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연재하였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외전입니다.
*나쁜 놈의 불꽃같은 주둥아리 털기 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Words : 20K
루이스 캐롤이 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지각이라며 거듭 재촉하는 흰 토끼를 보고 의아해하던 앨리스가, 그 토끼굴을 통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빠진 끝에 '이상한 나라'에서 겪은 일들을 담은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이 어째서 이 곳에 왔는가를 그 앨리스에게 빗대서 자신의 처지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시선을 끌만한 토끼도 없건만, 어째서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아니, 토끼굴이라면 분명 있기는 하였다. 상담실 벽으로 난 이상한 구멍.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파란색의 구멍이 자신에게는 똑똑히 보인다. 어지럽기 짝이 없지만 저 너머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때때로는 건물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건만 자신에게 꼭 이 너머로 건너와야 한다는 듯 속삭이는 그 소리가.
저 너머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곳이기에?
익숙한 듯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뛰어드는 모험은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이다.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또 돌아오는 길은 마련이 되어있는가? 아니, 적어도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인가? 모든 것이 불확실 그 자체이지만, 종종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말해주던 직감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무의식적으로 맹렬히 저 너머에 가야 한다는 어떤 이끌림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벽에 이런 구멍을 계속 내버려두는 것도 역시 불길하군요."
계기는 지극히 간단했다. 일단 의상만 놓고 보면 명백히 과학자라 주장하는 수상한 노인이 상담을 빌미로 만나서는 대뜸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장치를 쥐여준 것이 전부였다. 장치라고 해봐야 그리 복잡할 것은 없고 학생들이 종종 납땜연습용 키트 같은 것으로 만든 것처럼 조잡하게 생긴 버튼 하나가 전부였다. 수상할정도로 붉은색의 그 버튼 하나.
과학자를 다시 떠올리며 문득, 어쩌면 그 노인이야말로 흰 토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옷도 하얗고 머리도 희게 잔뜩 새어버렸지 않은가? 물론 정수리를 시작으로 하는 다소 넓은 범위는 민둥산에 가까웠지마는.
"으이…. 한 번을 누르면 다른 차원으로 가고, 다시 누르면 원래 있던 곳으로 올 수가 있으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이 물건이 진짜로 차원을 오갈 수 있다는 겁니까?"
그 허무맹랑한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능력을 사용해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과학자는 자신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모양인지 거짓말이 아니라며 흐느적거리는 얼굴로 답을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반신반의하며 이 단순한 장치의 버튼을 누른 결과가 이것이다. 벽에 구멍이 났다. 어딘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는 스마트폰에 불을 밝혀 조금 길게 타자를 몇 번 두드리고 상담실 문을 단단히 잠가두었다. 수신인은 각각 좋은 놈과 이상한 놈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여행을 잠시 다녀오려 하오나, 돌아온다는 기약을 할 수 없으므로 언제 올 것인지는 묻지 말아주십사 합니다. 이런 내용이라면 두 사람에게 의문점은 남을 수 있겠으나,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주면 될 것이고.
스케쥴 상으로도 거의 한 달 가까이 상담 일정이라고는 없다. 물론 개인적인 상담 또한 요새 노스페라투 호드의 히어로 활동 덕분인지 뜸한 것도 한 몫했다. 자신의 결심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가? 벽에 뚫려있는 이 반투명한 구멍에서 웅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마치 자신더러 어서 들어와달라는 듯.
"이거야 원. 이제는 내 무의식마저도 이 현상에 과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그는 구멍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약한 두려움과 그보다도 못한 호기심, 그리고 압도적인 충동에 의해서. 그리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낀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지나치게 턱이 높아 겅중 건너야 할 것 같은 요상한 문 하나 넘은 기분.
"여긴, 도대체 어디― 오, 이런!"
혼잣말을 하며 어딘가 낯이 익은 거리를 둘러보던 그가 뒤를 돌아보자 그 구멍이 순식간에 오그라들어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급히 그 구멍이 있던 벽을 매만져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손 끝에 닿는 단단한 벽돌의 촉감 뿐. 사람들이 자신의 이런 행동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는 문득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통화권 이탈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소리를 낸 그는, 다시 한번 하려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렸다.
"여긴… 도대체 어디란 말입니까."
분명히 읽을 수 있는 문자, 길거리에 보이는 익숙한 화폐단위, 건물들, 사람들이 입은 옷들, 이 모든 것이 원래 세계와 같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여긴 전혀 다른 곳이다.
얼마나 기회가 남았을지 모르기에 장치를 조심스레 품에 집어넣은 그가 막 주위를 둘러볼 무렵, 카르나르 융터르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썩은 과일같은 것이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 바깥으로 뭔가를 던지곤 하는 질나쁜 어린이들의 장난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그 소음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고, 곧 얼굴을 작게 찡그렸다. 사람이 죽는 것에는 역시 본능적으로 처참히 박살나버린 그 모습에서 오는 역겨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으니.
"역시 오늘도 저기선 사람이 죽는구나."
"소문 다 퍼졌어. 회장이 본보기로 처형한 거라더라."
"역시 이 도시는 정치인이고 나발이고 간에 저 양반이 천년만년 해먹을거야."
사람들이 아주 작은 귓속말로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외에도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갑작스러울만큼 그에게 너무나 과한 정보들을 주던 탓에, 아예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복잡한 머리를 진정시키며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자신이 있는 이 도시는 행정 체계상 시장도 있고, 경찰과 소방도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전부 단 한 사람인 회장에게 집중되어있는 형태라는 것.
둘째, 이 차원에서는 능력자들이 훨씬 많이 있으며, 이 도시에서도 대놓고 히어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셋째, 히어로들이 이 도시만큼은 대통령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그 회장에게 저항을 하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는 것.
넷째, 그리고 회장의 정체는―
"말도 안돼."
그 쯤되자 눈을 다시 뜨고 주위를 둘러본 카르나르 융터르는 도시 군데군데 걸려있는 현수막 속 사진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만 여겼던, 바람에 펄럭거리는 현수막에 어딘가 익숙한 듯 그렇지 못한 친구의 얼굴을 보고 그는 얼굴이 질리기 시작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이, 설마."
캘리칼리, 가 아니라 데이비드 리라는 이름의 남성. 그 모습은 어딘가 낯선 느낌도 들었다. 늘 얼굴에 묻히고 다니는 핏자국이라곤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도 그렇고 검은색 와이셔츠를 속에 받혀 입고, 푸른색의 핀 스트라이프 양복을 입고 있는 것도 결고 자신이 아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면 하지 않을 스타일링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신기한 경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는 품에서 이 차원으로 오게끔 만들었던 그 장치를 꺼내 구멍이 났었던 그 벽에 겨누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벽은 요지부동이다.
"음? 이거 왜 안되는거지?"
먹통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시 차원을 뚫을 수 있을 만큼의, 자신은 잘 모르는 모종의 요건이 충족될만큼 기다려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계가 망가졌다는 것. 설마 이곳까지 와서 몸을 험하게 굴린 적은 없었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첫 번째 가설을 택한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떠올렸지만 딱히 뭔가를 해야할 의무감은 없었다. 신용카드라면 들고 있지만 통신도 안 되는 마당에 저쪽에서 통용되는 카드로 뭘 결제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문제는 생각이 그에 미치자마자 어쩐지 배도 조금 촐촐하고 목도 마른 듯 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당장 그의 앞에 닥친 인간의 3대 중요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온 아이디어를 짜낼 필요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일은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속으로 이 놈의 시체 치우는 날은 언제 끝나냐라고 투덜거리던 소방관들 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보란듯이 떠들어대는 남자들이 있었다. 입은 모양새는 제법 멀끔하다만, 막상 하는 행동거지는 전혀 그렇지 못한 자들.
"저기…, 선생님들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만…."
"뭐야!?"
"제가…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해."
체격은 제법 있어도 싸우는 것과 거리가 먼 인상 덕분에 방심했던 놈들의 눈빛이 멍해지며, 입이 헤 벌어진 사이로 침이 한 두방울 뚝뚝 떨어진다. 그 위압감이 넘치는 목소리에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두 놈은 순순히 자신의 지갑에서 두꺼운 지폐다발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고, 기꺼이 받은 그는 아직 시간이 여유롭게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참에 궁금한 것을 남은 시간 내로 다 털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얻은 그 결과 이 세계의 캘리칼리 데이비슨, 아니 데이비드 리라는 남자는 이 도시에 있어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남자였다. XX 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에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간부진에 올라간 그가 순식간에 회장자리까지 차지한 비결 중 하나가, 그의 이면에는 이딴 놈들을 수하로 부리는 마피아 같은 행동이 한 몫했다는 사실에 상담사는 탐탁치 않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 사이에서는 그 데이비드 리가 보스라고 불리며 완력이 상당해 무수한 히어로들을 무력으로 꺾고, 사회적으로는 시장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온갖 모욕을 주고, 경제적으로는 거대기업의 회장의 직위를 살려 오만가지 꼬투리를 잡아, 그야말로 말살에 가까운 짓을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이제 원래 세계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잔악한 짓을 한다는 생각에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보를 얻느라 시간을 정신없이 쏟은 탓에 어느 덧 10분이 다 되어가고,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의 두 왈패에게 카르나르 융터르가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은 여기서 날 만났다는 사실도, 내게 돈을 주었다는 사실도 전부 잊은 채로 이 골목길에서 사라져. 알겠나?"
"예…, 예―에."
휘적거리며 움직이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손아귀에 들어온 묵직한 지폐다발을 바라보았다. 이 돈의 정체가 주변 상인들의 '보호세'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리 오래 만지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었고, 무엇보다도 저쪽에서 봐온, 자신이 아는 그 열혈 경찰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떠올릴수록 그 위화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의 체격과 얼굴과 목소리로 이런 짓이라니.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는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려 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곧 거리를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가 들려왔던 탓에 자연적으로 시선이 그를 향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시의 미관과는 전혀 상관없이 설치해 놓은 티가 분명한 대형 브라운관에서 뉴스 속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에 카르나르 융터르는 눈을 뗄 수없이 멍한 얼굴로 그 내용을 거듭 읽어야 했다. 도저히 눈 감고 넘어갈만한 내용도 아니었고, 그것이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히어로 노스페라투 호드, 모 처에서 변사체로 발견
이곳에서도 히어로로써 활약하고 있었던 친구의 이름 다음에 따라온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분명 쉬운 문장이건만, 그 단어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한번도 더듬지 않고 설명해줄 수 있었지만, 그 주어가 모든 사고력을 방해했다. 그의 귓가로 사람들의 내면이 다시 흘러나오면서 대략 이러한 전말이라더라―라고 발표하는 무미건조한 앵커의 멘트가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XX시에서 히어로로 활동하고 있던 노스페라투 호드가, 데이비드 리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그의 불법적인 활동을 고발하였으나 그 고발이 전적으로 무혐의처리가 되어버린 것을 시작으로, 시를 대표하여 데이비드 리가 그의 활동으로 인해 발생된 각양각색의 피해를 피해자들을 대신하여 고발하였다는 내용.
한 번에 몰아서 했어도 그에게 버티기 힘들었겠지만,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를, 그리고 그마저도 끝나면 다른 하나를. 본래 고발을 하더라도 내용이 중복되면 안되는 것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이며, 이미 기록된 문자를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그 내용을 해석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어느 모로.
데이비드 리의 목적은 재판에서 이기는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훨씬 잔악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노스페라투 호드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여론은 그에게 유리했으나, 점차 이어지는 소송의 행렬로 인해 사람들이 이제는 응원하는 것도 지쳤고, 더 나아가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지탄받는 여론과 소송에 제반되는 그 모든 비용들을 노린 것이다. 마치 기세등등한 사냥감을 장기적으로 몰아넣으며 그 힘을 빼게 만들어 잡는 것처럼.
그리고 그 결과가 그의 죽음이다. 앵커는 이제 그의 사인에 대하여 유서가 발견되어 경찰 측에서는 스스로 달리한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고 전했지만….
"과연 이게 자의일지, 타의일지는."
아무리 강철같은 체력을 자랑한다고 한들, 정신적인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체력적으로는 한없이 건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그였기에, 이 세계에서의 노스페라투 호드가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비참할 뿐.
그는 문득 품 안의 장치를 다시 꺼내 바라보았다. 지금 이 버튼을 누른다면, 어쩌면 곧바로 원래 세계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불쾌함은 깔끔하게 묻어버린 채로 살아가라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잊으려 한다 한들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고, 이곳을 무어라 불러야 마땅할런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서도 두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이곳이 다시 생각날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할 일은 명확했다. 평소처럼 누가보더라도 명백히 나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저쪽에서도 늘 해오던 일이 아니었던가? 다만 이번에는 우연히도 그 명백히 나쁜 놈의 얼굴이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았을 뿐이다. 그러니, 그는 그 장치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다 지하철의 코인로커 앞에 섰다. 어쩌면 험하게 몸을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품에 넣어뒀다가 고장나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니까.
마음먹고 파고들기로 시작하자, 이쪽 세상은 그야말로 파면 팔수록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한밤중에 검은옷차림 일색으로 자신을 꽁꽁 싸맨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금 항구에서 데이비드 리라는 남자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이 도시답게 항구에서 연신 하역되는 물자들 중 오후에 보았던 왈패들과 행실이 비슷한 자들이 모여있는 것에 설마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들이 무엇을 다루고 있었는지를 보았다. 한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물건들마다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줄로만 알았던 그것들을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손에 쥔 공구로 뜯어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냈다.
하얀 것이 투명한 봉투 따위로 똘똘 싸매여진데다가 단단히 밀봉되어있는 뭔가. 놈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겠답시고 칼 따위로 푹 찔러 그 내용물을 책상 위에 조심스레 쏟았다. 찍어서 맛을 보고, 얇은 카드 따위로 덜어 코로 쑥 빨아들이는 저 모양새라면 누구라도 단번에 저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 왈패들이 낄낄대며 떠드는 그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나르 융터르의 온 몸에서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서야 이걸 팔아치울 수 있다며?"
"간수 잘 해 임마. 회장님이 그러시는데 인센티브제란다."
"뭐? 인벤토리?"
"하―. 이 새끼 입만 열리면 온 동네가 무식 대잔치를 여나."
저들끼리 뭐가 즐겁다고 낄낄대며 저열한 소리를 하는 놈들이 그 하얀색 가루에 정신이 잔뜩 팔린 사이에 그는 주의를 기울여 감시카메라 따위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없다는 확신이 들고나서야 그들에게 다가갔다. 섬뜩하리만치 서늘한 얼굴과 숨을 잔뜩 죽여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발소리. 깡패들이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는 것도, 반응하는 것도 그래서 너무 늦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가루들을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십시오."
컨테이너 안에 자신들이 애써 그 내용물을 뜯은 노력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쏘시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이 될지 참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사분란하게, 꺼낼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던 그 봉투를 우악스럽게 집어던지고 그 안으로 드럼통 속의 모닥불에서 불씨를 끄집어내 주저않고 던지는 이 모습이란.
혹시나 그 안에서 건질 것이 있기라도 하면 곤란하기에 아예 뜯어낸 잔해 중 불에 잘 타는 것들도 장작삼아 같이 밀어넣고는 컨테이너 문을 단단히 잠궜다. 이제 저 안에서 가루들은 의미없이 녹아 못쓰게 만들어질 것이다. 저 놈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 목숨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쥐락펴락하는 그 데이비드 리라면, 이 똘마니들은 저 깊은 바다까지 아무런 장비도 없는 채로 프리다이빙이라도 시켜줄지 모른다.
안에서 타기는 잘 타오르는지, 제법 뜨거운 열이 느껴질 때는 이제 1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융터르는 자리를 뜨며 슬슬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보이는 놈들에게 다시 한 마디 말을 했다.
"이걸 전부 태운 것은 당신들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신들 밖에 없었고."
마음 같아서는 저 컨테이너 안으로, 다시 멍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끄덕일 뿐인 놈들도 같이 집어넣고 싶었지만 아직은 안된다. 약을 처음 취급하기로 한 놈들이 자발적으로 불에 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원치않게 꼬리를 잡힐 터였기에. 그 자리에서 멍청히 있는 놈들을 내버려둔 채로 그는 현장을 유유히 떠났다. 동정심이 있을리가.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도시는 시끄러웠다. 정확히는 항구 방향에서.
명색이 마약류 취급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경찰들은 데이비드 리의 부하 중에서 제법 지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이때다 싶었는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다른 사람들 사이로 구경하듯 서있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귓가에는 경찰들의 속마음이 차고 넘치도록 흘러들어왔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데이비드 리 일당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기회, 이걸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러나 상황은 급작스럽게 종결처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한 사람만 예상했을 그 일.
그 자리를 조용히 떠나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등 뒤로 총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누가 죽었는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명백했고, 그 이유도 부하관리를 잘못한 죄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꼬리자르기.
그 날 오후, 엄숙한 표정의 데이비드 리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도시에 혼란을 유발한 주범으로 지목된 점에 큰 책임감을 느낀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였다. 오직 말 뿐인 사과.
이후로도 데이비드 리라는 남자가 도시에 퍼트린 악이 얼마나 지독했던가. 항구에서의 일 이후로도 며칠에 걸쳐 그 면면이를 살펴보고, 내린 결론은 그저 얼굴만 지독할 정도로 닮은 타인이라는 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방금도. 융터르는 멍한 얼굴로 휘적거리며 이 장소를 빠져나가는 시민운동가들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이들을 본보기로 죽이려 하였던 일당들을 바라보았다. 몸을 벌벌 떨면서 항구에서의 일을 그들의 소행으로 생각해 처리하려고 했다던 말을 흘러들으며,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을 본 것을 잊고 시민운동가를 풀어준 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적으로 처리했다 믿도록 말을 한 채로 자리를 떠났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막아버리고, 갖은 방법으로 돈을 쓸어담는데 여념이 없다…라."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금까지 본인이 건드려본 것만 해도 이미 여타 조직들을 궤멸시키다시피 했던 수준이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공격에도 약간만 휘청일 뿐, 여전히 꿋꿋하게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데이비드 리라는 그 자가 얼마나 이 도시에서 견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지도 다시 생각할 뿐.
자신이 한 혼잣말처럼 그는 돈을 모으는데 있어 어떤 규칙과 법도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모은 돈으로 로비를 비롯해, 꾸준히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이 도시에서의 발언권보다도 더 나아가 아예 시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들었을 때는 워낙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멍해있을 정도였다.
그런 야망을 부수기 위해서라도, 지금 융터르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개판을 바라보았다. 딜러도 손님도, 타짜도 호구도 모두가 이성을 잃고 싸우는 이곳은 그 데이비드 리의 자금줄 중 하나인 불법 카지노다. 불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엄밀히 말하면 돈을 환급하는 방법을 교묘하게 회피해 합법으로 처리했고, 카지노 입구 자체도 대놓고 번듯한 곳에 자리했으니.
이곳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몇 겹에 걸친 보안을 뚫고 가야했기에 차라리 세뇌를 통해서 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입장해 몇 번 돈을 따고 잃어주면서 면밀히 주변을 살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벽 곳곳에 매설된 스피커들. 열에 아홉 이것을 보안을 관리하는 쪽에서 맡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이 도박판에서 자신만의 도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이."
"아니, 뭡니까?"
보란듯이 총을 어깨에 매고 있는 깡패들이 험악한 얼굴로 블랙잭 테이블에서 연거푸 돈을 따고 있는 융터르에게 다가왔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열심히 돈을 따는 타짜인 척 연기를 하며 실상은 딜러와 카지노 측에 고용된 타자들의 속마음을 읽고 그에 따라 행동해주고 있었을 뿐이지만, 보는 사람은 대놓고 이 카지노의 돈을 쓸어담겠다고 구는 어설픈 타짜처럼 보일 터였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보니까 돈을 좀 꽤 따시던데, 더 큰 판가서 놀아도 되지 않겠냐― 이거지."
"흠. 더 큰 판이라. 좋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순순히 응하는 모습에 깡패들이 피식 웃으면서 앞뒤로 그를 포위하듯 싸맨 채, 숨겨진 입구를 열어 그 안으로 내몰듯 들어갔다. 천박하고 화려한 공간과 전혀 다르게 회백색 콘크리트가 삭막하고 메마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좁다란 복도. 드디어 이 복도에는 감시카메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로는 모든 것이 수월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로 싸우며, 이 카지노를 완전히 박살내버리십시오."
보안실에서 멍하니 침을 흘리고 있던 깡패들마저 우르르 카지노장으로 이동한 것을 카메라로 확인한 그가 자신이 들어온 이후의 시점을 전부 삭제하고 마이크를 통해 말했었다. 이 자리에 숨어있는 자들까지 모조리 끄집어내서 싸우도록. 민간인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렸지만, 그는 무시하였다. 어차피 이 곳에서 도박을 하는 것 자체가 데이비드 리의 자금줄이 되어줄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서 돈을 따고 잃는 그 모든 자들은 놈의 공범일 수 밖에 없었으니.
내부의 소란에 외부에서 감시하던 병력들도 그 안으로 들어와 싸움에 난입하기 시작하며, 승자 없는 배틀로얄의 현장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그는 곧 각종 기계들이 박살나고 터지며 발생한 화재를 뒤로 하였다. 이제서야, 그 거대한 줄기 하나를 겨우 베어냈지만 아직도 모자라다. 아직은.
그는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보았다. 이 도박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데이비드 리의 이름으로 도박장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정리해둔 파일들이다. 마찬가지로 저 안에서 누구의 것인지 크게 관심가지지 않고 들고 나온 똘마니의 전화기를 꺼내 이 도시에서 데이비드 리에게 가장 우호적인 신문사의 기자 연락처를 하나 확인하고 그 쪽에 전화하였다.
"당신은 신문사 앞에서 나를 매우 보고 싶습니다. 당장."
그는 신문기자 하나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제의 그 스마트폰으로 몇 번 더 두드려, 이 도시와 제법 거리가 먼 곳의 다른 기자들 앞으로도 동일한 내용의 메일을 예약발송처리한 뒤 곧장 바닷물에 던져 처리하였다. 이윽고 신문사 앞에서 멍하니 서있는 기자에게 다시 세뇌를 걸어 자신이 넘겨준 자료로 데이비드 리를 철저히 비판하는 기사를 쓰라고 한 뒤 자리를 뜬 그는, 한 가지 직감이 불쑥 들었다. 이제 머지않아 자신이 그를 직접 대면할 것이라는 그런 불길한 직감이.
어제처럼 긴 하루가 더 없었을 것이다. 불법 카지노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그 다음 날 오후가 되도록 그는 잠에서 도통 일어나지 못하다 겨우 눈을 떴다. 자신이 준 선물을 과연 데이비드 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반쯤은 그 기대감을 품으며 묵고 있는 숙박업소에 비치된 텔레비전을 켜자 끊임없이 지역 방송사의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제의 사설 도박장이 있었던 곳이 완전히 전소가 되었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화재에 대한 안전불감증, 도박 중독, 불법건축 등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였지만 그 내용 어디에도 데이비드 리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허, 이걸 다 막았단 말이지."
텔레비전을 갸름한 눈으로 바라본 그는 허망한 마음에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보 제공자가 누구인지 열심히 찾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문제의 똘마니는 죽었을 것이고, 그의 핸드폰은 먼 바다까지 휩쓸렸을 것이니까. 그러나 아쉬웠다. 분명 이 정도면 결정타를 먹였다고 생각했건만, 놈은 아직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보다 강한 피해를 입혀야 했던 것인가 생각을 하는 동시에, 융터르는 자신이 확실히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도 혼자서는 과연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이 정도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 하지만 동시에 한 이름을 융터르가 입에 올렸다.
"노스페라투 호드…."
저쪽에서는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그가, 여기서도 영웅이었던 그가 걸맞는 마땅한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것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게다가 이미 노골적일 정도로 공격을 연달아 했으니 아마 그 쪽에서도 자신을 찾을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멀리서 공격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그 편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방 바깥부터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럽다.
"문 열어!!"
"젠장, 마스터키 뭐해! 마스터키 빨리 안 갖고 뭐하냐고!!"
윽박지르는 소리에 뒤이어 잠금장치가 풀려 문이 열렸다. 강제 체크아웃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이 아우성의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점차 감이 잡히고 있었다. 날 찾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빠른데. 여전히 뉴스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의 시선에 신세에 비해 과분한 옷을 휘감고 있는 깡패무리들이 다가왔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여기까지는.
"드디어 직접 얼굴을 마주보나?"
"데이비드 리…."
"당신이 정―말로 궁금했어. 도대체 왜, 이 도시에 막 올라오신 분께서 이러실까."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키와 덩치마저도 지나치게 닮은 이 남자는 그 지겹도록 보았던 핀 스트라이프 양복 대신 자신처럼 검은색 투성이의 양복을 입고 노려본다. 목소리나 어조도 부정할 여지 없이 캘리칼리지만, 풍기는 기운은 그와 전혀 달랐다. 호탕한 쾌남은 커녕 적대적으로 노려보며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끄는 말투가 위험한 인물임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거대한 뱀이 있다면 저 남자일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로 있는 그에게 지체할 마음이 없던 카르나르 융터르가 입을 열었다.
"글쎄, 당신이 한 그 모든 짓거리에 대해 말을 듣고 싶을 뿐이라서."
"흥, 그런거였나? 별 볼 일 없구만."
이변이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저기서 말대꾸가 나와서는 안되었다. 다른 놈들처럼 침이나 흘리며 있는 사실을 마구 줄줄이 토해냈어야 했건만, 데이비드 리의 야비한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콧방귀를 뀌기나 할 뿐이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어째서.
물론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전제인 만큼,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에 묻히거나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대처법도 안다. 그러나 데이비드 리는 전혀 그런 기색하나 없이 태연히 듣고, 무시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낯빛이 변해버린 융터르의 얼굴을 보고는, 데이비드 리가 어느 새 카르나르 융터르의 뒤에 있던 부하들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
뒤통수에 닿는 묵직한 쇠몽둥이의 감촉. 순식간에 머리가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그는 테이블 위로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머리…."
반사적으로 부여잡은 뒤통수에서 뜨끈한 뭔가가 묻어나오기에, 그 손을 그대로 보니 피가 아직 멎지 않았는지 그 붉은색이 과하게 선명했다. 데이비드 리의 부하가 휘두른 몽둥이. 이럴 때 운이 나쁘면 기억상실증에도 걸린다고 하던데 다행히 그런 기미는 없었지만, 카르나르 융터르는 어째서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깨어난 곳도 지금 머물고 있는 숙박업소 그곳이 아닌가.
시간을 보니 그 놈이 처들어 온 늦은 오후에서 아예 완전한 밤이 된 것을 깨달았다. 거의 서너시간을 이 꼴로 기절했는데 어째서. 의문에 가득 찬 그의 귀로 텔레비전에서 앵커가 떠드는 소리가 잡혔다. 거듭 반복되는 그 내용은 처음에는 말 그대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데 힘들었고, 그 다음으로는 이해는 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반복되는 말은 이해하다 못해 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그 잘난 데이비드 리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보도 중인 앵커의 뒤로 자신의 얼굴은 올려두되, 신원불명자라고만 적어둘 수 밖에 없었겠지. 문제는 그 뉴스가 가지고 있는 내용이다. 지명수배자. 무려 이 지역 경찰서장의 이름으로 고액의 현상금까지 걸리신 귀한 몸이 되셨다.
"…캘리칼리 님이 괴인한테서 도망다닐 때의 기분이 이건가?"
때 마침 자신의 현재 인상착의에 대해서 떠드는 타이밍. 그는 단순히 갈아입을 목적으로 샀던 옷을 한 벌 꺼냈다. 처음에는 그 놈의 손길이 닿았던 돈으로 산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 나빠서 무작정 침대 아래에 가장 구석진 곳으로 밀어뒀었는데, 놈이 그것까지는 확인할 정도로 치밀한 성격은 아님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판이다.
평소 입던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 편이니, 들키더라도 몇 초정도는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객실에 비치된 장식품 같은 전화기가 울렸다.
"…."
-이제야 깼나?
"데이비드 리."
-뉴스는 이제 봤겠지. 당장 궁금한 것이 많을거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목소리 자체는 똑같지만, 데이비드 리의 야비하고 비열한 어조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그의 목적은 이미 알았지만 놈이 더 떠들게 내버려둘 참이었다. 예로부터 말이 많은 적은 여러가지로 정보를 빼내기가 쉬우니. 그의 침묵을 일종의 동의표현으로 이해한 것인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몰랐지. 내 사업 이것저것을 죄다 건드리고, 망가트리고…. 그런데 네 놈이 기자들에게 정보를 날려줄 적에 쓴 그 스마트폰 주인이 내게 와서 이야기를 해주었지 뭔가. 그 뒤로는― 뭐 네 놈도 알겠지. 난 매우 화났어. 직접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아주. 정말로. 그런 내가 단숨에 네까짓 놈을 쳐죽여버린다고 화가 풀리지도 않을 것 같거든.
"그래서 현상금을 걸었다?"
-크흐흐…. 그래 맞아. 온 도시가 전부 내 손아귀에 있지. 경찰들도 내 말에 꼼짝하지 못하니 기대하지는 마시고―. 지쳐서 결국 죽여달라 애원할 때까지 이 도시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평생을 쫓겨다녀보는 네 놈을 보고 싶어졌다. 뭐 그게 다일세.
자신이 놈의 사업장을 하나 둘 씩 망가트린 것을 이런식으로 복수한다는 말에 융터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상대방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제법 크게 쿡하고 비웃어버렸다. 그 반응이 의외라는 듯,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가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 융터르가 이 유치한 응보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글쎄, 당신이 하는 행동들이 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유치해서 말이지."
-유치?
"네 놈은 내가 죽여달라 빌 것이라고 했지만…. 장담하지. 그 꼴은 절대 볼 수 없을거다. ―그 반대면 모를까."
-허세는…. 네 능력이 내게 통할 거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이거 하나만은 충고해주지. 절대로 나한테는 안 통해.
호언장담하는 데이비드 리의 그 말에 다시 융터르가 쿡쿡하고 비웃어버리자 아예 통화가 끊어져버렸다. 이제 이쯤되면 길길이 날뛰는 놈이 이 우스꽝스러운 사냥게임 개최를 선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융터르는, 어쩐지 속이 후련한 느낌이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결국에는 빌런이 된 모양이다. 과연, 맡겨줬다면 충실히 노릇을 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그가 방문 밖을 나서자마자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카르나르 융터르의 서늘한 얼굴에 미소가 잠깐 감겼다가 곧 그 입이 열렸다.
"다들 데이비드 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 않으십니까?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해보심은 어떻겠습니까?"
노스페라투 호드를 곤경에 빠트렸던 빌런의 어딘가 흐릿한 그 인상을 떠올린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의 말에 잡으러 덤벼오던 시민들의 멍한 얼굴에 혼란이 맴도는 것을 보고 큭큭거리다가 곧 껄껄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빌런이 사건을 치고 다닐 적에는 막는 것이 그렇게나 힘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그 처지가 될 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리를 나선 그는 딱히 정체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코인로커의 문을 열어 장치를 꺼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겠지만, 이건 보다 극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사용할 것이다. 그 차원이동장치를 조심스레 품 안에 집어 넣은 그의 행동이 워낙 당당해서, 사람들은 방금 전 코인로커 앞에 서있던 그 남자가 고액의 포상금이 걸린 지명수배범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정작 당사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두리번거리고 헤맸다.
그 흐릿한 인상에 대비되는 독특한 말투의 빌런의 암시는 사람들에게 노스페라투 호드에 대한 인상을 왜곡시키는데 임팩트가 큰 사건들과 대량의 여론조작이 필요했지만, 그 능력보다 명백히 상위호환인 융터르의 세뇌는 그 복잡한 사전과정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거리 한복판에서, 때때로는 카페 테라스 테이블에서, 만원으로 숨 쉴 틈이라고는 없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귓가에 스며드는 그 부드럽고 낮은 저음으로 흘리듯이 말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데이비드 리를 몰아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가 죽어버린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요."
홀려버린 사람들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혼란, 그 뒤로는 자신만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난 안도감이, 뜻이 맞는 사람들이 많다는데서 오는 분노가. 때때로는 아예 암시에 지나칠 정도로 잘 걸려, 선동꾼의 역할로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아예 세뇌를 걸었다.
"정의로운 분노 앞에 위법이 있을까요? 데이비드 리의 수많은 악행에 대해 더 널리 알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네…."
본래라면 자신을 잡으려 했겠지만 선동꾼의 역할을 맡을 사람의 스마트폰을 잠시 넘겨받아 그는 기자들 말고도 자신의 이메일로 보냈었던 자료를 널리 퍼트리라는 말과 함께 슬슬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가 곧 떠들썩해지는 모습을 보는 카르나르 융터르는 문득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만약 두 친구가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잠깐이나마 즐거운 상상을 했다.
틀림없이 진짜 빌런이 되었다며 놀리겠지.
틀림없이 본성을 드러냈다며 괴롭히겠지.
그들이 놀리는 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렸다가 사라졌다. 이대로 곧장 데이비드 리에게 승부를 걸기에는 부족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선동을 해봐야 어차피 막무가내로 쓸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저 비참한 희생자가 될 뿐이다. 이제부터는 저들을 상대할 무력이 필요한 시점. 그는 경찰서로 발길을 옮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선생이 그… 데이비드 그 새끼를 이리저리 친건 아는데, 미안―"
"어째서 경찰이 데이비드 리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걸까요. 법을 지키지도 않는 놈의 부하도 아니니 체포해버리시죠."
"어, 그런가?"
"데이비드 리가 저지른 불법만 해도 이미 한 트럭이던데요, 대놓고 범죄자가 아닙니까?"
경찰들의 눈빛이 흐려지며 저도 모르게 '맞아, 맞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저들의 머리 속에는 체포 대상이 자신이 아닌 데이비드 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찰서 하나를 장악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 필요했다. 자신이 나온 경찰서에서 소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인근에서도 경찰들이 몰려오는 모습에, 융터르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도 다가가가 마음 속에 스며드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경찰들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독기에 찬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부족하군요."
이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현수막도 만들고 딱히 말하지도 않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만들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경찰들도 시위대를 지키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데이비드 리가 운영하는 회사에 따라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과연 어디에 있을지 궁금하던 융터르도 인파에 섞여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가 노리는 또 하나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해 서늘한 미소가 입에 올라왔다.
"여기는 지금 XX시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 그 한가운데입니다. XX 일렉트로닉스 회장, 데이비드 리가 시에 끼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온 모습입니다만― 잠시 인터뷰 가능하십니까?"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대동한 기자 앞에 선 융터르가 자신의 선량한 시민인 척하는 연기에 웃음을 참으며, 얼떨결에 인터뷰하는 사람처럼 어설프게 응대하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시위에 참여하신 것 같은데 혹시 아무 말씀이나 가능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데이비드 리 회장이 이 도시의 시장이 되겠다며 불법 카지노, 약물거래, 인신매매 같은 걸 했다더군요, 이걸 참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방송을 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반응이 각기 다르게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분노해서 같이 시위를 하기 위해 뛰쳐나올 것이고, 그럴 의지까지는 없는 사람들은 다시 주변에 이 영상을 전파할 것이다. 영향이 없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카르나르 융터르는 본인이 하는 행동이 명백히 선동임을 알고 있고, 훌륭하게도 경찰들을 포함해 대다수의 시민들이 이미 영향을 받았기에.
이제는 미디어도 자신의 선동에 동참을 하는 꼴이 되었다. 그때.
"젠장! 저 놈이다!! 잡아!!"
"니미, 이 새끼 어떻게 한거야?"
"아, 이런. 언제 오나 했는데…."
그의 팔뚝을 강하게 붙잡은 조무래기들이 드디어 잡았다며 저들끼리 왁왁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융터르가 꿈틀대지도 않고 얌전히 이끄는대로 움직이자, 안심한 놈들이 검은색 벤에 그를 강제로 태우고 어디론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무슨 수로 선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이제 뒤졌어!"
"아직 안 뒤진걸 고맙게 여겨 새끼야!"
"회장님부터해서 나까지 이 새끼 팰라면 얼마나 순번을 기다려야 하냐?"
"모르긴 몰라도 한참은 걸릴 걸? 도중에 죽지나 않으면 또 몰라."
그 대화에서 건진 내용에 차가운 미소가 살짝 걸린 것도 모르는 채, 그들은 잡았으니 포상금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서 이제 떠들기 시작했다.
"왔구만."
검은색밖에 없는 양복에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데이비드 리의 얼굴은 오후에 볼 적처럼 능글능글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살기가 잔뜩 감도는 그 모습에도 카르나르 융터르는 유유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XX 일렉트로닉스 지하에 위치한 깡패들의 아지트였다. 조무래기들이 저도 모르게 흘린대로 이 공간에 수많은 부하들이 오직 데이비드 리의 기분에 따라 눈치를 보고 있을 뿐.
데이비드 리가 손에 낀 장갑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연거푸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보스의 그 움직임을 따라 부하들도 저마다 들고 있는 연장들을 보란듯이 들어 올리거나 휘두르기를 하였다. 누가보더라도 곱게는 못 죽인다는 무언의 시위. 융터르는 그런 모습도 그저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능력을 무효화하는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뭐야, 눈치 챘나? …그런데도 순순히 잡혀왔단 말이지―."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으니, 능력도 이런저런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무효화라는 것도 생각할 여지를 뒀어야 했는데…."
데이비드 리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그의 몸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왔지만 융터르는 모습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그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차피 이 자리를 마련하신 것도 그에 따른 대비를 했으니 그러시겠지요?"
"궁금한게 참 많으신 건 알겠는데, 무슨 꿍꿍이를 그리도 품으실까―. 응?"
"글쎄요, 이 자리에 계신 수많은 분들에게 한번 여쭤보고 싶을 뿐입니다만, 보시다시피 전 주먹질이라고는 할 줄 모르거든요."
"지금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데이비드 리는 부하들이 이상하게 웅성거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밑바닥에서 시작할 때부터 자신과 늘 함께해왔던 충직한 부하놈들마저, 아직 무슨 능력인지도 모르겠지만 입을 끔찍할 정도로 계속 털어대는 남자의 말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으면서 자기 곁으로 감히 다가와 말했다.
"형님,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당장 말해보게."
"…그, 어차피 이 도시에서 형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최후의 발악이다 생각하고 재미가 떨어지면 그때 처리하셔도 되지 않겠는가―하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부하가 말하는 내용을 곰곰히 듣던 데이비드 리가 잠시 노스페라투 호드를 떠올렸다. 번개를 다루고 하늘을 날면서 괴력을 뽐내던 그 적수.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꺾을 수 없겠다는 생각과 감히 20년을 넘게 한솥밥을 먹던 동생의 말을 무시할 수 없던 그가 다시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어디 한 번 말해봐."
"아, 이거 배려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부하가 된다는 선택지를 한 번쯤은 고려해보심이 어떨까 싶어서 그렇습니다만."
"부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부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고, 데이비드 리가 그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거침없이 융터르의 멱살을 잡았다. 그 완력과 키 차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상담사는 허공에 발을 휘젓고, 보스의 팔을 잡아 겨우 목이 졸리는 것을 막는 사이, 보스의 이마에 핏줄이 솟으며 자신의 분노를 가감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지금 부하라고? 내 사업을 망치고, 내 야망에 똥물을 끼얹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아―아하. 달리, 달리 생각하면 저 혼자의 힘으로 경쟁조직의 사업장을 망가트릴수도 있다는 의미이긴 합니다만. 대국적으로 생각해보시지요. 저 카르나르 융터르가 당신의 적수가 운영하는 사업장을 일거에 박살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보시는겁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부하들이 은근슬쩍 그 말에 신뢰가 생기는 듯 연거푸 맞긴해 따위의 소리를 소근소근거리고 있었다. 데이비드 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최측근마저도 그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먼저 앞서나간 보스에게 만류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리조차도 어쩐지 그 부드럽고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불쾌함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이런 전력을 손에 쥔다면 추후에도 이 도시의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놈들에게서 우위를 손쉽게 점할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하였기에,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크게 내며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풀고 물었다.
"조건은?"
"제가 아직 이 업계의 룰에 대해서 잘 모르니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솔직한 대화 나누기를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흥미가 떨어진 그는 처음 있었던 자리로 가서 아무렇게나 앉아 갑작스럽게 가족이 되길 바라는 낯선 남자의 행동을 신경쓰지 않고 바라보았다. 조무래기들에게 다가가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근무 환경이 어떻게 되는지, 복지는 또 어떻게 되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 질문들이 제법 길기도 했고, 워낙 목소리가 낮아 보스가 아예 감시를 부하에게 맡길 무렵 그들에게 융터르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여러분들이 일하시는 환경에 비하면 여러가지로 너무 열악한 사정 아닙니까?"
"어? 그, 그러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지려고 하자, 그는 검지로 입술을 대며 다시 말했다.
"지금은 조용히 해주십시오. 제가 추후에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렇게 홀연히 조무래기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나름대로 중간에서 관리하는 간부급들에게도 그는 다가갔다. 자신의 능력이 충분히 간부급은 되지 않겠느냐, 혹시 관리하고 있는 사업장은 또 무엇이 있느냐, 중간에 자신도 이득을 충분히 챙길 수 있느냐 등등을 물어보는 동안 간부들은 자신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을 전부 털어놔주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간부들이 남았을 뿐이다.
"좋아, 질문놀이는 이제 끝난건가?"
"한 가지만 더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뭔가?" 아직도 질문거리가 남았다는 그 말에 데이비드 리가 기운이 빠져 되물었다.
"앞으로 한 가족으로서 임하려면 역시 공간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가 도대체 뭐하는 공간입니까?"
질린다는 얼굴의 보스가 부두목 정도 되는 자의 옆구리를 툭 치자, 그가 신입 조직원이 될 예정의 융터르에게 이런저런 것을 알려주었다. 집합장소이자, 비상구로도 연결되어있는 장소라는 그 말.
"자네도 혹시나 얼타면 큰일나니 잘 알아두게, 비상 탈출은 늘 보스가 먼저기 때문에 보스께서 계신 곳이 비상탈출 장소일세."
"그렇군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모든 질문을 마친 그가 처음 이 비밀장소에 도착했을 적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동안 제법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다시 긴장감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데이비드 리는 그 긴장감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융터르를 새로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박수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다가 사라진 다음, 한 마디라도 해보겠냐는 부두목의 질문에 카르나르 융터르가 기꺼이 하겠다며 모든 소리가 잘 울려퍼지는 한가운데에 섰다.
"여러분, 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진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어주십시오. 아무도 움직일 수 없도록, 혹시나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카르나르 융터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어조가 이상하게 위압감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데이비드 리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오후에 그를 찾아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뭔가가 단단히 잘못 되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고 보스가 몸을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려 했다. 그가 몸을 움찔하는 순간과 동시에, 양 옆에서 그를 지켜야 할 모든 조직원들이 데이비드 리의 몸을 단단히 붙들어매기 시작했다. 후려치며 떼어내려해도 눈빛이 멍하고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는 그 모습으로 들러붙고 또 들러붙는 것을 결국 떨어트리지 못해, 보스가 융터르에게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허?"
"라이터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전혀 꼼짝도 할 수 없던 데이비드 리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융터르가 하라는대로 하는 것에 당황해 무슨 짓이냐고 부하들에게 윽박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들이 그에게 라이터들을 제법 수북하게 내놓았다. 그가 한 졸개의 겉옷을 벗기고는 곧바로 불을 붙여, 라이터 더미에 바로 던져 큰 불을 만들어냈다. 스프링쿨러도 하나 없는 이 비밀공간에 열기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짓거리냐 물었잖나―!!" 부하들이 일제히 융터르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것에 보스가 비명을 질렀다.
"글쎄요, 그걸 답해줄 의리는 없는데 말입니다만…. 그나저나 여러분, 혹시 서로에 대해서 불만이 잔뜩 쌓이신 것 같은데 화끈하게 주먹으로 푸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서로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고통도 잊은채로."
카르나르 융터르의 얼굴에 올라온 서늘한 미소가 보스에게는 섬뜩함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의 몸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고 있던 부하들이 몸을 놓기 무섭게 그가 저 놈 잡아라라며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보스를 바라보고, 또 서로를 바라보았다. 더는 멍한 눈길이 아닌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리고 그 시선은 저 멀리 졸개부터 간부들한테도 이미 전염되어있었다.
"뭐야, 지금 네 놈들이, 지금―!!!"
그의 몸이 비밀공간 한복판에 나뒹구는 것을 시작으로, 저마다 주먹 혹은 연장 따위를 거칠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라이터 더미 위로 불이 그 싸움에 덩달아 부하들의 옷으로도 옮겨 붙기 시작했지만 한 놈도 그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는지 비명이라곤 지르는 놈 한 명도 없는 이상한 광기의 난투극에서, 데이비드 리에게도 부하라고 믿었던 놈들이 자신을 향해 주먹질을 날려야만 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거냐고!!"
"말했잖습니까? 답해줄 의리는 없다고."
부하들에게 공격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몰락이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도 못했다. 데이비드 리의 주먹에 나가떨어진 부하들에게서 살이 터지고 뼈가 꺾이는 등의 소름끼치는 소리들이 연달아 났지만, 일어나서 싸울 수 있는 부하들은 다시 일어나 서로에게 싸움을 거는 상황 속에서도 보스는 끝끝내 '왜' 라는 단어를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융터르에게 아무 답을 들을 수도 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보스가, 처음 자신이 서있었던 비상탈출구의 입구를 망가트렸다.
"하―!! 이제 다 끝났군! 유일한 생명줄이 없어졌으니 네놈도 이제 이 자리에서 얻어 터져 뒈지거나, 아니면 불타서 뒈질 일만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사방팔방으로 불이 옮겨붙어 매캐한 연기 속에서 데이비드 리의 눈이 미친듯이 번들거렸다. 그러나.
"글쎄요." 카르나르 융터르가 품에서 작은 장치를 하나 꺼내 아직 불길이 완전히 번지지 않은 벽을 향해 조준하고 버튼을 눌렀다. "아, 이제 되었군. 생각보다 재사용시간이 너무 길었어."
결국 데이비드 리의 몸에 불길이 옮겨 붙는 와중에도,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융터르가 벽을 향해 조잡한 뭔가를 겨누자 벽에 파란색 따위가 일렁이는 구멍이 생겼다. 그 너머로 몸을 밀어넣기 전, 이제는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그 남자가 데이비드 리에게 한쪽 입꼬리만 쑥 올라간, 명백한 비웃음과 함께 인삿말을 남겼다.
"그럼 안녕히…. 아, 이 상황에서 안녕히가 과연 되려나요?"
그렇게 그는 구멍과 함께 사라졌다. 자신에게 덤벼오는 부하 몇 놈을 때려눕히며 그가 사라진 벽을 향해 연신 두드리고 몸으로 박치기를 해도 구멍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데이비드 리는 다시 자신이 박살냈던 비상탈출구의 입구를 열고자 하였다.
"제기랄! 저리 꺼져! 이 쓸모없는 새끼들이! 젠장!! 열려, 열리라고―!!"
그의 허우적거리는 팔에 아직도 움직이며 싸우는 부하들의 몸이 짚단처럼 쓰러지는 것도 무시하고, 당긴 문은 열리는가 싶더니 중간에 뭔가 잘못되었는지 덜컹소리가 날 뿐 열리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불이 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연거푸 온 힘을 다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곧 새카만 연기가 이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해 숨을 쉴 수 없고, 이미 여러 번 얻어맞고 불타오르는 몸은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몸 조차도.
구멍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상담실이 보였다. 스마트폰에도 화면에 불을 밝히자 정상적으로 기지국과 연결되었다는 알람이 그를 마음 편하게 만들었다. 곧 온갖 알람들이 일제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금까지 꽤 지쳐있었던 그였기에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저 마음에 평온함을 얻고자 평소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침대로 종종 사용하던 카우치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캘리칼리 님께는 침대가 아니라고는 말했지만, 정말로 이거 편하군요…. 아니 내가 지쳐서 그런건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믿기지 않았던 그는, 졸린 눈을 이대로 감으면 다시 저쪽 세계의 숙박업소에서 눈을 뜰까봐 그것이 불안해져 억지로 깨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약간 누워서 쉬다보니 지금도 입고 있는 옷이 저쪽에서 산 것이며, 탄내가 꽤 심하게 배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앞으로 이 옷차림을 보면 계속 무의식적으로 생각날 것이 분명하다. 결국 지친 몸을 다시 힘겹게 들어올려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가 상담실 문을 여는 순간.
"어이 융터르―!!"
"아니, 문자, 그거, 남기고, 몇 시간을, 연락, 안 받으셨습니까?"
"몇 시간이오?"
"그래! 몇 시간! 자네 상담실 문 앞에서 이 친구랑 내가 30분을 기다렸는데…."
땅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렸더니 엉덩이가 다 시리다면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능숙하게 노스페라투 호드와 상담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초에 그 내용이 무슨 내용임을 암시했느냐며 거듭 따지는 두 친구에게 융터르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참 힘들고, 말하기에는 긴 일이 있다고 할 뿐,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어물쩡거리며 넘어가자 형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자네, 뭐 숨기는 티가 역력한데….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게."
그런데 이런 캘리칼리의 얼굴이 데이비드 리의 그것과 순간 너무 닮아서 융터르가 움찔하고 제법 과하게 놀래버렸다. 그 모습에 호드가 덩달아 당황한 캘리칼리에게 농담을 던졌다.
"캘리칼리 님, 융터르 님께, 사과, 하십시오."
"어? 사과? 혹시 배는 안되나?"
"…아, 제발."
갑자기 형사가 킬킬대면서 내뱉는 그 특유의 괴상한 개그가 툭 튀어나오면 기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여전히 피투성이의 형사는 영문도 모르는 채라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냐며 연거푸 두 친구를 바라보며 묻는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런 형사와 기자의 얼굴을 보고, 다시 잠깐 벽 너머로 넘어갔었던 그 세계를 떠올리다가 툭 내뱉었다.
"아… 역시, 이쪽이 훨씬 사람다우니 좋습니다."
"음? 서에서는 요새 나보고 좀비라던데. 뭐, 칭찬인 거 같으니 넘어가지."
"그거, 칭찬, 100%, 아닙니다. 완전, 디스."
그런 의미였냐며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노스페라투 호드와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따지는, 분명 몇 시간 전이지만 참 그리웠던 일상이 돌아왔다. 융터르는 계속 해명하라는 캘리칼리의 엄살 섞인 비명에도 연거푸 바람 섞인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런 일상이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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