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 3세와 돚거즈들을 일방적 콜라보했읍니다.
*정확히는 극장판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아주 약간 참고했읍니다.
왁타버스 내에서 소위 '악당즈'라 불리는 세 사람, 이제는 카르나르 융터르까지 포함된 네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친 이 상황, 설명하라고 하면 할 수 있었다.
1. 비즈니스 킴의 성 중 하나에 무작정 들어닥쳤다.
2.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와중, 비즈니스 킴이 납치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3.'으로 시작되어야 할 그 문장은, 비즈니스 킴이 비즈니스 킴에게 납치 되었다는 내용이여야 했으니까. 그에게 반은 장난으로 치킨을 사라고 윽박지르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벙찐 얼굴이 되어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명백히 겪은 상황을 오히려 부정하기에 이르어버렸다.
비즈니스 킴이 비즈니스 킴에게 납치 당한 유일한 증거인 깨진 창문 너머로 반박자 늦게 비밀소녀가 달려갔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이야기(물론 정작 비즈니스 킴은 얼굴을 붉히며 무어라무어라 외치긴 했지만)를 나누던 그가 누군가에게 끌려가 사라지는 것도 충격인데,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비즈니스 킴 본인이라는 상황을 여전히 믿을 수 없던 탓이었다.
그러나 창문에 아직 미련하게 들러붙은 깨진 유리들이 그녀의 손가락에 자그마한 상처를 내고나서야 비밀소녀도 겨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겪은 이 순간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도 난생 처음 겪는 일. 어떠한 이유나 근거를 찾기보다도 몸이 그 뒤를 쫓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납치범 치고는 제법 느려서 다행이라고, 네 사람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아주 지극히 (그리고 사소한 폭력이 동반된) 우연으로 차를 얻어타는 등의 행운(?)으로 이미 저 멀리 앞서간 비즈니스 킴을 겨우 뒤쫓았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오솔길 주위로 빽빽한 나무들이 음침하게 자라있어, 일부러 알고서 들리지 않는 한은 누구도 알지 못할 오래된 성이 그믐달이 희미하게 비추는 빛마저 역으로 받아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긴…."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목소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떨림과 동시에짙은 회한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둘,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였다. 그 한 사람, 카르나르 융터르가 아직은 이해를 못해 의뭉스러운 얼굴이 되자 당사자가 배경에 어울리게 음산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망령왕의 성에 온 걸 환영하네."
한때 망령 출신이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추억 때문인지 묘하게 들뜬 것 같은 캘리칼리가 선뜻 나서서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고 그것이 곧 얼마지나지 않아 완전히 박살나버린 것은 문제였다. 방금도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탈출한 소피아는 제 복면 속으로 들어간 돌가루 따위를 요령좋게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니! 아니!! 당신만 믿고 가면 된다면서요! 캘리칼리!"
"나도 몰라! 비킴 이 멍청한 놈이 언제 리모델링이라도 했나보지 뭘!"
소피아의 항의대로 캘리칼리는 일행을 이끌고 비즈니스 킴이 있을 문제의 옥좌로 향했지만 이대로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성 내부는 함정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캘리칼리의 말대로 분명 잘해봐야 이리저리 빠지고 헤메이게 만드는 함정에 불과했던 것들은 침입자들을 향한 살의 수준의 악의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도둑 생활을 해온 비밀소녀도 겨우 가쁜 숨을 토해내는 마당에, 최근 겨우 악당즈에 편입이 된 카르나르 융터르는 아예 조금만 건드려도 곧 산화될 기세였다. 숫제 바닥에 주저앉은 두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더 내버려두면 상황이 악화될 것임을 짐작하고, 서로를 바라본 다음 입을 모아 외쳤다.
"아우…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요오—!"
"맞습니다. 마침 우연이라고 해도 좋을 지 모르지만, 갈림길이 나왔으니 여기서 둘 씩 갈라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로를 노려보던 소피아와 캘리칼리는 그 제안에 순순히 응했고, 곧 소피아는 비밀소녀와 먼저 왼쪽으로 난 길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융터르는, 소피아보다는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이상한 경쟁심으로 불이 붙은 캘리칼리의 곰 발바닥같이 큰 손에 들어올려져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촛불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복도 위로.
그러나 그 걸음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융터르가 황급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잠시, 잠시만요 캘리칼리 님."
"뭔가?"
"방금 죽으실 뻔 했습니다. 바닥 잘 보시지요."
"뭐?"
자신의 발치에 닿을 뻔 했던 복도 바닥을 융터르의 말대로 캘리칼리가 노려보듯 눈에 불을 켰고, 곧 그가 왜 지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판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닳아빠진 부조가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조가 새겨진 바닥이 함정을 작동하는 스위치처럼 보인 탓이었다.
캘리칼리가 일행을 뒤로 물리고 깨진 돌조각 하나를 주워들어 제법 세게 그 위로 던졌다.
"이런 망할."
천장처럼 보였던 것이 갑작스럽게 우르르 쏟아져내려 무수한 먼지를 두 사람에게 끼얹어져 버렸다. 옅은 갈빛의 그 희뿌연한 먼지 사이에서 미친듯이 콜록거리기를 한참이었던 캘리칼리와 융터르가, 본래대로라면 앞으로 곧장 나아가려 했던 그 복도를 바라보자 거의 깨지지도 않은 묵직한 벽돌 따위가 어지러울 정도로 널부러트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생각없이 더 나아갔다면 온전한 꼴은 절대로 못 보았겠군요."
"젠장, 이걸 소피아랑 비밀소녀는 모를 거 아닌가?"
쯧 소리를 낸 덩치 큰 모험가가 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끄집어 내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그 표정은 점차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워낙 그 변화가 심한 터라 곁에서 올려다 보는 중이었던 융터르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묻기도 전에, 자신의 단말기를 들어올린 사짜 심리상담사도 곧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별 차이 없는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갑작스러운 통화권 이탈이라니, 노골적이어도 정도껏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와서 도로 저 친구들 뒤를 쫓느니, 어차피 이 성 꼭대기에 있을 비킴 그 개자식의 방이 목적지니까 믿고 우린 계속 길을 가보자고. 그나저나 함정이 곳곳에 깔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답답한데."
"짐작가는 바가 있어 그렇습니다만, 혹시 무기 사용해도 됩니까?"
"어?"
소피아나 비밀소녀라면 모를까, 융터르의 입에서 전혀 뜬금없는 말이 나와, 캘리칼리가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소리를 내자 사짜 심리상담가의 외투 안 주머니에서 뭔가가 확 튀어나왔다. 너무나 익숙한 그 실루엣은 다른 것도 아니고 총이었다. 생각도 못한 것이 뽑혀 나와버려, 캘리칼리는 반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지가 뢴트게늄도 아니고 왠 총?!
황당해하는 캘리칼리의 반응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이 신참 악당은 자신이 끄집어 낸 리볼버 탄창을 열어 잠시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거침없이 벽에 몇 발이고 발포하였다. 굉음, 그리고 매캐한 탄연과 함께 후두둑 벽에 구멍이 나면서, 촛불의 흔들림은 더욱 심해졌다.
"바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복도에 촛불이 심하게 일렁거리는건가, 하고."
"바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지만, 공기가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고는 생각했지. 헌데, 그것이 이런 속임수였다라. 하!"
서로 지탱하던 것들이 점차 무너져내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이 험악한 함정 투성이 속에서 망령왕이 무사히 지나갔나 했더니! 부서진 벽 안으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 지 모르는, 나선형 계단으로 이루어진 긴 비밀통로가 있었다.
"좋아! 소피아, 비밀소녀 그 친구들보다는 먼저 올라가자고!"
"거기서 경쟁심을 발휘하시는 겁니까?"
이미 저 위로 앞서 올라가고 있는 캘리칼리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래까지 쩌렁쩌렁하도록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편, 비밀소녀와 소피아 쪽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만신창이에 가까운 두 사람은 도둑으로서의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직감에 가까운 결론을 동시에 입 바깥으로 내밀던 참이었다.
"여기… 망령왕이 아무리 다 알고 있다고 해도 한 번은 반드시 걸릴 거 같은데요오…."
"어어— 진짜 그렇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자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서 야식이라도 먹겠다고 생각없이 나갔다가…"
소피아가 예시를 든답시고 꺼낸 가정에 비밀소녀는 저도 모르게 "으으!" 소리를 내면서 작게 진저리를 쳤다. 방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돌 위로 피라냐 따위가 튀어오르는 기분까지도 연상하게 만들게 날카로운 칼날 따위가 여전히 불규칙하게 들어갔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만약 재수가 나빠서 어두운 복도 위를 무작정 걸었다가 함정이 있는 바닥 위에 발을 뻗었다면? 세상 끔찍한 생각은 하지도 말아달라는 듯 다시 비밀소녀는 진저리를 쳤으면서도 떠오른 생각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소 님 지금 뭐하십니까?"
"소피아 님 말 듣고 생각해봤는데요… 그럼 망령왕은 어떻게 이런 성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스위치라도 있을까 싶어서요."
"오, 그거 일리가 있군요?"
소피아도 그녀를 따라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이 공간 안에서 한사코 벽을 더듬거나 횃불과 벽에 진열된 갑옷 따위를 건드는 등을 거듭했지만 유감스러울 정도로 소득이 없었다. 캘리칼리-융터르 쪽과 헤어진 이후에도 까딱하면 목숨을 잃어버리기에 아주 충분한 함정들을 진절머리 나도록 겪어온 두 사람은 이대로 정공법, 즉 이어질 함정들을 계속 맨 몸으로 돌파해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귀를 기울여보자, 벽 쪽으로 귀를 기울일수록 그 소리가 더욱 커졌다.
"어머, 이거 캘리칼리 님 웃음소리 아니에요?"
"어?!"
소피아는 처음에 이것을 환청으로 치부했던 터라,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들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지만 비밀소녀가 똑같은 것을 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적어도 캘리칼리 데이비슨, 그리고 어쩌면 카르나르 융터르는 벽 안에 있다! 급한 마음에 소피아가 벽돌을 하나 움켜쥐고 빼내려 했지만 단단하게 맞물린 탓에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어—어떻게, 어떻게 해야 안으로 들어갑니까!?"
그 주위의 벽을 더듬던 소피아가 당황해하는 사이, 비밀소녀는 급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가끔은 정교한 장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다소 과격한 수단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여전히 방치된 갑옷 허리춤에 걸려있는 제법 긴 롱소드를 하나 끄집어 냈다. 그리고 칼집까지 뽑아 던져 소피아가 낸 틈 사이로 냅다 찔러 넣고 이리저리 뒤틀기 시작하였다.
"아하! 지렛대의 원리!"
"아시면 빨리 도와주세요!"
소피아는 제 소지품 중에서 가장 신뢰를 하는 물건, 속칭 '빠루' 라고 불리는 것을 단단히 손에 쥐고 조금 헐거워 보이는 돌벽에 마찬가지로 찔러넣었다. 찔러넣은 자리가 달각달각거리며 이탈을 하려는 듯 소리를 내는 것에 힘입어, 그는 온 힘을 팔뚝에 집중 시켰다.
"으랏챠!!"
"아우! 다치시겠어요!"
비밀소녀가 황급히 말한 그대로, 소피아가 빼낸 그 돌로 인해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벽 하나가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튼튼하게 고정이 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이탈의 여파는 제법 컸고, 아무래도 노스페라투 호드나 프리터와 같이 좌우로 넓은 고멤이 열 명 나란히 선다고 해도 충분히 동시에 입장 가능할 정도로 널따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에 감탄할 시간은 없다. 망령왕이 비즈니스 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 궁금한 이유에서라도, 그들은 벽 안에 나있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비밀통로 안에는 함정이 아무것도 없으리라 믿으며.
"오 이런!"
"어이, 다들 무사한가?!"
함정은 없었지만, 방해공작은 있었다. 본래라면 없어야 했을 낙석 따위가 일행들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위에서 자신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망령왕이 한 짓거리로 밖에 해석될 여지는 없다. 급한대로 계단 난간에 매달리는 등의 방식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회피하곤 하던 네 사람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위를 저마다 짜증이 일어나는 얼굴로 올려보았다.
뒤따라 올라오다 장도리의 노루발 부분을 계단에 찍어 제 몸을 고정한 소피아, 어디서 꺼냈을지 모를 색색깔의 풍선에 대롱대롱 매달린 비밀소녀도 저마다 일단은 괜찮다며 먼저 앞서가던 두 중년에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이대로는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또 다시 거대한 돌덩어리 따위가 내려올 기미가 느껴지자, 지체없이 캘리칼리가 외쳤다.
"융터르, 자네 총 몇 발 남았나!"
"걱정하실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런 융터르가 몇 발이고 쏠 수 있다는 듯 잔탄 수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캘리칼리는 씩 웃고는 이어 말했다. "어이 소피아! 자네 망치나 좀 빌리자고!"
"아잇! 이거 소중한 거인데! 아껴쓰십쇼!"
난간에 매달려 있던 소피아가 훌쩍 몸을 던지듯 날아올라 다시 계단 위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큰 손아귀에 정확히 애용하는 장도리를 던져주었다. 그립감이 만족스러웠던 캘리칼리가 씩 웃고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채 계단 위에 발을 내딛은 비밀소녀와 그들이 무슨 짓을 할 예정인지 눈치 챈 소피아를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길은 우리들이 뚫을테니까, 되었다 싶으면 잽싸게 올라오게!"
"아주 그냥 멋있는 건 다 할라고 그래!"
"저기요! 앞에 또 돌 대따 큰 게 굴러오는데요!"
"캘리칼리 님, 여섯 발을 발포할테니 균열이 크게 난 쪽을 때려주시면 됩니다."
과연 비밀소녀가 경고한대로 다시금 돌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소피아와 비밀소녀는 조금 전과 달리 몸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금 자신의 리볼버를 겨눈 융터르는 언행일치의 미덕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광속으로 떨어지는 돌을 향해 정확히 6번 전부 발사했고,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절대 속도를 죽이지 않겠다는 듯 돌덩어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빵꾸는 뚫렸을 거 아냐!"
2m 22cm의 거구가 박력있게 휘두른 망치질. 과연 소피아가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그 괴력에도 장도리는 전혀 망가지지 않았고, 되려 거대한 돌덩어리가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난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밀소녀는 그 둘의 합이 잘 맞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훌쩍 뛰어내렸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며는— 저는 먼저 올라가서 더 내려오는지 볼게요오—."
"아잇, 이러면 나 캐리 받는 느낌이잖아요! 비소님!"
저 아래에서 소피아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머지 셋은 딱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머 저게 뭐에요?!"
"생김새만 봐서는—"
"어어, 꼭 제물을 바치려는 모양인 거 같습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가까스로 꼭대기까지 올라오자, 웅장하되 황량한 분위기였던 기존 아래층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네 명을 맞이했다. 저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공통되는 한 단어. 호화롭다. 올이 빠지는 것 하나 없이 관리가 잘 된 짙은 붉은빛 융단은 오랜 도둑의 감으로 확실한 고급품이 틀림 없고,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도 한번쯤은 명화 특선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를 해주었던 것들이다.
게다가 주위로 널려있는 것은 온갖 호사품들이었지만 막상 재물욕이 당장 이들에게는 들끓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당장 중요한 장면이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책상은 흡사 제단처럼 보였고, 그 위에 널부러진 붉은 양복의 비즈니스 킴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당장 그 몸에 칼을 꽂을 기세였던 망령왕까지. 소피아의 말처럼,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이 비즈니스 킴을 제물로 바치려는 망령왕의 모습이었다.
언성만 높이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히 분노하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성큼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곧바로 소피아와 비밀소녀, 그리고 융터르 순으로 따랐다.
"얍!"
비밀소녀가 어디서 저런 괴력이 나오는건가 의심이 되지만, 명백히 주먹을 내지르자 가볍게만 들리던 기합소리를 배신하는 파공성이 그 주먹에서 뿜어져나왔다. 최근에 풍신에게서 바람마법을 배웠다고 했는데, 배웠다는 것이 이런 종류의 마법인가 싶어 얼이 빠진 나머지 세 남자들은 몇 초 동안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아우, 아쉬워라. 이걸 피하시네."
하지만 아쉬움이 듬뿍 드러나는 그녀의 말처럼, 망령왕은 그녀의 주먹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롭게 피하고 말았다. 그저 피하기만 했을 뿐이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비즈니스 킴 그 자체다. 다른 남자들을 뒤로 한채 앞에 나선 그녀를 차마 공격할 수 없던 것인지 망령왕은 그 자랑하는 '상현딸'을 단단히 움켜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격을 날리지 못했다.
캘리칼리가 그런 은발의 장신에게 비웃듯 중얼거렸다.
"나 참, 망령왕과 비킴 저 놈이랑 둘로 쪼개졌어도 본질은 하나다 이건가?"
"이야, 그야말로 비즈니스 킴 그 자체군요? 근데 왜 진짜 비킴을 납치했을까요?"
소피아가 이 성에 들어와서부터 줄곧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결국 꺼냈다. 망령왕이나 비즈니스 킴이나 표리일체, 라고 한다면 구태여 납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일행 중 맨 뒤에서 다시 리볼버에 탄약을 채워넣던 융터르가 조용히 웅얼거리기 시작했지만, 평소와 달리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질투?"
"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융터르 님?"
"비즈니스 킴 님께서는 망령에 있을 무렵을 무척 싫어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참 이상한 친구야."
여전히 망령왕은 비밀소녀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대치하는 상태를 유지했다. 그녀를 베어 넘긴다면, 다른 남자들은 거리낌 없이 쓰러트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은근슬쩍 그 눈길이 연거푸 자신의 뒤에 있는 제단을 바라보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을 눈여겨보던 융터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매우 극단적인 상상입니다만, 망령왕이 비즈니스 킴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 그게 됩니까?"
"망령왕도 비즈니스 킴이라면, 망령 신세를 벗어나고자 할테니까요."
낮게 웅얼거린 그 목소리가 모든 반응을 이끌어낸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망령왕이 몸을 급히 돌리더니, 여전히 제단 위에 곱게 누워있는 비즈니스 킴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다시 소용없었다. 재빠르게 융터르가 발사한 총알이 그의 몸을 스치듯 빗겨 맞춤과 동시에 망령왕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제 등을 드러내고 말았다.
"어딜!"
"아잇, 당신 정신 나갔습니까?"
캘리칼리와 소피아가 잽싸게 날린 망치와 빠루가 그런 망령왕의 등을 정확하게 때렸다. 둔탁한 소리 사이로 작게 뭔가가 부서지는 것이 들린만큼, 몇 발자국은 물러난 망령왕이 제 고통스러움을 호소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비즈니스 킴을 향해 칼을 들이밀고자 했고, 그 시도는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
"아무래도 정답을 맞춘거 같아요, 그쵸?"
"그러게나 말입니다."
캘리칼리와 소피아가 만들어 낸 기회를 틈타, 제단 위에 널부러진 비즈니스 킴의 몸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비밀소녀와 융터르가 망령왕을 저마다 노려보았다. 외형은 똑 닮았으나, 목소리만큼은 아직 가져오지 못한 것인지 망령왕이 입을 아무리 놀려도 그 사이로 나오는 것은 뻐끔거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입 모양은 너무나 확실하다. 내놔.
고멤들 중에서 키가 상위권에 있는 비즈니스 킴의 몸을 그보다 작은 체구의 두 사람이 들고 나르는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한번은 요행으로 피했지만, 지금은 불운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비즈니스 킴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시도에서는.
그러나 망령왕이 다시 한 번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그는 시야가 너무 좁았다.
"작작 좀 하십쇼! 이 짭 비킴 양반아!"
"둘 다 뭐해! 얼른 저 자식 들고 튀어!"
소피아와 캘리칼리가 이번에는 손에 쥔 것이 없었기에 그 몸을 날려 망령왕에게 거센 몸통박치기를 먹여주었다. 제 아무리 상현딸을 들고 위협적인 검격을 보여줄 망령왕이라지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날아오는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몸을 나뒹굴 수 밖에 없었다.
지금껏 망령왕이 낸 틈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것. 그 정도 쯤이 되면 융터르가 비즈니스 킴의 몸을 업고 먼저 비밀통로 아래로 향하고, 그 뒤를 비밀소녀가 따라 내려가면서 남은 두 사람에게 외쳤다.
"적당히 하구 얼른 와요!"
"아 예! 비소 님 적당히 하고 얼른 뒤따라 가겠습니다!"
"적당히가, 될까 모르겠지만!"
과연 본질은 비즈니스 킴. 망령왕은 남자 둘이 남아서 자신을 상대한다는 것이 지독히도 불쾌했는지 거침없이 비밀소녀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치스러운 방이 망가지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세기의 명화나 보물 따위가 금빛을 화려하게 빛내는 파편에 불과할 정도로.
"야이, 이 인간아! 저거 찜해뒀는데!"
결국 울컥한 소피아가 복면 너머로 짜증을 부렸을 때는, 칼 끝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바람이 그 복면을 찢은 상태였다. 처음으로 당황한 그가 황급히 찢어진 부분을 더듬거리자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친 것인지 그의 금발머리가 툭 튀어나온 참이었고, 캘리칼리는 고멤이 된 이후 처음으로 소피아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한편 융터르와 비밀소녀, 그리고 비즈니스 킴은.
"아… 이거 언제까지 내려가야 합니까?"
"으음, 아직은 한~참 내려가야 할 거 같은데요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는다면 난간 조차 없는 나선형 계단의 한가운데 그 뻥 뚫린 구멍으로 떨어질 것 같아 노심초사하는 융터르, 그리고 아예 두둥실한 풍선다발에 제 몸을 맡긴 채 천천히 그 구멍을 통해서 내려오는 비밀소녀는 저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올라갈 적과 마찬가지로 이 성은, 침입자에 대해서 여러모로 무자비했으니까.
"…주게."
"예?"
융터르는 드디어 자신이 환청을 듣는 건가 생각을 했지만 아니었다. 그의 등에 업혀있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불쾌하다는 듯 비즈니스 킴이 틱틱거리는 말로 작지만 또렷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달했다.
"에유, 빨리 좀 내려주게. 이 천박한 것."
"아니 이 당신은 살려줘도 말을 꼭…."
소피아와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분명 고멤들 중에서 무력적으로 어딜가도 그리 꿀리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령왕을 상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지금 눈 앞의 그는 한때 진짜 비즈니스 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대방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해치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직 망령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만이 남아 있는 괴물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막상 기세좋게 나섰긴 했음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몸 위로 난 두 사람은 일방적인 폭력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융터르 그 놈 대신 내려가는건데."
"아, 저도 그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어이 소피아, 지금이라도 도망 치는게 좋지 않을까?"
"어어… 그러면 저 양반이 죽어라고 쫓아오는 거 아닙니까?"
캘리칼리는 그 말에 차마 그렇다는 답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망령왕은 진짜 사람도 아닐지 모르니까. 사람이 아니라면 어마어마한 체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정말로 소피아의 말처럼 죽어라고 쫓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등 뒤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의 입구가 어느 새 닿아있을 무렵,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두 사람이 나자빠져버리고 말았다.
"아이 이 천민 놈들. 지금, 지금 내 성에서 말이야 응? 아유 세상에 이거 다 망가지고 말이야."
"야! 왜 왔어!"
"맞습니다!"
캘리칼리와 소피아의 항변은 귓등으로도 듣지않는 그 답게, 비즈니스 킴은 곧장 망령왕을 향해 말했다.
"아유 이 천박한 것, 망령이 주제넘게 왕을 참칭하고 말이야."
"지금 비킴 말 안 더듬는거 실화입니까?"
소피아는 엉뚱한데서 감탄을 해버렸지만, 그런 관중의 반응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마이페이스인 비즈니스 킴은 망령왕의 약을 더욱 슬슬 올리면서도 여전히 이 새로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저기, 저 커튼. 커튼 줄을 동시에 내리게."
"햇빛이라도 쬐게 해서 망령 성불시키려고 하는건가?"
"에잇! 내리라면 좀, 좀 내리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비즈니스 킴에게서 묘한 박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던 두 사람은 그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망령왕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도록 만든 그런 비즈니스 킴이 유도하듯 어느 지점, 보다 정확히는 자신이 제물로서 누웠던 그 제단 근처까지 갈 무렵이었다.
툭. 무기도 없는 그런 성의 진짜 주인이었기에 망령왕은 영문도 모르고 그 가벼운 밀침에 몸이 휘청거렸다.
"지금! 지금!!"
이때가 그 신호인가 싶어, 은근슬쩍 커튼줄의 한 쪽씩을 맡아 서있던 캘리칼리와 소피아가 동시에 줄을 힘껏 내렸다. 그러자, 망령왕이 서있던 자리 바로 그 바닥이 갑작스럽게 훅 꺼지며 긴 은발이 하늘을 향해 나부끼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망령왕은 보이지도 않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모습. 그것도 더는 오래 볼 이유가 없다는 듯 무거운 돌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비즈니스 킴 님의 계획이었다고요?"
"아잇, 융터르 자네는! 그 사람 말이, 말을 좀 믿어보게 좀!"
"네에 네에, 비즈니스 킴 님이신데 당연히 그러시겠죠오—."
"아니 레이디도! 하아, 나 참 이거, 원통하고 어, 억울하고…."
대신 댓가는 확실히 챙겨가니까요. 라고 비밀소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크게 신경도 쓰지 않던 비즈니스 킴은, 자신을 어쨌든 구해준 네 악당들이 서로 신나서 낄낄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다음에 행동할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망령왕이 엉망으로 만든 이 방 안에서 멀쩡한 보물들을 들고 나른다는 소리겠지.
"에휴, 이 천민들. 고까짓 코딱지만한, 그 푼돈가지고 뭐에 쓴다고."
실제로는 망령왕을 이대로 완전히 묻어버리기 위해 만든 함정 투성이 성이었으니, 그 정도 지출은 감행해도 좋겠지. 비즈니스 킴은 커튼을 걷자 보이는 아침 햇살, 그리고 그 아래로 뭔가 묵직한 것들이 가득 담겨 움직임이 굼뜬 자동차 한 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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