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AU입니다.
*비명을 향하여 후속입니다.
Words : 10k
어떤 의미라고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충 카르나르 융터르 답다고 하면 납득이 되는 깔끔한 레어 안이 엉망진창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본래 드래곤 하나가 있기에 적당한 작은 규모였기에 두 친구는 조금 불편해도 여전히 인간의 모양을 하기로 했지만, 그 선택을 둘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어어!! 이봐! 확장공사라도 할까 하더니만, 그게 이런 식인건가!?"
"차라리, 스스로, 박살낸다, 하십시오!"
"이거 너무 오래간만이라 움직이는 게, 아니 이런 꼬리가 왜 갑자기." 드래곤이 그 아우성에 놀랍게도 쩔쩔맨다.
"젠장! 차라리 넓은 공터에서 연습하게! 우리 다 깔려죽겠어!"
이미 완전히 다 커버린, 짙은 푸른색 비늘이 눈에 띄는 드래곤이 해츨링도 아니고 허우적거리면서 레어 이리저리 부딪치는 탓에 아무리 보호의 마법이 걸렸다 한들, 잔돌 따위가 우르르 떨어지고 있던 탓이다. 방금도 두 인간 흉내를 내는 친구들은 저도 모르게 그 거대한 꼬리가 휘적거리는 것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몸을 뒹굴고 있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옷을 이렇게 망가트리냐며, 인간들 사이에서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이름을 쓰는 블랙 드래곤이 버럭 화를 내었다.
한편 붉은색 옷 아래로 근육이 두드러지는, 스스로를 노스페라투 호드라 불러달라는 레드 드래곤도 순식간에 회복되기는 하지만 연거푸 떨어지는 돌멩이 따위에 상처가 연거푸 나는 것이 껄끄럽다는 듯, 아예 자신에게 보호마법을 둘러 자잘한 충격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 두 친구들에게 긍정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슬프게도, 곧 블루 드래곤의 그 거대한 몸집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한 인간 남성의 모양으로 변했다. 깔끔하게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가 자신의 팔다리를 살펴보고나선 입을 열었다.
"역시, 아직은 이 편이 제게 더 편하군요."
"잊었다, 잊었다, 하더니만, 이런, 기본도, 완전히, 잊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지를 이용하는 마법에 돌을 비처럼 쏟아지게 만드는 그것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체험하던 두 드래곤이 저마다 옷을 툭툭 털면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설령 레어였던 자리에 그대로 깔린다 한들 죽을 리가 없지만, 이런 어설픈 이유로 돌더미에 깔린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아직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간 카르나르 융터르에 조금은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블루 드래곤이 익숙한 몸으로 돌아와 제 손(보다는 몸)으로 완전히 박살 내놓을 뻔했던 레어를 다시 마력으로 복구시켰다. 원체 세 드래곤 사이에서 가장 마법을 능숙하게 다룬 덕분인지, 기억을 되찾고 난 이후에 가장 먼저 한 것도 레어까지 도달하는데 마력을 이용해서 몸을 띄운 것이었다.
"나 원참. 원래 모습으로 날아가는 편이 더 편하지 않던가?"
"아직은, 몸이,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하나, 봅니다."
멋쩍게 웃는 그 모습 마저도 아직은 인간다운 그 모습에 두 친구는 여전히 한숨을 거두지 못했다.
망가졌던 레어 안은 순식간에 거구의 드래곤이 몸을 뉘이며 쉬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취향이 독특한 인간이 동굴 안에서 사는 것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 누가 블루 드래곤 아니랄까봐 곳곳에 파란색이 감도는 그 가구들 중 일부 위에 제멋대로, 떨떠름한 얼굴로 앉은 두 친구들이 레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집에 가까운 그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인가?" 캘리칼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전 다시 여행이나 떠나볼 참입니다."
"여행?" 호드가 그런 융터르의 답에 반문을 하였다. 어째서 기억을 되찾은 지 며칠 안에 다시 방랑하려는지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잠드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고, 어차피 변해버린 세상이나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쩌면…."
드래곤은 완전한 생명체다. 망각이라는 결점을 배우지 못할 만큼. 카르나르 융터르는 한때나마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잊는다는 선택을 통해 라자가 사라진 상실감을 잊어버리려 하였지만, 지금 다시 와서 기억난 이상 얻은 것보다도 잃어버린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본래의 몸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조차도. 그 말의 품은 의미를 알아차린 두 친구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뭡니까?"
"자네가 또 어디 멍청하게 가다가 기억상실 되기 전에 붙잡아둬야지."
"감시, 할겁니다."
동행한다는 말을 저렇게 하는 자도 더 없을 것이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야 워낙 로드마저도 내노라하는 이단아 같은 존재이며, 노스페라투 호드도 상대적으로는 덜하다지만 그와 성향이 비슷하다. 카르 앤 드래고니안에서도 이미 손절한, 막무가내의 구현과도 같은 두 친구들을 자신이 말린다고 한들 들을리도 없었다. 그러니 저들이 같이 가겠다고 하면 그건 이미 기정사실이자 확정이다.
그럼 전설의 모험가 셋의 재데뷔인가? 라며 어느 새 애용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칼집째로 휘두르는 캘리칼리의 모습에 덩달아 호드 붉은색에 노란색이 조금 섞인 묵직한 중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있던 카르나르 융터르가 한 때의 즐거운 기억이 떠올라 잠시 웃고는 가벼운 옷차림에 마법이 걸린 활을 하나 꺼냈다. 백발백중의 마법이 걸린, 한때 영웅이 썼다고 알려진 신궁의 그 화려한 모습을 흔한 롱보우의 그것으로 바꾸는 것을 본 캘리칼리가 핀잔을 놓았다.
"이번에는 활쟁이로 할 참인가? 그럼 아예 귀 큰 친구들로 모습을 바꾸지 그러나?"
"엘프들은 그 어떤 종족들보다도 물들기가 쉽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며칠 전보다 더 심하게 기억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우리들은, 다치지도, 않으니, 궁수, 하시는게, 좋습니다."
호드의 그 말에 융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더라도 괴물같은 회복력으로 나아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처음 셋이 모험할 적에 나름대로 무난하게 보여야 한다며 맡았던 역할은 그리 쓸모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갑작스럽게도 캘리칼리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한들, 요새는 워낙 평온한 나날들이어서 말이지. 자네 찾는답시고 모험가 노릇 좀 해봤는데 유감스러울 정도로 소득이 없었네."
탐욕스럽기로 소문난 블랙 드래곤 답게, 돈과 보석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아쉬운 이야기겠지만 애당초 전투를 즐겨하지 않는 카르나르 융터르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소식도 없었다. 그 얼굴이 제법 화색을 띄고 은근히 권유하듯 물어보았다. 최근에 또 우연히 들은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 걸음으로 거의 세 달은 가야 나오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곳으로 한번 가보지요."
"날아서, 가면, 되지, 않습니까?"
호전적인 성격의 레드 드래곤은 단순히 등산을 하자는 것에 다소 실망한 투를 숨기지 않았다가 아차하는 얼굴로 어쩐지 풀죽은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후유증에 시달리는 그를. 캘리칼리가 껄껄 웃으면서 아직은 재활운동에 여념이 없어야 할 친구의 어깨를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고는 말했다.
"까짓거 걸어가보자고! 그래서 그 산꼭대기에는 뭐가 있나? 숨겨진 보석? 아니면 뭐, 희대의 명검이라도 꽂혀있나?"
"아…, 아니오. 그냥 산 꼭대기입니다만. 그저 경치가 좋다기에 가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다야?!"
싸움도, 보물도 없는 이 무의미한 여행에 두 드래곤은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맥이 쭉 빠졌지만 반대로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이 선호하는 조용한 여행길이 될 것 같아 즐거운 티를 숨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친구들은 시대가 혼란할 때 활약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 생각으로 아주 가볍게 짐을 꾸려, 레어에 걸어둔 함정과 보호마법들을 점검하고 막 나서려던 찰나, 부리나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두 친구들이 뒤쫓아왔다.
"―로드시여 맙소사."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반응이 카르나르 융터르의 입에서 나왔다. 한숨 섞인 한탄. 이것마저 깜빡할 것이라고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자신의 친구들이 지독한 반골성향을 가지고 있어, 지금처럼 따로 여행하는데 들뜬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절대로 취향과 맞지 않더라도 아득바득 쫓아올 것임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의 난처한 얼굴이 즐겁다는 듯,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가 아주 가벼운, 전형적인 여행자의 옷차림으로 뒤를 따라오는 그 모습에 따라오지 말라 한들 들을 생각도 없는 두 친구들을 뒤로하고 융터르는 레어 바깥으로 나왔다. 그 입구에서도 날씨가 맑은 날이면 보이는 그 만년설로 뒤덮힌 산 꼭대기를 향하여.
확실히 세상이 많이 달라진 것에 융터르는 고개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을 무렵에는 그 자그마한 시골에서 나오지 않았던 탓에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는 것이 너무나 적응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을 떠난지 처음으로, 아흐레째 되는 날에 대도시에 들어서면서 그 변화를 확실히 체감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날탈과 같은 그런 것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아직은 어설프고 또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하늘을 나는 거대한 새의 날개 아래로 자그마한 봉 하나에 몸을 의지하며 연거푸 날아오르려는 시도가 그의 주의를 빼앗을 정도였다. 옛적에는 아주 숙련된 마법사가 겨우 공중으로 띄운다는 느낌의 비행을 해내도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건만.
혹은 그 앙숙관계라고 표현하는 것도 점잖을 정도였던 드워프와 오크 관계가 요즘에는 친밀해졌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랄 일 중 하나였다. 심지어 둘 사이의 결혼을 축복해달라며 인간 사제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 융터르는 지금까지의 상식을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드래곤 턱이 빠지는 모습에, 아무래도 세상 경험은 훨씬 많을 수 밖에 없던 캘리칼리와 호드가 넌지시 말해주었다.
"드래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족들이 인간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하면 믿겨지나?"
"엘프도, 인간들과, 접촉하면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말을 곧바로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한 식당을 가리켰다. 채식주의자 오크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말술을 들이키고 고기를 뜯는 엘프의 모습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있는 융터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가관도 아니었다. 차마 실례가 되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저 엘프의 모습은 차라리 귀도 크고 키도 큰 드워프가 아닌가. 딴에는 자기 종족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는 것인지, 종종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입에 밀어넣을 적마다 엘프와 순결의 신 그랑엘베르를 부르짖고 있는 모습은 하고 싶은 말마저도 잊게 만들어버릴 지경이었다.
캘리칼리가 말하는 인간화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은, 그런 지극히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만이 변화하지 않았다. 변화시키는 중이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50년 전부터 봐왔던 그들만이 그나마 융터르에게 있어 안도감을 일게 하였다.
"세상이 정말 많이 변하긴 했군요."
구조도 복잡한 거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에, 현기증이 일어나는 그가 한 음식점의 야외 테라스로 마련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 번씩은 자신들도 겪었던 반응이기에 두 친구들도 각각 자리를 잡아버리니 곧 눈치 빠른 하플링 종업원이 주문하겠냐며 다가왔다.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메뉴판이 쓱 들어오고 사라지기를 순식간이었고, 그 속도만큼이나 매우 재빠르게 음식이 나왔다. 전혀 주문하지도 않은, 어처구니없이 비싸고 맛도 없는 음식이.
"…진짜로 많이 변했군요."
"이런 얼치기 수법에 당하는 자네가 바보아닌가? 이런 강매에 가까운 건 자네가 한창 활동할 적에도 있었던 건데― 퉷."
"와우, 재료가, 차라리, 아깝습니다."
그렇게 식당에서 입맛만 버렸다며 세 사람이 각자 투덜거릴 동안, 떨떠름한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은 카르나르 융터르의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가 우지끈하고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날틀의 비행실험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좌우로 거의 10큐빗은 될 그 거대한 날개가 뭔가에 박살나며 사람들을 덮친 것이다.
반사적으로 그의 몸이 벌떡 일어나버렸지만 나아갈 수 없었다. 미처 테이블 위를 떠나지 못한 손을 호드가 붙잡고 있었고, 캘리칼리의 시선은 그에게 붙박이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도 않았다. 전에 없이 아주 냉정한 얼굴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표정에 걸맞는 말투가 쏘아졌다.
"또 도와주려고 하나?"
"어째서, 도우려고, 하십니까?" 호드 또한 표정이 캘리칼리와 다를 바 없었다.
"…다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한때 치료사 카르나르 융터르는 종종 질병과 까마귀의 게덴을 모시는 프리스트를 흉내내면서, 신성력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마력으로 사람들에게 치유를 하였다. 어쨌든 낫기는 했기에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러려니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지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신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하얀 가운을 입고 한 손으로 들기에 제법 큰 상자를 버거워하면서도 달려나가는 의사라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에게 호드가 힐난하듯 물었다.
"저들에게, 마법으로, 치유를, 하면, 이번엔, 무엇으로, 핑계, 삼을 겁니까?"
"…."
그들은 라자를 잃고 미쳐 날뛰었었으면서도 다시 인간들을 도우려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도움을 주었으면 갚는다는 것도 아닌 헌신이라는 감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융터르도 떨떠름한 얼굴로 도로 제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여행이 이어지면서 캘리칼리 데이비슨과 노스페라투 호드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행동 하나하나에 긴장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인파 사이에서 부모님을 잃고 우는 아이에게 마력으로 가느다란 실선을 뽑아내 따라가면 된다고 일러주는가 하면, 결국 다친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몸이 아직도 덜 풀렸다며 투덜거리는 캘리칼리가 애용하는 미스릴제 바스타드 소드를, 보통 짐승보다도 훨씬 흉포하고 덩치도 그만큼 거대한 곰의 목에서 뽑아내는 뒤로 융터르가 부상을 입은 사냥꾼들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긴 풀을 약사에게 보여주면 알아서 해줄 겁니다."
결국 그도 호드의 경고를 받아들인 모양이다. 사냥꾼들의 몸 상태를 보고서는 예전처럼 금방 일어나 걸을 정도로 완전히 치유하지 않고, 피가 났던 자리를 소독하고 그 위로 잘 짓이긴 약초를 덧대며 부목 정도나 하는 수준이었으니. 그의 이러한 처치에 할 말을 잃은 호드가 더는 지적을 하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인간에게 물든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말이었다. 그 옛날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 등의 문물을 구축하며 살아오던 종족들에게 오크를 비롯한 다양한 몬스터들이 맡아오던 그 위협적인 적의 역할을 이제는 짐승들이 맡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피넬과 헬카서스의 새로운 조화라고 하였지만 신의 부재가 제법 오래된 지금에 와선 그 표현마저도 부정당하며 그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현상 정도로 남아버린 마수라는 적들의 존재들.
그래서 이후로의 여행은 전투라기보다는 약간의 사냥과도 비슷한 느낌과 함께 진행되었다. 몸이 근질거리던 드래곤들에게는 그래도 긍정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옛날에는 모험가인 척 해보려고 해도 기세만 흘리면 알아서 벌벌 기었는데! 이 짐승들은 막무가내로 덤비는군!"
"차라리, 이렇게, 패는 맛이, 있으니, 낫습니다."
"정말 그걸로 좋은 겁니까…?"
가끔은 융터르마저도 활을 들고 싸워야 할 정도로, 마수들은 생각보다 넘쳐나고 있었다. 덕분에 그 어떤 때보다도 몸을 움직인다는 경험, 짐승보다도 누린내가 심해서 맛이라고는 없는 고기들을 억지로 요리해놓고 미각이 고통스러운 경험, 사람들을 구해주고 감사를 받는 경험 등이 차곡차곡 쌓일 무렵, 결국 여행을 떠난지 세 달이 조금 넘어 거의 100일이 되어가는 시점. 그들은 산 위를 올랐다.
"그 산을 오른다고요? 혹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러시는 겁니까?"
"음? 이야기? 우린 그냥 오르는 것 뿐인데."
쑥대밭이 된 개척마을이지만 다행히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이, 무사히 마수 퇴치가 끝나고 마을의 장로가 뜨악한 얼굴로 세 드래곤의 여행에 반문을 하였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나 노스페라투 호드는, 단순히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를 뿐이었기에 그 산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로가 말했다.
"그 산은 예로부터 하늘 바로 아래에 위치해있어서, 모든 영혼들이 모이는 산이라고 이름이 났습니다. 가슴 속에 회한이 뼈저리도록 사무친 자들이, 영혼에게 지혜를 구하려는 자들이 오르려고 무수히 시도하였지만 전부 실패하였습지요."
"왜, 실패, 했습니까?"
"일단 한없이, 너무 높으니까요. 겨우 살아돌아온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가혹할 정도로 춥고 또 가혹할 정도로 바람이 매섭다고 하더이다. 아무리 몸을 따뜻하게 하고 가더라도 가장 사정이 나은 이들은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야 했을 정도이며, 심하면 그 시신도 수습할 수 없습니다요."
그 노인의 말대로 산을 오르는 것은 하물며 생명력이 질기기로 소문난 그 오크가 도전한다한들 실패할 것이 분명해보였다. 융터르가 보호마법을 둘렀음에도 때때로 한기가 몸에 스며들 정도였고, 오를 수록 발디딜 곳도 거의 없는 상황. 차라리 날아서 가자고 두 드래곤이 융터르에게 은근 권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부르튼 손과 굳어버린 발로 아득바득 기어오르는데 겨우 성공하였다.
그렇게 오른 이 험한 산 꼭대기는, 이전에 융터르가 말했던대로 아무것도 없이 그저 만년설 밖에 없는 곳에 불과하였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 곳에 보석이든 무기든 남겨놓으려면 먼저 왔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이 꼭대기에 오른 것은 세 드래곤이 최초였으니. 저 멀리 북쪽 끝이나 남쪽 끝으로 가야 느낄 수 있다는, 뼈마디까지 시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제법 널따란 정상에서 발 밑에 드리운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그 아래를 보다 생각보다 의외라는 듯 말했다.
"장관이구만?"
"영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믿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혼들을 만나는 것은 아니었군요. 그래도… 뭐."
지난 3개월에 가까운 여행에서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제서야 두 친구들에게 고백하였다. 지난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라자를 만나 계약을 맺을 뻔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내용. 서서히 석양이 지는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태연해서, 두 드래곤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지, 융터르는 흰 김을 하늘을 향해 조용히 흘리며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한 밤이 오려면 멀었지만 저 하늘 위로 벌써부터 은하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들이란 저런 광경을 상상하며 이야기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가득한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발 밑으로는 평생을 걸치더라도 녹지 않을 눈이, 그 위로는 머리카락을 정신없을 정도로 나부끼게 만드는 바람이. 미약한 흰 김이 그 바람결에 피어오르기 무섭게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융터르가 다시 이야기를 하였다.
"더는 계약을 맺지 않을 겁니다."
"그거 잘 되었군!"
"오, 그러고보니, 아무르타트, 이야기를, 아십니까?"
노스페라투 호드가 가장 순수한 드래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어떤 드래곤들보다도 순수성을 지키고, 인간들에게 최후의 경고가 되기 위하여 머나먼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녀의 이야기. 그 의미를 알아차린 융터르의 눈빛이 서글프게 변했다. 호드와 캘리칼리는 나란히, 융터르가 등지고 있는 그 서쪽을 바라보며 마주보았다. 호쾌한 검사를 연기했던 블랙드래곤이 말했다.
"우리도 서쪽으로 갈까 하네. 자네도 같이 하지 않겠나? 아니, 같이 가면 좋겠군. 틀림없이 즐거울걸세."
"…."
"아, 이런." 말없는 그 침묵에 호드가 한탄을 내뱉었다.
"저는…, 역시 저는 남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미 전 그 순수성을 정말로, 많이 잃어버렸거든요."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래서 뭔가 생각해둔 바라도 있나?"
캘리칼리의 그런 질문에 융터르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충분한 줄 알았지만, 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한 종족에게 그것은 이제 회한으로 남아버려 그를 한없이 인간답게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생각해둔 바라. 그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블루 드래곤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떠오르며, 걱정과 안쓰러움이 섞인 얼굴의 두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저 또한 잊혀지려 합니다. 어디 깊은 산 속에 틀혀박혀서… 때때로 원래 몸으로 움직이는 것 정도만 잊지 않고…."
"하, 만수무강하시게." 예상했다는듯, 캘리칼리는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가끔, 편지, 보내겠습니다. 한 10년? 20년? 그 간격으로." 호드는 아직 걱정과 염려가 섞인 얼굴이었다.
"당신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아주 악담을 하시지 그러십니까."
피식 웃으면서 하는, 융터르의 그 말에 두 친구들도 저마다 껄껄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높은 산 위에 있는 만큼, 이미 석양이 그들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있을 무렵, 두 드래곤의 형상이 훌쩍 밤하늘 위로 드러나더니 곧 석양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의 그 어느 것보다도 매서운 바람결을 맞이하며 점이라고 불러주기조차도 미미할만큼 사라질 때까지, 융터르는 그저 말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지금까지, 여정을 같이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는 흐릿한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두 친구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똑똑히 보인, 옛 라자의 영혼에게 그는 제멋대로 중얼중얼거렸다. 어쩌면 자신이 여전히 헛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이미 안식을 찾았을 당신을 내 억지로 끌어온 것이 아닌가 미안하다는 그 말. 그리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없이 두려웠다는 그 말까지. 라자의 유령에게 융터르는 양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안아주는 모양을 해주었다.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할 적에 이런 식으로 하더군요. 나 또한 당신을 더는 볼 수 없을 터이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껴안듯 내민 팔을 위로, 마치 신에게 헌상하듯 손을 올린다. 영혼이 저 먼 하늘 위로 떠오르자, 이리저리 마구 뒤틀리며 불던 바람도 그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듯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렇게, 밤하늘의 별 사이로 사라지는 옛 추억을 블루 드래곤이 나지막한 말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제는 잊겠습니다. 당신도 나를 잊어주세요."
동쪽을 바라보는 그의 몸은 낭떠러지 앞에서도 전혀 멈추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훌쩍 그 아래로 뛰어내렸던 한 사람의 모습은 곧 짙은 푸른빛의 드래곤이 되어 아주 능숙하고 유려하게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익숙한 그 감각으로.
깊은 숲 속에서 마수들이 나왔다. 붉은 빛을 흘리며 더욱 포악하고 덩치도 거대한 이 짐승들은 보통의 무기로 찔러봐야 상처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을 아는 마을 사람들이 낯빛을 하얗게 물들인 채로 손에 쥔 조잡한 무기들을 더욱 단단히 쥘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누가 죽더라도, 단 한 명만이라도 살려서 마을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듯, 곰을 닮은 그 괴물같은 짐승이 몸을 번쩍 일으켜 앞발을 한번 후려칠 적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내장까지 갈갈이 찢겨 쓰러지는 사람들만 늘어났다.
"제, 제기랄!!"
"어째서 이런 시련을…!!"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작 서너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 목전으로 다가온 죽음 앞에 청년 하나가 결국 눈을 감고 그 죽음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 곧 결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바람을 찢는 맹렬한 소리가 들리며 곰을 닮은 괴물이 괴성을 지르고 쓰러졌다. 틀림없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무시무시한 발톱이 달린 앞발로 자신을 내려찍으려던 놈이, 제 아무리 잘 단련된 철검이라고 해도 소용없는 그 머리뼈에 화살이 깊이 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곧 바람을 찢는 또 다른 소리들이 연거푸 들리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괴물들이 쓰러졌다.
"뭐하십니까? 나무가 되기로 결정이라도 하셨습니까?"
청년들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허우적거리며 돌아보는 끝에는, 마치 지하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낮은 목소리의 중년이 막 롱보우를 내려놓고 있는 참이었다. 마수 여섯마리를 그렇게 화살 여섯 발로 완벽히 잡은 중년, 활을 든 것만 제외하면 차라리 학자 정도로나 보일 법한 그가 여전히 어리벙벙한 청년들을 향해 다가왔다.
"흠, 이거 서둘러야겠군요. 이 숲은 유독 밤이 빨리 오는 편이라."
그가 말하는 서두르라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청년들이 화들짝 놀라, 저마다 한때는 이웃들이었던 다른 장정들의 마지막 모습을 조심스럽게 다뤄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워프 둘, 오크 넷, 엘프 하나, 인간 셋. 처참했던 최후를 겨우 수습하기 위해 그나마 덜 끔찍한 모습으로 각각의 가족 앞에 내려놓은 생존자들은, 남은 이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자신들을 구해준 이 중년 남성을 영주에게 소개해주었다.
남성은 스스로를 카르나르 융터르라고 밝히며, 저 위의 산에서 나름대로 이런저런 연구를 하는 것으로 소일거리 삼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주는 마수를 화살 단 한 발로 제압하는 그 능력을 높이 사서 합당한 일원으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그는 거부하였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는거요? 여기가 신생 영지라 아직은 그리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곧 대륙에서 부유한 영지가 될 예정이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구해오겠소이다."
"아니오, 전 필요없습니다. 그저…."
"그저?" 영주의 반문에 카르나르 융터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종종 전서구 같은 것으로 신문 같은 것만 좀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세상이 요새는 너무 급변해서 뒤따라잡기가 참 힘들더군요."
이 황당한 요구에 영주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알겠다면서, 지금이라도 있는 신문들을 가능한 끌어모아 그에게 넘겨주자 남성이 눈을 빛내며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바로 읽으려 하였지만 역시 상황이 상황임을 아는 것인지 아쉬운 마음으로 품에 안고 이만 실례했다며 물러났다.
마력으로 통나무 따위를 요령좋게 잘라 번듯한 집을 지어놓은 솜씨를, 두 친구들이 보면 놀라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융터르가 문을 열었다. 이상할 정도로 집 안에 훈훈한 온기가 감돈다. 분명 사람들을 도우러 급히 나갈 때 불씨만 겨우 살려뒀다고 생각했는데. 벽난로 속 장작들이 본래 피어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과하게 큰 불을 내는 그 모습이 먼저 보이고―
"어이! 우리 기억나나?"
"이런, 또 기억 안나면, 우리, 난감해, 집니다."
주인도 아니건만, 멋대로 벽난로 겸 스토브 위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차를 여유롭게 홀짝이며 두 친구들이 태연한 얼굴로 그를 반기는 모습에 융터르가 황당한 마음이 반, 반가운 마음이 반이 되어 웃으며 말했다.
"편지를 보내신다더니 이런 방식의 편지도 다 있는겁니까?"
"전서구가 이곳까지 도통 날아가지를 못하더라고!"
"저희가, 날아도, 거의, 수 주는, 걸렸습니다. 비둘기가, 가능, 하겠습니까?"
"하…. 그 먼 곳까지 정말 어떻게 가신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 하는게 좋겠나?"
산 속이기에 밤이 일찍 그 어두운 베일을 조심스럽게 덮은 시각. 오래간만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이르고 그렇다고 금방이라고 하기에는 아득하게 멀었던 동안 세 친구들은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던 탓에, 그 장막이 태양에 불살라지도록 끊임없이 이어졌다.
'커미션 >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아래 음악소리가 들리다 (0) | 2023.03.05 |
---|---|
검고 깊은 물 아래에서 (0) | 2023.02.26 |
비명을 향하여 (0) | 2023.02.19 |
바람 위 나비 (0) | 2023.02.17 |
나쁜 놈 이야기 : the Bad man In to the Distortion World (0) | 202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