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원탁 회의' 의 후속편? 정도가 되겠읍니다.
*다시 한 번 설정을 날조하도록 허락해주신 칠성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히키킹의 발음을 마고프네드 사람들은 잘못 이해해서 '히키킹구'가 그의 이름인 줄 압니다.
태초의 8성이 위치한 곳 중, 어느 곳이 가장 혹독한 환경이냐고 묻는다고 하면 의견들은 저마다 다를지언정 공통적으로 나오는 곳이 있었다. 마고프네드. 위치로만 따지자면 그 티아로크 성보다도 더 북쪽에 있으며, 인접한 지역 하나 없이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며 마땅히 군침을 흘릴 법한 자원도 그리 많지 않은, 이 곳 사람들은 그리하여 살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있어 유학을 하고자 한다면, 마법의 풍마성이나 기계공학의 테느포데 시, 그리고 그 외의 일반적인 학문은 크노모스 성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라는 의미는, 이 성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다수가 학자들이라는 것이고 다시 말해, 옆구리에 외날의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이질적인 목적을 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란 곱슬머리, 팔꿈치 아래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풍성한 소맷자락은 두꺼운 외투차림으로 혹독한 추위를 피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도 한껏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지금… 재채기를 연거푸 해대고 있었다.
"아—니! 여기 왜 이렇게 춥스무니까?"
"청년, 날씨 감각이 좀 이상한 거 아니우? 여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으니까 그렇지."
오죽 안쓰러웠으면 깐깐하기로 소문난 상인 하나가 직접 뜨끈한 간식거리를 직접 쥐어줄까 싶을 정도로 남성의 옷차림은 이곳 사람들의 기준으로 가관도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으슬으슬하게 얄팍하기 그지 없는 천옷은, 차라리 저 남쪽의 영주성이나 사시사철 뜨거운 포데카이라 성에서나 입으면 어울릴 것이다. 어쩌면 의화성이라던가. 혹시 배라도 잘못 타고 온 것은 아니냐던 상인들의 질문에 이 남자는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다 놀란 가슴을 쥐어짜면서도 끝끝내 대답했다.
"노, 노, 노! 이 히키킹구 분—명히! 이 크노모스 성에 볼 일이 있다! 이겁니다."
"암만 봐도 칼잡이인데… 여기서 칼부림할 거라도 찾으쇼?"
"그렇스무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무니다."
영 이상한 말만 하고 돌아다니는 청년의 괴상한 복장 사이로는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았는지, 몸을 감싼 붕대 사이로 짓무른 것이 배어나오고 있었고 이를 가볍게 여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곧 스스로를 '히키킹구'라고 소개한 남성이 수상하다는 제보가 기사단에 들어왔고, 성주의 언급에 따라 사전에 관련 정보를 착실히 받아두던 기사단장 프리터가 변장한 채로 황급히 시장거리로 달려갔다.
과연 그의 시선으로 보아도, 한없이 독특하다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남자가 어수선하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정령인 그로서는, 저 남자가 지닌 힘 만큼은 지극히 가벼운 언행에도 불구하고 무시하지 못할 수준임을 느끼고 있었다. 성주의 말에 따르면 분명 의화성의 그 강맹한 기사단이 절반이나 불구가 되고, 성주이자 수호신인 이덕수마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했으니 자신이 섣불리 그를 제압하려 한들 무고하고 무해한 사람들만이 피해를 입으리라 그는 판단했다.
게다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한 성주이자 수호신, 카르나르 융터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자를 발견하면 즉시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성주 카르나르 융터르는 정령임에도 지극히 인간처럼 행동해서, 지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뛰어온 프리터의 그 행동에 별다른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프리터가 원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그의 방침이므로. 그러나 그가 전달한, 그 이덕수와도 맞상대를 했다는 남자가 공공연하게 시장에서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다는 보고를 전달 받았을 때는 늘 냉담한 그의 표정에 살짝 실금이 나기 시작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것은 분명 분노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이르군요. 그 회의가 있은 후로부터, 불과 이레가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의화성에서 아주 그냥 곧장! 이 곳에 올라온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이 됩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다면, 가장 빠른 방법을 택해야 가능할 터이니…."
어두운 색을 풍부하게 쓴 성주의 방에서,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금도 정신없이 서류작업에 매진하였지만 점차 그 처리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프리터는 그 주위로 마력이 불온하게 날뛰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성주는 지금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이 카르나르 융터르가 우습게도 보였나보군요. 물론, 이 크노모스 성이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환경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다친 것도 제대로 회복하지 않은 채 제 목을 노리러 오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 자란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차분하였기에 차라리 이 마고프네드의 만년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기가 서려있었고, 곧 작성하고 있던 것을 서둘러 마무리 지은 그는 금실로 수놓아진 독수리 무늬의 새카맣고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스치는 긴 망토를 둘러 맸다. 수백년의 시간을 함께해 온 마도서가 그 곁을 지키듯 둥둥 떠오를 무렵 그는 성의 핵심이자, 그 자체라고도 할 수있는 성의 심장조각이 박힌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였다.
"이것, 그리고 내 목을 노리고 있다라…."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나가려는 찰나, 발코니 아래로 내성을 지키는 위병들과 누군가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확인하겠다며 발코니로 뛰쳐나간 프리터에게 워낙 독특하기에 한 번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에 익은 말투가 저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히키킹구라는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
"성주는 나와라! 이 히키킹구와 한 판 붙자!"
"성주님이 무슨 동네 친구냐!? 이 미친 놈!"
"압송해! 무조건 지하감옥으로 끌고 가버려! 성주님의 심판도 필요없다!"
히키킹구의 입장에서, 목적에 방해가 되는 위병들은 의화성에서의 기사단과 비교하기 전에 피라미와도 견줄 가치도 안된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실랑이를 벌이며 진입을 방해한다면 기꺼이 베어버릴 생각 만만으로 슬슬 옆구리에 걸친 얇은 도를 뽑을 생각에 손을 은근슬쩍 올려두기 시작했다. 고작 10여 초 정도를 더 지체할 따름이지만, 마음에 이미 불이 잔뜩 붙은 그로서는 인내심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고 있었고 곧 예리한 칼날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만큼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성주님 납신다!!"
"다들 좌우로 물러서! 성주님 행차하신다!!"
내성 안쪽에서부터 시종장이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점차 그 목소리가 히키킹구의 앞까지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숨이 순식간에 날아갈 뻔 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위병들이 긴장한 얼굴로 내성 입구의 좌우로 저마다 군기가 바짝 오른 자세를 유지한 채 자리를 잡아, 히키킹구는 순식간에 자유로운 몸이 되어있었다. 곧 메아리 치듯 크노모스 성 이곳 저곳으로 성주의 행차에 대한 알림이 메아리를 치는 사이.
"과연 듣던대로군요. 말하는 싸가지나 꼬라지는 영 아니지만 실력 하나는 제법 된다던 자가."
"당신! 당신이 이 성의 성주이무니까?! 이 히키킹구! 성의 주인 자리를 걸고 한 판 붙겠스무니다!"
노란색 곱슬머리의 이방인이 섬전처럼 옆구리에서 완만하게 휘어진 외날의 독특한 칼을 뽑아 성주에게 겨눴을 때는, 저마다 창날을 들이밀며 압송하려던 위병들이 식겁한 소리를 냈다. 감히 성주에게 무기를 들이민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이 너무나 재빠르다. 나름대로 창과 칼을 잡아 생활을 해오는 이들의 감으로 미루어보자면 분명 저 괴상한 이방인의 실력, 그 하나 만큼은 감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칼 끝을 면전에 두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표정은 아까와 변한 것이 크게 없었다. 굳이 얼굴에 변화가 있느냐고 한다면 미간이 아주 약간 좁아졌을 뿐. 히키킹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성주의 발걸음에 곳곳에서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지만, 이미 열이 오를대로 오른 융터르의 귀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
"한 판 붙자? …여기서?" 중후한 목소리가 난생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고 곧.
"으—에에에—!?"
성주는 복잡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천천히, 누군가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뻗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간단하다고 그 누가 표현 할 수 있을까. 히키킹구라는 사내의 주위로 제법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 자만이 저 멀리 뒤로, 마치 누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질질 끌리다못해 아예 하늘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 곧 패대기쳐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기만 할 줄 알았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성벽 너머의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기세였다.
"일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습격자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여러분들은 상대하실 수 없을 터이니, 전 출입구를 단단히 봉쇄하십시오. 저 놈이 다시 이 성에 들어올 수 없도록."
"성주님께선 어찌하시려고…."
"저 자는, 제가 상대합니다. 제 몫입니다."
먼저 적을 분쇄해버릴 기세였던 기사단들은 성주의 차분하다못해 무감정한 말에 돌연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에는 일과 연구에 치이며 살면서 때때로는 생활습관이 엉망이라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보이곤 하는 성주를, 마고프네드의 모든 이들은 감히 우스갯감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 자신의 상징인 독수리처럼 순식간에 공중에서 낚아채 갈갈이 찢을 기세의 성주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건드는 놈이 있다면 그 놈부터 죽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없이 그 탐학하기까지 하는 성주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주민들이 몸을 사리며, 나름 잔뼈가 굵은 기사단에서도 감히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나자 카르나르 융터르의 망토자락이 펄럭이며 곧바로 쏜살같이 히키킹구의 날려진 궤적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순식간에 상하로 뒤바뀌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입 안에 새하얀 눈덩어리가 잔뜩 들어가있다. 분명 대비했다고 생각했건만,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힘이 뒷목을 잡아, 자신의 몸을 질질 끌기 무섭게 곧 저 하늘 위로 내다던져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고고한 성벽이 저 멀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몸에 반동을 준 그 탄력으로 벌떡 일어난 히키킹이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입 안 그득한 눈을 퉤퉤 뱉어냈다. 다행히 제법 폭신한 눈더미 위에 떨어진 덕분인지 지난 의화성에서 입은 상처 위로 흔적이 새롭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한 번 슥 둘러보던 히키킹의 앞으로, 새하얀 설원과 너무나 대비되는 검정 일색의 남성이 소리라고는 없이 아주 사뿐하게 그 위로 떨어진 모습은 차라리 바닥의 그림자에서 솟아 오른 것 같다. 지하 동굴을 연상케 하는 깊고 울리는 목소리가 성주의 입에서 나왔다.
"이름은?"
"히키킹구이무니다." 조금 전보다 더 긴장한 히키킹의 목소리는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지만,
"히키킹구?" 그 발음을 억지로 따라하려니 사뭇 괴악하다. 성주의 자리를 넘보는 이방인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정정해주었다.
"노노노! 히, 키, 킹. 이렇게 발음하무니다."
히키킹, 히키킹이라. 말끔하게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푸른 눈동자의 성주는 몇 번을 읊조리고는 다시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드는 히키킹에게 냉담한 어조로 쏘아붙이듯 물어왔다.
"이 카르나르 융터르가 우스워 보였습니까?"
"…으에?" 뭔가 설명을 잘라먹은 그 질문에 노란머리 습격자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삐져나왔다.
"이레, 당신이 이 크노모스 성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의화성에서 이덕수 님을 습격하고나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을 전부 동원해야만 가능한 시간. 온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채로 달려온 것은, 이 카르나르 융터르와 이 크노모스 성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도 못한 상태여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리 생각하고 온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히키킹의 입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더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을 암묵적인 동의의 표현으로 이해한 크노모스 성의 성주는 흉흉한 기세를 더는 숨기지도 않은 채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라며 반지를 끼운 손을 다시 들어올렸다. 곧 마력이라 부르는 모종의 힘의 움직임을 느낀 히키킹이 곧바로 칼을 단단히 쥔 채, 차라리 지상 위로 낮게 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속도로 성주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같은 수에 또 속아넘어갈 것 같스무니까!"
"누가 같은 수라고 했지?"
벼락소리가 들리는 착각 속에서 휘두른 히키킹의 검은 충실하게 성주의 목을 향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방향은 맞았지만, 예리한 칼날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차라리 허공이라기보다는 투명하고 단단한 물체 사이를 가르려다 막힌 것처럼, 칼을 도로 회수하려고 힘을 주는 그를 아예 무시한 채로 카르나르 융터르가 그 독특한 칼을 유심히 바라보다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칼이라…. 그리고 방금 보여주신 동작과 이 힘까지. 과연 이덕수 님께서 고전하셨다고 표현하실 수 밖에 없겠군요."
"하—! 이래서 마법사는 껄끄럽스무니다!"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자신의 고함으로 덮어버리려는 듯 그가 소리질렀지만,
"당신, 성을 빼앗겼군." 융터르는 히키킹의 정곡을 찔러버리는 말을 해버렸다.
"시끄러—!!"
차라리 유리가 깨졌다고 믿을 소리가 울리면서, 히키킹이 순수한 괴력으로 칼날에 가해진 구속을 깨버리고 열 몇 발자국은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한편 그 행동을 바라본 카르나르 융터르도 오른손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수호신들조차도 마법을 아예 깨부수기 위해서는 적잖은 힘을 들여야하는데, 눈 앞의 히키킹은 오히려 더욱 그 기세가 날뛰는 것이 명백히 보였기에.
분노가 그 힘의 원천이었는지, 혹은 슬로우스타터같은 체질인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다시 돌진해오는 히키킹의 속도는 조금 전과 비교를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조금만 더 대처가 늦었다면, 지금처럼 망토자락이 베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고, 그 사실을 그도 아는지 히키킹은 기세가 등등해져서 "다음은 진짜이무니다!" 라는 소리를 기합처럼 내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칼질과 천둥소리가 거의 동시에 다가왔으나, 시간이 점차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진짜 천둥과 벼락 간의 관계처럼 칼을 휘두르고 난 뒤에 수 초는 지나야 예의 그 천둥소리가 들릴 정도다. 성벽 바깥의 설원에 도착한 이후로, 오른손을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던 융터르의 몸이 점차 반격할 기회는 커녕 방어에 급급하기만 할 뿐이다.
순식간에 다섯번을 휘두른 칼의 궤적에는, 검에 깨우침을 느낀 자들이 사용한다는 검기가 잔상처럼 남아 미처 방어의 주문이 닿지 않는 곳에 얇고 깊은 상처를 내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칼질은 그 직전의 것보다 더욱 빠르다. 곧 고목처럼 서 있던 그 몸도 균형을 잃고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히키킹이 아니었다.
"이걸로 끝이다!!!"
자신을 얕본 것이냐며 윽박지르면서도, 오히려 한없이 오만한 성주의 태도에 이골이 나있던 히키킹이 휘두르는 칼날은 아예 벼락이 깃들어 있었다. 잊힌 성주무기라 할 지라도 끝없이 연속된 투쟁으로 조금씩이나마 그 힘을 되찾고 있다는 증거. 처음처럼 마력이 그 칼날을 붙잡지도 못 한채, 이제는 성주의 목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가고 있다. 드디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초석이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그의 눈에는 강렬한 열망이 어른거렸지만.
"허?"
"분명히 물었습니다. 이 카르나르 융터르가 우습게 보이냐, 고."
크고 작게 시나브로 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르나르 융터르의 목소리는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처럼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히키킹은 어째서 아까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붙잡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고고한 섬의 주인은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되받아치지 않았다. 결과를 알기 전이었다면 몰랐을 그의 행동은 차라리 공격한 것이었음을.
지금까지 무시했던, 얇고 풍성한 옷자락 사이로 스며든 한기가 그저 이 한랭한 섬의 환경 탓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이덕수와의 싸움에서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들. 그 사이사이로 절대 녹지 않는 아주 미세한 얼음바늘 같은 것이 셀 수 없이 빽빽하게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히키킹은 성주의 행동을 이해했다. 융터르는 히키킹이 자신과 가까이 다가올 적마다 막아내고 반격하는 척을 하면서 그 바늘 같은 것을 계속 심어두었던 것이다.
싸움에 흥분하고, 날뛰어 그 이질적인 것을 미처 느끼지 못했던 히키킹이 바들거리는 손으로 그것을 빼내려 하였지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빼내려 하자 몸에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맨 정신으로 뼈나 혈관 같은 것을 뽑아내는 것과 같은 격통이 뒤이어, 그의 악 다문 입에서 신음소리가 비죽 새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지쳤지만 비웃는 티가 역력한 성주의 목소리가 그 귀로 조소하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걸 빼내려 하십니까? 할테면 해보십시오. 이미 당신의 내장 곳곳에 뿌리 내렸으니, 이를 뽑아내려면 순수한 영혼이 대신 흘려주는 눈물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 말대로, 히키킹이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명상하듯 내면을 관조하자 작은 바늘처럼 보이는 것들이 겨울밖에 없는 이 환경에 기승을 부리며, 점차 복잡한 구조를 이룬 채 몸 곳곳을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곧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그의 왼가슴에 잇따른 충격을 주기 시작해, 노란머리의 습격자는 처음 이 곳에 도착한 것 이상으로 오한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바늘이 그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주의 선언과도 같은 엄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잊혀졌다 한들, 당신 또한 성주무기를 지닌 자이니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이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십시오. 히키킹."
"무엇을, 내게 무엇을 원하무니까?" 이제 손등에 비치는 혈관도 새파랗게 물들기 시작한 그가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감히 이 크노모스 성을 탐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그 허황된 꿈을 피력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그 증거임을 보여주십시오."
염원을 이루지 못한 분노로 이방인은 눈물을 흘리며 알겠다고 중얼거리자, 그의 몸이 처음 성주와 만났을 적처럼 슥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처럼 내다꽂듯 집어 던질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선착장까지 그저 얌전하게 둥둥 뜨다가 대륙으로 향하는 배 위에 툭 떨어졌을 뿐이다.
"성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이 대륙으로 가는 조건이라면 가장 좋은 선실과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비용을 무료, 그러니까 이 쪽에서 전부 부담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저라면 그 제안을 곧바로 받겠습니다만…."
선장의 말에 히키킹은 그저 그리 하겠다고 답한 후 선원들의 부축 겸 안내를 받아 선실로 돌아갔다.
크노모스 성. 성주만이 들어올 수 있는 방에 오늘 예외가 생겼다. 예외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를 일이다. 몸 곳곳에 깊은 칼자국을 남긴 채 기운이고 체력이고 전혀 남지 않은 채로 돌아온 카르나르 융터르의 몸을 프리터가 간병해주고 있으므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며 붕대로 감싸는 동안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성주에게 프리터는 더 좋은 방법은 없었냐며 잔소리에 잔소리를 곱빼기로 끼얹어줬다.
"…그만, 그만 좀 하십시오. 그 눈의 여왕이라는 마법의 조건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는! 그 마법, 쓰지 마십시오! 아주 그냥 동반자살 마법 아닙니깟!"
그 말에 덧붙이듯 다음 회담 전까지 빨리 낫지 않으면 그 얄미운 티아로크 성의 이무기한테 놀림감이 될 것이라는 기사단장의 투덜거림에 성주가, 아파서 시원하게 웃지도 못하고 그저 끅끅거리며 애써 넘어가려하였다. 아무리 정령으로서 오래 살았어도 카르나르 융터르가 웃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던 프리터가 영문을 모르는 눈치이자, 성주이자 수호신은 향후의 즐거움과 지금의 고통이 뒤섞인 얼굴로 설명해주었다.
"그래요, 저는 그를 분명 살려줬습니다. 온갖 굴욕을 덕지덕지 붙여준 채로 말이지요. 그렇게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자가 취할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으음, 일단 화낼 것 같습니다만!"
"필시 분노하겠지요. 어쩌면 자신의 무력함에 증오를 품을 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자신조차도 살라먹어가며 힘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이 갈구할 겁니다. 다른 성을 습격하는 것으로 밖에는 해소할 수 없는."
히키킹이라는 폭탄을 심지 끝까지 들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겨버린, 그 무책임할 정도로 황당한 말에 간병을 계속하던 프리터의 손이 우뚝 멈췄다.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자가 하는 행동은 늘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파괴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 어떤 미래가 명백히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자가 지금 태연하게 침대에 누워 자신의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괜찮겠느냐고 기사단장이 웅얼거리듯 물었다.
"상관없습니다. 대륙이 전부 그 놈의 손에 떨어지든 말든.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 가당찮은 놈의 몸은 시간이 흘러 결국 거대한 얼음나무가 될 것입니다. 물론 해제하는 방법이야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절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왜… 그렇습니까?"
"마법을 풀기 위해서는 제 피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매개체가 되도록 제가 피를 흘려줄 것 같습니까?"
카르나르 융터르가 다시 끅끅거리며 웃는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한없이 잔혹한 말에 몸서리를 쳤겠지만, 이미 성주의 자비없는 손속을 한 두 차례 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적어도 당장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히키킹이라는 자는 오히려 자비를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감히 수호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더없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기사단장의 지론이었기에.
그래서 그는 다시 벼락의 힘이 깃든 흔적으로 인해 상처가 도로 벌어지는 것을 면밀히 살피며, 이무기 놈에게 놀림받기 전에 얼른 털고 일어나라는 말을 다시 할 뿐이다.
'공개 썰입니다. > 멤고 단편 - 판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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