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AU 입니다.
Words : 10k
검게 보이지만 햇빛을 받으면 짙은 푸른빛 비늘이 보이는, 고개를 한참은 뒤로 넘겨야할 만큼 까마득한 거대한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아니, 비명을 지른다. 비늘 사이마다 박힌 자그마한 것들은 인간들이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그것의 비늘 사이사이마다 찌르고 박아넣은 병장기들이다. 감히 이 시대에 신 바로 아래에 자리한, 완전한 존재에게 마법조차 깃들지 못한 무기들이 유효한 공격에 성공한 것은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대단한 이유일지 모르지만.
라자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들이 라자를 죽였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라자를 통해 드래곤을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드래곤이 인간과 대화를 거부하지 않게 해주는 것일 뿐이라며 라자는 거부했고, 그래서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었다. 죽은 이의 몸을 감싸며 영혼의 절반이 사라진 그 상실감, 그 죽음을 부정하려 했던 짙은 푸른빛의 드래곤에게 그래서 냉병기가 달려왔고, 영혼의 반려가 남긴 유언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애도하는 그 비통한 마음에 예리한 날이 찔러들어왔다. 이 어리석은 자들은 드디어 인간이 승리하리라 믿었다. 그것이 오판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드래곤이 지금까지 울부짖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그저 지금까지 털끝 단 하나의 훼손도 일어나지 않게 몸으로 그 모든 공격들을 막아내며 라자의 육신을 지킴으로서 슬퍼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박힌 그 어떤 냉병기가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 그래서 병사들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시간은 그 자각에 비해 너무 일찍 와버렸다.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입이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는 대신 브레스를 뿜어냈다.
오히려 차갑게 보일 정도로 새파란 불꽃이 병사들은 물론, 그 뒤에서 지휘하던 장군까지도 단숨에 덮쳤다. 피와 살점은 물론 뼈마저도 순식간에 불살라져 사라진 현장.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저 울분에 차서 정교하게 뿜어낸 것이 아니었기에, 유피넬과 헬카서스 사이의 행운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일부 병사들이 자신의 잘못을 빌며 드래곤에게 자비를 구했다. 영혼의 일부를 잃어버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던 자에게서 나올 것이라 생각도 못한, 놀랍도록 이성적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들 머리 위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가 그래야 합니까?"
"드래곤이시여, 아량을 베풀어주소서…! 부디 당신께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소서…!"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들이 죽였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지요."
그 방법을 물어보려 하였던 병사들이 약간의 기대와 희망에 차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돌아온 것은 단 하나였다. 마법이다. 그 어떤 명검도 이보다 예리할 수 없다는 듯, 칼날과도 같은 얇은 것이 병사들의 몸에 얇고 깊게 저마다 마구잡이로 저미고 박혔다. 그러는 한편으로 짙은 푸른빛의 드래곤이 자신의 앞발을 아주 조심히 놀려 흙구덩이를 서있는 사람 하나가 쑥 들어갈 만큼 파내, 그 안으로 라자의 몸을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넣고는 흙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몸을 돌려 여전히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을 잠깐 바라본 뒤 한 쌍의 날개를 펼쳐 병사들이 소속해있던 왕국으로 날아가버렸다. 병사들은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인간들에게 물들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드래곤은,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안식을 주지 않았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그들의 몸이 풀썩 쓰러지자 순식간에 부패하고, 곧 시체가 되어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리하여 왕국이 멸망했다. 오만했던 왕은 차라리 끝까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우겼고, 그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그래서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했다.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동상부터, 온갖 건축물들의 미약한 흔적만이 흉측하게 남아, 한때는 이곳 또한 사람이 살던 곳이었음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그 폐허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그에게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이제 그만하게."
"당신들에게 이해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하십시오."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짙은 푸른빛의 드래곤보다도 더 덩치가 거대한, 붉은빛이 강렬한 드래곤과, 햇빛 아래에서도 뚜렷한 검은색의 드래곤이 다가왔다. 둘은 여전히 새파란 불꽃이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새어나오는, 방금 국가 하나를 완전히 멸망시킨 그의 눈이 더 없이 공허함을 알아차렸다.
만약 모험심과 담대함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였다면 두 드래곤이 하나를 상대하는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몸집으로 목을 물어뜯고, 마법을 날리며, 꼬리마저도 휘두르는 것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후대의 모험가들이 행여나 이곳에 한 왕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흔적들이 그래서 불타고, 으스러졌으며, 짓밟힌 채로 완전히 사라졌다.
하나는 둘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린채 울부짖던 그가 자신을 말리는 두 친구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몸에 상처가 얼마든 더 생기더라도 상관하지도 않은 채 덤비고 또 덤빈 끝에 쓰러지고 말았다.
―라는 꿈을, 깨고나면 기억하지도 못하는 채로 카르나르 융터르가 오늘로써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꾼다.
문을 누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오늘도 그리 좋은 꿈이라 할 수 없는 꿈에서 깬 카르나르 융터르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에서 온 미약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났다. 해가 떴냐고 한다면 엄밀히 말해서 그렇다고는 하겠지만, 아직도 어슴푸레한 새벽이다. 이제서야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그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네, 나갑니다."
잠에서 덜 깨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가 잠긴 채로 그가 말하며 동시에 문을 열자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한 장년의 남성이 파랗게 질려서는 부디 살려달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등에는 남성과 똑닮은 어린 여자아이가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숨을 가쁘게 쌕쌕거린 채 업혀있었다.
"뱀, 뱀에 물렸습니다. 독사였어요."
"이런."
숲지기가 단숨에 목을 쳐내고 남은, 독사의 표독스러운 인상을 확인한 치료사는 급히 등불을 밝히고 뱀독이 더는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아이의 몸을 조금 매만지며 그 상처를 확인했다. 급히 달려온 아버지의 헌신이 보답을 받았는지, 다행히도 도려내야한다던가 하는 잔혹한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급하게 비축된 약초들을 빻아 상처 부위에 덧대고 해독제를 마시게 하면서 그 효과가 빨리 돌도록 낮은 목소리로 주문 비슷한 것을 웅얼거릴 뿐이었다.
그 독이 퍼진 속도만큼 효과가 곧 돌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가도록 쌕쌕거리던 소리가 점차 편안해지고, 아이의 낯빛도 점차 불그스레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 모습에 숲지기는 그 나이대의 어른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안도감에 못 이겨 주저앉고는 살았다며 울먹거렸다. 아직은 피곤한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의 치료사가 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모은 약재들을 잡념 하나 없이 다시금 잘 빻아내어 한번씩 먹을 정도로 소분한 주머니를 그런 장년에게 내밀었다.
"독기운이 완전히 가시려면 아직 약을 좀 더 먹여야 하니, 이걸 하루에 한 번은 먹게 하십시오. …내일부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요!!"
"하…. 저는 제 방에서 다시 잘겁니다. 지금보다 아이 숨소리가 더 고르면 그때 가시면 되겠습니다. 그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깨워주십시오."
그리 말하는 치료사는 숲지기가 주섬주섬 은화 두어개와 동화 열 몇 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도 무시하고 본인이 말한대로 방에 들어가버렸다. 아무리 새벽녘에 피곤하다는 이유라고는 해도 명백히 예의라고는 없는 태도지만, 숲지기는 그것을 지적할 만큼 예절에 관해 엄격한 인물도 아니었고, 원체 저런 사람임을 알기에 그저 하나뿐인 딸내미가 정신을 차리고 제 아버지의 품에 쑥 안겨오는 것에 기뻐할 따름이다.
막상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렇게 누워있은 채로 들어올 때와 달리 그들이 조용히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고야 말았다. 자신의 솜씨에 감탄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모자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그는 이런 순간을 어쩌면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단단히 쳐둔 커튼 사이로 결국에는 햇빛이 스며들 때까지 그가 뜬 눈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며 주변이 점차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소음으로 제법 시끄러워질 때쯤, 딱히 이방인들이 올 이유가 없는 그런 작은 마을에 모험가가 왔다.
"엄마, 싸우는 아저씨들은 원래 저렇게 커?"
"에그머니나, 얘야 이런 건 보면 못 써요. 얼른 들어가자."
작은 마을이기에 오히려 더욱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과, 기껏 마을에 닥치는 위협이라고 해봐야 종종 밭을 망치러 오는 멧돼지 따위가 전부라는 이장의 말에도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머리가 서너개는 넘도록 덩치 큰 이 모험가는 괜찮다며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라고만 말했다.
"사람?"
"그렇지, 사람. 이 마을이 품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치료사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아―. 그 양반 말이구먼."
이장이 염소 같은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이 마을이 최근에서야 구성원으로 인정한 그 치료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딘가 늘 허한 얼굴에 덩치값도 못한다는 인상의 그.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대해주지만, 치료가 끝나고 멀쩡해지면 곧바로 관심을 끊어 도저히 호감을 살래야 살 수도 없었던 치료사를 수십년째 골칫거리로 생각하던 이장이 기꺼이 모험가에게 그를 소개시켜주었다.
마침 치료사의 거처 앞에서, 약초가 가득한 바구니를 어깨에 이고 돌아온 카르나르 융터르와 이장, 그리고 모험가가 만났다. 앞머리가 쉼표처럼 한 쪽 이마를 살짝 덮은 모양새의 덩치 큰 모험가가 영문을 몰라 눈이 갸름해진 치료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장에게 대뜸 눈이 휘둥그레할 만큼의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에서 몇 닢을 꺼내 건네주며 쾌활한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좋아! 되었네!"
"이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는 반사적으로 긴장해서 버릇처럼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카르나르 융터르 님, 자네가 필요하다고 이 마을까지 찾아와주신 분이시라오."
"저를요? …왜죠?" 그 의문에는 모험가가 여전히 즐겁다는 듯 말했다.
"내 모험에 자네가 필요하니까. 그럼! 이야기는 다 된 걸로 이해하고 이만 바쁘신 분 그만 붙잡도록 하지요, 어르신."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가 그보다는 작은 롱소드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거대한 그가 이장을 은근한 어조로 쫓아내버리는 것을, 융터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잠시. 그는 모험가가 제 덩치만큼이나 큰 손으로 치료사를 집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단 둘만이 있는 치료사의 집, 융터르는 불쑥 자신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이 이상한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집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이 남자의 천성이 뻔뻔하다 생각하며 넘어가더라도, 모험가의 정체만큼이나 신경이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 없습니까?"
"글쎄? 그나저나 여기서 천년만년 살 것은 아닐테지?"
그 뻔뻔한 테도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에 겨우 잠들었던 것이 깨서 그런 탓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치료사는 결국 본인 동의가 없는 여행길을 졸지에 준비하게 되었다. 여차하면 붕대로도 쓸 수있는 옷가지들, 부상에 잘 듣는 약초들,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를 돈 따위라던가 최신 약학서적, 그리고 약간의 식량들로 카르나르 융터르의 짐 또한 자신을 고용한 남자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단촐하게 마련되었다. 그 동안 그 집안을 억지로 밀고 들어온 뻔뻔함치고, 놀랍도록 그 안에 관심은 하나도 두지 않았다. 차라리 치료사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좋아, 준비 다 되었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집 안에 들어올 때처럼, 다시 치료사를 문 바깥으로 밀어낸 그는, 아슬아슬하게 머리에 닿는 천장이 신경에 제법 거슬렸던 것인지 과장된 태도로 기지개를 펴고나서 그 큼직한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악수하자는 신호에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의 손이 쑥 들어간다는 착각을 받으며 마주 잡았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 부르게. 엉뚱하게 부르지는 말고."
"카르나르 융터르입니다. …그나저나 제가 당신의 모험에 필요하다는 의미가―"
"나중가면 알게 될 걸세. 자, 그럼 출발해보실까?"
자신을 반강제로 이끄는 모험가, 캘리칼리 데이비슨에게 거의 끌려가듯 마을 입구를 나선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 태도에 다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 자신을 어딘가로 늘 끌고 가던 친구가 있었던 느낌이.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막 떠나가는 이 마을에서 안정적으로 약초를 캐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삶을 살기 전의 모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또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분명한 과거를 찾고 싶었지만, 자신이 아는 그 어떤 방법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어두컴컴한 무의식 저편에서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굳이 이 모든 것에 대한 힌트를 찾는다면 거의 두 달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 부분까지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캘리칼리라는 이 모험가가 조금 더 중요했다.
"앞으로의 여정이 험할 예정인겁니까?"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융터르는 성큼성큼 앞서가던 캘리칼리의 등 뒤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노련한 검사이자 모험가처럼 보이지만 상처 하나 없는 그가, 자신을 고용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느냐는 치료사의 질문을 듣고도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저 넘어갈 뿐, 고용주 치고는 이래저래 비밀이 많았다.
캘리칼리 데이비슨과의 여행은 놀랍게도 제법 즐거운 축에 속했다. 떠나온 마을에 모험가가 아주 안 오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가끔이지만 그들의 동행에 합류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캘리칼리는 확실히 자신에게 여러가지를 배려해주는 것이 확실히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치료사라는 사실을 알고 다가온 가난한 이들을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마음과 한시 바삐 길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도, 그는 그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자네가 원하는대로 하게라며 기꺼이 시간을 내주고는 하는 일이 잦았다.
그 뿐만인가. 아직 노숙에 익숙치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능한 좋은 여관에서 묵는 것에 돈을 아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융터르는 이 배려가 점차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식사를 할 적이면 더더욱 그러했는데, 자신이 말하지도 않은 취향을 어떻게든 알아내서는 "여기 이 식당이 그 생선요리를 기막히게 잘 한다더군!" 같은 소리를 하기 일쑤였고, 후식으로 가끔 커피가 나오는 경우에는 미처 말하기도 전에 먼저 몇 번 마셔보고 가장 입에 맞았던 블렌드를 먼저 말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이쿠, 이거 찾는 것 맞나?"
그렇게 말하며 불쑥 흙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약초를 얼떨결에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옷이 흙투성이가 된 그가 핀잔을 놓으면서 말했다.
"자네, 내가 너무 한 곳에 집중하면서 걷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응? 자네가 말 안 해줬었나?"
미리 말하지도 않은 자신의 버릇마저도 어떻게 아는 것인지 당황하는 나날이 이어진 끝에 결국 카르나르 융터르는 어느 날, 이런 알 수 없는 호의에 불안감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여관에서 그 귀한 케이크를 우걱우걱 먹던 캘리칼리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정말 누구십니까?"
"말했을 텐데,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니까?"
"단순한 검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긴장한 융터르가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제 버릇, 취향 이런 걸 너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날선 질문에 캘리칼리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으하하! 험한 일에 끌고 갈 예정인데, 이 귀하신 인력을 잘 먹고 잘 재워서 불만 없이 끌고가야지 않겠나! …미리 조사했네."
어쩐지 설득력이 부족하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치료사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귀한 인력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쓰는 모험가의 표현에 의구심을 표할 무렵, 그들은 이제 산을 다시 타고 오르다 습격을 마주했다. 차라리 도적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어느 미궁에서라도 뛰쳐나온 것인지 캘리칼리보다도 덩치가 더 큰 오우거가 무려 일곱이나 나타난 것이다. 이 상황을 마주한 융터르는 서둘러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애용하는 검을 바닥에 푹 꽂은 고용주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물이라도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그저 덩치가 큰 사람이었던 그 모습이 햇빛마저도 빨아들일 것 같은 새까만 드래곤이 되어있는 모습. 당황한 오우거 무리들이 도망치려 했지만, 그 블랙드래곤이 마법이라 불러 마땅한 것을 부리자 상황이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어쩐지 놀랐다기보다는 당황한 마음의 융터르가 고용주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드래곤…이셨습니까?"
"아― 이거, 웬만해서는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잖나."
어느 샌가 다시 덩치 큰 검사, 캘리칼리 데이비슨으로 변한 드래곤이 껄껄 웃는 모습을 보며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본래 라자가 없으면 말은 통해도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드래곤의 지금껏 여정을 떠올리자면, 이미 충분할 정도로 이해를 동반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처음으로 든 생각은 자신이 그의 라자가 아닐까 하는 것. 그러나 곧바로 그 가설을 휴지통에 쑤셔넣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의 라자였다면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어떤 연결점을 느낀다고 하지 않던가.
애석하게도 연결점을 느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드래곤일 적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그 기시감. 그리고 아주 흐릿하지만 지금의 데면데면한 것보다는 훨씬 친밀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멀리 떨어져서 연락이 끊어졌었던 옛 친구를 보는 감정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인 자신이 드래곤과 친구였을리도 없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그렇게 정답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로, 이 드래곤이 도대체 무슨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으며 동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해가 대략 여덟번은 뜨고 진 후, 아주 잠시동안은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한 적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징검다리를 굳이 폴짝 뛰어 건너려다 물에 흠뻑 빠진 그 모습에 본래 마을 구성원으로 있었을 적처럼 독설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은 놀랍게도 그 독설도 즐겁다는 듯 껄껄 웃어 넘기며 물에서 빠져나와 마법으로 다시 옷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대화를 넘어 독설도 즐겁게 받아들이는 드래곤이라니.
그리고 아홉번째 해가 뜨는 날, 평소와 달리 산맥을 넘지 않을 적부터 치료사는 어쩐지 자신의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이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는 융터르는 이것을 그저 답답하다는 표현하기엔 제법 거칠고 메마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 산 속이 낯에 익다는 생각을 하였다. 동시에 잃어버려선 안될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데에서 오는 슬픔, 그리고 실낱같은 분노마저도 느낄 쯤. 삭아빠진 해골 전사들이 그 앞을 막았다.
"당신들…."
카르나르 융터르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낯익지만 이미 거의 닳아서 아주 흐릿한 문장이 갑옷 위로 돋을새김 되어있는, 그런 해골들이 쥔 녹슨 칼 끝에는 불과 며칠 전에도 싸웠는지 빛바랜 핏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있었지만 그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엎드리고 있을 뿐. 말을 할 수 없는 언데드들의 그 행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마치 "제발"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어울릴 법하였다.
"아는 놈들이었나?" 곁에서 캘리칼리가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아뇨, 모릅니다. 전. 저는 이 사람들을 모릅니다." 융터르는 악몽에서 시달리고 나면 오던 두통이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 근방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퇴치가 정답이겠구만."
그 말에 융터르에게 납작 엎드렸던 해골들이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감히 드래곤에게 덤볐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 모습은 덤볐다기보다는 자신들을 완전히 죽여달라는 행동처럼 보이고 있었다. 캘리칼리가 평소 태도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해골들을 무참히 박살내기를 거듭했지만,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인지 산산조각나야 마땅할 뼈다귀들이 바들바들 떨리더니 도로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융터르는 점차 심해지는 두통과 함께 보고 있었다. 그저 달그락거리는 언데드들이 낼 수 있을리가 없는,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자비를! 부디 안식을! 애원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앳된 병사들의 얼굴이 다 삭아버린 해골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융터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거듭 부정하고 있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 속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기억들이 현실이라며 윽박지르는 것도 한없이 거부하고 있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의 드래곤에게 덤벼오는 언데드들은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저 너머의 아무것도 없는 동굴. 아니, 어떻게 저 동굴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 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왜 저 해골들이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확신 하고 있는 것일까.
해골들이 도대체 몇 번을 쓰러졌는지 세는 것도 포기할 무렵, 카르나르 융터르가 입을 열었다.
"그만."
그 말에 어떤 힘이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드래곤이나 그에게 덤비던 해골들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었던 무기를 내렸다. 그 움직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그들을 넘어 아주 천천히 동굴에 다가갔다. 빛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지만, 그는 이제 이 불쾌한 익숙함으로 가득찬 공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가장 한가운데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주 유심히 본다면, 그 한 발자국 앞의 흙바닥만 색이 아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나르 융터르라 스스로 믿어왔던 자는 굳이 그 관찰력을 총동원하지 않더라도 이 공간, 이 흙바닥의 미세한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안식을 구걸하는 해골들이 누구였는지를 점차 떠올릴 수 있었다. 아직은 흐릿한 수준이었지만. 전과 같이 똑같은, 그런 낮은 음였지만 확연히 다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
"이대로 인간이라 믿으며 평생을 살게 해주실 것을, 어째서."
"거의 150년이 넘게 흘렀거든.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었네."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그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다. 흙더미 아래로 자신의 라자가 누워있는 그 자리를, 융터르는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고 다시 어루만지면서도 잘못해서 그 안식을 방해해버릴까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때와 다르게 인간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 뒤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해골들이 다시금 넙죽 절을 올리는 소리다. 그 행동이 이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은 스스로를 카르나르 융터르라는 한 인간이라 믿고 싶었던 드래곤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용서하겠습니다."
다시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는 어떤 기척도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영혼의 일부가 묻혀있는 그 자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던 그의 손이 점차 움직이지 않을 무렵에야, 뒤를 돌아본 그는 이제 녹슨 무기와 방어구들만 남아있는 것을 아직은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이제는 종종 그가 보이곤 하였던 그 길쭉한 동공으로.
"당신이 말한 모험이 이걸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랬네. 자아찾기라고 해두자고."
"쓸데없는 배려를…."
"그나저나 정말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건가? 자네가 누구인지 알면 슬슬 나도 기억나겠거니 싶었는데."
그런 블랙 드래곤의 질문에 아직은 머리 속에 안개가 완전히 개지는 못한 융터르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마력이 흐트러지고 있는지 그 위로 짙은 푸른색 비늘이 올라왔다 사라지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손을 들어올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째서 저 자와 만나고 난 뒤부터 자꾸 손이 멋대로 올라가는 것인지 스스로가 의아해하는 모습, 캘리칼리는 그래, 그게 좀 충격적이었어야 말이지라는 말을 피식거리며 송곳니가 보이는 웃음과 함께 하였다.
목덜미가 아팠다.
매만지던 비늘투성이의 손을 떼어보니 피가 살짝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았기에, 드래곤은 치료사일 적과 달리 능숙하게 마력을 이용해서 허공에 물을 거울처럼 불러내었다. 그렇게 보이는 목덜미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가도 흐릿하게 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인상적인 송곳니 자국이 저 자의 것과 닮아있었다.
"당신이 날, 물었군요. 날 말리기 위해서."
"…." 그 침묵을 무시하고 아득한 기억이 떠오르던 융터르가 중얼거렸다.
"그 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화가 나 있었으니까. 내 상실감을 부정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아직도 잊지 못한 모양인데. 그깟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은 것 봐선."
"돌아가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날 내버려두세요. 이대로 다시 잊고 그 작고 하찮은 마을의 치료사로 살아갈겁니다."
"그건 허락할 수 없네. 이제서야 옛 친구를 되찾을 기회를 나도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거든."
간절한 어조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끄집어낸 말. 완전히 과거를 되찾지는 못한 카르나르 융터르가 그 중 단어에 미간을 좁혔다. 다시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던 그가 인간일 적의 습관으로 가방에서 통증을 줄여주는 약초를 손에 쥐고 있으려 했지만, 이어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냉정하게 약초를 낚아채 흙바닥 위로 던지며 못쓰게 만들고는 버럭 외쳤다.
"자네 그 꼴을 봐! 인간으로 50년이나 지냈는데도 아직도 노인의 얼굴을 할 수 없잖나! 천천히 나이든 사람처럼 될 수도 없을 만큼 과거에 얽매여있는 자네가 어떻게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간단 말인가!"
"50년…? 제가, 50년을 그 마을에서? 아니야. 아냐, 난. 난 그 마을에 겨우 적응했습니다. 3년? 5년? …10년이 되어서?"
중얼거리며 경련이 일어난 듯 고개를 젓던 그는 자신의 기억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년인 숲지기는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마을 이장이 청년일 적에 그 아내의 산욕열을 자신이 치료해주었다. 작은 마을에도 지독한 전염병이 돈 것은 30년도 전에 일이다. 어째서 몰랐을까. 사람들은 그에게 단순히 치료사라는 이유로 존댓말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 마을 누구보다도 가장 나이가 많았던 존재였기에.
자신이 만들어낸 모순 앞에서 좌절한 융터르를 안쓰럽게 보던 캘리칼리가 허공에 붉은색 작은 폭죽과도 같은 마법을 쓰자, 곧 숲 속에서 저벅거리며 근육이 도드라진 다른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카르나르 융터르는 자신에게 기억나지 않느냐며 이야기하는 친구와 저 자가 누구인지 드디어 떠올릴 수 있었다. 한참을 진땀이라도 뺐었던 것인지, 붉은색 옷이 강렬한 그가 대뜸 말했다.
"레어에서, 사라진, 뒤로, 150년은, 넘게, 흘렀습니다."
"그 모습은, 스스로를 노스페라투 호드라고 지칭 할 때의 모습 아닙니까."
카르나르 융터르는 노스페라투 호드를, 그리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으로 셋이서 여행을 떠날 적이 떠오른다. 다소 돈은 밝히지만 정의로운 모험가 노릇을 했던 그 시절. 그리고 아주 우연히 융터르는 자신의 라자를 만났던 그 시절이. 그로부터 150년은 넘게 흘렀다는 말에, 이제는 비늘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방랑 치료사 역할을 즐겨했던 그가 마른 세수를 했다. 그 머리 위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말해주었다.
"자네…, 그 때 이후로 충격에 빠진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더군. 레어까지 옮기고 나서 이 친구랑 한 번씩 언제 깨려나 살펴보고 가길 거듭했었지. 그 간격이 조금 느슨해졌을 때,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네."
"그 뒤로, 계속, 찾았습니다."
"여기서 인간 걸음으로 거의 열 여드레는 걸어야 나오는 한적한 마을에서 치료사로 있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나?"
"거기서도, 치료사, 했었습니까?" 호드 마저도 그 황당한 행동에 어처구니 없었는지 헛웃음을 내고 말았다.
그 동안 자신을 찾는다고 온갖 고생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캘리칼리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아직은 스스로를 블루 드래곤이라 생각하기보다는 카르나르 융터르라는 존재로 생각하는 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라자의 조촐한 무덤을 다시 도로 보았다. 적어도 150년이 지났다면, 그만큼 인간이 오래 살 일도 없으니 이제는 완전히 놓아주어야 하리라. 그의 귓가에 아주 아득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바람결 사이로 속삭였다. 그 말을, 아직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친구에게 말해주었다.
"이제 충분합니다."
여전히 괜찮은지 물어보는 그들에게 융터르는 지금까지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약초가 가득한 바구니를, 라자의 무덤 앞에 내려놓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완전한 존재라 한들, 150년은 망각을 배우기에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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