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티브는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입니다.
*지구를 관리하는 행성관리자 카르나르 융터르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입을 터는 다른 두 아저씨들의 고군분투입니다.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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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우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시점, 한 우주인의 감상대로 지구라는 푸른 별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어쩌면, 달과 비교해도 그 거리가 제법 가까웠을지도 모를 정도지만 천문학자들은 이 초월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없어, 그렇게 그는 다른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해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혹은 조만간 그는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오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곧 그의 몸이 지구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가장 해악을 끼치는 자들과 닮기 위해, 그와 닮은 형상으로 오밀조밀 빚어지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 배가 둥둥 뜬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하등 없었지만, 곧 그 배를 보는 누구든 불온한 것을 잇따라 내던지는 모습을 본다면 그 내용물이 무엇이든 결코 좋은 시선으로 바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밀봉된 드럼통이 제법 무거운 것인지, 수면에 닿자마자 곧장 그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는 이 무단 투기범들은 마지막 드럼통까지 배 멀리 던지고 항구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 저거 뭐냐?"
"…엉?"
기왕 환경오염을 저지르는 패악무도한 짓을 한 김에, 피우던 담배 꽁초까지 바닷물에 던지려던 선원들이 자신들의 눈을 벅벅 비벼도 보고 뺨을 때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 눈과 정신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물 위를 걷고 있다. 어떤 마술쇼 따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 밑에 부표같은 것을 단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맨 몸으로 들어간다면 분명 얼마 헤엄치다가 곧 빠져 죽어도 떠오르지 못할 이 바다 한 가운데서 태연하게 걷는 사람이라니? 아직은 멀찍이 거리가 떨어져있지만, 바다라는 공간은 워낙 기상천외한 곳이 아니던가.
"야, 야—야! 빨리 배 시동켜!!"
"씨—팔! 걸고… 걸고 있는데 이게 안 걸려!!"
연신 엔진을 깨워보려고 해도 도통 꿈쩍도 않는 배는 그저 물결에 둥실둥실 흔들릴 뿐이고, 감히 태평양 한복판에서 걷는 기적을 선보인 남자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본래 움직이라고 있는 본래 목적도 망각한 배의 옆에 새파란 브릿지와 백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장발의 남성이 물기라고는 하나 없는 상태로 무단 투기범들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이지 않는 배와 패닉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그 위로 남성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지막하지만 귓가에 선명하도록 와닿는 굵고 낮은 목소리에는 위압감이 서려있었다.
"당신들입니까?"
"뭐, 뭘!"
"이, 이, 이거 무단으로 올라오는거야! 어!? 당신 지금 큰 실수하는거라고—!"
"무단. 제가 상대방의 허가 없이 어떠한 행위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당황해하고, 모른척하는 선원들을, 그 브릿지의 색만큼이나 비인간적으로 파란 눈으로 노려본 괴한이 바다를 향해 손짓을 하자 물살을 거스르고 올라오는 것들이 있었다. 선원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빠트린 드럼통들이다. 곧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갑판 위로 떨어진 무단 투기의 결과물들은 바다의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빠트린 이것들은 무단이 아니냐고 행동으로 묻는 듯 하여 날뛰던 선원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사람들 중 제법 그 패닉에서 빠르게 탈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주로 그 뒤에 몰려오는 것은 분노였다.
"이거나 먹어 이 개새끼야!!"
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대뜸 발사한 그것. 귀가 찢어지는 착각을 받으며 샷건 셸의 빈 껍데기가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다 위를 걷고 손짓으로 드럼통들을 건져 올린다고 한들 몸에 저만한 충격을 받는다면, 그 불곰마저도 일격에 죽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매캐한 탄연이 피어오르는 배 위에서 대뜸 샷건을 발사한 선원이 기세 등등해져 광기가 서린 웃음을 연신 내뱉었지만 곧 그것도 잠시.
"개새끼, 개의 어린 자식을 의미하는 말. 혹은 사람을 비하하는 다양한 단어 중 하나. 맞습니까?"
"뭐야, 씨팔 뭐냐고—!!"
"지금 이 모습은 분명 개의 그것이 아니므로, 당신은 지금 저를 비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맞습니까?"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도, 목소리도 아니다. 더욱이 분명 정통으로 배에 그 자그마한 납구슬들이 일제히 처박힌 것을 보았음에도 응당 흘려야 할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정체불명의 남자의 구멍이 뚫린 배는 뭔가 꿈틀대는 하얀 것들이 다른 살점들 사이에서 기어나오더니 그 빈 곳을 메꾸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 저 목폴리티같은 옷 마저 복구가 된 모습을 모든 선원들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손 끝으로 물방울이라도 떨어지듯, 자그마한 구슬들이 연거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샷건 쉘의 구성요소인 납구슬이었다.
미신에 약한 뱃사람들답게, 저마다 믿는 신의 증표를 손에 쥐고 달달 떠는 목소리로 자비를 구걸하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남자가 다시 손짓을 하자, 더할 나위 없이 악몽이라고 해도 좋을 현실이 선장의 주위로 벌어졌다. 제법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이 순식간에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몸이 바스라지는 모습은 분명 맨 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가난이라던가 하는 이유로 쫄쫄 굶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줄 적의 그것보다도 더 징그럽고, 더 끔찍했다.
차라리 뼈 위로 아무것도 없이 살가죽이 바싹 들러붙어있다고 생각하는게 나을 정도로 바짝 마르기를 거듭하던 선원들은 이미 그 전 시점에서 죽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지만, 놀랍게도 그 입에서는 마치 좀비가 된 것인 양 괴상한 소리가 실낱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으어, 으어어…! 역시! 역시 이거 하면 안 된다니까! 이 병신같은 새끼들이…!!"
"누가 시킨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원들의 질 나쁜 농담을 들으면서 킬킬대던 선장은 과연 사람이라 불러도 좋을지 이제 알 수 없는 이 존재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방법은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시킨 자의 이름을 부는 것이었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묻지 않은 그런 사소한 정보마저도 전부 줄줄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선장은 드디어 살았다는 안도로 오열을 하기 시작했고, 그 또한 다른 이들처럼 바싹 메말라 죽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자신의 변화에 당황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잘 마른 장작처럼 바싹 죽어버린 배 위에서 남자는 그제서야 드럼통에 관심을 가졌다.
"이건…."
열어보지 않더라도 그의 눈에는 내용물이 전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이제 원재료도 알 수 없는 각종 산업폐기물들의 집합체. 아무리 밀봉을 한다 한들, 언젠간 수압 등의 이유로 그 사이가 벌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심해부터 천천히 오염되기 십상이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한들 이 당연한 결과를 모를 리 없으니, 이처럼 명백한 의도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래서 곧 발을 움직여 배의 조종실로 이동했다.
배를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그는 조심스럽게 그 모든 장치들을 손으로 훑었고, 곧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젠장 이건 또 뭐야?"
경사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아침부터 일어난 사건에 머리를 쥐어뜯듯 북북 긁으며 순식간에 불어난 사건 자료들을 꼼꼼히 읽었지만 도저히 자신이 아는 상식선에서는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내린지 오래다. 그도 그럴것이, 망망대해에서 떠밀려온 중형 선박에는 가까스로 신원조사가 완료된 모든 사람들이 미라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가관도 아닌 것은 으레 이런 불가사의한 사건을 단숨에 해결해줄 수 있는 선내 CCTV와 같은 물적증거에서 더 심화되었다. 자신을 대신해 거의 밤새도록 돌려본 파트너의 말대로 뭔가가 이상하다.
형상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뭔가가 있다. 굳이 아는 선에서 묘사하자면 안개 내지는 아지랑이 같은 그것이 움직이자 거대한 드럼통이 거의 수십개는 일제히 갑판 위로 내던져지고, 선원들이 점차 산 채로 미라가 되어 쓰러져버렸다. 선장으로 보이는 이가 그 안개 앞에 엎드리며 뭔가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그마저도 미라가 되어버린 상황.
영상분석실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화면 하나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못했다. 문제의 안개의 이동을 따라 화면을 부리나케 전환하자 그것이 운전실로 향하는가 싶더니 스위치들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안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단 저 망할 놈이 범인인 건 확실한데…."
캘리칼리는 이미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미불명의 안개가 선원들과 선장들을 죄다 미라로 만들어버리고 배를 움직였다고 보고서에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그는 사건을 잠시 에둘러보기로 하였다. 이 피해자들은 도대체 야밤에 무슨 짓거리를 하다가 저렇게 되어버렸단 말인가? 다이얼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던 형사는 곧 현장에서 사라진 것을 하나 떠올렸다. 드럼통.
저 정체불명의 범인(?)이 바닷속에 들어가있던 드럼통을 건져냈으니 일단은 저 배에서 수십개에 달하는 드럼통을 버렸다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 버렸을까? 자연스럽게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궁금증은 그 쪽으로 향했다. 물론 어디 영화에서처럼 깡패놈들이 여러가지의 이유에서 사체를 은닉하느라 저 꼬라지가 났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을 경사는 부정하기로 하였다. 선원들의 인상이 다소 거칠기는 하여도, 그쪽 세계와 접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 탓이다.
"허? 이게 뭐야."
손에 익지 않는 영상분석실 장비를 이리저리 건들다가 드럼통 하나에 줌을 잔뜩 당겨보니 어떤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일대에 유명한 화학공장의 이름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경사의 잘 정돈된 팔자 수염의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뭔지는 몰라도 참 대—단한 환경운동가 납셨구만."
무수한 삽질 끝에 귀중한 단서께서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이제 그만 검증을 해볼 시간이 아니겠는가.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마찬가지로 사건 해결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파트너, 노스페라투 호드 경장의 어깨를 툭툭치며 앞서 경찰서 바깥으로 나섰고 노스페라투 호드도 그 의미를 알아라치고는 자신의 외투를 챙겨 곧장 뒤따라 나섰다. 덩치가 유독 거대한 두 사람이 자주 애용하는 SUV가 곧 부드럽게 출발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부여잡던 경사의 얼굴이 이상해보였는지 조수석에 앉은 경장이 자료에서 곧 눈을 떼고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모르겠네, 아— 정말이지 이건. 도대체 세상에 어떤 또라이께서 이런 일을 저지르신건지 감이 안 잡히네."
그 영문 모를 소리를 호드는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공감은 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인간적인 범주를 넘어도 이렇게 과하게 넘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일단은 사건이기 때문에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비극도.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대로 이리저리 차를 몰고 움직여 문제의 화학공장에 도달하자 놀랍게도 순경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상으로 따지면 아예 다른 관할서같은데… 무슨 일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호드의 말대로 진을 치고 있는 순경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잘 마른 밀랍마냥 바싹 굳어있는 모습은, 역시 저 안에서도 보통 예삿일이 벌어진 것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고 현장에 다가가는 두 사람을 당연히 순경들이 막아세웠다.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안되기는! 우린 사건 조사하려고 온거야!"
"이 공장, 책임자가 저희 사건에 관계되어 있습니다만."
"어… 어… 예?" 거구의 두 형사를 감히 막아세운 순경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가 겨우 이성을 붙잡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사람이요?"
이제는 두 형사가 얼빠진 목소리를 낼 차례가 되었다. 그나마 좀 더 침착한 노스페라투 호드 경장이 방금 들은 말을 없었던 것처럼 굴며,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오늘 새벽 선박 하나가 항구에 입항을 했는데, 선원이고 선장이고 일제히 미라가 되어있었으며 조사 결과 이들이 이 공장에서 뭔가를 받아 바다에 무단 투기하려던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을. 워낙 황당한 사건이라 속보로 온갖 매스컴을 통해 시끄럽게 알려졌던 그 내용이 떠오른 순경들은 그제서야 납득을 했다는 듯 들여보내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어째서 현장을 봉쇄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안에 들어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저희도 이거 이상한 사건에 대판 걸렸습니다."
"안에, 안에라— 좋아 알겠네. 얼마나 이상한지 그쪽도 한번 견식해보자고."
아직은 영문 모를 소리기에 이상해봐야 얼마나 이상하겠느냐는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은, 현장을 오가는 과학수사대원들의 그 독특한 차림새를 보고서 뭔가 이 현장 또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현장에 갈 수록 점차 코 끝을 찌르는 이상한 냄새. 황급히 과학수사대원 중 한 사람이 두 사람을 현장 바깥으로 끌어내면서 질타하는 목소리를 냈다.
"미쳤어?! 지금 저 안에 뭐 들어있는지 모르고 들어가면 어떻게 해!?"
"아니, 뭐, 뭐가 있는데 그러는 건가? 우린 다른 관할서에서 왔다고!"
"…어? 돌겠네. 일단 모르긴 몰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안돼."
다짜고짜 안된다며 만류하는 상대방의 태도에 인내심이 짧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덩치를 내세워 들어가게 해달라고 윽박질렀지만, 과학수사대원이 안되는건 안되는거라며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미간 사이에 깊은 골이 날 정도로 그 인상이 험악해지면서도 경사는 곧 그 만류하는 이유를 조금씩이나마 짐작하기 시작했다. 공장 내부도 아니고 사무실이라면 방독면을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과연 과학수사대원의 방독면이 뿌옇게 변할 정도로 한숨을 쉬면서 만류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안에 유독성 물질이 가득해. 맨 몸으로 갔다가 송장을 더 치우고 싶진 않거든 우리도?"
"얼마나… 심하기에 그런가?"
"닿으면 살점이 녹아버리고, 조금만 저 안의 공기를 들이마셔도 폐가 완전히 굳어버릴 정도지. 지금 훌륭한 예시가 저 방 안에 있거든?"
사장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그 문 너머를 가리킨 상대방의 말 뜻을, 두 사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맨눈으로 보기에 과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겠지. 호드가 잠시 식은땀을 감추며 자신들이 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못해도 지난 밤부터 오늘 새벽 사이로, 이 회사의 지시를 받은 배가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려다가 미라가 된 채로 돌아온 기괴한 사건.
"저희는, 이 사건의 관련자로, 사장을 심문하러 온 겁니다."
"젠장, 근데 사장 놈은 저렇게 폐기물 범벅이 되었단 말이지… 잠깐만."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캘리칼리가 툭 내뱉었다. "우리가 맡은 사건이랑, 이 사건의 범인. 동일인물이 아닐까?"
"예?"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망상 같은 거라서 근거고 뭐고 없네만. 일단 수사협조 차원에서 그 쪽이 지금까지 모은 자료들을 좀 복사해가도 되겠나? 이쪽에서 모은 것도 넘겨주겠네."
곧 수사대원이 사건의 정식 담당자를 두 형사에게 소개시켜줬고, 간단히 명함을 교환하는 것으로 이 괴이쩍은 정보 교류의 장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도 경찰서의 불은 좀처럼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문제의 화학공장 사건에 관한 자료가 팩스로 넘어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두 형사는 차라리 폐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과격한 환경운동가야 언제든지 등장해서 판을 치고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게 도통 과격한 환경운동가의 만행이라며 넘길 수 있는 행동인가?
"사람들을 바싹 말리고, 그 수많은 드럼통을 단숨에 옮긴다라. 혼자서 이게 가능한가?"
적어도 사람은 불가능하다. 물론 여럿이서면 못할 것이 무어가 있느냐만, 그랬다면 필시 목격자들에게 들키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목격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범인 후보 중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자는…
"유령인가!?"
"아니, 그게 무슨, 실없는 소리입니까?"
무심결에 한 혼잣말에 그의 등 뒤로 익숙한 퉁명스러움이 들려왔다. 오늘 밤도 덩치에 맞지 않게 영상분석실에서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던 호드가 여러가지로 피곤하다는 얼굴로 파트너의 어깨를 툭 치며 카페나 가자며 권했다. 지속적으로 서류만 보다가 눈이 빠질 것 같았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기회를 저버리지 않고 벌떡 자리에 일어나자마자 순식간에 경찰서 문을 열고 슬슬 석양이 지는 저녁놀의 공기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호드가 조금은 염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 그러고보니까, 황사라던데요."
"후우! 알게 뭔가! 저 안에 갑갑하게 있다보면 이 공기도 맑고 상쾌하게 다 느껴진단 말일세."
맞는 말이라며 호드도 동의했다. 두 형사는 천성이 어쩔 수 없이 아웃도어 스타일이었던만큼, 사무실에서 종이나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에 질색팔색하던 차였다. 걸어서 카페까지 가는 두 사람은 이번 사건의 여러가지로 괴이함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눴지만, 지금까지의 결론은 늘 한 가지로 귀결되곤 하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직 잘해봐야 3월에 불과한데도 제법 온기가 훅 끼치는 바람에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아이스초코를 쭉 마시고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게 봄이야? 아니면 여름이야?"
어쩌면 속에서 열이 북받쳐 오르는 통에 지금의 온기가 더 가혹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지는 탓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번에 절반은 쭉 빨아들인 노스페라투 호드의 얼굴만 봐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울분이라는 것이 대번에 느껴져, 사건 이야기를 가급적이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공장 사무실, CCTV 봤습니다."
"허? 어떻던가?"
"솔직히, 제가 경찰이 아니었으면, 그냥 유령이 했다고, 그리 넘어갔습니다."
그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많은 뜻을 함축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영상을 본 두 사람이기에 알 수 있는 말. 항구의 미라들과 화학공장 사장의 끔찍한 말로는 이 유령이라는 존재에 의해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만 이것을 어떻게 일일이 설명한단 말인가?
"CCTV에 아무 장난질을 안 쳐놨다고 한들, 세상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네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가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은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매도당하기 좋다. 그러니 몇 안되는 사실을 쥐어짜내서라도 이번 사건의 범인을 상부, 그리고 매스컴에게 공개해야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극단적이고 최첨단 장비를 잘 다루는 환경운동가라는 희한한 조합의 범인상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그것이 납득이 되어줄지는 모르지만. 문득 자신이 쥔 컵을 내려다본 그가 쓰게 웃었다.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으면 순식간에 다 마셔버린 것일까. 옆을 힐끗 보니 호드의 것도 자신과 별 차이는 없었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음?"
두꺼운 겉옷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지금과 같이 밤에도 제법 후텁지근한 날씨에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를 입는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남자가 어떤 인기척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이 낯선 사람의 등장에 지금까지 자신을 살려온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오감이 경종을 울렸다. 이 남자, 위험한 놈이다. 그저 계절감과 거리가 먼 옷차림 탓이 아니었다. 풍겨오는 분위기는 분명.
"호두야, 혹시 뭐 챙겨온 거 없지?"
"오… 있겠습니까?"
여전히 뚜벅거리는 저 소리에 공연히 긴장감이 올라오는 노스페라투 호드의 얼굴도 그와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건이 불시에 들이닥친다고 한들, 잠깐 휴식하는 사이에도 터지는 건 좀 가혹하지 않은가. 캘리칼리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굴렀다. 운이 좋게도 부러진지 오래된 나뭇가지가 제법 굵은 것이 몽둥이로 쓰기에는 괜찮을 듯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계절감을 지극히 모르거나 혹은 정신이 어딘가 잘못 되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대방과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보이는 그의 외양은 옷차림 외에도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새하얗게 샌 머리에 파란색 브릿지를 말끔하게 뒤로 넘겨 붉은색 머리끈으로 동여매고, 그리고 그만큼이나 시퍼런 눈동자.
"이야— 이거, 뭔 코스프레인가?"
"글쎄요, 제가 아는 어떤 만화나 영화도, 저런 외모는, 없었는데."
"그렇단 말이지…."
두 형사의 긴장감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이 이상한 외모와 옷차림의 남성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다가올 뿐이다.
"안녕하십니까?"
기이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의 말은, 마치 우연히 산책을 하다 지나가는 사람인 것처럼 건네는 인사.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그런 의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이 이상한 남자는 자신들에게 분명히 용건이 있어서 다가왔다. 그렇지 않으면 저 두 다리가 갑작스럽게 멈춰설 이유가 없으므로.
형사들의 노려보는 눈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태연하다 해야할 지 뻔뻔하다 해야 할 지 모를 남자가 선뜻 자신을 밝혔다.
"카르나르 융터르라고 합니다."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일테지?"
"그렇습니다."
그리 뻔뻔하게 답하는 남성에게,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한숨을 푹 쉬고는 늘 휴대하는 수갑을 꺼내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들이밀었다. "XX호 선장 및 선원 총 21명을 습격하고 XX화학공장 사장을 유독성 폐기물로 살해한 게 네 놈이지 않나?" 그러자 융터르가 순순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카르나르 융터르가 본래 이 장소에 도착한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존재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 폐기물을 바다에 투기하려던 인간들과, 그 행위를 사주한 사람 외에도 세상에는 실로 여러가지 이유에서 지구의 상태를 갈 수록 악화시키는 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에 대해 추적하는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저 두 사람의 기억을 지우기 위함이었지만.
"이해 되지 않는군요. 저를 체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다니."
"글쎄, 일단 댁은 사람을 죽였거든. 그것도 좀 많이."
"체포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를 법정에 세우고 왜 죽였는가 그 진술을 받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감옥에 가두고 당신들이 말하는 법에 의해 저를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위로는 조금 짧지만, 옆으로라면 캘리칼리보다 더 넓은 호드가 그 건장한 덩치를 내세우며 분명 평균보다 조금 큰 키의 카르나르 융터르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무력을 써야 한다면 각오는 하고 있지만, 이 정도로 윽박지르면 어지간한 깡패들도 순순히 기가 죽어서 따르던 경험을 살린 것이다. 그러나.
"어?"
아주 가볍게 툭 밀쳤을 뿐이다. 그저, 그의 키 때문에 손을 뻗으면 호드의 가슴 높이 정도에 닿아, 카르나르 융터르의 손이 그렇게 호드를 슬쩍 밀었을 뿐인데도. 체격만큼이나 몸무게도 상당한 그 몸이 붕 뜨더니 대략 5m 정도를 날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파트너의 원치않는 저공비행을 체험하게 된 노스페라투 호드도, 그것을 미처 붙잡지 못하고 옆에서 바라본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카르나르 융터르라 자칭하는 존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얼굴의 그가 말한다.
"신. 전지전능한 존재임을 의미하고 싶으셨다면 아닙니다. 저는 지구를 관리하는 이른바… 행성관리자입니다."
행성관리자, 행성관리자라— 호드를 황급히 부축한 캘리칼리가 가는 눈으로 카르나르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던 자신의 푸념섞인 우스갯소리가 의외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다니.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그저 미친 놈이 머리를 허옇게 염색하고 더운 것도 티를 내지 않으면서 일부러 두꺼운 옷을 입은 것일지도 모른다. 호드를 밀쳐낼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요행이 따른 것이겠지, 라고 말하고 싶으셨습니까?" 카르나르 융터르가 곧바로 생각의 흐름을 끊는다.
"제기랄. 차라리 신이라고 해주면 안 되겠냐? 그게 설명은 되거든? 납득은 안 되지만."
"저는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지구, 이 행성에 관련된 것에 국한 되어있으므로."
"우린 어차피, 지구 바깥으로, 못 나가니 우리 입장에서, 전지전능, 맞습니다."
"아하." 카르나르 융터르가 얼굴에 변화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묘한 사내에게 묻고자 한다면 이것저것 묻고 싶은 두 형사지만 당장은, 저 외계인께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미라로 만들어버리고, 유독성 폐기물에 사람을 차라리 빠트리다시피 들이부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음을 숨기지 않은 이 행성관리자는 그저 형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충분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단으로 투기하려던 그 드럼통 안의 내용물이 바다에 지대한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 현장에서도 들었지. 사람도 살점이 녹고 폐가 다 딱딱하게 굳을 정도라던데. 그래도 이건—"
"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캘리칼리의 말을 다시 카르나르 융터르가 잘라냈지만, 그 무례함을 지적할 만큼 형사에게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다만 타인(?)이 해버린 자신의 말에 그저 거듭 동의를 표할 뿐. 행성관리자가 이후로도 미라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저 어떻게 처분할 지 적당한 판정이 떠오르지 않아, 수분을 빼버렸다는 부연 설명을 해주었긴 하지만 그걸로 납득이 될 형사들은 아니었다. 물론 관리자도 그들의 이해를 구한 것은 아니었기에, 형사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목적을 이야기 하였다.
"본래라면 저는 당신들과 만난 순간, 그 기억을 지우고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만 제 행동에 의구심을 품는 행동에 방침을 바꿨습니다."
"허! 아이고 고마우셔라. 그래 무슨 목적이 있고, 무슨 방침이 있는지도 설명해주면 좋을텐데 말이야."
그 비아냥이 담긴 목소리에 카르나르 융터르라고 자칭하는 관리자가 그 낮은 목소리로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현재 이 장소를 기준으로 24시간 이내, 제게 인류라 불리는 종을 말소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해시켜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두 분이 성공하신다면, 저는 그 즉시 제 목적을 취소하겠습니다."
"잠깐만, 그럼, 그 목적이라는 건 설마." 호드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24시간이 지난 이후, 저는 당신을 포함한 인류를 이 행성에 있어 일종의 해악으로 분류, 말소할 것입니다."
"어이,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방금 뭐라고 했나? …두 분?!"
캘리칼리 데이비슨조차도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와 뻔뻔함을 한구석에 밀어버린지 오래다. 지금 자칭 행성관리자, 카르나르 융터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한다면 이제부터 24시간 이내로 자신들이 입을 어떻게 터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인류 멸망의 날을 초래하게 된다는 셈이니. 갑작스럽게 너무나 무거운 책무가 떠밀려 온 두 사람은 이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려 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 상대방을 체포하겠다던 본래의 목적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두 분.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 그리고 노스페라투 호드 님."
"어째서?! 이봐, 우린 자넬 체포하려고 한 거였지 졸지에 인류를 대표하는 변호사같은 노릇을 할 생각도 없었다고!"
"문제가 됩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실례하는거, 설마."
그 파란 유리구슬 같은 눈이 도로록 굴러가더니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제법 야심한 밤에 공원에서 불꽃을 터트리고 술을 까느라 아주 정신없이 즐거운, 누가보더라도 불량청소년 무리들이 대략 열 명정도. 과연 인적 드문 공원이라 이런 사달도 다 일어난다는 생각에, 노스페라투 호드가 서둘러 계도를 위해 그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지만 곧 내달려야 했다.
"야, 니들 안 춥냐?"
"술 깰라고 그러니까 춥지 등신아. 내가 뭐랬냐?"
"아 씨발, 존나 추워. 야 누구 라이터 좀 빌려줘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얼큰하도록 술에 취한 한 놈이 라이터를 자기네 무리에게서 가져오더니 곧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규모가 작고 관리가 안 되어있다고는 하나 화단에 술을 잔뜩 적신 종이쪼가리를 불에 붙여 그 화단에 바로 던진 것. 바싹 마른 낙엽이 수북한 화단은 곧 불씨를 순식간에 키워, 거대한 불이 되었다. 카르나르 융터르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는, 그 방화현장 한가운데를 가볍게 손짓하였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그 손을 얹어주는 듯이. 그리고.
"어!? 어 씨 뭐야? 불 꺼졌어!"
"씨발, 얼어 뒤지겠는데 뭐야!"
불에 타올랐던 흔적만 남긴 채 숯덩어리가 되어버린 화단에서 시선을 뗀 카르나르 융터르의 몸은, 불이 꺼졌다면서 다시 불을 지피려는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달려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도 둘 씩이나. 캘리칼리와 호드가 맹렬하게 불량학생들에게 어깨로 태클을 걸다시피 하며 일장연설의 훈계를 늘어놓았고, 그 덩치 때문에라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학생들은 다신 안 그러겠다며 저마다 주섬주섬 짐을 싸서 황급히 흩어졌다.
"후—! 젠장, 안 늦었구만."
"진짜로 큰 일, 날 뻔했습니다."
학생들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자기네들이 길바닥에 늘어놓은 술병들이 카르나르 융터르의 눈짓에 완전히 증발되어버린 것을 두 형사들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야말로 "있었는데 없었다"라고 밖에 표현 못할 그것이 만약 사람에게 행해졌다면? 더 끔찍한 망상의 행렬을 가까스로 막아낸 호드는 고개를 좌우로 털어대며 잊으려 하였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카르나르 융터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그 입을 열었다.
"왜 막으셨습니까?"
"24시간!! 24시간 동안 자네를 설득하라고 했잖나, 응? 그럼 자네도 그 동안은 이 해괴한 짓거리를 좀 참아야 하는게 형평성에 맞지 않나?"
"제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관리자의 행동에 모순을 지적했고 카르나르 융터르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그런 상황에서 황망한 정신의 상태로 복귀하려던 두 사람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여기지 않는지, 그저 밤거리를 거닐며 저마다 삼삼오오 떠들기나 할 뿐이다. 분명 이상한 옷차림의 남자가 있는 것을 아무도 신경스지 않는다.
"저기, 왜 자네를 다 모른 척하는건가?"
"모르는 척이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편이 여러모로 업무에 훨씬 수월하므로."
"업무라…."
호드는 쓰게 중얼거렸다. 지금에서야 자신들도 저 관리자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만약 지금도 몰랐다면 뒤에 유령을 붙이고 다니는 꼴이 아닌가. 그리고 업무라는 말도 저 자에게나 업무이지, 실제로는 한 종이 이상할 정도로 번성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드는 참이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그런 한편으로 몇 걸음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이 관리자가 은근 신경에 거슬렸다. 설득하라기에 24시간이 되는 시점에서 자신들 앞에 뿅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밀착감시는 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장담한대로 경찰서 안의 그 모든 사람들은 두 형사를 제외하고는 전혀 경찰과 거리가 먼 인물이 돌아다니더라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신의 일에 매진하거나 혹은 설렁설렁 시간을 떼우고 있을 뿐이다.
"이거 돌겠군. 까딱하면 스위치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아예 환장할 거 같아."
"아니, 스위치라니요?" 마찬가지로 심란한 호드가 그 혼잣말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자 캘리칼리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있잖냐. 영화 같은거 보면 핵 같은 놈 발사할 적마다 유리케이스에 얌전히 있는, 그런 무진장 큰 빨간색 버튼."
그의 묘사를 묵묵히 들은 노스페라투 호드도 아주 전형적인 이미지를 하나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과연 틀린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다. 자신들이 잘못 해서 그 유리케이스를 주먹으로 깨고 그 안의 스위치를 건드린다면? 아포칼립스를 다룬 영화들은 그 상상력에 대해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여기 관리자라는 양반께서는 자기 뒷담화를 하는지도 모르는 눈치로 지금도 차가운 눈으로 이곳 저곳을 보며 당장이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마음을 애써 참는 중이니.
두 형사는 그 심기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은 아닐까 퇴근하기로 마음 먹은 시간 동안 노심초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이상하고 남모를 동행은 경찰서 안 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 그 시간만 오기를 애써 기다렸고, 결국 조속한 결과를 도출하기를 원하는 상부에게는 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최종 결론으로 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결과는 이게 말이 되냐는 핀잔이었지만, 그렇다고 까딱하다가 우리 다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진범께서 다 듣고 계신데요라는 말을 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니.
"야, 상상력이 지나친 거 아니냐? CCTV를 무효화 할 수 있는 재머를 이용한 극렬 환경주의자의 범행? 이거 잘못 하면 옷 벗는 거로는 끝이 안 나!"
"팀장님, 이 사건이 그럼 어떻게 규명이 될 수 있습니까? 아, 그래요. 이 결론도 솔직히 대충 끼워맞춘 것이긴 한데,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방안이라고 생각 안 드십니까?"
"상식적이지…. 맞긴 한데! 아니 그래도! …니미 나도 모르겠다 이젠."
투덜거리면서도 팀장이 나름대로 상부에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지, 그 엉망진창인 보고서를 조금은 더 상식적인 선에서 다른 이들에게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최대한 고생한 끝에 이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 후폭풍과는 전혀 관계없이.
"차라리 제가 했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편이 더 낫지 않습니까? 경찰은 본래 진실을 규명하는 직업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잔뜩 피곤해진 얼굴로 형사들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낮고 울리는 목소리에 멈춰섰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이지만, 그 사이로는 미묘한 정도로 궁금증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지독할 정도의 첨삭에 시달렸던 두 형사의 표정은, 이제 특급 위험물질을 상대하는 조심성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되려 피어오른 것은 짜증이다. 노스페라투 호드가 틱틱대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게, 당신 때문 아닙니까?"
"저 때문이라고요?" 카르나르 융터르의 뻔뻔하기까지한 반문에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이제 주위 눈치도 신경쓰지 않고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아까 우리한테 뭐라고 했더라? 체포할 수 있냐고? 법정에 세울 수 있냐고? 처벌 받을 수 있겠냐고? 할 수 있겠지 왜 못하겠어!? 그 잘난 몸뚱이를 우리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내세우고, 지금까지 사람들 여럿 속앓이 시키고 머리는 싸매게 만드는 이 염병할 사건에 대해서 자네가 직접 나서서 말하면 다 해결 될 일이니까! 근데 문제가 뭔줄 아나? 사람들이 안 믿어 줄거라는 말이지!"
인기척이라곤 없는 복도는 울분에 받친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진짜 뻔뻔하다고 말을 덧붙이는 호드의 서늘한 말에는 차라리 살기가 담겨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인간 외적인 존재에게 있어 위협조차도 되지 않지만, 진심이 듬뿍 묻어나오는 하소연에는 설득력이 매우 높았기에 행성관리자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저 조용히 침묵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사의 뒤를 지속적으로 밟은 카르나르 융터르는 곧 텔레비전에서 불과 1시간 전 쯤 보았던 두 사람의 상사가 무수한 기자들 앞에서 어떤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화면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다시피 한 두꺼운 헤드라인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주장한 그 내용을 조금은 더 공식적이고, 상식적인 방안으로 수정이 되어있었다.
-그— XX호의 선장 및 선원 총 21명이 일시에 미라가 된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배 안에 선의가 없었다는 점과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구비된 물이 오염되어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뙤약볕 아래에서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채 귀항하는 선택을 내리고 이동하던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연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말대로 마땅한 증거는 없지만 적당한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기자들은 저마다 기삿거리를 하나라도 더 챙기기 위해 손을 연거푸 치켜들고 발언권을 요청하는 난잡하고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경찰서 내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사이로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라는 호드의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 모든 것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방문객이 앉는 길쭉한 의자에서 곧 자리를 일어났다. 저 발표로 조만간 흥미로운 관측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일단 자신들의 손을 떠나 더는 할 일이 없어진 두 형사는 공동으로 사는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봐, 설마 집까지 쫓아올 생각은 아니겠지?"
머리를 위로 한참은 올려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덩치 큰 형사,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염려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카르나르 융터르의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쫓아올 속내를 드러냈고, 잠시나마 긴장감에서 해소하고 싶었던 두 형사들은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아랑곳 하지 않고 저마다 쓰러지다시피 하였다.
그 뒤로, 아무도 이목을 끌지 않을 제법 허름한 빌라이자 집에서 두 형사는 이 행성관리자라는 작자가 졸지에 지워버린 인류의 변호사 노릇을 계속 하기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늘 한결 같았다. 만약 감정을 드러낸 것이 맞다면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인가라고 밖에 표현 못 할, 카르나르 융터르의 얼굴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고 결국 그의 입에서 "들을 가치도 없다"는 말까지 나와버렸다.
거듭된 실패에 현기증과 약간의 미열마저 느끼던 두 사람이 방바닥에 드러누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제기랄, 온종일 머리를 굴렸더니 내가 생각해도 뭔 어처구니 없는 말만 하게 되는구만."
"24시간까지, 아직… 남았으니까 조금 쉬었다, 생각합시다. 벌써 새벽 3시, 입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카르나르 융터르가 보더라도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지친 탓에 수 년은 순식간에 늙어보이는 착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정작 이 과로를 떠안겨 준 당사자는 태연하게 발코니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제법 달동네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높이였기에 저 아래로는 감히 낮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부시도록 환하고 다양한 조명들의 세례는 일종의 빛으로 이루어진 길이 아닐까 싶은 착각도 들 정도.
곧 등 뒤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말로써 납득시키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지쳐버린 정신에 이기지 못하고 잠에 금방 빠져든 것이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 서늘하도록 파란 눈을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에게 돌렸다. 당장 쓰러져 자는 것이 지금은 몸의 컨디션에 도움을 줄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성관리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두 거구의 신체가 헬륨풍선이라도 되는 듯 가볍게 둥실 떠올랐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연 무엇이 수고했다는 것일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그는 각자 본인 방이라고 적어둔 문패를 확인하고 저마다 침대 위로 던져두었다. 이대로 남은 시간 동안 설득을 실패한다면, 모든 인류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결심은 변하지 않은 상태지만, 아직 시간은 남아있고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 유의미한 관측결과가 기다릴 것이다.
"다만 무리하게 시간을 앞당길 이유는 없으므로. 지금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관리자의 모습은 차라리 잠에 든 것처럼 보였기에 그 날 아침, 겨우 잠에서 깬 두 사람이 황당한 얼굴로 꼿꼿하게 앉은 자세의 그를 바라보았다. 호드가 눈을 연거푸 비비며 이 황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망설이다 결국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에 카르나르 융터르의 눈이 떠지면서 동시에 그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분명 아침인사 같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어… 마침 오늘이 비번이긴 한데 말이지."
"Jesus,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준비가 되시는데로 저를 따라와주셨으면 합니다."
까딱하다간 곧바로 인류멸종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두 남자가 부리나케 외출채비를 갖춘 결과는, 사람들의 열기가 순식간에 응집된 곳은 다름 아닌 광장이다. 예로부터 어떤 시위가 있을 적마다 가두행진을 벌인다면 반드시 그곳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익숙한 그 거리는 이미 다양한 사람들이 차도까지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기자들이 소속된 방송국 스티커를 붙인 카메라 앞에서 저마다 마구 현장을 취재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을 갑작스럽게 마주한 두 형사는 저마다 마른 세수를 하거나 볼을 꼬집는 등의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남자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갑자기 앞서나가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뒤를 쫓아 익숙한 길을 걸었을 뿐이건만, 알아차리지도 못한 순간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한 것이다.
"여긴?"
"이 곳의 반응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뉴스가 보도 된 이후 불과 2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순식간에 사람들이 응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연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호드가 놀란 것은 다른 부분이 아니다.
"잠깐만요, 지금, 2시간이라고, 했습니까?"
노스페라투 호드는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는 사실에 놀라 반문을 하였지만 워낙 시민들의 시위소리가 큰 탓에 묻혀버렸다. 그 행렬을 바라보던 카르나르 융터르의 새하얀 꽁지머리가 훽 돌아가 등 뒤에서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두 형사에게 시선이 닿았다.
"제가 두 분께 어떤 실수를 했습니까?"
"그… 아닐세."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이미 인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상대방의 행동에 일일이 자신이 지금 어떤 기분인가를 설명하는 것도 바보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상황이 어찌 된 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머니에 쑤셔둔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경찰의 수사 발표가 있은 이후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인지 매스컴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는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행보였고 그들의 자체적인 수사 결과에 따른 발표가 이후 후속보도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벌어진 급작스러운 시위.
XX화학 공장에서 극도로 유독성인 화학 폐기물을 바다에 드럼통 수십 개나 무단 폐기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환경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시위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는 것. 나름대로 신경을 쓰기는 한 것인지 저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LED 전구를 촛불처럼 달아논 것이다. 그리고 저 앞에는 시위를 주최한 것으로 보이는 환경단체들이 내가 범인이다라는 내용의 시위 문구를 저마다 전면에 내세운 채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신기하군요. 이런 면은 처음 보는데."
"옛날엔 안 그랬네. 뭐랄까… 비교적 최근에 한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그 지역 일대를 여러모로 망가트린 일이 있었거든. 그 이후로 그 나라가 오염수를 방류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바닷물 관련해서 좀 관심이 깊어졌을 뿐이네."
"오염된 자연 환경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호드의 툴툴거리는 어조에 융터르가 곧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눈과 마주치는 바람에 호드가 뜨끔해하며 들썩이려는 어깨를 겨우 진정시키고는 뒤이어서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적응할 사이도 없이, 생선도 못 먹을 정도로, 망가지면,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겁니까?"
"살기 위해서라도 환경문제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노스페라투 호드는 평소 담아두던 말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카르나르 융터르가 저지른 그 살인도, 본질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하는 편이 차라리 돈이 되니 저지른 것이라는 것. 굳이 먼 바다까지 나가서 무단 투기를 하려는 것도 그 위험성을 잘 알기에 당장 가까운 곳에서 피해를 보지 않으려는 일종의 꼼수로 저지른 사건이라는 점까지.
"만약, 폐기물 처리시설이 더욱 활성화 되면, 무단 투기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겁니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폐기물 처리시설을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에 대해 설명이 부족합니다."
"아직은 이상론이지만, 사람들이라는게, 발등에 불 떨어지면, 하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리 말한 호드는 제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되는대로 주워 섬긴 말이다만 아직도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있어 인류라는 족속들은 여전히 파괴만 일삼는 부류로 판단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다면 좋았겠다는 후회가 든 탓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봐온 사람들은 늘 그랬다.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그것이 더 쉽고 빠르니까. 그리고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사람들은 그 행위가 곧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옴을 알고 나서야 멈추곤 하였다.
"크게 보면, 당신이 선장과 선원들을 미라로, 만든 것과 맥락은 같습니다. 사람들 간에, 이건 위험하다,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 혹시, 오스트레일리아라고 아나? 나름대로 대륙인데."
한편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견해는 조금 달랐기에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구에 관한 지리 정보를 모를 리 없는 카르나르 융터르는 적도 아래의 유일한 인류 문화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비번일 적, 우연히 보게 된 다큐멘터리 영상이 기억 속에서 떠오른 캘리칼리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카르나르 융터르에게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듯 하였다.
"거기 자연환경이 지나칠 정도로 초식동물에게 좋거든. 포식자가 없으니 말이야.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나?"
"순식간에 불어났겠군요."
"그렇지. 토끼만 해도 억 단위라네.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훨씬 많은 토끼들이 사는거지. 그런데 말이지, 그게 고작 24마리에서 시작되었거든. 물론 그 쪽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뒤늦게 천적을 풀어놓는다, 아니면 토끼들을 죽일 바이러스를 심어 풀어놓는다던가 별의 별 수를 다 썼지만 지금도 그 동네는 심심하면 토끼가 들끓는 그런 곳이 되었네."
"그렇군요. 과연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수를 조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겁니까."
"더불어 그 동네는 억 단위의 토끼들이 온갖 풀을 남김없이 뜯어먹는 바람에 황무지가 꽤 많다는 사실도 생각해 주면 좋겠구만."
그 말에 융터르의 얼굴이 잠시 변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기회를 놓칠 세라 재빠르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사막화를 만들어버린 토끼 또한 지구에 있어 해가 되니 자네 논리를 적용하면 토끼도 멸절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그건…." 카르나르 융터르라 자칭하는 관리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대로 한 지역의 생태계를 거의 파괴하는 주 원인이 사람만 있지 않다는 반례이므로.
"호드 이 친구의 말을 생각해주게. 사람들이란 것이 자네처럼— 그래, 지구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한 자네처럼 뭐든 다 알고 그에 대비할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야. 그러니 저기 저 시위하는 사람들처럼 위기를 느끼는 시점이 자네가 봤을 때는 턱없이 느려도 고치려고 하는 것 아니겠나. 근데 짐승들은? 그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있겠나?"
카르나르 융터르가 다시 시위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XX화학 공장이 대기열의 계열사라는 후속 보도의 영향으로 이 행진은 점차 그 본사를 향해 이동할 기미가 뚜렷하다. 그 행진을 조금 늦게 바라보던 호드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경찰의 업무를, 당신은 진실을 규명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반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막는 것입니다."
"아니면 다수의 사람들이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
물끄러미 행렬을 바라보던 행성관리자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목소리가 슬그머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편협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의 주장대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사람들 외에도 충분히 가능함을 확인했습니다. 요컨대 이 행성의 문제를 오롯이 인류에게 책임 지울 수 없겠습니다."
"그럼 그 말은…." 기대감을 억누르며 호드가 은근슬쩍 답을 재촉했다.
"두 분께서 저를 설득하셨으므로, 소기의 목적을 취소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관리자의 몸이 평화롭게 시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파묻혀 보일락 말락 하는가 싶더니 곧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이상한 만남 이후로 변한 것이 있느냐고 한다면, 사람들의 시위와 그로 인해 외신을 위시한 국적을 가리지 않는 나쁜 의미에서의 관심을 끌어버린 그 기업 본사에서 항복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아픈 척을 다 빠진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발톱까지 표현하던 총수가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허리를 반으로 접고 일어나는 모습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주가 때문이겠지 뭘."
캘리칼리는 심드렁한 어조로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 문제의 모기업 주가가 나날이 곤두박질 치고 있는 그래프는 그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총수도 허리를 굽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형사가 마찬가지로 그 24시간이 지난 이후의 지금을 못믿겨해하는 호드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지금 이 순간마저 꿈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지 그 외부 자극에 화들짝 놀라 조금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직 사건 들어온 것도 없으니, 잠시 커피나 마시면서 쉬자고."
"오, 좋습니다."
커피를 마실 때면 종종 들리는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는 공원은 여전히 한산했다. 무턱대고 만든 것은 좋았지만 워낙 사람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여서 점차 시에서도 관심이 뜸해진 탓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불과 엊그제의 일이 그저 피곤해서 들었던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그마한 화단 하나가 잿더미가 된 모습.
카르나르 융터르를 만나고 난 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스테인레스 재질의 텀블러에 자기 몫의 음료를 담아 마시기 시작한 두 형사는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그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호드다.
"우리, 그 날, 말 제대로 한 것 맞습니까?"
"아니… 잘 모르겠는걸. 그래도 순순히 물러나줬으니까 잘한 거 아닐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신 호드는 그 반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역시 아닐 것 같다고 말했다. 기껏 잘 마무리 된 사건에 초를 치는 것 같아 조금은 불쾌감이 오른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자네 생각은 뭔가?"
"…봐준 것 같습니다."
"봐줬다고?"
무슨 변덕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노스페라투 호드가 생각하기에는, 카르나르 융터르라 자칭한 그 행성관리자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미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면, 그 바다에 드럼통을 내던진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게 호드의 주장이다.
"게다가, 보란듯이 끔찍하게 미라, 만들어놨습니다. 유독성 폐기물로 그 사장도 죽였습니다. 이게 그 나름의 경고, 아닐까요."
"그럴듯 하구만….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
캘리칼리도 마침 화단을 방화하던 불량청소년들이 잠깐 오버랩되었다. 순식간에 그 주위에 있던 소주병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들이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그리 사라졌는데, 학생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줄곧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드의 의문제기에 맞춰 곰곰히 생각하다 툭 내뱉듯 말했다.
"봐줬구만 이 망할 관리자 양반. 학생들을 우리가 구할 것이라고 안 거야."
"지구에 한해서는 전지전능이라고 했고, 우리 속마음도 다 읽을 수 있으니…."
노스페라투 호드가 쓰게 웃으면서 말한 것처럼,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부랴부랴 호주 이야기를 꺼낸 것도 분명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다른 사례도 찾아냈다며 납득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차라리 예상 답안을 마련해두고 그 정답 여부를 판별하는 것과도 같지 않은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삼킨 캘리칼리가 반사적으로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고는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한거야? 그 양반은."
"잊지 말아달라, 그리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잊지 마라… 라는 말이지."
신과 같이 애매하고 불확실한 존재가 아닌, 분명 선명하고 형태가 있는 존재가 우주에서 지구를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문득 두 형사에게 떠올랐다. 그러니 그런 행동들을 굳이 익숙한 감각으로 치환하자면—
"나 고생하고 있으니까 알아봐달라?"
"아니, 뭡니까 그게." 거대한 존재의 의지가 순식간에 아주 친숙하고 익숙한 푸념이 되자 호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잖나! 아무리 환경 오염에 대응하려고 해도 워낙 싸질러 둔 것들이 많으니 좀 작작해달라는 푸념이 아니고서야…."
관리자의 의도를 깨달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이를 박박 갈아대며 지금까지 놀아났다고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것도 모른 채 진짜로 멸망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마음을 잔뜩 졸이며 보내온 24시간이 갑자기 덧없이 느껴진 그의 입에서는 이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호드는 상대적으로 점잖은 편이었기에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굴도 된통 속았다는 분한 얼굴이 되어 자기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순식간에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형사가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늦었다.
"굉장히 분해하시는군요."
"어?!"
"당신, 위로 간 거, 아니었습니까?"
깔끔하게 머리는 변함이 없지만, 일단 색은 차라리 암갈색에 가깝고 무엇보다도 짧게 다듬은데다 눈은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역시 인상깊은 그 동굴과도 같은 저음. 카르나르 융터르가 조금은 인간미를 띄는 웃음을 슬며시 지으며 명함을 꺼냈다.
"지금은, 심리상담사 카르나르 융터르입니다."
"어… 어, 어떻게!?" 그 천하의 호드가 새된 목소리로 벌떡 일어났다.
"굳이 비유하자면 언더커버 보스와 같습니다. 면허는 없지만 속마음은 잘 읽을 수 있으므로, 의심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이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말을 곱씹어보면 이미 인간 사회를 알 만큼은 안다는 소리가 아니겠느냐며 마찬가지로 벌떡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거의 울부짖음을 방불케하는 괴성을 질러댔고, 융터르는 아주 살짝 웃는 얼굴로 태연하고 뻔뻔하게 답했다.
"비록 시간은 넘기셨지만 제 의도를 알아차려 주셨기에 감사인사를 드리고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기랄, 당신, 얼굴 두께는, 도대체 몇 cm입니까?"
"제 피부 두께는 표준 성인 남성의 지표를 따릅니다. 해당 질문은 주로 뻔뻔한 상대방의 태도를 돌려 비난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두 사람에게는 익히 아는 그 비인간적인 태도로 다시 융터르가 질문했지만
"맞네! 맞아! 이 뻔뻔한 놈!!" 진지하게 분노하기 시작한 캘리칼리의 목에서 핏대가 솟아오를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물고 관리가 안 된 공원은 그렇게 두 사람과 한 이상한 존재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그 현장 근처로 얼씬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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