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찬가지로 칠성님의 정말정말로 맛있는 소재를 받았습니다.
*성이 성주와 수호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골자입니다.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분명 성이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위병들이 지키고 서있는 출입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단순히 낯선 곳으로 진입한다는 긴장감만 서려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는 분명 경외감이 어려있었다. 그럴만 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쌓기도 전에 이미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태초의 성. 외부인들은 지금 그 중 하나이자, 가장 세력이 거대한 북부의 티아로크 성에 들어가는 중이다.
남색바탕에 은빛 수실로 거대한 용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는 사이로, 서로를 아는 듯 마는 듯 애매모호한 관계를 이루던 방문자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고자 뿔뿔히 흩어졌고 그런 움직임을 심장부에 위치한 자리에서 성주는 전부 지켜보았다. 작달막한 체구, 잘해봐야 다섯 글자를 좀처럼 넘기지 않는 독특한 말버릇이 인상적인 그가 새롭게 오가는 자들을 유의깊게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건네준 고급스러운 편지에는 성주 회의에 참석하라는 내용의 편지가 적혀있었다.
"흥."
성주, 단답벌레의 누가 들어도 불편한 기색이 담긴 그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리자 그 자리 뒤에 배경처럼 깔린 베일이 살짝 일렁거리며 객관적으로 보아도 성주의 덩치보다 배는 더 거대한 장신의 남성이 슥 나왔다. 단정하게 손질된 콧수염이 좌우로 죽 벌어지며 그 입으로 쾌활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또 뭐가 그리 불만인가?"
"이것."
단답벌레가 내민 익숙한 초대장은 이미 성의 수호신인 캘리칼리 데이비슨에게도 과할 정도로 눈에 익었고, 동시에 그의 머리에는 주황빛의 머리가 단정하게 뒤로 넘어간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버릇과도 같이 수호신은 "저번처럼 불참하면 되는 것을 뭘 또 그리 짜증내고 그러나?" 라고 넘어가려 했지만, 성주가 자세히 보라는 듯 내민 그 초대장을 읽고난 뒤의 표정을 표현하라고 하면 씹어서는 안 될 그런 것들을 씹은 그런 것이다.
단순히 통보용이 아니라 입장권의 역할도 겸함을 아는 그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초대장을 한 손에 구기려하였지만 애써 참아 냈다. 그 내용에는 유독 그 둘을 노린 것인지 불참 시에는 태초의 8성 간 무역에 대한 불이익을 주기로 사전에 합의를 보았다는 경고가 적혀있다. 식량사정이 유독 각박한 북부에게 무역은 식량을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임을 알고서도 이러한 통보를 준다는 것은 분명.
"그 재수없는 놈을 또 봐야 한다, 이건가?"
"응."
"망할."
수호신도, 성주도 전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저마다 언짢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촉박해지는 일정임을 확인하고 대륙의 중심에서 서쪽의 고산지대를 향해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대륙에서 떨어진 채로 차가운 북해 위, 눈이 쌓인 마고프네드의 땅 위로 고고하게 성 하나가 우뚝 서있다. 그 태초의 8성 중 하나인 크노모스 성은 유일한 선착장에 도열한 기사들과 병사들과 달리 배에 오르는 자는 단 두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냉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기사들 중 부기사단장이 목청 높여 경례를 외치자, 그 휘하의 다른 이들이 절도가 차고 넘치도록 손을 치켜 올렸다. 그 경례를 받는 단 한 사람, 성주이자 수호신인 카르나르 융터르는 금색 수실이 제법 화려한 새카만 망토 차림으로 그 인사를 묵묵히 받았다.
돛대 꼭대기에 성주의 상징인 독수리가 새까만 바탕에 금실로 수놓아져 팔락이는 깃발이 나부낌과 동시에 성주의 마법으로 움직이는 배는 곧 기사단장인 프리터가 손수 키를 잡자 둥실 떠오르더니 곧 하늘 위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하였다. 제 아무리 용이라 할지라도 따라잡을 수 없을 속도.
"아이고— 아—주 언짢아보이십니다…."
"늘 그렇지요."
기사단장이 곧 일부러 키를 잡지 않아도 안정된 비행이 가능함을 확인하고 키에서 손을 놓았다. 곧 자신의 본분이라 여기는 시중을 들기 위해, 배의 유일한 선실로 들어가보니 망토만큼이나 새카만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넘긴 성주이자 수호신은 언짢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성주 회의에 참여할 것을 강권하는 초대장을 노려보고 있는 참이다. 프리터는 저 얼굴이 당연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성주들은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상할 정도로 유독 한 성에 대해서는 악연이라 불러 마땅할 기억들이 잦은 편이었으니.
"기왕 이렇게 될 바에야, 그 두 사람이 참석하지 않길 바라마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그들도 어쩔 수 없었나보군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글쎄요, 이걸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 직감이라 해야 할지…."
멍청한 놈들은 똑같은 북부라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답해줄 가치도 없는 물음을 티아로크 성의 주민들이나 크노모스 성의 주민들이 저마다 들었다면 개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했고, 이는 각 성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따지자면 각각 수호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혼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캘리칼리 데이비슨, 그리고 궁극적으로 질서를 추구하는 카르나르 융터르. 수백년 전부터 앙숙관계였던 두 사람이 일순간에 화해할 것이라고는, 이제 다른 수호신들은 물론 성주들도 포기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그러니 카르나르 융터르의 입장에서, 성주회의에 태만을 부리며 참여하지 않는 티아로크 성을 오히려 반겼지만. 그는 그 인상깊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번 회의는 또 무슨 황당하고 별 의미가 없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옛?" 프리터는 지금까지 회의라 함은 늘 엄숙하고 중대한 사항을 토의하는 자리라 알고 있어, 심히 당황해하였다.
"당신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참고로 지난 회의의 안건은 원활한 교류를 위한 파티 따위의 개최를 어디서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륙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티아로크 성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쪽은 아예 사방이 바다로 싸인 곳이다.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고, 심지어 바다도 추위가 심한 날에는 얼어붙는 이 곳에서 파티를 연다 한들 사람이 오겠는가? 게다가 근본적으로 그런 것을 할 만큼 자원도 여유롭지는 못하다. 결국 가장 부유한 히르디오스 성이 그 장소가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건만, 구태여 이를 회의로 한 이유를 카르나르 융터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안건으로 소집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번 회의에는 무려 불참 시 무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경고를 흘려놓았기에 어떤 황당한 안건이 나온다 한들 감내해야 하리라.
곧 익숙한 난기류가 선체를 마구 두드리기라도 하는지 심하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풍마성이 그 영역 주위로 둘러싼 마력을 실은 바람의 결계에 크노모스 성의 성주는 배에 닥친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 위로 올라섰고, 그런 행동을 프리터는 막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주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두꺼운 책이 바람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팔락거리다 어느 한 지점에서 페이지가 멈췄다.
그 내용을 보지도 않은 채, 사방이 격렬한 바람으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성주가 반지를 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프리터 님, 슬슬 착륙 준비를 도와주시지요."
"아, 아이고! 여기는 언제까지 이리도 번거롭게 할 참인지…."
프리터가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하게 배를 몰아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깔끔하게 절단이 난 바람 장벽 사이로 새하얀 성이, 그리고 그 아래에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 도열한 위병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보이는, 주황빛 머리카락과 희고 짧은 두루마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소녀가.
"어서오세요. 카르나르 융터르 님 그리고 프리터 님."
"급히 오느라 연락을 먼저 드리지 못해, 이러한 혼란을 끼친 점 사과드립니다. 비밀소녀 님."
"음음, 일찍 오셨구만.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시게나."
자신이 갈라놓은 장벽을 도로 손짓 한 번으로 복구할 때 쯤 성주 비밀소녀의 뒤로 소리없이 풍신이 나타났다. 과연 오래 산 마법사답게 능숙한 손길로 그가 회의장 안으로 손짓을 하자, 과연 희미한 마력의 실선이 가지런하게 뻗어 어디론가로 가게끔 유도하고 있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융터르가 말없이 목례를 꾸벅하고는 그 기다란 망토자락이 펄럭이도록 성큼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8필의 말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남색과 은색이 뒤섞인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으음! 저 친구들도 좀 요란—하구만—!"
"누가 뭐래도 북부의 지배자니까요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은, 다시 말해 저 너머에서 건너올 것들을 막아주는 최전선이라는 의미다. 그만큼 티아로크 성에서 영주의 권위는 차라리 왕과도 비견될 법하였고, 저 8필의 마차는 마치 그 위세를 보여주기 위한 무언의 시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병사 하나하나가 마법사인 풍마성이, 크노모스 성에서의 방문과 마찬가지로 북쪽에서 몰려오는 바람의 서늘한 기운 탓인지 긴장감으로 얼어붙은 동안.
"어—이! 우리 왔네!"
"옴."
"단답벌레 님, 캘리칼리 데이비슨 님 두 분 어서오세요."
"좋아, 이쪽으로 가면 되는 거겠지? 얼른 끝내고 얼른 집에 가자고."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자신보다 작달막한 키의 단답벌레가 뒤쫓아 오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는지, 아예 그 작은 몸을 옆구리에 들고 비밀소녀의 환영 인사는 들은 척 만 척 벌써 회담 장소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풍신은 그 둘의 사정을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인사는 받아줘도 되는 것 아니냐며 그 특유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하였다.
"으음! …저 싸가지 없는 것들."
비밀소녀는 쓰게 웃으면서 성의 수호신을 달랬고,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성주들이 도착하는 것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모든 성주는 동등하다—라는 전제에 따라, 절대로 누구 하나 모난 구석 자리에 앉히지 않기 위해 마련된 둥그런 원탁에 8명의 성주들이 저마다 자리에 앉았다. 물론 거리는 저마다 제법 떨어져있었다. 회의 중에는 사소한 것부터 심한 것까지 온갖 다툼이 있기 마련이니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지금도 노려보는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관계라던가.
"자, 다들 모였으니 이제 우리 레이디께서 회의를 여신 이유에 대해 들어보게나 이 천민들."
히르디오스 성의 성주, 비즈니스 킴이 그 자랑하는 은발의 긴 생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슬슬 회의를 시작할 것을 요청했고,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과는 별개로 어설픈 침묵이 유지되고 있던 공간이 슬슬 누그러듦에 작은 목례로 감사인사를 표시한 비밀소녀가 이번 회의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들으신 적이 있으실지도 몰라요, 성을 습격하는 검사의 이야기 말이에요."
"이잉…. 이 도파민이는 들은 적이 없소만."
검술과 마법을 다루는 이들과 달리, 성주 중에서 유일하게 기술을 추구하는 성주가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반론에 비밀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도파민 님이 계시는 테느포데 시는 아마 성의 수호신이 없어서 그런 걸거에요." 라고.
"허믄, 다른 곳에서는 뭐 습격이라도 당했다— 이거요?" 보는 것만을 믿는 그가 아직 그 습격에 반신반의할 무렵
"그렇다고 하믄 어쩔 것이여? 이 기계쟁이 영감탱."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유!?"
도파민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깐깐한 인상의 이덕수가 툭 끼어들었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목까지 올라오는 옷으로 몸을 단단히 여몄지만 분명 그 사이로 작게나마 보이는 것들은 난 지 얼마 안 된 상처들이다. 저마다 깊고 얕은 것 중에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것인지 붉은 뭔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 볼 수 있었다. 모두의 이목을 원치 않게도 끌어버린, 의화성의 성주가 내친 김에 이어서 말했다.
"으응, 왔었지. 대뜸 내 목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구는 내 기사단의 반을 병신으로 맨들어 놨어. 말하는 싸가지나 꼬라지는 여엉 아니었지만서두 실력 하나는 제법 되었다고 헐 수 있겄다."
"아니, 어르신이 다치기도 한단 말입니까?"
호전적인 성격의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해서 되묻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지옥에서 끌어온 것처럼 절대로 꺼지지 않을 불을 다루는 그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다른 성주들과 수호신들도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덕수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톡시코스 성의 성주, 곽춘식이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들고 그 대화에 참여했다.
"그, 근데 저희 성에는 아직 안 왔슴다."
"우리도." 화려한 장신구가 짤랑소리를 내며 포데이카라 성의 성주인 뢴트게늄이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영주성의 성주, 해루석과
"저, 저희도 안, 안 왔는데요." 라고 기어드는 목소리의 에스피아 성 성주 부정형 인간이 저마다 끼어들었다.
"흐응, 당연허지. 느이들 성에 있는 수호신은 정체를 꽁꽁 감싸뒀잖여. 허믄 이 자리서 다음 모가지가 위험한 놈이 언 놈일거 같어?"
신랄하게 꾸짖는 이덕수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 말이 맞다면 당장 이 습격을 받을 성은 얼마 되지 않는다. 캘리칼리 데이비슨, 풍신, 비즈니스 킴과 카르나르 융터르. 후보군이 순식간에 넷으로 좁아진 시점에서, 비즈니스 킴이 불쾌함을 참을 수 없다며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이런 제기랄, 정말이지 참을 수 없군! 만약 이덕수,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이라도 그 빌어, 빌어먹을 습격에서 제1순위는 바로 이 몸이나 저기에 있는 융터르가 아닌가!"
"이런 세상에."
다른 이들에 비해 반박자 더 빠르게 그 주장을 이해한 해루석이 아직 이해 못해 눈을 끔뻑일 뿐인 다른 이들에게 그 말에 대한 설명을 황급히 덧붙였다. 비즈니스 킴과 카르나르 융터르는 지금 수호신이지만, 더불어 성주도 겸하고 있다는 점을. 그러니까 이덕수 처럼. 다시 짤그랑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뢴트게늄이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
"아— 그러니까 그 놈은 단순히 수호신만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 성도, 힘도 전부 차지하고 싶어서?"
당사자가 만약 이 자리에 있다면. 그 진의에 대해서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만 자신들에게 칼을 겨누는 놈에게 정중히 자리를 초대해봐야 돌아올 것은 자명하다. 더욱이 실제로 이덕수가 입은 그 무수한 상처들은 그 반증이 되어주지 않았는가? 좌중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런 침묵을 곧 누군가가 깨버렸다. 새까만 망토의 카르나르 융터르다.
"비즈니스 킴 님께서는 적어도 걱정을 당장 하실 필요는 없겠군요."
"어머나,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비밀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년의 성주이자 수호신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우리 중 가장 부유하고 그만큼 병력의 양과 질이 압도적으로 우수한 히르디오스 성을 어떤 대비도 하지 않은 채로는 먼저 공격하고 싶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의화성의 위치처럼 변방에 있는… 이쪽이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가장 최우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냉철하게 말해버리는 그 태도에 질린 사람들이 다시 저마다 말을 아낀다. 그러다 부정형 인간이 다시 침묵을 깨며 이야기를 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나 모르니까 그 습격자의 외모라던가… 뭐 그런거 없, 없나요?"
"있지. 노랑머리에 곱슬머리가 아주 심혀. 그리고 여서는 뭐 들어본 적도 없는 말투를 쓰니께 잘들 알아두라고."
그리 운을 뗀 이덕수가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린 이야기를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여기에 자리한 그 누구라도 단번에 독특하다고 밖에 생각할 복장과 완만하게 휘어진 외날의 길쭉한 칼을 쓰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칼솜씨를 보여준다는 점을. 묵묵히 듣던 융터르가 정중하게 답했다.
"주의하지요. 귀한 정보 감사합니다."
"알믄 되었어. 난중에나 좀 자네 특산품이나 함 넉넉하게 보내기나 혀. 살아서 돌아오믄."
그 뒤로 이어지는 회의는 놀랍도록 평온한 일상의 그것이었다. 각지의 특산물의 교환 마련의 기회를 비롯해 성 내외로 발생한 특이 현상에 대한 정보의 공유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가. 그러나 그 최소한도의 시간만을 지켜주면 되었다는 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가 있었다. 카르나르 융터르다. 그는 이만 그 습격자에 대한 대비를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다시 자신의 배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 의견은 사뭇 합당했기에, 이후로는 사교적인 행동에 불과할 따름이라 다른 이들은 순순히 그 이탈을 허락해주었다. 오직, 오직 단 한 성만을 제외하고.
"어이 잠깐만."
"또 뭡니까?"
"나 좀 따라오지."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다른 이들보다 배는 거대한 그 덩치를 일으켜세우고는 북풍한설이 담긴 것 같은 눈으로 카르나르 융터르를 바라보며 귀환을 막아세웠다.
풍마성의 외곽까지 한참을 나선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이쯤에서 하면 되겠구만!" 이라며 말했을 때는, 영문 모를 얼굴로 뒤따라오던 카르나르 융터르도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너른 공터. 카르나르 융터르의 눈이 뒤로 이어질 말을 예상하고 작게 찡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캘리칼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 한 판 붙어보자고. 응?"
"거절한다면?"
"그럼 자네를 천하의 겁쟁이다, 라고 대륙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주겠네."
"그거 참으로 값어치 없는 협박이군요.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성주로서 할 일이 제법 되기에."
되려 쏘아붙이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말이 매섭도록 차가웠다. 성주의 자리에 능히 오를 수 있는 실력과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걷어차버린 캘리칼리 데이비슨의 행태를 굳이 꼬집는 발언임은 그 자리에서 듣는 그 누구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다른 표현 방식도 있겠지만, 이토록이나 직설적이고 정없이 말하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화법은 다른 성주들이나 수호신들도 제법 질색하곤 하였다.
그 중 가장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단연 캘리칼리 데이비슨이다. 그의 목이 비뚜름하게 꺾이는가 싶더니 그 얼음장 같은 파란눈은 삽시간에 노랗게 변하며 동공이 세로로 길쭉해졌고,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호흡에서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깊고 낮은 울림이 진한 메아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인내심이라는 덕목을 키우면 좋겠다— 그리 간언을 드린지도 이미 수 십차례건만. 들은 척조차도 하지도 않는군요."
그렇게 따지면, 막상 그런 말을 하는 카르나르 융터르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투쟁심. 성의 번영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이상,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성을 정복과 지배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향해 야멸차게 쏘아붙인 주제에 막상 덩달아 투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새카만 망토차림의 상대방을 보며 캘리칼리는 끅끅 웃는 사이로 비꼬았다. 그럼에도 막상 그의 눈은 여전히 적대적인 감정을 절대 수그리지 않았지만.
"자네도 인내심을 좀 키워야겠는데, 카르나르."
"이게 지금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뒤늦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달려나온 나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선이라도 느낀 것인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서도 분명 어느 지점부터는 더 다가가지 않았다. 틀림없이 다친다. 늘 닫힌 채 동동 떠다니던 카르나르 융터르 옆의 두꺼운 마도서의 페이지가 지금 바람도 불지 않는 이 곳에서 나부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 유독 손속이 잔혹하기로 유명한 두 수호신이기에, 끼어들어봐야 손해보는 것은 자신임을 아는 다른 이들은 그저 그 주위로 피해가 더 번지지 않게 에워싸는 수 밖에 없었다.
섬전처럼 캘리칼리의 모습이 곧 하늘 위로 치솟았다 생각할 때 쯤, 갑작스럽게 거대한 그림자가 평원 일대를 뒤덮었다. 거대한 용. 북부대륙의 지배자가 어째서 그 명성을 차지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웬만한 사람이라면 결코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모습이 순식간에 빛무리를 땅 아래로 내다꽂기 시작했다.
"저, 저 망할 노므 새끼가!"
"아주 그냥 여기가 자기네들 싸움터지, 어?!"
"다, 다들 몸조심! 몸조심 하세요!"
이 세상 북쪽 끝에서나 느낄 수 있을, 공기마저도 일순간에 얼어버리는 한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쏟아지는 그 모습. 이덕수와 뢴트게늄이 자신의 무기를 빼들어 맨눈으로 뜨고 바라볼 수도 없는 강렬한 열기를 내뿜고, 부정형 인간은 방패를 지켜들어 일대에 가해지는 공격을 전부 흡수하기에도 급급하다. 긴장된 눈으로 다른 사람들은 공격의 여파를 막아내기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그 한가운데에 있는 당사자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하였다.
"음음, 섣부르게 걱정한 것 같구먼!"
"어유! 저게, 저게 막아지는 거였소?"
무사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카르나르 융터르가 먼지라도 옷깃에 들러붙은 것인지, 손으로 어깻죽지를 툭툭 터는 그 모습은 마치 이게 전력을 다하기는 한 것이냐고 묻는 듯 하였을 정도로 오만하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어째서 멀쩡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행동으로 설명이라도 해주는 듯, 곧 그 주위로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은 굵직하고 뾰족한 기둥같은 얼음들이 우수수 떨어져 주위를 더욱 차갑게 만든다. 다른 이들에게 들리든 말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낀 반지가 더없이 빛을 발하는 채로 가볍게 손짓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럼,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것이 무릇 예의라고 하지요. 그리고— 목이 아프니 그만 내려오심이 어떠하실지?"
마도서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강대한 마력의 기운이 좌중을 압도했던 것 치고는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처음에 긴장한 사람들은 가까운 곳을,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둘러보던 중 비즈니스 킴이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발견한 그것에 당황해하며 새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 천민, 저건 아주 그냥 미쳐버렸구만!"
"일대를 아주 태우려고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만…!"
해루석이 급히 창을 꺼내 힘껏 바닥을 향해 찔러넣자, 마치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반구형태로 사람들을 감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운석의 열기가 상당해서 지속적으로 그가 무기에 힘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땅에 아직 닿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증발할 정도였다.
하늘에 고고히 떠있던 용도 그 운석의 낙하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 포효를 한 번 하며 날개짓을 하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하고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더 높은 곳을 향해 숨 쉴 틈도 없이 쏘아졌다. 한 번이 안된다면 열 번, 그리고 백 번. 그마저도 안된다면 차라리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과연 전설 속의 생명체가 지닌 위용답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할 그 소름끼치도록 시린 한기를 무수히 사용하고도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전혀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사이로 다시 익히 아는 그 거한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머리를 털어대며 투덜거렸다.
"무식하고 크게 한 방이라. 자네답지 않은걸."
"투정이라고 생각해주시지요. 테스트는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좋아. 뭐, 어디가서 쉽게 죽지는 말라고."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밟고 올라가더니 이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배 위로 훌쩍 몸을 던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다시 거칠게 머리를 탈탈 털었고, 그 사이로 제법 큰 돌 조각이 톡 떨어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재수라고는 하나도 없구만."
"…이건?"
"이—거는 아주! 저희 성주님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우훗훗훗!"
푸른 피부가 인상적인 정령이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단답벌레에게 마법적인 처리가 된 상자를 내밀었다. 크노모스 성의 기사단장이자 성주의 충신과도 같은 저 자가 직접? 그 카르나르 융터르가 선물을? 미심쩍어하는 눈길로 성주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분명 갓 싹을 틔운 모종이다. 그것도 양이 제법 되는지라, 그 곁을 지키는 캘리칼리 데이비슨도 덩달아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어 눈을 찌푸린 채 프리터를 노려보았다가 상자 안 깊숙한 사이로 이질적인 것이 자리한 것을 깨달았다.
편지다. 카르나르 융터르 특유의 단정한 글씨체가 몇 안 되는 문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그는 단답벌레에게 넘겨주기 전 먼저 읽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던 프리터는 먼저 물러나겠다며 이미 저멀리 내뺀 상태였다. 티아로크 성의 성주는 그런 방문객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작게 의구심을 표하던 중, 캘리칼리 데이비슨이 갑작스럽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이를 득득 갈기 시작했다.
"뭐임?"
"직접 읽어보게, 내 입으로 말하려니 속이 터져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구석이 구겨진 채, 그 종이를 넘겨받은 단답벌레도 몇 안되는 문장을 읽고서 자신의 이해력이 이토록 낮았던가를 제고할 필요를 느꼈다. 그만큼 문장의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친애하는 티아로크 성의 성주, 단답벌레 님께.
보시는대로 이 상자 안에는 제 성에서 연구한 끝에 키워낸, 온갖 험지는 물론 북부의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밀의 모종이 들어있습니다. 부디 잘 키워서 식량 사정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맛은 이 카르나르 융터르가 보증하겠습니다. 더불어, 해당 작물로 어떠한 이득을 취하실 경우 해당 작물에 관한 사용량에 비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열티를 받아내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재수, 없음. …진짜로."
"이거, 우리도 뭔가를 좀 먹여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이를테면 엿이라던가."
다음 성주회의가 언제 열릴 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이쪽에서 그 답례를 톡톡히 치뤄줘야 할 의무감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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