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럼프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일단은 기분상 슬럼프가 왔습니다.
2. 그러나 무릇 이럴수록 더 굴려야 창작물이 나온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내려져 온 진리랬습니다.
3. 그러한고로 리퀘스트를 받았읍니다. 제목과 같이 용식하쿠로 한 번 써본 글임미다. 정확히는 왓이프 입니다.
4. 좋은 아이디어 주신, 제이님께 감사합니다. 근데 닉값 못하시는 거 아니, 아닙니다.
5. 슬픈거 써달라고 하셨는데 슬프지는 못해서 죄송합니다.
새우튀김은 가끔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조폭이 되어서는 칼을 마구 휘두르는 꿈이었습니다. 상대하는 적들도 똑같이 조폭들이었고, 자신은 홀로 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 싸움이 어땠는가 하면 말 그대로 악다구니였고, 진흙탕 싸움이었습니다. 그 꿈을 꿀 적마다 새우튀김은 이상하게도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무릇 흩날리는 피 따위에 징그러워한다던가, 혹은 맞서 싸웠다는 적대감이 흔적처럼 남았어야 했지만 어쩐지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그 무엇도 아니고 처연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그럴 때마다 반사적으로 하쿠를 바라보았습니다. 여전히 잘 자고 있습니다. 아니, 잔다기보다는 그저 절전모드라던가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눈을 뜰 적마다 "아부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며 물어봐주는 것이 너무나 기특하니 잘 자고 있다고, 새우튀김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 혼잣말이 절로 툭 튀어나옵니다.
"그러고보니... 얘가 날 언제부터 아버지라고 부른거야?"
이상했습니다. 처음엔 마스터라고 부른 듯 했는데, 순식간에 호칭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익숙해서 그런가? 그 생각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습니다. 미꾸라지처럼 마구 다른 생각들을 훼방놓습니다. 어째서 아버지가 된걸까, 다른 호칭도 있겠건만. 신기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제법 괴이쩍은 그 호칭이 새우튀김에게는 기꺼이 받아들여질만하고 더 나아가 즐거운 기분마저 들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 즐거운 탐구가 차게 식었습니다. 마치 그걸 더 알아내기 싫다는 듯 흥미가 멀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미묘한 두통과 함께 그냥 그런가보다라는, 이상하리만치 허무한 느낌이 든 것입니다. 두통은 마치 그에게 경고를 하는 듯 했습니다. 더 알아내려고 하면 괴롭힐테다 같은 말이라도 하는 듯 합니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통약을 대충 입에 털어넣고 물 한 잔을 마신 다음, 그는 다시 잠자리에 듭니다. 지하에 위치한 도파민 박사 연구소 위로 모양도 추측하기 힘든 달이 흐릿하게 밤거리를 비추는 동안, 더는 그 이상한 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예?"
최근 새 멤버로 합류한 자칭 심리상담가를 새우튀김이 불러 발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그도 그럴게 애니메이션 관련으로 토론 한 후 접점이랄 것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신참이라 뭐든 긴장하기 마련인 상담가 또한, 그렇게 제법 경직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습니다.
새우튀김은 그,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조용한 곳으로 이끌고는 대뜸 자신이 요새 이상한 꿈을 계속 꾼다며 '이게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무의식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상담사에게는 제법 도전적이었던지, 그 꿈 내용을 물었고 내담자가 된 새우튀김은 곧이곧대로 설명했습니다.
"조폭? 새우튀김 님이요?"
"안 믿기죠? 저도 그래요. 근데 거의 한 달 내내 그 꿈만 꾼다니까요?"
융터르가 전혀 못 믿겨하며, 동시에 반쯤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말했지만, 새우튀김은 제법 진지했습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눈물까지 흘리는데 이걸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겠느냐며 되려 화까지 내었습니다. 그 모습에 상담사가 한숨을 쉬면서 본인 입으로도 불확실하다는 최면요법을 제안했고, 내담자는 그거라도 해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라고 말한 상담사는 곧 소파 위로 그를 눕게 했습니다. 그 머리에 늘 달라붙듯 씌워진 유치한 날개달린 회전모자가 조용한 방에 반복적인 메트로놈 리듬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 소리 위로 융터르 특유의 낮은 저음이 설명하기 힘든 묘한 울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이건 잠들거나 의식을 잃는 것이 아니며, 함부로 조종당하지도 않는다는 등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에서 가끔 보던 그런 멘트들을.
곧 이어서 그 목소리가 점차 가라 앉는 느낌을 줍니다. 그 말마따나 계단을 점차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반사적으로 '네, 네' 하는 것 같은데 저 멀리서 흐릿한 뭔가가 보입니다. 도파민 박사 연구소입니다. 상담사의 아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하늘인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느낌입니다. 지금 어디에 있나요?
"박사...도파민 박사님 연구소요."
"무얼 하고 있습니까?"
"그 쪽으로 가고 있어요...."
상담사의 질문에 새우튀김은 차례차례 답했습니다.
왜 그 쪽으로 가는걸까요? 싸웠어요.
누구와? 조폭들과.
왜 싸웠나요? 지키려고.
무엇을 지키려고? 하쿠를.
그의 기억은 더 저편으로 향합니다. 하쿠를 만났어요. 그 말이 나올 때까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꾸는 꿈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그건 꿈이 아닌, 저 오래된 기억이 얇아진 벽을 깨고 스며나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본 융터르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차근차근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죠?"
새우튀김은 답하지 못했습니다. 상담사의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흐르던 기억들이 어느 순간 이리저리 뒤섞여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입니다. 기억 속의 그가 지금 하쿠의 관자놀이 쯤에 위치해있는 기억장치를 건드리는 순간에 갇혀버린 탓입니다. 그 얼굴. 늘 항상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가 탁한 회색이 되어버린 얼굴. 용식은 이제 울면서 상담사의 말도 듣지 못 한채 계속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하쿠가 날 찾아왔어요. 제가 하쿠를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미안해. 날 찾아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미안해. 아이처럼 꺽꺽대며 울고 진정되기까지를 기다린 상담사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누구죠?"
조폭? 과학자의 조수? 그러다 그는 가장 맘에 드는 답변을 찾아냅니다. 하쿠의 아버지. 그 말을 하자 용식 혹은 새우튀김의 얼굴이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쁘게 쉬던 숨도 점차 고르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방금 한 답변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듯, 확고하게까지 보입니다. 그거면 충분한가요? 그 말에 새우튀김이 고개를 잘게 끄덕였습니다.
자신을 괴롭힌 꿈의 정체를 확인한 새우튀김의 의식은 그렇게 계단을 타고 점차 오르듯 수면 위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곧 눈을 뜨자, 그는 자신이 박사의 연구소도 아니고 클럽의 그 퀴퀴한 방도 아닌 전혀 다른 곳의 천장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두통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간만에 둘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우튀김은 은근슬쩍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피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어쩐지 얼룩져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불현듯 그 눈에서 뭔가가 뚝 떨어져버렸습니다.
"아부지! 왜 우십니까?"
"응? 아, 아잇... 눈에 뭐 들어갔나부다. 우는거 아냐, 응."
하쿠가 새우튀김을 올려다보며 묻습니다. 가운 소매자락으로 슥슥 눈가를 문지른 그가 하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습다. 그 한없이 깨끗한 손으로 부드럽게, 마음을 담아. 그러나 하쿠는 그 손길이 유독 관자놀이만큼은 피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는 것도 모른 채, 하쿠는 그저 한결같이 청량하게 '하하!'하고 웃을 따름입니다.
순간 충동적으로 그는 딸내미를 번쩍 안아 품에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무리 눈물을 훔쳐 닦아내더라도 자신의 얼굴을 더 감추기가 힘들어진 탓입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없이 행복하게 해주자. 그녀의 몸에 눈물이 떨어질까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그저 하늘을 바라본다고 고개를 위로 치켜 들었습니다. 참으로 하쿠색이라 불러마땅한, 한없이 새파란 하늘이 그 눈에 비춰졌습니다. 단 한 점의 붉은색도 없이.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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