, 그런 모양새였다.
요란하고 천박하며 과하게 명랑한 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곳을 지나가는 단답벌레는, 코인이 좌르륵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과 그 반대로 자신의 돈을 먹었다며 기계를 때려부수려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적당히 빈 자리에 앉았다.
기계라는 중립적인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속칭 한 팔 강도라는 이 돈 먹는 하마의 악명은 카지노 안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드높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렇게나 들러붙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한번 잭팟이라도 터진다면 그 사람은 운수가 틔였다는 수준이 아니라 팔자를 고쳐쓸 수도 있을 만큼 그 배당률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 배당률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자신이 집어넣은 수많은 지폐로 쌓아올려진 골탑의 정체임을, 냉정하게 생각하면 알 수도 있겠지만 도박꾼들에게는 이미 그럴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기계를 부수려는 자들은 그저 양복을 입은 경비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끌려나갈 뿐.
그래서 이 기계를 사람들에게 패망의 지름길로 이끄는 이들은 몰랐다. 단답벌레가 몇 번 지폐를 먹이고 나서 레버를 돌렸을 때 순식간에 코인들이 바닥을 좌르륵 메우며 빛을 발하는 모습을. 당장 현금으로 환전이 가능한 이 천박한 금빛 동전들을 집기 위해 다른 꾼들이 들불처럼 달려들어 혼란을 야기한 상황을.
그리고 이 슬롯머신의 기본적인 시스템을 만든 것은 자신임을. 자신을 내친 조직에게 복수할 시간이다.
9. ☔⚡🌈 /융터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났군요” 길을 걷다 부리나케 뛰어 문이 열리지 않은 가게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차양 아래로 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걸 불운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어떨지 제법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내밀면 금방 감기에 걸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아침인데.
오늘 이 정도의 강우량이 예고가 되어있었나? 그런가 하면 기억 속의 기상캐스터는 아니라고 답을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곁눈질로만 보아도 굵은 빗줄기가 매섭게 지면을 때리는 이 모습을 어떻게 기상캐스터는 오늘의 날씨를 맑음이라 설명할 것인가. 심지어 번개까지도 번쩍거리는 모습이 앞으로의 상황을 더욱 심상치가 않게 만들었다.
“손님이신가요?”
“예?”
멍하니 차양 바깥을 보고 있으려니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마침 접은 우산의 물기를 탈탈 털며 그에게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그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태도를 유지하자 노신사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가게 문을 막고 있던 구식 셔터를 드르륵 소리가 나게 올렸다.
그 바람에 밖으로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커피의 향이다. 그것도 공장이나 어느 가게에서 떼어다 오는 원두가 아닌, 직접 로스팅을 하는 그 특유의 향기. 노신사는 그러고 있다간 벼락이라도 맞겠다며 농담을 건네고는 선뜻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침 좋은 원두가 들어온 날에 첫 손님이라, 저도 운이 좋군요.” 라며 원하는 자리에 앉아달라던 노신사는 그렇게 20분이 조금 안되게 볶은 원두를 솜씨 좋게 갈아낸 한 잔을 융터르에게 바로 내밀었다.
옅은 산미와 그에 두드러지는 단맛.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가 훈훈해진 가게 안의 공기. 추위로 몸이 얼어있던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해가 떴을 떄 이런 좋은 가게를 만났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음, 그럼 정말 좋은 때 아닙니까?”
노신사가 창문을 가리킨다. 그 시선을 따라 돌아간 고개도 가게 주인의 말에 끄덕였다. 커피를 즐기는 그 사이에 맑게 개인 하늘 사이로 무지개가 선명했다.
10. 👨🦳🎴💎 / 캘리칼리(if 노인)
눈 앞의 이 노인은 누구인가. 천연덕스럽게 익숙치도 않다면서 화투패를 화려하게 놀리고는 순식간에 패를 완성했다. 장땡이다. 그에 비해 나는 기껏해야 구땡. 이번에도 졌다. 하지만 잃은 것은 없었다. 자신이 건 것은 없는데 비해, 노인은 아기 주먹보다 조금 작은 다이아몬드를 선뜻 꺼내면서 한번이라도 이기면 이 보석을 넘겨주겠다고 했으니 할 수록 손해는 볼 일이 없다.
나는 계속 하겠다고 했지만 연거푸 패배하는 통에 속이 쓰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얻고 잃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고의 문제니까. 새하얗게 바래진 머리카락과 콧수염조차 한때는 쾌걸이자 호인이었노라 주장하는 듯 보이는 저 자, 스스로를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 불러달라던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한번 더 할 것이냐 물었다.
“당연히 하죠!! 한 번 더 합시다 노인장!”
“그래야지.”
이번에는 내가 패를 섞을 차례다. 저 노인에게 계속 져서 그럴 뿐이지, 나도 다른 사람들 뒤통수는 여럿 쳐본 타짜다. 손 안에서 패가 움직이는 바는 내가 지극히 원하는대로 섞이고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이길 차례가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또 똑같았다. 어째서인지 나는 또 다시 구땡, 캘리칼리 노인은 장땡. 이 믿기지 않는 결과에 욱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처님 가운데토막이다! 그리 생각해 노인에게 손을 보여달라고 하려 했다. 그러나.
“자네 손장난 하는 거 다 티가 나는데 말일세.”
“에, 예??”
“학습 능력이 없는겐가? 아니 그 이상으로 뇌가 없는건가?”
노인이 서늘하게 지적을 하자, 나는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이 섯다. 분명 나도 한번, 저 노인도 한번 그렇게 순서를 정해 패를 돌린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내 차례에 내가 유리한 방향이 되게끔 손장난을 쳤다. 그런데도 계속 지고, 또 진 것이다. 그걸 왜 눈치채지 못했지? 그걸 왜 저 노인은 이제서야 알아차린거지?
캘리칼리 노인이 갑자기 귀가 울리도록 쩌렁쩌렁 웃어,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그 노인이 갑자기 그렇게나 보석이 갖고 싶으면 가지라고 하기에, 그가 내민 보석에 손을 뻗고서야 알았다. 나는 줄곧 걸고 있었고, 줄곧 잃고 있었다. 내 시간을. 저 노인의 손보다도 자글자글하게 주름지고 검버섯이 잔뜩 피어오른 내 손이.
11. 🤖🔫😎 / 왁파고
왁파고에게 내려진 이번 임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물총 싸움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방수 기능은 충분하지만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의아해하는 메시지를 창조주에게 띄웠을 때, 그저 박사는 삶에 웃음이란 것이 필요한데 그것도 어렵냐며 오히려 그 피조물에게 한 소리를 하였다.
그렇다고 왁파고가 창조주에게 원망한다던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로봇이고, 명령은 절대적이며, 당장 주어진 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으니. 그리고 지금의 임무는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되었다.
[저 어떻게 합니까. 박사님.]
피조물은 자신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누가 보더라도 완전히 기계인 그 얼굴을 처음부터 좋아해주거나, 호감을 가져주는 어린이들이 없었던 탓이다. 아무리 선생이라는 어른이 어르고 달래도 한번 겁을 먹은 아이들은 그가 웃자 비명을 꽥 지를 뿐이라, 난처함은 계속 이어졌다.
“으아앙 엄마! 눈 무서워어어!!”
[짜잔, 이제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한 아이가 발작적으로 우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비명에서 왁파고는 큰 힌트를 얻었다. 그는 급히 양해를 구하고는 얼굴의 반은 가릴 거대한 사이즈의 선글라스를 곧바로 써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과연 그 말대로 효과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아이들의 긴장하던 티는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낸 몇몇 아이들이 손에 쥔 물총을 그에게 겨눠 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상의 나래라는, 로봇인 그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왁파고에게는 어쩐지 자기들을 괴롭힌 못된 로봇의 역할을 주었고, 그걸 충실히 행하던 왁파고는 다시 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또 울기 시작했다.
“아앙!! 왁파고가 불쌍해!!”
“왁파고야 미안해!!”
우는 아이들을 또 달래려 진땀을 빼는 선생을 보던 왁파고는 아이들에게 선뜻 다가가 한 마디를 했다. 그러면서 내미는 것은 엄지 손가락.
[여러분들이 물총으로 저를 치료해주어, 저는 이제 착한 로봇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히끅거리면서도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이상하지만 착한 왁파고는 이제 우리 친구!”
12. 🐋🍱🚪 / 해루석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혹등고래의 등 위다. 일광욕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거대한 친구는 등에 나 있는 숨구멍으로 수중호흡 중에 빨려들어간 물을 기세좋게 뿜어내며 무지개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진부한, 대자연이 주는 웅장함이었다.
그리고 해루석, 그 자신은 지금 이런 누구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절경에서 하기로 결심한 것이… 오늘의 점심 도시락 즐기기다. 고래는 그 등 위에 올라탄 것이 누군지는 몰라도 갈매기 따위가 무리지어 앉았다 생각을 했는지, 물에 곧바로 들어가지도 않고 계속 수면을 부유하는 자비로움을 선사했다.
오늘의 점심은 그런 한편으로 유감스럽게도 하필 초밥 도시락. 어쩌다 고르게 된 것이 이토록이나 얄궂은 선택이라니. 그런 한편으로 해루석은 나름대로 변명아닌 변명을 속으로 계속 하기에 이르었다. 어차피 이 혹등고래라는 친구도 생선을 주식으로 먹지 않는가? 동족을 먹는다는 잔혹함보다는 저 거대한 친구에게 있어 자기 도시락은 맛있는 냄새는 나는데 무척이나 조그마한 양에 불과할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오, 이거 진짜 맛있다!”
마침 이번 도시락 한정 장어초밥이 진짜배기였던 탓에 그는 감탄을 했다. 지금까지 장어초밥은 양념을 대충 입혀 퍽퍽하고 살이 부스러져, 소위 거르는 종류였건만. 특유의 눌은 간장향이 비린내를 확실히 잡은 장어의 향과 한데 어우러져 코를 타고 역주행하는 느낌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연어나, 광어, 놀랍게도 현장 아니면 먹기 힘들다던 고등어 초밥마저도 하나같이 훌륭한 맛이었기에, 그는 다음에도 이 초밥집에서 주문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곁들여 포장된 장아찌까지 말끔하게 먹고 난 그는 여전히 수면을 부유하는 이 거대한 친구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래의 꺼끌꺼끌한 등짝을 살살 어루만져주며 덕분에 잘 먹었다고 감사인사를 돌렸다.
그 순간, 고래의 온 몸으로 진동과 함께 청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좋은 시간을 보냈냐는 질문처럼 들려와, 해루석이 들어왔던 문을 다시 열고 고맙다며 크게 외쳤다.
“오 세상에!”
등 위의 손님이 자리를 뜬 것을 눈치 챘는지, 그제서야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던 고래는 순식간에 수면 위로 박차 올라 그 배를 하늘 쪽으로 돌리며 도로 거대한 물장구를 쳤다. 살아서 보기 힘든 경험을 이렇게나 다양하게 즐기다니, 오늘은 정말이지 운이 좋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13. 🎴🍇💤 / 뢴트게늄
즐거운 추석에는 꼭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건 온 가족이 칙칙한 초록색 담요 비슷한 것 위에서 찰지게 치는 고스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뢴트게늄은 지금 그 친척들에게 연거푸 자신의 돈을 뜯겨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점당 10원이라는, 그 미미한 판인 덕에 최대로 뜯겨봐야 5천원도 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니까.
그런 그의 기분은 모른 채, 어르신들은 계속 뻑이 났다느니, 고도리라느니 아직 그 게임을 잘 모르는 뢴트게늄에게는 어려운 용어들을 계속 쓰고 있었다. 저 규칙만 알면 자기도 저 어른들 사이에서 능청스럽게 골려줄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성인으로 분류가 된지 몇 년이 되지 않은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얘, 뢴트야. 이거 먹어봐라. 포도가 아주 다네, 달아.”
“그렇지! 내 패도! 이렇게나! 달달구리—! 하고!”
그의 돈을 가장 많이 털어간 친척이 무려 뒤집은 패에서 다른 사람이 싼 똥을 연거푸 치우고 순식간에 점수를 싹쓸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한 아주머니가 그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알이 제법 굵은 포도 여러 송이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해도 챙겨주는 정성을 무시해선 안되었기 때문에, 뢴트게늄은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웃어보이며 잘 먹겠다고 답하고는 그 접시를 받아 들어 한 알을 톡 따 입에 밀어넣었다. 그 말대로 정말 달다. 올해 그렇찮아도 농사가 잘되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
그렇게 몇 알 먹고 나니 졸음도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르신들 화투 치기 좋게 방이 따끈한 것도 있고, 방금까지 점수를 얻으려고 과하게 긴장했던 탓도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화투판을 떠나 포도나 얌전히 먹고 있으려니 지루해진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에그머니, 얘 뢴트야! 이불 깔아줄게, 거기서 자!”
“어유 거 냅두어! 꿈에서라도 점수 좀 따라고 혀어!”
분홍색 머리의 청년은 포도껍질에서 나온 그 붉은 물이 손가락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꾸벅꾸벅 졸다 결국 벽에 기대듯 잠들었고,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은 아직 애라며 낄낄 거리는, 그런 즐거운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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