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전번에 천사융 연성을 보고 났더니 뭔가 갑자기 시동걸려서 급발진했습니다.
*본격 더블 융소리 들어갑니다.
*천사융은 카르나르, 퇴마융은 융터르 이렇게 서술하겠습니다.
자신을 카르나르 융터르라고 지칭하는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천사에게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웠기에, 일이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큰 일이 닥치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부하격의 하급 천사들이 급히 그의 사무실에 달려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을 느꼈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뭡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을 듣고나서, 그는 더 이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와락 구겨버리고, 얼굴도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채로 흐르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집무실을 진동하듯 울려대기 시작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 그 자를 데려오십시오. …같은 이름의 사람 말고."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된, 자신이 아는 캘리칼리 데이비슨과의 동명이인이자 마찬가지로 덩치 큰 신부를 잠시 떠올리고 뒤늦게 덧붙인 천사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평소 이상으로 엄하게 그를 질책함과 동시에 엄격한 처벌이 필요할 것이다. 한 손은 사람처럼 올라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로 저절로 향하고, 다른 한 손은 새끼손가락부터 엄지까지 안단테의 박자로 부드럽게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 끊임없는 도돌이표는 방문 너머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의해 끝났다.
"어이! 나 이번엔 잘못 안 했다고! 자꾸 이렇게 잡으면 쓰나?"
항변을 하는 그 거대한 덩치는 떠밀리듯 방 안으로 밀쳐져 들어가버리고, 잘못을 안 했다며 주장하던 대악마는 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오싹한 눈길을 본 체 만 체 하며 도로 나가려고 용을 쓰기 시작했지만 시선에 걸맞는 목소리에 그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만하시지요. 방금 보여주신 그 태도로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심증만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아 이런."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카르나르의 엄동설한과도 견줄 수 없는 서늘한 목소리에, 검은색의 고급 양복을 입은 대악마가 그제서야 몸을 천천히 돌려 카르나르 융터르를 '다 들켰네'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빠른 고백만이 그나마 처벌을 덜 받을 길임을 잘 알아도 경험상 너무 잘 아는 그가 이 사무실에 오면 늘 맘에들어하는 익숙한 소파 위로 몸을 눕듯이 앉아 마주보기 시작했다. 그 표정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짖궂은 장난을 치다 딱 걸린 그것이었으나, 지금은 다시 태연하고 능글맞게 돌아와있었다.
"어떻게 알았나?"
"내부 밀고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질렀는지나 알고 계십니까?"
카르나르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뻔뻔하게 껄껄 웃는 소리만 내면서 모른 척을 하였다. 그 웃음소리가 내포하는 뜻. 오랜 기간 그를 알아온 경험으로 속내를 알아차린 대천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다가 작게 한숨 쉬고는 다시 말했다.
"당신… 일부러 그랬군요."
"으하하하—! 재밌는 걸 내가 못 참는게 죄지. 별 수 없구만. 자네 원하는 데로 지지든 삶든 맘대로 하게. 헌데 이걸 처벌이라고 부를 수는 있나?"
그 뻔뻔한 말에 대천사가 그를 매섭도록 노려보았으나 이제는 노골적으로 껄껄 웃어대는 그에게서 나올 것은 더 없었다.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플 것이 분명하여, 자리를 뜬 그는 당장 향해야 할 목적지가 명확하다는 점 하나를 가지고 그나마 위안을 삼기에는 이번 일이 너무 거대해서 차라리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한때는 구마사제를 지망했던 카르나르 융터르가 뜻밖의 손님을 맞이 한 것은 그 날 오후를 막 넘겼을 무렵이다. 마땅한 일감이 없으니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으로 휴식을 느긋하게 즐기려던 그의 계획은, 문에서 꽝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책장이 구겨지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종이만큼이나 와락 구겨진 얼굴로 문을 열자, 익숙한 분홍머리의 악마가 보였다. 분명 계약 조건에 따라 성당의 별채에서 살아야 할텐데.
악마로서의 위엄은 어디 갔는지, 뢴트게늄이 땀을 비오듯 쏟아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히 융터르였다. 뻔뻔하기로 이름난 뢴트게늄이 어째서 이렇게도 당황해하는가, 그 의문은 곧바로 해결되었다. 악마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 뢴트게늄이 쭈뼛거리며 현관문에서 몸을 살짝 비키자 있어야 할 복도 대신 새하얀 양복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옷에 쓰인 색상 하나로 인상이 달라지는 그.
자신의 모습을 빌려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대천사가, 더없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먼저, 그리고 뢴트게늄을 슬쩍 바라보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 나 이제 가요? 어? 내가 원해서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충분하니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욱이 그리 하라고 사주했던 자는 지금 지상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마땅한 벌을 내렸으므로, 동일한 죄로 당신을 처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상황설명을 할 터이니 준비 부탁드립니다."
뢴트게늄이 그 말을 듣고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더는 그 곁에 있고 싶지 않았는지,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것 마냥 냅다 도망쳐버린 자리를 먼 눈으로, 쌍둥이와도 같은 두 얼굴이 나란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융터르는 그나마 자신이 알아차린 부분만을 먼저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뢴트게늄은 자신보다도 더 상위의 악마에게 어떤 사주를 받고 범죄를 저질렀다. 그것을 이 자신과 똑닮은 천사가 알아차리고, 벌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자신같은 일반적인 사람을 이 여섯 장의 날개가 흐릿하게 팔락거리는 천사가 찾아올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똑같이 생긴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달갑지 않기도 하였다.
융터르는 그보다도 지극히 인간다운 어떤 곤란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치 않는 일란성 쌍둥이인데다 이름도 자신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이 상대방을 무어라고 지칭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상대방을 호칭하기 위한 용도로 부르기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은 듯 하였다.
"카르나르, 라고 부르시지요."
"그것도 어쨌든 제 이름 아닙니까?"
"다른 별명이라도 있습니까?"
"…없군요.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설명이라니요?"
융터르는 궁금증을 남긴 상태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을 그닥 탐탁치 않아 하였기에, 준비를 하러 간다는 뢴트게늄을 떠올리며 답을 촉구했다. 흰 옷 일색의 차림 때문인지 유독 벽안이 더 돋보이는 카르나르가 융터르를 빤히 보다가 가볍게 한 숨을 쉬고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이해가 안 되기는 매한가지의 말.
"지금부터 저와 지옥으로 잠시 향해야겠습니다."
"아…. 제가 죽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글쎄요, 당신이 진정 어디로 향할지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높으신 분만이 아시는 것이라. 그리고 저는 분명히 잠시라고 말했습니다마는."
악마들을 돈벌이로 삼아 퇴마를 해온 그에게도 지옥은 아주 피상적인 느낌만 알 수 있었다. 뢴트게늄이 술집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만 들었을 때는 환경이 열악하다, 라는 인상이 강하다는 것 말고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어서 그게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도 공간이 공간인 만큼,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드는 그가 평소 구마활동을 할 때 준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성수 따위를 가방 안에 쓸어담고, 그것도 모자라 기도서와 단답벌레의 가호가 깃들어있는 묵주까지 챙기고 나서야 카르나르를 바라보고 말했다.
"자세한 건 이동하면서 설명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이 안 보일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 카르나르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닮은 대악마는 본래 뢴트게늄 이전의 지옥의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었던 자로, 그의 실수 혹은 의도에 의해 뢴트게늄을 속여 아직 죽어서는 안 될 한 어린양의 혼이 지옥으로 빠지게끔 꼬드겼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융터르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럼 명색이 대천사께서 직접 지옥으로 강림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됩니다. 그 곳은 어디까지나 악한 자들이 거주하는 곳인데,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그것을 가장 적대하는 곳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융터르는 일전에 조건을 회피하기 위한 이유로 신부복을 입은 채 악마들의 술집에서 뢴트게늄과 만났을 적을 떠올렸다. 평소 안면을 텄다 생각했던 놈들조차도 자신에게 곧장 험악한 눈짓을 보내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상황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이번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 분명 좋은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제가 당신과 간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당신이 인간이므로, 제가 그 안에 숨어서 다닐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힘을 쓰는 일은 없어야 가능하겠지만."
설득력은 있다. 카르나르의 말에 융터르는 그렇게 납득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앞서가는 천사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궁금해 했으나 곧 쌍둥이 같은 두 존재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춘 곳은 여전히 초조해하는 얼굴의 뢴트게늄이 연거푸 왔다갔다 오가는 것을 반복하는 공터다.
그가 전혀 다른 두 존재의 같은 얼굴을 휙휙 번갈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진짜로 해요?"
"더 늦는다면, 이건 제 선에서도 커버를 쳐드릴 수 없습니다. 지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준 계약마저 충분히, 이쪽에서 임의로 파기 또한 가능하다는 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걸 바라지는 않으시겠지요?"
"아잇! 물론이죠…. 그, 그러면— 하, 합니다?"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얼굴의 뢴트게늄이 발을 앞으로 뻗어 세차게 쿵 소리가 나도록, 그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프리터의 일로 인해 한 번 본 경험이 있던, 지옥으로 향하는 단방향의 문이 불길한 검붉은빛 기운과 함께 그 입구를 드러내며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면 들어가시지요."
"지상으로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카르나르는 융터르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채 그의 등을 희생양을 찾는 듯 흐느적거리는 문 한 가운데까지 밀쳐버렸다. 사이비 성직자가 당황해서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의 길게 난 그림자로 흰 옷의 카르나르가 재빠르게 뛰어듬과 동시에 그 문이 닫혀버렸다.
융터르에게 있어 즉각적으로 떠오른 지옥의 첫 인상이란, 황량한 밤의 사막이었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늘을 묘사한 듯 냉랭한 기운을 뿜는 창백하고 푸른빛이 감도는 위쪽 공간을 자세히 보면 그저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발에 지겹도록 채이는 모래들. 과연 지옥으로 떨어지다라는 표현을 쓰는 만큼 그 모래사장 위를 벌써 뒹굴어버린 그와 다르게, 카르나르는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여유롭게 땅으로 착지하였다.
그 모습을 영 아니꼬운 눈으로 보던 융터르가 몸에 들러붙은 모래를 툭툭 털며 비아냥거렸다.
"제 그림자를 빌려야 할 정도로 간절히 지옥에 오고 싶으셨던 분이, 착지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군요."
"본래 선량한 영혼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매우 가볍게 부유하듯 떨어집니다만. 내가 어쩌자고 당신의 외모를 빌렸는지."
당사자 앞에서 싫다는 표현을 신기한 방식으로 해낸 대천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잡은 융터르는 그 손이 곧장 떨어지기에 그것이 일종의 인사표현인 줄 알았으나,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실이다. 그것이 자신과 카르나르의 손목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이게 무슨 끈이려나 싶어 의아해하는 필멸자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돌려준 대천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끈입니다. 당신이 엉뚱한 짓을 하다, 이런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말하시는 꼬락서니가 마치 미아를 사전에 방지하자는 의도로 들립니다만."
"오, 아주 못 알아차리시는 건 또 아니었군요."
비아냥에는 더 큰 비아냥이. 융터르는 이 천사가 자신의 외양과 이름만 따온 것은 아니라고 내심 확신을 하였다. 막상 자신의 말버릇을 역으로 당해보니 이토록이나 기분이 나쁠 수가 있던가. 가짜 신부가 한숨을 쉬고서는 아직 둘 밖에 없는 이 황량한 공간에 뚝 떨어진 이유를 물었다. 으레 이런 일이 있으면 목적을 숨기곤 하는 대천사도 그럴 의도는 없는지 순순히 답해주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거리 위로 뭔가가 뚝 떨어지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입니까?"
"이 곳은 지옥에 있어 일종의 외곽지대입니다. 어지간히 여유가 넘치는 자들이 아니고서야 악마들이 오지 않지요."
"…그럼 저 자는 그 어지간히 여유가 넘치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융터르가 손가락을 들어 멀리 가리키자, 카르나르의 시선도 그것을 따라 돌아가다 인상을 곧바로 쓰기 시작했다. 짙은 푸른빛으로 사방이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새카맣기 짝이 없는 남자. 불길이 이는 것같은 붉은 눈만 아니였다면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외양을 그대로 빼온 남자가 얼굴에 여유를 가진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천사가 손을 뻗어 사이비 성직자를 자신의 뒤로 물리고 경계심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간만에 일을 하시는 소감은 어떻습니까?"
"오우, 옛 생각 나서 좋던데. 그나저나 그 친구를 입장권으로 쓰다니." 능글거리는 답과 함께 융터르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제가 관심있는 것은 당신이 저지른 그 실수지요.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 이런! 내가 잘 붙들어놨었는데 말이지…. 도망 쳤어."
연극적인 몸짓과 뻔뻔한 말투는 융터르에게 있어 심각할 정도로 캘리칼리 데이비슨, 당사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보란듯이 대놓고 활짝 편 여섯 장의 날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엄한 곳에 꼬투리를 잡힐 염려를 덜었다. 그것보다도 문제는 본래라면 캘리칼리를 닮은 이 악마가 더는 도망치지 않도록 영혼을 붙잡았어야 했던 모양인데, 그걸 놓쳤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저 여유로운 태도로 보아 애당초 잡아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르나르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그렇찮아도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진 얼굴로 대악마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똥개도 자기 구역이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대악마의 입에 걸린 웃음은 더욱 진해졌을 따름이다.
"여기서… 뭐, 힘자랑이라도 하고 싶으신가? 그럼 어디 해봐. 지옥에 천사가, 그것도 품계를 위에서 세는게 더 빠를 양반이 친히 내려오셨다고 환영 파티를 해줄 친구들이 여기 널리고 널렸거든."
"…해루석 님에게 당신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언질을 주겠습니다. 그 술집의 운영비용은 사실상 천상에서 거의 지원하고 있음을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하, 내가 전에 파뒀던 개구멍이 어딘가 있었을 텐데 말이지—."
"지금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게다가 우린 저 자가 놓쳤다고 하는 그녀를 찾으러 온 것 아닙니까?"
참다못한 융터르가 두 존재 사이로 몸을 끼어들며 이야기를 하였고, 평생에 걸쳐서라도 이해하지 못할 악우의 페이스에 휘말렸던 카르나르는 그 분위기 전환에 자신의 머리를 잠깐 짚으며 방금까지 말씨름을 했던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이 대악마는 융터르의 지적이 오히려 맘에 들었다는 듯 카르나르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껄껄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융터르는 이 공간에서 돌아다닐 유이한 필멸자라는 입장에서, 저 웃음이 유쾌함을 담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불꽃 마냥 불길하리만치 검붉은빛이 그 눈에서 연거푸 일렁거리는 것을 본 뒤로, 대악마에게는 이번 일이 그저 단순히 본인의 심심함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고 곧 그 붉은 눈과 마주쳐버렸다.
"궁금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
"…그건 저희가 찾으면 될 일입니다."
어쩐지 정신을 뒤흔드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닮은 이 대악마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정신이 잠시 희미해질 뻔 했던 융터르가 반사적으로 손 안의 묵주를 더욱 세게 쥐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그 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대악마는 이 장소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이후로 가장 크게 쯧 소리를 내며 불쾌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좋아. 그 쪽은 놀리는 재미도 없구만…?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겠네. 자, 잘 보라고."
융터르에게 있어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보여준 그가 자기 검지를 들어 여유롭게 아래를 가리켰다. 단순히 지하보다도 더 아래인가, 라고 해석한 융터르와 달리 카르나르는 그 손짓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그 움직임이 전에 없이 조급하다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단순한 손가락질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을 융터르가 하기 무섭게 카르나르가 더없이 불안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서둘러야겠군요."
서두른다는 의미를 그저 빠르게 움직는 것으로 이해했던 융터르는, 차라리 정신을 잠시 동안은 잃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생각보다 과격한 성격의 천사가, 단답벌레의 불에 타오르는 검과 비슷한 느낌의 검을 허공에서 소환하더니 곧바로 모래바닥을 세차게 찍었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구멍이 저 아래로 무저갱을 이루며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모래먼지를 뒤집어 쓴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융터르는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카르나르와 연결된 하얀 끈으로 인해 몸이 저 아래로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XX성당 청소년부의 성가대 소속 독고혜지는 눈을 뜨자 지금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이것 하나는 명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위험하다. 모르긴 몰라도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그들을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괴롭히는 이상한 것들이 득시글한 자리를, 누가 안전한 곳이라고 보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여기서는 눈에 띄면 자기도 저 사람들처럼 아주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우씨! 그나저나 나 여기 어떻게 온거야?!"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보니, 요근래 성당에 새로 부임한 키 큰 신부님이 이상한 말을 연거푸 해댔던 것이 문제였다. 그 신부님 답게 어딘가 장황하고 또 연극적인 어투였다만 죽어서 그리운, 모든 이를 보고 싶지 않느냐는 말. 뭔가 기도를 같이 드린 것 같은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 어두컴컴한 듯 불길하게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도는 공간에 온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온 몸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욱신거림. 아무래도 여기저기 심하게 멍이 든 것이 확실하다.
독고혜지는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 신부님 맞긴 했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이상할 정도로 닮은 얼굴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불안해져 덜컥 뛰쳐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막상 자신을 붙잡는 소리에도 마다하고 그나마 익숙한 느낌의 현대적인 사무실에서 뛰쳐나오자 보이는 이 광경이란. 게다가 정신을 살짝 놓은 탓도 있어서 그녀는 지금 당장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라면 나는 어디 여긴 누구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일단 깨달은 결론 하나. 그 신부님 닮은 꼴은 진짜 아가토 신부님이 아니다. 그리고 굳이 하나를 더 말하자면, 여기는 절대로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 기암괴석 사이로 난 새까만 그림자에 몸을 구겨넣듯 숨은 그녀가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까이를 보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건 명백히 사람들이 고통에 질려 괴로워하는 광경과 소리 뿐인 이 지옥도에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나기 전까진.
"침입자다!"
"천사란다! 타락시키자!"
적어도 일반적인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한 이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에, 탈출할 궁리에 몰두하느라 혜지의 푹 수그린 고개가 바싹 들어올려졌다. 분명 저들이 천사라고 똑똑히 말한 것을 들었다. 믿으라면 차라리 천사를 믿고 말지! 그런 생각의 독고혜지는 몸을 살짝 바깥으로 뺄까 생각을 했지만.
"아냐, 잘못하면 내가 인질이 될 수도 있잖아. 조용히 있다가 가까이 오면 잽싸게 붙으면 되는거지."
그런 판단으로, 그녀는 조금 전처럼 아주 조용히, 그저 쥐 죽은 듯이 그림자 너머의 소란과는 전혀 상관도 없다는 듯 조용히 숨기로 결정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군요."
"당신 페이스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이미 구마자로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여야 할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캘리칼리 데이비슨 아가토의 모습을 빌릴 것을 그랬습니다."
사막에서 뛰어내리니 보다 본격적인 지옥이 시작되었다는 듯, 곳곳의 불구덩이에는 죄를 지은 영혼들이 울부짖는 살벌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섯 장의 날개을 대놓고 선명하게 활짝 펼치고 카르나르가, 등 뒤로 성수병과 묵주를 각각 한 손에 든 융터르에게 달려드는 악마로부터 그를 지키면서 투덜거렸다. 캘리칼리의 이름이 나오자 사이비 성직자의 얼굴은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요상한 얼굴이 되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글쎄요, 아무리 제 성격도 빌려왔다고 한들 온전히 저와 닮은 것 같지도 않아서 그거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찮아도 성직자가 되기 전부터 주먹으로 악마들을 때려눕혔던 그와 닮은 천사라, 그거 참 볼만하겠다는 생각을 한 융터르는 단답벌레의 가호가 깃든 묵주를 방심한 대천사의 등 뒤로 뻗었다. 그러자 괴로워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비명이 천사의 귓가로도 똑똑히 들려왔다.
"정말 손 많이 가는 천사시네요."
"…서둘러 찾읍시다."
"독고혜지…님이라."
떨어지면서 그제서야 뢴트게늄이 협박에 못 이겨 지옥으로 끌고와버렸다는 영혼의 주인을 안내받은 일이 떠오른 융터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청소년부 성가대이자, 귀염성과 왈가닥이라는 어딘가 상반된 성격이 인상깊었다. 특히 늘 앞머리에 돌돌 매달린 분홍색의 구르프라 불리는 것을 하고 다니는 것이.
"오래 있어봐야 여긴 당신이나 저한테나 별로 좋지 못한 환경이니, 속전속결로 갑시다."
"그 페이스를 더 올린다라— 진짜 배려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군요."
"그대로 악마한테 사로잡히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말하시지요."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다는 듯 말하는 카르나르의 말과는 달리, 둘의 손목에 저마다 엮인 끈은 더욱 단단하게 손목을 단단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속내 참 알기 쉬운 천사라는 생각과 함께, 융터르도 지지 않고 성수를 뿌리며 길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영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
"천사님이라고 무고한 어린양을 전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건 아니군요?"
"당신은 방법이 있다 이겁니까?"
"확신은 못하지만 한 가지 수는 있지요." 그런 융터르가 양 손을 입가에 대고 냅다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사짜신부 왔습니다!"
황당한 말. 게다가 비교적 최근에 깨달은 것이지만, 카르나르가 자신에게 내린 가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또 믿게 하는 그것이라는 시너지가 겹쳐져 공격하던 놈들조차 잠시 벙쪄버리는 그런 조용한 순간이 찾아왔다. 별 소용 없는 것 아니냐며 카르나르가 질책 어린 말을 하려 했을 때, 아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런 곳에서 제법 가벼운 달음박질 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홍색 구르프가 이마를 통통 치면서도 달리기에 집중한, 여고생이 답하는 목소리.
"아—저—씨—!!!"
"아, 왔네요."
"…진짭니까?"
황당해하는 카르나르, 그리고 보란듯이 뿌듯한 내색을 애써 감춘 융터르가 그녀를 잡으러 주위로 뛰어든 악마들을 향해 저마다 검과 성수를 휘둘렀다. 각자 신성한 것에 닿아 화상과 같은 연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검고 흰 양복이 저마다 내민 팔을 독고혜지가 겨우 붙잡았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그리고 그 얼굴이 어째서인지 둘이라는데서 온 황당함이 적당히 섞인 그녀의 표정은 뭔가 당장이라도 많이 묻고 싶어한 그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두 분 모두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역시 들어올 적에도 그랬지만, 나갈 적에도 참 무식한 방법 쓰시는군요."
"설마 그 술집이 다시 열리기까지 기다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과 함께 카르나르의 몸이 어느 악마조차도 뒤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를 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아니 진짜 뭐, 뭐에요?! 혹시 쌍둥이?"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속도감과, 더는 끔찍한 곳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꽉 감았다 떴더니 노을이 아름답게 진 채로 겨우 익숙한 주변인 것을 확인한 독고혜지의 황당함이 섞인 질문에 카르나르와 융터르, 둘 다 동시에 질색하며 말했다. 그 말투부터가 너무나 똑닮아서 저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는 행동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독고혜지는 그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생각해버렸지만 그것을 따지기에는 이미 오늘 참 이상한 일을 순간이나마 겪어 힘들었다.
"불편한 일을 겪게 된 점, 대신 사과드립니다."
"…됐어요! 금방 와주신 것도 있고 하니깐 봐드릴게요."
카르나르의 사과에 뭘 봐준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고생은 슬슬 집에 가야 한다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미 저 멀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흰 옷 군데군데가 아직 새카만 흔적이 남아있는 천사는 그 뒷모습을 보고는 말을 흘리듯이 하였다.
"꽤 씩씩하신 분이군요. 그리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할 말을. 하지만 가급적이면 당신같은 존재들과는 영 엮이고 싶지 않군요."
기왕 구마를 할 것이라면 지상에서 하는 것으로 족하는 융터르가 살짝 혀를 내두르며 먼저 집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도 카르나르는 오묘한 얼굴로 바라보다 곧 주위 배경과 녹아드는 것 같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대천사에게는 갈 곳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래서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 항상 고즈넉한 그 방은 평소와 달리 손님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상을 빚어낸 것 마냥, 그림자 사이로 툭 튀어나올 때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타오르는 불이 일렁이는 것 같은 대악마다.
"그래 좋아. 확인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합니다. 부족한 점이야 추후에 대비하면 되는 일이고.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의 수단에 대해서 다시 제고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만."
"이봐, 난 자네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벌도 다 받았잖나! 받아쓰기 500번 하기."
대악마가 투덜거리면서도 그림자 사이에 가려져 안 보이던 종이 뭉치를 보란듯이 들어올렸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과연 다시는 카르나르 융터르를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장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종이를 낚아채듯 집어올린 대천사가 바라도 보지 않고 책상 위로 던져두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시험을 할 차례겠군요."
"이거 기대가 되는구만. 잘 부탁하지."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빈 자리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르나르는 창문 너머로 멀리서 보이는 한 성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공기 중으로 흐트리며 내었다.
"여러분들께는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연이겠지만 그 말과 함께 석양이 점차 서쪽 하늘로 느릿하게 지기 시작하면서 대천사의 짙고 푸른 눈이 오히려 두드러지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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