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거— 우리 제대로 온 게 맞나?”
“상점에서 구입한 지도가 정품이라면 길은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가짜라는데 내 드워프제 쌍검 둘 다 걸겠네.”
대검을 등에 차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거구의 남성과,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충분히 덩치가 있겠지만 동행인에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작은 남성 둘이 서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벌써 몇 시간째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안개 낀 숲에서 헤메이고 있는 탓이었다.
소맷자락이 제법 풍성한 느낌의 로브를 입은 작은 남성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완드를 들어 지도를 향해 겨눴다. 곧 불길하게 검붉은 빛이 지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이내 곧 사라졌다.
“아, 이런.” 잘못 들으면 어디 땅굴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의 깊은 탄식이 위저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사의 안색은 그 소리에 긴장한 태를 감출 수 없었다.
“뭔데? 무슨 일인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 어떤 것을 듣고 싶으십니까?”
“굉장히 불길한 말인데... 좋아, 그럼 좋은 소식부터 알려주게.”
“그 쌍검 대장간에 팔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이런 망할.”
위저드의 말에 파이터는 인상을 팍 쓰면서 주저 앉더니, 한탄 섞인 신음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그 상인 놈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게 생겼더라니- 하는 소리는 덤이었다. 위저드는 붉은 빛이 사라진 지도를 꼼꼼히 살핀 후 “이건 10년 전 탐색범위를 기록해 둔 것이군요.” 하고 읊조렸다. ‘지금 엄청나게 화났다’는 얼굴의 파이터가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마법사의 손에서 그 지도를 낚아채고는 곧 북북 소리를 내며 거칠게 찢었다.
1.
이 사건이 있기 불과 하루 전, 두 사람은 길드마스터에게 불려나왔다가 막 하우스 문을 나선 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상급자에게 대차게 한 소리 듣고 나온 부하직원의 표정들이었다.
“어이, 진짜 해야 되냐? 둘이서? 이걸?”
“굳이 속되게 표현하자면 ‘까라는 대로 까라’ 였습니다만.”
“젠장, 하필 그 ‘그림자의 숲’에서만 나오는 괴수퇴치를 왜 우리가 해야 되느냔 말이다.”
그렇게 투덜거리는 거구의 파이터,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공연한 마음에 W와 M이 멋들어지게 교차한 깃발이 휘날리는 깃대를 발로 툭 찼다. 평소라면 그저 호쾌하게 웃어넘길 터였지만, 지금은 하필 의뢰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본래 혼자서 의뢰를 해결하던 그에게 있어 동행자라는 존재 자체가 영 께름칙한 탓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로 같이 지목당한 위저드인 카르나르 융터르 또한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 쪽은 아예 자기 개인실에서 -다른 길드원들의 묘사에 따르면- 그 놈의 무의식을 탐구하던 참에 갑자기 현장에서 뛰라는 말을 받은 참이었으니까. 어디 방에 콕 하니 틀어박혀 앉아서 의뢰를 해결하는 쪽을 선호하던 그였기에 이러한 실전은 그로서도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제의 의뢰는 대략 5년을 주기로 ‘단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그림자의 숲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단 하나’ 라는 것이 퇴치해야 할 괴수라는 점도. 의뢰내용을 곰곰히 곱씹던 캘리칼리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이거 우리 엿먹으라고 하는거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게 좋을까—”
이미 답을 생각해놓고 있지만 손도 몇 번 맞춰 본 적 없는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기에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던 파이터가 어물쩡하는 태도로 말을 끌었다. 그 모습이 누가 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 알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듯 하였다. 그리고 위저드는 그런 비언어적 묘사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벽창호는 아니었다.
“까짓거 싹 해치워버리자- 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허, 그냥 속시원하게 다 말할 걸 그랬네. 한 번 해보자고.”
2.
그리고 다시 지금.
두 사람은 의뢰자에게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깊은 증오심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괴수 퇴치의 사유도 그저 그 괴수의 박제가 보고 싶다는 터무니도, 어처구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조우해서 잡는데 성공하더라도 그 괴수의 사체가 볼품없이 망가진다면 실패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건 일단 마주치기라도 했을 때의 문제인 것이고, 그림자의 숲에 산다는 괴수는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였다가 지금은 다 사그라든 떡밥과도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그 덩치는 또 어떠한지, 한때는 말도 참 많았던 그것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내린 결론이란 그때 그때 다르다는 싱거운 것이었다. 마치 자기 권역인 그 숲처럼.
정작 다른 문제가 직면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보이지도 않는 괴수의 공격이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격한 전투를 마치고 피로감을 느끼며 완드를 거둔 융터르가, 그 반대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면서 평소보다 높은-그래봐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낮은-언성을 내었다.
“그렇게 무작정 돌격하니 또 오발사고가 나는 것 아닙니까?”
“피할 수 있는 각이 그 쪽 딱 하나였는데 말이지- 그럼 거기에 맞춰서 공격한 자네가 잘못이지 않나? 아앙?”
크고 작은 피해가, 꼭 가랑비에 온 몸이 다 젖는다는 말처럼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쌓이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피해의 대부분은 서로가 합이 맞지 않았던 탓이 더 큰 편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캘리칼리가 기세좋게 칼을 휘두른다 싶으면 그 경로에 하필 융터르가 있다던가, 반대로 융터르의 마법이 캘리칼리의 등에 꽂힌다던가, 의도는 아니지만 감정의 골이 불규칙하게 이어진 사냥시간 동안 꼴보기 싫게 갈라진지는 제법 오래였다.
“캘리칼리님의 덩치가 워낙에 크셔서 제가 그 부분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럼 반대로 제게 칼을 휘두른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방금 외웠던 주문 하나를 날려서 굉장히 손실이 큽니다만.”
“허! 난 그 쪽으로 날아온 공격을 쳐주려던 것 뿐인데 말이야. 자네가 어찌나 비실비실거리면 그런 가벼운 공격에 주문 하나가 다 날아가버리나?”
“제 체력과 주문은 관계없습니다만?”
“내가 마법은 잘 몰라도 내 등짝에 꽂혔던 주문이 포착된 대상에게 바로 꽂히는 건 알고 있는데- 그 공격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되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
캘리칼리의 가뜩이나 험상궂은 인상이, 융터르의 턱없이 낮은 목소리가 점차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로가 전혀 양보라고는 전혀 없이 노려보았다.
그 주인들처럼 묘할 정도로 예기를 뿜어내는 두 자루의 쌍검과, 주문을 이루는 마법 문자들이 일렁이는 완드가 곧장 두 사람의 손에서 자기 과시를 할 쯤이었다. 서늘한 공기가 갑작스럽게 푹 꺼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거구의 파이터였다. 그는 양 손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일단 의뢰부터 마치고 보지. 근데 그 전에, 내가 좀 많이 피곤해서 말이야.”
“그렇군요. 숲 속이라 시간개념이 흐려졌는데, 아마 바깥은 벌써 늦은 저녁인 것 같습니다.”
시간을 얼추 짐작한 위저드는 완드를 휘적거리면서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제법 넓은 원이 따스한 빛을 내면서 그려지더니, 퍽 고급진 캠핑 세트가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났다. 번거롭게 침낭 따위를 챙기지 않는 캘리칼리는 이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경쾌하게 불었다.
“이런데서 꽤 편히 쉴 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의뢰에 있어 휴식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뭐 되었다. 헌데, 나 지금 흙이며 땀이며 피며 내가 봐도 좀 더러운데— 들어가도 되나?”
“상관없습니다. 원래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냥 텐트니까요.”
방금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렸는데도 순순히 답하는 융터르의 그 모습에 캘리칼리의 입에서 실없이 ‘핫!’하는 웃음이 튀어나왔고, 이내 곧 그 커다란 몸집은 텐트의 상대적으로 작은 입구에 요령좋게 빨려들어갔다.
텐트 주변으로 칠 수 있는 한 가장 최상급의 보호 결계를 친 뒤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융터르는 텐트 내부의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는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는 슬쩍 웃으며 뒤따라 들어갔다. 거구의 동료는 자신의 몸집도 충분히 감당하는 내부 높이에 감탄하며 텐트 주인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어이, 이게 그냥 텐트냐? 무슨 집을 갖다 놨는데?”
“말씀드렸을텐데요. 휴식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요. 이 정도 사양으로 맞추는데 신경 좀 썼습니다.”
“신경 쓴 수준이 아니잖나. 이건. 제법인데?”
“목욕탕까지 마련하느라 길드에서 개처럼 굴렀다는 점만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방금 그게 농담이었던 것인지, 융터르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실실거리는 웃음기가 배어들다가 이내 곧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의외였던지 캘리칼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농담도 할 줄 알았나? 난 자네가 목석같은 놈인 줄 알았거든.”
“가끔 해봤는데 다른 분들은 제가 무슨 진담 한 것처럼 들으셨습니다.”
“허, 그 목소리로 농담을? 골렘이 춤을 추는 게 더 그럴싸하겠다.”
“아.”
‘설마 목소리 때문이었나’ 라며 충격에 사로잡혀 중얼거리던 위저드를 뒤로 한 채, 파이터는 텐트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쑥 들어갔다.
3.
길드 내에서는 ‘만약 평소에 피칠갑을 하고 돌아다니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막 씻고 나오는 때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외에는 다루지 못하는 예리한 쌍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면 순식간에 그 멀끔한 얼굴이 도로 피투성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의뢰 성공률은 높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들이 많아 얼굴 보기도 힘든 입장이라는 것도 한 몫했다.
그래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내며 거실(?)로 나온 그 모습은, 당연히 카르나르 융터르에게도 정말 생경한 그것이었다.
“우와.”
“이봐, 그 목소리로 그런 감탄사 내니까 정말로 기분 이상한데.”
“우—와아.” -융터르는 일부러 더 낮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었다.-
“나 원참. 사람 얼굴 처음 보나?”
그는 투덜거리다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짐에서 뭔가를 꺼냈다. 무려 미스릴로 만들어진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조각 케이크였다. 그 격렬했던 움직임 사이에서도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심지어 위에 얹은 딸기마저도 완벽한 모양을 갖춘 것이었다.
자신의 몫으로 만든 파스타를 접시에 막 옮겨 담던 융터르는, 차라리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라면 모를까 이 무지막지한 전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들었던 집게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릴 뻔했다.
“어? 딸기 생크림 케이크— 처음 보나?”
“음, 아, 아뇨. 그러니까. 그. 의외라고 해야 하나 이걸. 그 취향이니까 존중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그럼 그 쪽으로 하지. 취향이니까 존중해줘.”
조각치고는 제법 양이 되는데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정말 맛있었는지 입가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있는 채로 입가에 아직 묻어있던 생크림을 슥 닦아낸 캘리칼리는 문득 물끄러미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그도 꽤 배가 고팠었는지 접시가 깔끔하게 비워진 상태였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낀 융터르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보니 우리 아까까지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이제야 생각나신 겁니까?”
“근데 갑자기 우리 왜 이러는거냐? 그러니까 이게 웬 뜬금없는 평화 무드 조성이냐고.”
“글쎄요”라고 입을 연 융터르였지만, 그도 마땅한 생각이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한참동안이나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도돌이표를 무한히 반복했다. 그렇게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정확히는 캘리칼리가 지루함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 쯤에) 융터르가 겨우 운을 떼었다.
“지금은 이 곳과 관련된 의뢰가 거의 없거나 아예 받아주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5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뭔가?”
“숲에 이간질을 일으키는 일종의 악령이 있다는 설이 잠깐 돌았었습니다.”
악령이라는 단어에 캘리칼리의 눈살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피와 살과 뼈가 있다면 그게 설령 드래곤이라도 평범한 철검을 들어도 거뜬히 베어버릴 자신이 있는 그였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 실체가 없는 존재의 경우라면 미리 준비한 특별한 장비 없이는 벨 수는 없는 셈이다. 그리 반갑지 않은 정보에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거 근거가 있는 가설…인가?”
“예전에 다른 의뢰로 대도서관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 비치되어있는 신문에 작게 기재되어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제목이 ‘그림자의 숲 토벌 파티 연속 살인 발생하다’ 뭐 이랬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들어 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군.” 캘리칼리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융터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기사에 따르자면… 상호 간에 가벼운 말다툼부터 몸싸움에 돌입했다가 결국 무기를 휘두른 끝에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화의 원인으로 악령이 시켜서 그랬다고 지목했다는 내용도.”
“꽤나 자세히 기억하는구먼.”
“워낙 내용 자체가 끔찍했으니까요. 저들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미 옛 이야기입니다.”
쯧 하고 혀차는 소리를 가볍게 낸 파이터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 툭하고 내뱉듯 그 말을 받아 이어갔다.
“근데 뭐, 한창 때는 언데드도 열심히 때려잡던 경험에서 말하는건데 좀 이상하지 않나?”
“어떤 점이 이상하십니까?”
“뭐 악령도 종류가 많다지만 일단은 그 놈들도 언데드 아니냐는거다. 그 특유의 음습하고 기분 축축 처지는 그런 기운을 팍팍 뿜어내는.”
“대분류로 따지자면 악령이 언데드과에 속하죠. 네. 근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우리가 서로 싸울 때도 그런 기분 느껴본 적이 있었나?”
4.
어느새 잠결 같은 것은 확 달아난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카르나르 융터르에게 고개를 쑥 내밀며 예리하게 물어왔다. 그런 그의 질문에는 이미 수 년간 가지각색의 몬스터들을 도륙해 온 베테랑의 감이 은은히 배어있었다.
그 태도에 압도당한 위저드도 숲에 들어온 이후의 기억들을 반추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몬스터 퇴치 의뢰를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유령이라는 족속들은 오히려 사람들 사는 곳에 기어들어가 있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경험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저도 그 특유의 축축 처지는 기운은 느낀 적이 없군요.”
“그렇군. 정리를 한 번 해보지.” 라며 캘리칼리는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1.서로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그는 유독 여기에 힘을 주어 말했다- 공격반경에 들어갔다.
2.그로 인해 서로 싸울 뻔했지만 악령 특유의 소행은 아니다.
3.휴식을 취하면서 ‘좌우당간’-다시 그는 여기에 힘을 주며 말했다- 화해했다.
그렇게 손가락을 막 중지까지 꺾으며 말하던 파이터의 말이 뚝 멈췄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융터르가 평소 그라면 내지 않았을 얼빠진 소리를 덩달아 내자, 전사는 간만에 진지했던 모습에서 익히 보아온 뻔뻔하고 능글맞은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자!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 이제 똑쟁이 양반이 머리 굴릴 시간이네.”
“흠….”
앉아있던 의자에 몸을 맡긴 듯이 기댄 마법사는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더 낮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그것은 캘리칼리 데이비슨 또한 마찬가지라서 가면 갈수록 이게 주문을 외우는 것인지 추리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왜 우리는 악령한테 홀리지도 않았는데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을까요?”
“허… 수수께끼는 쥐약인데 말이지.”
“경험에 기반해서 사실만 확인해봅시다.” 라고 융터르가 달래는 어조로 말하자 전사는 그 두텁고 큰 손으로 턱과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 괴수 놈의 공격. 망할 가시넝쿨 같은 것이 마구 몰아치다보니?”
“그 공격이 저희끼리 교묘하게 싸움을 유도했다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뭐?”
마법사는 이어서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괴수의 공격이 그렇게 몰아쳤는데도 막상 그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고 지금까지 우리가 입은 부상들은 오히려 서로 간 공격범위에 휘말린 것이 이 사태의 큰 원인인 점을. 어떤 방향으로 공격을 하거나 회피를 하게끔 유도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그리고 그런 공격들은 대부분이 다른 사람은 보기 힘든 각도로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까지.
악령 이야기를 꺼낸 것도 나중에는 대놓고 서로서로 살인까지 해버린 것에 대해 ‘악령에게 홀려서 그랬다’ 정도로 넘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자, 상대방은 어쩐지 납득이 되는 기분에 본래 이 긴 대화의 첫 질문으로 돌아갔다.
“그럼… 우리가 뭔가 어설프게 화해한 이 상황은?”
“글쎄요, 지쳐서 그런게 아닐까요. 먼저 말씀하셨잖습니까? 많이 피곤하다고.”
이 악명높은 파티 와해 패턴의 파훼법이 그저 ‘지쳤으니까 일단 쉬고나서 생각합시다’ 같은 방식이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다들 비웃겠다고 캘리칼리는 문득 생각했다.
5.
다년간 노숙생활을 하면서, 난생처음으로 나무뿌리가 아닌 푹신한 베개를 베고, 짐승의 가죽이 아닌 따뜻한 이불 속에서 뒤척인다. 캘리칼리에게 이는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몸에 맞지도 않는 정장을 입고 화려한 파티장에 나설 때와 어딘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자신의 생활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숲 너머로부터 햇빛이 아주 흐릿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편하게 잠을 자기는 커녕 뜬 눈으로 밤을 새야 했다. 하품을 쩍쩍하면서 거실(?)로 나온 그에게 융터르가 인사를 건넸다.
“편히 보내셨습니까—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눈 밑이 시커매지셨군요.”
“글쎄 그 쪽도 영 얼굴이 말이 아니만, 응?”
키득거리면서 전사는 가볍게 위저드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상대방의 얼굴도 밤잠을 설쳤는지 눈 밑이 새까매져있었다. 마법사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밤새 바로 쓸 수 있는 주문들을 죄다 외우느라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막상 다시 싸우려니 걱정이 앞서는 캘리칼리가 전략이 있는지 물었지만 상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을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텐트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결계 주변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바닥을 잔뜩 난자한 흔적이었다. 캘리칼리는 씩 웃으면서 융터르에게 요청했다.
“나한테 저런 결계 씌우지 말고, 가만 있어보게.”
“네? 그러면 어제처럼 부상을 입으실텐데요?”
“내가 목숨줄 하나는 참 질기거든. 요청하면 그 때 도와주게. 교대하자고. 그 때는 말야.”
그 순간 시커먼 그림자 같은 공격 하나가 채찍마냥 다시 결계를 매섭게 때렸다. 그것이 밤 동안 이어진 무수한 공격의 정체였는지, 옅은 황금빛의 반투명한 보호막이 산산조각 났고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텐트는 완전히 부서져버린 그 모습을 본 캘리칼리는 제법 화난 목소리로 먼저 뛰쳐나가면서 외쳤다.
“나중에 빌려달라 말하려고 했는데!”
양 옆구리에서 뽑혀나온 한 쌍의 검들이 찰나의 간격으로 전부 그 주인의 손에 들려 그 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먼저 앞서나간 왼손은 박자가 어긋난 공격들을 자연스럽게 흘리고 쳐내며 반동을 이겨내기보다는 흐름을 타서 부드럽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 사이사이마다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오른손이 움직여가며 위협적으로 보이는 공격들을 한 발 먼저 앞서 나가며 베어내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치 ‘이것도 쳐낼 수 있으면 해봐라’라는 듯이, 가장 굵은 그림자가 파이터의 몸으로 쇄도하자 있던 왼손의 검이 순식간에 바닥을 바라보면서 내리 꽂혔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다른 검이 독사처럼 뒤틀고 날뛰는 그것의 허리를 순식간에 베어내었다.
“으랏차차!!” 하고 내지르는 호쾌한 기합소리와 동시에 온 몸에 힘을 준 캘리칼리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직전의, 그 공격의 나머지 그림자를 밟고 뛰쳐나가면서 일반적인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나가면서 순식간에 무수한 검격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적에게도 상당한 고통이었는지 문제의 줄기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사악한 뱀의 최후처럼 이리저리 날뛰다가 곧 산산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감싸고 있던 숲까지 그 공격에 휘말려 조금씩 생기던 공터가 확실히 넓어졌다.
그 순간 융터르는 저 전사가 뭘 하는지 깨달았다. 저 망할 놈의 괴수가 파티를 자멸 시키고자 교묘하게 공격을 한다면, 이쪽에서는 차라리 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어드벤티지인 숲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얼굴에 살짝 웃음기를 띄웠다가 곧 가라 앉혔다. 자신도 생각했던 계획이므로.
“어이—! 교대다! 보호마법을 써 주게!”
괴수의 끔찍한 울음소리와 동시에, 아무리 훌륭한 방패라고 하더라도 몇 번 부딪치면 곧장 깨질 것 같은 새까만 가시줄기 다발이 내리 꽂히기 직전에 마법사가 건 보호주문이 성공적으로 황금빛을 내뿜으며 전사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피해를 온전히 받아내주는 것은 아니었는지, 줄기 하나가 흩뿌리듯이 휘적이다 전사의 몸을 제대로 밀쳐내버렸다.
전사의 몸이 그 충격에 땅으로 몇 번을 튀어오르면서 구르다가 결국에는 마법사가 있는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걱정에 가득찬 목소리로 융터르가 질문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안 죽었네, 안 죽었다고. 덕분에 살았어. 고맙네.”
“다행이군요.”
“이제 그쪽 계획도 들어볼 시간인 것 같은데, 괜찮나?”
“캘리칼리님과 똑같습니다.”
위저드가 씩 웃고 난 뒤, 완드를 한 번 ‘휙’ 소리가 나게 휘두르면서 동시에 주문 몇 가지를 내쏘아냈다. 단순한 빛무리처럼 보이는 것들 중 하나는 쇠사슬이 되고, 또 어떤 것은 자세히 보아야만 보일 것 같은 가시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보라색 안개가 되어, 저 멀리서부터 날뛰며 오는 가시들에게 차례로 달라 붙었다. 전사에게는 이 공격들이 분명 좋은 연계가 되겠지만 저런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큰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차라리 자신이 다시 물약이라도 먹고 회복해서 덤벼드는 것이 어떨까 하는 순간, 융터르의 다른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제 제법 큰 주문을 쓸 겁니다. 제 뒤에 계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저드와 파이터의 중심으로 여느 때와 다른 새카만 빛무리가 어른거리는 마법진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뼈와 가죽 밖에 안 남은 것처럼 보이는, 무수한 손이 되었다. 어떤 의미로는 융터르와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생김새가 워낙 흉악해서 캘리칼리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숲 너머로 괴수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가 하더니, 곧이어 화산에서나 느낄 법한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른 길드원이 딱 한 번 쓰고 말았던, 무시무시한 용암이 강처럼 흐르며 숲을 죄다 녹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잡았습니다.” 라며 융터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손들이 점차 마법진 속으로 도로 들어가고 그 끝에 남은 것은 침팬치였다. 두 사람은 어이가 사라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는 점차 큰 목소리로 낄낄 웃어대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들을 괴롭힌, 그리고 여전히 발악하는 이 하찮은 괴수(?)를 포획틀에 쑤셔 넣고는 길드로 들어왔다.
6.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은 종종 같이 의뢰를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서로 실없는 농담도 서슴없이 주고 받으면서 지내는 사이가 된 것이다. 가끔 서로에게 어떻게 팀을 맺게 되었냐는 다른 길드원들의 질문에는 ‘그냥’이라고 답해버린 탓에 융터르가 마법약을 먹였다느니, 캘리칼리가 무력으로 협박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도 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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