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캘리칼리 데이비슨
어디 한 번 두고보라지. 그런 각오로 펼친 책은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자세히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사온 것이지만, 평소 책을 좀 멀리했어야 했었다. 분명 낱말 하나하나 떼어다 놓고 보면 잘 들어오건만 그것이 조금 길게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순식간에 검은 것이 글자고 흰 것이 종이구나―정도로, 자신의 이해력이 순식간에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양 표지가 하늘을 바라보도록 쫙 펼쳐버린 채 테이블 위에 냅다 얹어두고 말았다.
표지를 힐끔 바라보던 그가 다시 책갈피 삼아 엎어두었던 그 자리부터 도로 읽기 위해 펴들었지만, 앞으로 읽을 부분은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그 사실을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던 그가 투덜거렸다.
"으―아, 그 때 왜 내가 도발에 걸려서는…!"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꿰여진 것이 분명했다. 발단은 아주 간단했다. 무엇이 트리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식자랑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저마다 자신이 아는 것을 한껏 자랑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 합방이 없어 심심했던 사람들이 퀴즈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었던 모양이건만. 직감적인 종류의 퀴즈는 곧잘 맞추곤 하던 캘리칼리도 상식이나 지식이 바탕이 되는 종류는 연거푸 쓴 맛을 봐야했다. 빈 말로도 좋다고는 못할 성적을 두고서 고로시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고멤이 아니다.
"Ah뉘, 캘리칼리 님, 점수, 실화, 입니Gga? Unreal."
"하…. 이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신겁니까?"
깊이는 내버려두더라도 아는 것 자체는 많은 카르나르 융터르야 그렇다 치자, 조금 아슬아슬한 차이로 더 높은 점수를 얻은 노스페라투 호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캘리칼리의 자존심에 지대한 상처를 냈다. 그래서 나중에 이런 일이 다시 오게 된다면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하루에 한 권 씩 책을 읽기로 했건만.
고멤 엔터테인먼트 건물의 그 큼직한 메인 홀에 드리우는 햇빛이 너무나 따뜻하다. 그 널따란 소파를 한껏 독차지한 채 눕고 뒹굴며 다시 활자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글자보다도 먼저 그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졸음이다. 점차 무거워지는 것은 눈꺼풀 뿐만이 아니었다. 책도 400페이지가 넘는 만큼 들어 올릴 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내려놓아도 되지 않겠는가. 나른한 오후의 적막한 건물 안에는 곧 그가 잠에 빠지면서 고르게 쉬는 숨소리만 고요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2. (롤러스케이트)🥤🩹 / 비밀소녀
※롤러스케이트는 버그 땜에 안 보여요....
바퀴들이 아크릴재 바닥을 세차게 긋고는 잠시 조용해지는가 세차게 내리 찍는 소리가, 그리고 그로 인해 얻는 쾌감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내지르는 환호성이 시끄러운 인라인 스케이트장에는 조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철퍼덕'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그 소음 발생의 주인공은 주황빛이 맴도는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은 채 이번에는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잽싸게 일어난 다음 한 켠에 앉아 곰곰히 생각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다보니 이제는 설령 엉덩방아를 찧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나마 덜 아픈 것인지를 아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다행히 초보자의 준비성을 철저히 발휘한 비밀소녀의 양 팔꿈치와 무릎에는 안전 보호대가, 머리에는 헬멧이 착실히 씌워진 상태였기에 가장 크게 다친 것이라고 해봐야 피부가 조금 쓸렸다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심 승부욕이 강한 비밀소녀로서는 이것도 살짝 분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도 더 어려운 코스에서도 멋지게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심지어 확실히 어린 친구들 중에서는 보호장구 이런 것 하나 없이도 멋지게 장애물을 타고 이쪽 저쪽으로 넘나드는데!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더라?
어쩌면 뢴트게늄 님이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히키킹 님이 그 운동 솜씨를 뽐내느라 그랬을 수도 있고.
혹여나 풍신 님이 바람을 타고 다닌다는 말을 한데서 자극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오기의 결과는 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 그 발단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금 그녀는 매우 속이 들끓는다는 점이 아주 중요했다. 한 번 자극을 받았는데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달래가며 일어나보니 불어오는 바람에 살갗이 따금한 느낌이 들어 그 자리를 비밀소녀가 내려다 보았다. 보호장구가 닿지 않는 정강이에 피가 살짝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으으… 너무 무리했나아…."
혼잣말이 절로 나오던 그녀는, 적어도 평지만큼은 익숙하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매점으로 가서 시원한 탄산음료와 접착 밴드를 샀다. 약간의 쓰라림을 참은 채 밴드를 붙이고 나니 그래도 좀 나은 듯 했다. 그리고 시원한 캔에서는 캔을 따기 무섭게 탄산이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밀소녀가 참지 못하고 한 모금 쭉 들이켜 그 독특하고 짜릿한 단맛이 주는 쾌감은 방금 전까지의 불편한 몸과 마음에 작게나마 위로를 주었다.
"으음―. 이거만 마시구, 다시 한 번 더."
방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홀짝거리면서도 그녀의 눈은 여전히 코스를 이용해 하늘을 잠깐이나마 부유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신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3. 👑🔪⏳ / 캘리칼리 데이비슨
단순한 모래 무덤인 줄 알았건만, 입이 쩍 벌어질만큼 거대한 고대 왕가의 유적이었다. 이 기분 좋은 반전은 곧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등골이 서늘한 것으로는 몇 번이고 모자를 위험한 함정들이 주는 긴장감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람 목덜미 높이 정도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칼날을 애써 피한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이 악의 넘치는 함정들에 치를 떨면서도 오히려 오기를 느꼈다. 이렇게 꽁꽁 감출수록 돌아오는 결과가 값지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기에.
"허? 이게 뭐야, 단검?"
애써 끝까지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공간은 생각보다 작다. 그리고 이 수많은 함정들을 겨우 피해 온 댓가치고는 굉장히 초라했다. 노력의 댓가치고는 너무 허무하게도 손에 쥔 단검은, 그 손잡이 끝에 이상한 모래시계같은 것이 달려있다는 점 빼면 오히려 낡아빠졌기에 이 것 또한 함정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도 들기에 이르었다. 하지만 이 방을 꼼꼼하게 조사해본 결과, 이 개고생의 종착역은 틀림없이 이 방이었고 그것은 곧 지금 손에 쥔 이 단검이 말하자면 최종보상이라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낡아빠진 단검이 어떻게 최종보상인가?
실망에 찬 눈을 지울 수 없는 채로 그는 방을 빠져나오던 그가 저도 모르게 "어어어―!!" 하고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그 방을 빠져나오려고 발 하나가 삐죽 나선 순간부터, 불길하게도 낙석이 슬슬 떨어지는가 싶더니 아예 몸 전체가 삐져나오려고 하자 그가 내딛는 곳에도 균열이 심하게 나면서 저 밑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발 밑으로는 보기에도 묵직한 돌덩어리들이 떨어지는대 소리라고는 전혀 들리지도 않았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유적은 점차 붕괴되는 가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고, 그 큰 키를 이용해 겅중겅중 뛰던 그 조차도 결국 고작 수 초 차이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어어!!"
반사적으로 내민 손에는 이 개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인 단검이 들려있었고, 바람결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끝에 달린 시계가 정확히 반바퀴를 돌았다. 눈을 찌르는 환한 빛 사이로 캘리칼리를 중심으로 이 일대의 모든 시간들이 갑자기 역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정신을 차리자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으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감탄한 그 목소리는 무너져가는 소리에 묻혀버렸고 그는 아직 목숨을 완전히 부지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 샌가 그 입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4. 🎸🌙🎉 / 뢴트게늄
무더운 여름 저녁,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버스킹 축제는 그렇찮아도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음악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골목이 허락하는 한 온갖 포장마차들이 들뜬 모든 이들의 위장을 간질이는 그런 곳이다. 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취향에 맞는 무대를 찾아 삼삼오오 흩어지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아직 무대 순서가 되지 않아 긴장한 김피탕&짬뽕도 섞여있었다. 아니 그런 것치고는 유독 긴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부득이하게 이 축제에 불참한 비챤의 몫도 대신하기로 한 뢴트게늄이었다.
"오오―니! 뢴트게늄 님은 긴장 안 하세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전 지금 긴장했는데… 예?"
베이스와 코러스를 하기로 한 부정형인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드럼을 맡은 김치만두번영택사스가마저도 긴장감에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뢴트게늄은 전혀 아니었다. 태연하게 포장마차에서 꼬치구이의 흔적으로 보이는 길다란 대나무 꼬챙이 하나를 이쑤시개 삼고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버스킹 무대에 오를 사람으로 보이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의 핀잔을 듣고서도 그 분홍색 머리를 한껏 뒤로 넘긴 뢴트게늄은 오히려 손목에 걸친 비닐봉투 따위를 부스럭거리더니 자신에게 한 소리 씩 하는 두 사람에게 아직도 김이 가시지 않아 뜨끈한 소시지 따위를 쑥 내밀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분명히 제 몫으로 보이는, 더 큼직하고 더 맛있어보이는 것을 한 입 우적 베어 문 그가 말했다.
"니들이야 말로 뭐하냐?"
"오오니?!"
"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뢴트게늄 님?"
"축제잖냐, 즐겨야지!"
황당해하는 두 사람에게 뢴트게늄은 자신의 이론을 설파했다. 그 답게 워낙 장황했지만 겨우 정리한 바로는, 이 자리가 탈락자를 가리는 일종의 경연이었다면 당연히 긴장해야했겠지만 그런 것 하나 없이 그저 실력을 뽐내는 자리라면 평소 연습하던대로 마음 편하게 해도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 말에 묘한 박력을 느끼던 두 사람도 정신을 차리니 어느 새 들고 있던 소시지 꼬치를 다 먹은 상황이었고, 그 기름기를 닦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자신들의 순서가 되어있었다.
"내가 말했지! 즐기라니까!"
뢴트게늄의 화려한 기타 솔로에 맞춰 저 멀리 혼자 있는 달의 곁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5. 🃏🖋❄️ / 부정형인간
"자, 이제 네 차례."
느그고에 재학 중인 독고혜지는 맞은 편의 남학생에게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뒷면만 보이는 트럼프 카드 두 장을 내밀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숫자가 맞는 카드가 한 쌍을 이루며 책상 위로 두서없이 늘어져있는 이것은 도둑잡기다. 예전에도 한 번 응해줬다가 졌고, 그 벌칙으로 안경 코기둥 사이로 자물쇠가 채워졌던 기억이 있는 부정형인간은 떨떠름한 얼굴로 둘 중 어떤 것을 뽑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조커카드를 집을 확률은 ½.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마치 얼음장 같다.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부정형인간은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그녀와 엮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교내 카스트 제도의 중하위권에 속하는 인물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성적이 조금 우수한 편이라는 것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요소겠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그의 부정적이고 소심한 태도는 일진들의 재밌는 장난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독고혜지가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무엇을 골라야 벌칙이랍시고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지 고심하는 그에게, 분홍색 구르프가 인상적인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 결국 짜증을 터트렸다.
"야, 빨리 안 골라?"
"아, 아니 왜 짜증 내고 그래…."
더는 고민할 시간도 없다. 카드 위로 손을 뻗으며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부정형인간이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음을 느끼며 왼쪽, 그러니까 독고혜지의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카드를 골라 그 내용을 긴장한 얼굴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자기 손에 들려있는 남은 카드와 짝을 맞춰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이겼다.
"어? 뭐야, 내가 졌어? 와―씨. 개짜증나네."
실수했다. 이번에는 무슨 핑계로 괴롭힐지,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 그는 언짢은 티를 감추지 않는 그녀의 눈치를 슬금슬금 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로 갑자기 훅 뛰어오른 긴장감에 그는 자신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침삼키는 소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귓전을 크게 울렸고, 그래서 그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조금 늦게 확인했다. 잘해봐야 손바닥을 조금 넘기는 길쭉한 상자가 눈 앞으로 쑥 다가온 것을.
"생일이잖아. 우씨, 원래는 다르게 줄려고 했는데."
한 눈에 보아도 비싸다고 소문난 만년필이 그 상자 안에서 나오는 것을, 이제 부정형인간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생일이라고 이걸 줄 이유도 없을텐데.
6. 👻🦊🍃 / 단답벌레
같은 숲이어도 밤의 그것은 으슥하다못해 어쩐지 서늘한 기분이 물씬 강하게 풍겼지만, 단답벌레는 어쩔 수 없었다. 낮에 오를 적에 중요한 것을 두고 하산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탓이다. 바람결에 나뭇잎 따위가 이미 바래져버린 낙엽 위로 떨어지는 것이 선명히 들리는 이 심야에 도로 올라가야 한다니. 당장 급한 일만 아니었으면 내일 다시 이 험한 산을 올라도 될 것을 그는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투덜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손전등으로 어디가 길인지 비추느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릴 적이면 저 앞에서 사람인 것이 분명한 형체가 '이쪽이야' 라고 하는 듯 길안내를 해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정말로 길이 분명하였기에 취미가 야간산행이라도 되는 것인가 생각되는 그 등산객은 친절하게도 어느 정도까지 가면 멈추고, 또 뒤쳐지겠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올라가던 그에게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기 더 가면 낭떠러지인데…."
"예?"
갑작스럽게 귓가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단답벌레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전등으로 휙휙 비쳐본 사방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지만 분명.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로 인해 그의 마음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의심이 싹 틀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저 앞에서 걷는 사람을 믿을 수는 있는걸까? 만약 저 사람이 걷는 길을 무작정 믿고 따라갔다가 이 한밤중의 산 속에서 무슨 봉변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식은땀이 저절로 목 뒤를 타고 흐르며 그의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
산골짜기 어딘가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답벌레의 근처에서 소름이 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이라면 도저히 낼 수도 없는 그런 끔찍한 소리가.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뻗은 손전등의 끝에는 어쩐지 새까만 털이 인상적인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홱홱 좌우로 휘두르고 있었다. 말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에 홀리기나 하고 라고 할 듯. 그리고.
"따라와?"
어쩐지 여우의 고개가 살짝 끄덕인 것 같아, 그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그리하여 이 위험천만한 야간 산행의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여우를 따라갔고 그래서 무사히 목적지로 도로 올라가 잊은 물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여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사건만 떠올리면 그는 어쩐지 간이라도 하나 구해서 다시 산을 올라가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 / 해루석
낙엽이 짓밟히고 으깨지면서, 잘 마른 나뭇잎 특유의 가을향이 편자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위로 생화가 똑같이 짓밟힘으로서 색다른 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갈색의 덩치 큰 말이 투레질하며 질주하는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면, 그리고 후각도 예민하다면 아주 미약하게 흐르는 눈물의 그것도. 여느 여성 부럽지 않은, 검은색의 긴 머리가 공기를 헤엄치듯 목적지도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무채색 투성이의 옷이기에 오히려 더 인상깊은, 해루석은 그렇게 한참 말을 타고 달리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앞에서 멈췄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순간 불타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한가을의 숲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관심이 없는 그는 질주한 끝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내렸다. 장시간 질주한 덕분에 목이 마른 것이 분명한 애마는 곧장 주둥이를 물에 박듯 잘박거리며 갈증을 해소하였지만, 해루석은 그러지 못했다. 맞바람에 마른 눈물자국이, 여기까지 달려온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대체 왜."
멋들어진 미성은 억울하다는, 마음 속의 불꽃을 제대로 토해내지도 못한 채 그저 삼킬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그대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 분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억울함. 동글동글한 자갈과 그 사이를 헤엄치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전부 보이는 그 맑은 물 너머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했던가? 그리고 오늘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러나 자신은 간택받지 못하였다. 이번만은. 이번 순간만. 그 자랑하는 긴 머리카락이 온통 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루석은 대뜸 그 머리를 시냇물에 밀어넣었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오늘이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그 분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오늘이 아니여도, 앞으로도 남아있다. 그러니 그 때를 위하여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다시 달리면 될 일이다.
8. 🎸🩹📷 / 부정형인간
느그고 재학 중인 부정형인간은 오늘도 음악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저녁시간 때 급식도 마다하고 음악실로 향했다. 오늘의 저녁도 매점에서 미리 사둔 빵과 우유다. 비닐이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 사이로 늘 먹던 것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고, 그마저도 사실 시간이 아까웠던 그가 허겁지겁 먹고 치운 자리에는 늘 베이스가 함께했다. 부모님께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받은 것 치고는 상당히 저렴한 축에 속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에 묻은 크림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걱정되어 연거푸 티슈로 닦아내고 그는 재빠르게 네 줄짜리 현을 아무렇게나 퉁겨보았다. 낮고 굵은 울음이 음악실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둥―하고 울리는 그 독특한 음은 어떤 악기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순식간에 그는 예전부터 연습해왔던 곡 하나를 곧바로 연주하였다고, 그 순간 자신은 낡은 음악실이 아닌 멋들어진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무대 아래로 환호하며 손을 높이 치켜 든 사람들이 부정형인간이라는 이름을 외친다. 그가 속한 밴드에서도 베이스인 그에게 극찬하는, 그런 상상을. 그렇게 상상 속의 무대와 상상 속의 관객에게 마주 환호하며 화려한 베이스 솔로를 하려던 그 순간―찰칵!
"어? 어―으억!"
틀림없이 문가에서 들려온 촬영소리에 당황한 나머지 연주하며 즉흥적으로 몸을 흔들던 그가 중심을 잃고 자빠져버렸다. 게다가 운이 지독하게도 나빠서, 그의 오른손이 책상 따위에라도 쓸렸는지 손등에 핏방울이 송골하게 맺혀있기까지. 아직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노출된데다, 다치기까지. 부정형 인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작에 문을 잠글 것을 후회하면서.
"아니! 괜찮아요?!"
"…예?"
자신을 몰래 찍은 것이 분명한 상대방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분홍머리가 전교에서 인상깊을 수 밖에 없는 상대방이 미안하다면서 다친 손에 황급히…라기보다는 거의 오두방정을 떨며 반창고 따위를 붙여준 그 날. 고교밴드에는 새로운 파란이 불 아주 사소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9. 📚🛋💻 / 융터르
소파가 침대는 아니지만 어쨌든 몸을 기대며 책 정도 보기에는 참 좋은 가구가 아닐 수 없다, 라고 카르나르 융터르는 생각한다. 그 아래에는 소파의 앉는 부분까지 거의 닿을 정도로, 두껍기도 하고 양도 꽤 되는 책들이 쌓여있는 참이다. 따로 일정이 없는 그가 이렇게 독서 삼매경이 된 이유는 예전에 한번 웹소설에 깊이 몰두했다가 본격적인 활자를 오히려 못 읽게 되는 바람에, 말하자면 활자 재활 운동과 같은 그런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막무가내로 빌린 이런저런 책들은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그저 돌아다니다가 충동적으로 이것저것 집어온 것들이었기에 어떤 것은 정말로 흥미가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의 연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을 각각 쌓아둔 높이가 드디어 역전되었을 무렵, 그는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이거 시리즈 물이었나?"
자세히 알아보니 책 디자인도 다르고 출판사도 다르기에 같은 작가가 별개로 책을 내놓은 줄 알았건만, 워낙 인기가 좋았던 명작이었던 탓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판을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새로 출판한 버전의 번역이 예전 것과 비교하면 어딘가 많이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소파 옆의 테이블에 얌전히 있는 노트북을 열어서 검색을 해보니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리뷰글을 보면 일제히 번역의 품질을 비난하는 것 투성이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자신의 것과 다르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융터르 또한 이런 의견에 적극 동의하는 바로서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미 단종된 구판을 구할 방법이었다.
"하… 이걸, 어디서 구한다…."
뒤늦게 입문한 죄로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 구판 번역본을 찾는 사람들은 그 외에도 매우 많았고 그마저도 웃돈을 불러도 쉽게 입수하지 못하는 희귀본이라는 사실은 그를 곧 절망감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예로부터 늦게 입문한 자는 그것만으로도 죄라고 하지 않던가.
10.⚽💦🧊 / 왁파고
버축대 이후로 고멤들은 제법 뿔이 난 상황이었다. 물론 감독과 매니저, 선수로 참여한 고멤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고멤들이 더 많은 시점. 그래서 그들은 무려 우왁굳에게 건의랄지, 항의를 한 결과 직접 축구를 하고 있었지만, 필드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왁파고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문자 그대로 탈인간적 스펙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힘이 강력하다고 알려진 풍신이나, 호드는 나름대로 조절이 가능하다지만, 왁파고는 아예 태생부터거 그렇게 태어난(?) 죄가 있어 몸싸움을 하려고 해도 맞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의외로 큰 문제였다.
그래서 왁파고는 혼자 이쪽 저쪽 오가며 아주 공평하게 응원이나 하고 있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 고저 차이가 없는 음색으로 어떤 방식으로 응원을 하든 돌아오는 것은 기운 빠진다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심판을 보던 우왁굳조차도 그 테헹 소리가 함께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응원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해버렸다.
"아."
"왁파고님! 괜찮으십니까?"
"아, 하쿠님.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유니폼을 대신 해서 조끼를 입은 채로 하쿠가 그야말로 방싯 웃으면서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주었다. 선수 교대입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던 왁파고가 고개를 한번 기울이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직접 뛴 탓인지 저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멤버들이 경기장 한 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있었다. 하쿠도 체력 보존을 위해 다른 멤버랑 교대를 했지만, 하필 몸을 쓰는 것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없는 방향으로 오히려 신뢰도가 넘치는 융터르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선수교체를 요청하는 소리에 하쿠는 쪼르르 달려가고 그런 하쿠를 바라보던 그가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응원법을 찾아냈다.
"여러분, 시원한 음료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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