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지금까지 쓴 것들을 다시 읽어봤는데, 융터르님이 다크히어로다! 이랬으면서 뭔가 어필이 잘 안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인 즉슨,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써보겠다, 이거지요.
*또한 히어로로서 압도적인 호드님에 대비해 뭔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싶은 두 아저씨들에게 버프를 조금... 근데 이게 버프가 맞나..?
공장에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라는 형사를 만나고 온 뒤, 카르나르 융터르는 최근 이상한 현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단순하게 말하자고 한다면 환청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환청이 아니라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는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변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심할 때는 주파수가 엉망진창으로 맞춰진 라디오를 듣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있었고 반대로 아주 깔끔하고 선명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갓 내린 눈을 뽀드득 밟으며 산책을 하던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이제는 그나마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선명하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지금. 자신이 지금 있는 이 길거리에는 당장 그 목소리를 낼 만한 연령대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어디선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이가.
융터르의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어떻게 그 아이의 울음과 비명소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들리는가? 그 질문에서 시작한 상담사는 한 가지 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세워보기로 했다. 울음과 비명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결과물.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가장 그 감정에 집중했기에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이 길거리 위에서 적어도 그런 양상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 근처의 집들 중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빠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죽이지 말아주세요!!
-불경한사탄놈의새끼불경한사탄놈의새끼불경한사탄놈의새끼불경한사탄놈의새끼---!!!
외칠 기운도 없는지 그저 속으로 살려달라는 소리와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는 것도 이보다는 더 자비로울 것 같은 소리가 더 크고 명확히 들리는 방향으로 쫓아가니, 허름한 주택이 나왔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불길할 정도로 적막한 그 집의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더 가까이 다가가자, 낮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한 여성의 기도문이 들려왔는데, 그 내용이 '자기 자식에게 사탄이 들렸으니 이 성스러운 행위를 통해 부디 악에서 이겨낼 힘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가끔 시각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동화책 낭독 봉사를 하던 카르나르 융터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겨움과 분노가 온 몸을 타고 넘실대는 기분을 받았다. 평소와 달리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그는 이미 주먹을 세게 쥐고 낡은 문짝이 부서져라 두드렸다.
"...누구야!!"
마찬가지로 문 수리비가 두렵지 않았는지 세차게 '쾅!' 소리를 내며 안에서부터 현관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바라본 집안은 그야말로 황폐함 그 자체였다. 멀쩡한 세간살이라고는 없는 거실 한 구석에서는, 추레하고 낡은 옷을 입은 여인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어두컴컴한 집 안의 유일한 광원인 촛불에 의지해 기도문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문을 연 남자도 마찬가지로 이 추운 겨울에 얇은 옷차림이었고 특히 벨트가 없었는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은근슬쩍 손으로 연신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카르나르 융터르의 신경을 끄는 것은 그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세뇌와는 다른 방향으로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을, 저리도 똑같이 지을 수 있는가? 특히 눈가를 자세히 보니 부부가 전부 핏줄은 아닌 묘한 붉은색의 뭔가가 감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이, 당신 누구냐니까?" 노크(?)를 해놓고 한참을 서있던 융터르에게 명백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남성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동복지센터 소속 직원입니다. 아이가 비명을 한참 지른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왔습니다만."
그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나가는 심리상담가입니다-라고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굳이 세뇌를 시키지 않더라도 특유의 낮고 굵은 목소리는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기도 했고. 과연 그 말에 영향을 받았는지, 남성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별 일 아니니까 저리 꺼지쇼." 라고 말하며 양 팔을 뻗고 내쫓으려 하였다. 그리고 융터르는 상대의 한 쪽 손에 뭔가 이상한 자국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끈 치고는 너비가 제법 되는 뭔가로 손바닥을 한번 빙 두른 그것. 급히 한쪽으로 치우느라 아직 남아있었겠지만, 남성의 옷차림과 견주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융터르가 남성의 허우적거리는 손짓을 가볍게 피하며 말했다.
"선생님? 혹시 벨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베, 벨트? 아, 아, 알아서 뭣하게. 어!?"
처음에는 내몰기 위한 손짓이었지만,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것을 짐작한 것인지 이번엔 명백히 적개심을 품고 휘두르는 앙상한 주먹에 곧이 곧대로 맞아줄 융터르가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회피하고 오른손을 내뻗어 이 아버지 자격도 없는 한심하고 역겨운 작자의 얼굴을 꽉 쥔 채로 명령했다.
"비켜. 당장."
그의 손 안에서 파들파들 떠는 남자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동시에 융터르는 누가 이 상황을 볼 것을 염려해 재빠르게 문을 닫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도문을 외는데 여념이 없었던 어머니의 탈을 쓴 괴물이 그 이변을 알아차렸다. '사탄'이니, '마귀'니 오만가지 악다구니를 질러대는 그쪽에게도 한없는 증오심을 느낀 융터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여자가 까딱하다간 흐느끼려는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돌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피비린내와 뭔가가 탄 내음이 은은히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부모의 의무를 저버린 자들이 저지른 행태가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결과물을 직접 목도하자 더욱 끔찍했다.
먼지 구덩이같은 바닥에서 잔기침을 하며 우는 아이. 두 눈이 전부 달군 부지깽이 같은 것으로 지져진 상태인데다 온 몸에는 벨트로 살점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맞은 흔적. 피와 고름이 눈물과 섞여 계속 바닥을 적시는 그 어린이는 공포심에 이성을 잃고 계속 '살려주세요'만 쉼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이가 부서져라 악다문 그는 서둘러 구조대에 신고해서 엠뷸런스가 그를 병원으로 빨리 이송하도록 하기 위해, 아이가 그 낯선 손길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것도 참으며 안고 지상으로 나왔다.
보호자임을 자청해서, 전화상으로 비록 두 눈을 살릴 수는 없었지만, 다른 부분은 치유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 융터르는 치료에 대한 부분은 자신이 전부 부담할 터이니, 아이가 놀라지 않게끔 부탁드린다는 말로 통화를 종료하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세뇌에서 풀린 두 남녀가 무릎을 꿇고 결박되어있는 그 모습에 자신들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고래고래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위화감을 느낀 그는 저들이 이미 먼저 다른 놈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라는 가정을 세웠다. 더 오랫동안 세뇌를 시킬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영향에서 금방 벗어나는 것인가? 카르나르 융터르는 여전히 소리지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전말을 모조리 듣기로 결심했다.
그의 세뇌는 말을 건 뒤 1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풀린다. 달리 말하자면 그 10분 안에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면 이론상으로는 끝없이 세뇌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융터르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입술과 목이 메말라가도 자신을 초점이 나간 눈으로 올려다보는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계속 하게끔 명령을 내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 분이 저희에게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자식놈에게 사악한 마귀가 들렸다고..."
"다가올 미래에... 천국의 문이... 온다고... 마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자식을 학대한 대목에서 융터르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 정도의 학대를 고작 그런 이유로? 종교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믿는 편도 아니지만, 적어도 신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종교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이 허름한 집도 '그 분'에게 바치고 남은 결과물이겠지.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 교주 주제에.
"너희들이 말한 그 분은 누구지?"
"그 분... 그, 분은... 신의 아들이시옵고... 저희에게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옵고..."
"저희가... 천국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약속한 분이시옵고..."
교주에 대해 묻는 질문에 두 사람의 반응이 좀 전과 사뭇 달라졌다. 그저 멍한 표정이었던 것이 갑자기 어떤 희열감 비슷한 느낌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건 단순한 희열감이 아니다! 심리상담사로서의 지난 경험들이 저들의 반응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보더라도 명백한 숭배다. 그들은 진심으로 교주를 따르는 것이 분명했다.
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둘은 계속해서 교주를 찬양하고 있는 모습에 융터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건 숫제 광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이비교주가 광신도를 만들어 내는 능력자라, 절묘하기 짝이 없는 저급함에 그는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교주 찬양소리를 더 듣고 싶은 맘도 없던 그는 이제 입을 다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번 주 토요일에 그 분을 뵙기로 했는데... 이를 어떻게..."
"영혼을 구원받아야 하는데... 하루라도 속히 타락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말해."
부부는 교단에서 생각보다 지위를 갖춘 모양이었는지 위치와 장소, 시간까지 필요한 정보를 줄줄 토해냈고 그 정보는 지금 고스란히 융터르가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구한 아이에게서도 나름대로 유용한 정보도 얻어냈고. 그렇다면 바로 출발해도 되었겠지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의외로 캘리칼리 데이비슨 경장이었다. 그때 그 공장에서 분명 자신을 체포하러 왔었을 텐데 무슨 변덕이 불었던 것인지 그저 명함이나 교환하고 말아버린 싱거운 사이.
그는 연락처에서 '이상한 놈'을 검색하고 한참 망설이다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약속 장소로 잡은 식당에서 그는 케이크를 주문하는 의외성을 보이기도 했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스스럼없이 친구라고도 불러주었다. 그렇게 먼저 선뜻 나서준 사람에게 예전처럼 홀로 나서는 행위는 어쩐지 쌓은 신뢰도 없었건만 묘하게 배신을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부 정보원 이야기를 그가 실수로 흘렸을 때, 놓치지 않고 그 쪽으로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결국 설득당한 형사가 마음대로 하라며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이 새삼 고마워 인사를 한 그는 일어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집. 그 광신도들이 사는 집으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부부의 얼굴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져 있는 불쌍하고도 역겨운 놈들.
"일어나."
그러나 그의 세뇌는 듣는 이의 몸상태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가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야만 하고, 뛰라고 하면 뛰어야 한다. 부부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따랐다. 썩은내가 진동하는 주방에 시선을 돌린 융터르의 눈빛이 어떤 물건에 꽂혔다. 부억칼이 정확히 두 자루.
"집어."
터벅거리며 움직인 광신도들은 날에 녹이 빽빽하게 슨 부억칼을 각각 하나씩 서로 집었다. 축 늘어진 손 아래로 괘종시계의 추처럼 칼이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였다. 서로를 마주보게 한 후,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융터르가 먼저 현관문 쪽에 다가가며 마지막으로 명령을 했다.
"서로가 죽을 때까지, 찔러."
-7. 좋은 놈 이야기 - 히어로(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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