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는 다른 스타일로 시도해서, 권민님이 자전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보고 싶었읍니다.
*개인적으로 왁타버스 오리지널 힙합, '나비'를 브금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Words : 5k
XX대학교 영화과의 '권민'이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저도 모르게 반문을 하곤 하였다. 아, 그 이빨? 어릴 적 과장되게 그려놓고는 하던 토끼의 앞니처럼, 그의 치아가 워낙 인상깊었기에. 실제로도 종종 짖궂은 사람들이 그 독특한 개성과, 그에 따르는 발음에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더라도 그는 늘 허허 웃는 소리로 넘어가곤 할 뿐, 굳이 그에 대해서 불쾌해하는 등, 감정이 상했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간혹가다 어째서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는지를 지적해도, 그 특유의 발음으로 "아잇, 다딜인데요 뭘."라고 말하고나서는 그 특유의 어흐흐 하고 웃어 넘겼다. 나는 종종 그의 이러한 대범함이라 불러야 할지, 혹은 바보같음이라고 해야할 지 모를 애매한 감상과 함께 생각하고는 하였다. 고민이 전혀 없을 것 같다고. 태어나면서 늘 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온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것에 비해 늘 사소한 것에도 힘들고 버거워하는 나와는 전혀 다르다고.
어쩐지 그 어흐흐―하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낙천적인 태도에 동경을 하게 되고 덩달아 웃게 되며 의지를 하게 되곤해버렸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영화과에서 출품하곤 하는 영화에 종종 비춰지는 영상 속에서는 어쩐지 억지로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태도가 보이는 듯 하였다. 자신을 상하게 하면서 다른 이들을 웃게 만드는 광대같은 그 태도 따위에 날선 비난들을 들어버림으로써 당사자도 아닌 내가 가끔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던 어느 날.
결국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햇빛이 창문을 물들인 끝에 테이블 위로 스며들고, 공기 사이로는 로스팅되는 커피콩 향기가 느껴지는 사이에, 권민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음 글쎄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는게 좋을지 잠시 생각해봤어요. 제가 늘 웃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가끔은 광대처럼 과장되어보이는 것도 맞는 말이잖아요. 실제로도 지금 저는 정말 즐거우니까 그런거에요. 굳이 이유를 생각하자면 그게 다에요. 즐거우니까.
…사실 이렇게 웃고 다니는 것도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그 동안은 뭘 했냐고요? 글쎄요…. 저는 아무래도 화를 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이든, 제 자신에게든.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음에 차지도 못했고…. 아, 여기서부터는 제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괜찮을까요? 히히. 듣기 싫다고 해도 이미 늦으셨습니다―. 저도 가끔은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날도 있는게 좋죠. 그쵸?
고등학생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아, 대학교에 가게 되면 난 철학을 공부해야지―라고. 어? 왜 철학과냐고요? 어흐흐, 어? 그러게요? 근데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도서관에 가면 철학 코너 쪽 책 많이 읽어서 그랬나? 뭐 아무튼 그 동안 부모님께 말 잘 듣는 아들이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으니까, 또 대학가면 너 원하는 거 다 하라고들 하시잖아요?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저도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었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라는대로 다 했죠. 근데! 근데요! 막상 수능까지 다 끝나고 대학교 지원하는 시기가 되서 외국에 대학 있잖아요? 거기 철학과에 지원하려고 했는데 영어가 너무 어려운 거에요!
막 수능 끝나고 나면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잖아요? 그! 그 스무 살도 안 되는 나이에 제 세상이 막 무너진 게 느껴졌었어요. 아니, 부모님이 반대해서도 아니고, 학교에서도 다른 과로 지원하라고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 영어실력 때문에 여길 못 가? 라는 거였잖아요. 으허허, 진짜! 와―, 진짜로 제가 그 때 절망한다는게 뭔 뜻인지를 진짜로 깨달았던 거에요. 근데 그렇다고 막상 다른 대학교 철학과를 가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부모님이랑 선생님들이 결사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그 때 저는 속으로 막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무슨 과를 가든 말든, 이 어른들한테는 그저 대학 간판이 더 중요하구나. 근데 슬프지만서도 그게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 부모님께는 다른 친척분들에게 그 XX대학교에 간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는거고, 담임선생님께는 학교 정문에 올릴 플래카드, 왜 있잖아요? 대학교 입학 축하한다면서 서울대같은 유명한 대학부터 쫘르르 써내리는 그거. 그런 거 왼쪽 윗줄에 내 이름을 집어넣어서, 내가 권민이를 그 XX대학교에 보냈다!라는, 그런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학생이 된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결국에는 그 대학에서 갈 수 있었던 영화과를 선택한 거에요. 그 대학은 꼭 갔으면 좋겠다고 어른들이 하도 그러니까. 근데 영화에 대해서, 뭐 제가, 어흐흐. 뭐 아는게 있어야죠. 지금이랑 다르게 그 때는 흥미도 그리 많다고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1학년 1학기에 받은 첫 성적이 좋을리가 있었나요. 지금와서 봐도 정말 대놓고 나 공부 안 해―라는 심보가 그득그득하게 담긴게 다 느껴진다니까요. ―아 잠깐만요. 저 목이 좀 마른 거 같아서.
그 쯤 되자 권민은 잠시 실례한다며 말을 멈추고 어느 샌가 테이블에 올려진 자신의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나대로 저 날 적부터 긍정적일거라 믿었던 사람이 그러지 못했다는 이 고해성사에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조용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겨우 생각이랍시고 꺼낸 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잘 적응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으하하, 그툐, 디금은 딘따로 달 디내고 있드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주었다.
정말 안 좋은 생각도 솔직히 했었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말 안할 거에요. 이거는― 이제 그, 제 비밀입니다. 무덤까지 평생 들고 갈거에요. 으흐흐. 아무튼, 학교 생활 잘 하라면서 부모님이 대학교 근처에다가 좋은 방을 잡아주셨는데, 그 침대 위에 누워있으면 말이에요 어쩐지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대학 근처에 바다의 ㅂ자도 없는데. 근데도 진짜 쏴아아 하고 방에 물이 차는 거 같았어요.
엄마가 사주신 옷에, 한 때는 철학과를 지망했던 흔적들, 대학에서 사라고 강제로 떠넘긴 온갖 교재들, 반은 억지로 하고 때려쳤던 온갖 과제들, 그리고 저까지.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으면 그 파도에 전부 쓸려서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착각이 든거에요. 아, 원래 이럴 때 멋있게 철학자 명언 하나 딱! 말해주면 좋은데. 어흐흐, 다 까먹었네요.
그날 그날마다 강의가 끝나면 나름대로 자유시간이나 이런 저런, 딱히 충만하다고는 못할 방법으로 시간을 낭비하면서 저는 저대로 그냥 파도가 점차 커지기만을 기다렸던 거 같아요. 지금와서 생각하면 진짜 잘 버텼다! 이런 생각이죠. 근데…, 근데 그게 다였어요. 무너지는 거 알면서 그 자리에 버티고 버티다가 언젠가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려고 했나도 몰라요.
그렇게 진짜로 나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도 안 이상할 거 같았던 어느 날 말이에요, 전공에서 필수로 이수하라고 지정해 놓은 강의들 중에 각본을 쓰는 게 있거든요. 그때 교수님이 자유 주제라면서 뭘 한 번씩은 써보라는거에요. 잘 쓰면 그걸로 영화 촬영도 한 번 해보자면서. 근데! 저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제 각본 XXX 이런 이름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길 바라면서 열심히 뭔가를 쓰고 지우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는데도 저는.
생각해보면 영화과에 와서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그나마 뭔가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게.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까 막 벌써 30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막 써내려간거에요. 극본에 맞는 문법도 하나 안 지키고 그냥 제 생각을 좌르륵하고 써내려가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은 제가 제출한 걸 보고 저희들끼리 막 수군수군대더라고요. 쟤는 틀렸다. 뭐 이런 말로요. 근데 교수님이 그러는거에요. "이거 괜찮네" 그러면서 제가 썼던 극본을 머리 위로다가 치켜올리시고는 흔들흔들거리시던게 아직도 안 잊혀져요. 아마 평생 가도 그거는 못 잊을 겁니다. 그 때 그 오후가 주는 햇빛이며, 강의실에서 풍겨오는 낡은 책상의 나무 냄새가.
물론 나중에는 교수님한테 따로 불려가서 극본 쓰는 법 안 배웠냐며 문법이 아주 엉망이라고 한 소리는 듣긴 했어요. 으허허허. 그래도 그 뒤로는 이렇게 딱 말씀해주시는거에요. "너만의 철학이 있는 거 같아서 독립영화의 극본으로 쓰면 좋겠다." 그 어떤 칭찬이나 꾸중보다도 그 때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만큼 저를 울린 건 또 없을 거에요. 내 철학이 있다잖아요. 다른 거 다 떠나서 그 말이 듣고 싶었던게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제서야 제 속에서 꽉 막혀있던 뭔가가 겨우 풀리기 시작한거에요. 그게 뭔가냐고 물어보셔도 몰라요. 아잇, 모르면 모르는 거에요. 아무튼 그때부터 생각이 점차, 아주 조금씩,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어요. 철학과에 들어가야만 철학을 하는건 아니잖아요, 그쵸? 막무가내로 이리저리 탈선하던 것이 아주 우연하게도 정상적인 궤도 위에 오른 거에요. 내 철학을 담은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나? 그런 거 말이에요. 왜 꿈과 현실이 양립되어있으면 하나만 선택하라고들 그러잖아요? 근데 전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저만 봐도 철학과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지는 못해도, 제가 만드는 영상에 제 철학을 녹이는 것처럼 내 현실에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으흐흐. 그러니까 결과만 놓고 보면 영화과 온 것도 잘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치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라는 거잖아요. 이걸 무시할 수는 없더라고요. 음… 어, 어어― 근데 왜 이 이야기를 했더라?
그가 볼을 살짝 긁으며 멋쩍어하였다. 나는 그의 질문에 본래 처음 이 면담하기 위해 건넸던 질문을 다른 표현을 써서 답해주었다. 그러자 권민은 내 의도가 다시 생각났던지 연신 "아 마따 마다."하면서 박수를 큰 소리로 연신 치며 민망함을 웃음으로 덮어버렸다.
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조금 슬펐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웃음거리가 되려 하는 그의 태도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동정심과 연민이,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내가 이 사람을 잘못 재단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이.
아잇, 아이 왜 울려고 그래요! 괜찮아요, 아니 진짜로 저 정말로 괜찮거든요. 저를 이리도 생각해주시는데 고맙고…, 감사하고 그런거에요. 아 근데! 그건 있어요! 제가 영상 속에서 이렇게 좀 과장해서 웃고 떠들고 그러는 건 그냥… 어떤 의도나 해석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웃는 건 정말로 즐겁고 웃기니까. 제가 우스꽝스럽고 오버스럽게… 그 당해준다고 하는 그런 것도.
왜 그러냐면요, 제가 극본을 가르쳐주신 그 교수님으로 인해 영화과에 적응하고 삶에 의지를 다시 되찾았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구요, 문득 든 생각인데. 근데 아직 저는 교수님처럼 어떤 통찰력이 있다거나, 감독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멋지게 촬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준다던가는 아직 못하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걸 선택한 거에요. 그게 중요한 거라니까요. 그치만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거로 인해서 당신이 너무 슬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거 과몰입이라구요! 으허허허! 아― 진짜로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웃었으면 좋겠는데, 영상 속의 제 행동으로 인해 슬퍼하시는거면 이건 뭔가 잘못 된거에요. 그저 바라는게 있다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가 하는 이 일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끔 응원해주시는거. 그거면 충분하다고 봐요. 어… 거기서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그냥 영상 속의 제가 행동하는 바보같은 짓에는 그저 마음껏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거면 진짜 충분하거든요.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결국에는 맞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건 있어요, 아까 전에 말하긴 했지만 인정하는데 시간이 진짜로 오래 걸렸거든요. 늦바람이 든 도둑이 날 샌 줄 모른다고 그러잖아요. 이제서야 이 쪽에 전념을 다하긴 했지만 그 동안은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온갖 생각으로 고민을 했고, 저 혼자 스스로 눈물도 흘리고 그랬거든요. 아니, 아이…잇! 알아봐달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진짜로. 그건 제가 이 일도 힘들어서 나중에, 진―짜로 먼 미래에나 나중에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면 그때 해주셔도 충분하다구요.
어, 어어―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아 맞아. 그 동안 제가 저 스스로를 위해서 흘린 눈물이 충분히 차고 넘치기 때문에 더는 다른 사람이 저를 위해서 울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걸 말하고 싶었던 거에요. 저는. 눈물 얼마나 귀해요, 아깝잖아요. 그거. 자, 이제 그만 뚝해요, 뚝.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얼음이 다 녹아버린 음료수를 맛있게 마셨다. 해가 길어져 며칠 전만 해도 벌써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을 시간이었지만, 이 긴 대화를 나누면서도 창문 너머로는 석양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권민이 애써 울지 말라고 했건만 히끅거리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연거푸 내고 있었다. 그가 멋쩍게 웃는 모습에 심호흡을 하고 다시 나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아잇! 당연하됴. 던 디금이 가당 행보캅니다."
불타오른다기 보다는, 아주 수줍게 다가온 석양에 그의 웃는 얼굴이 닿았다. 쑥스러워 얼굴이 벌개진 것처럼 보이는 그 얼굴. 어쩌면 내 얼굴도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꺼이꺼이 울다가 결국 나올 눈물이 더 없어서 벌개진 눈가를 가려주고 있겠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권민은 잠시 키득키득 웃고서는 이어서 말했다.
"솔딕히 말해서, 아프로 뭘 하고 싶냐고 하면 그건 달 몰라요. 그치만 디금 당장 뭘 하고 싶냐면 더는 데 이름으로 뭔가 만들고 싶어요. 데 털학, 데가 품었던 뜻들. 그리구 데당에다가 다 봐라!! 라고 포효를 하는거뎌. 이게 이 권민 님의 뜻이다!! 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권민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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